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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이나 일곱 살 때 쯤. 임수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경염이 앞뒤 보지 않고 같이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금릉으로 흐르는 강은 맑지 못했고, 둘 모두 수영은 커녕 툭하면 넘어지며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어떤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뒤에서 둘을 보던 경우가 급히 뛰어들어 구한 물었을 경염은 답하지 못했다. 잘못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호령에 경염은 젖은 꼴로 땅에 누워있는 임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괜찮겠죠? 겨우 나온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물을 잔뜩 먹어 끝까지 내려간 목소리였다. 모두를 구하려 하는 바람에 뭍으로 건졌을 임수는 기절한 상태였다. 몸에 이상은 없을거라 말했지만 경염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차라리 매달리며 울었다면, 경우도 혼냈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일을 어찌 했느냐고. 경염은 저도 물에 빠져 죽을 했다는건 생각하지도 않는 같았다. 허우적거린건 임수만이 아니었고, 괴로웠을텐데.


임수는 얼마안가 깨어났다. 경염은 그제서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힘빠진 몸으로 임수를 부축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경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경염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쩌려고 그리 조심성이 없냐며 화를 내는 소리에 그제서야 떨림이 묻어있었다임수는 정신이 없는지 무거운 눈을 굴려 생쥐꼴을 경염을 쳐다보았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물에 빠져서도 보였던. 착각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으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났다작은 손이 뻗어진다. 강의 차가움이 그대로 옮아있는 얼굴이 평소보다도 창백했다. 손에 닿은 뺨은 이상하게 연약하다.


경염.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이 떨어졌다. 황자의 위엄과는 너무 맞지 않은 광경이었다. 항상 놀리고는 했던 짙은 눈썹은 쳐져있었고, 걱정과 두려움이 엉망으로 섞여있었다. 임수가 흐릿하게 웃었다너무 걱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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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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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치부들과 모든 불안감들이 눈을 깜박일 시간조차 주지 않아요.





*




기린재자라고 하였다. 손에 넣으면 천하를 쥐게 해준다는, 강호 강좌맹의 종주.


경염은 따가운 눈을 문질렀다. 밤이 늦었다. 서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오늘도 그런 날의 일부일 뿐이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침전에는 촛불 몇 개가 녹아가고 있다. 경염은 먹으로 쓰인 글자를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당신을 선택 할 겁니다. 낯선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경염은, 웃음이 나왔다. 예황군주의 혼삿일을 이용해 정생을 녕국후부로 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왕의 마지막 남은 핏줄은 천대받는 7황자가 숨기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단번에 알아보았다. 기왕비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액유정에서 아이 하나를 살리고 묘비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몰라도 경염만은 정생의 얼굴에 남아있는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인이 아니라는 것에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 본인조차 모르는 신분은 숨기기 쉬웠다. 당연히 액유정에서 꺼내주고 싶었으나 황상의 눈 밖에 난 불길한 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소철 선생이라는 자는 말을 꺼낸지 며칠만에 정말로 아이를 궁에서 꺼내왔다. 아직 노비 신분을 벗어나도록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될 것을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주변에 어두웠던 경염은 금릉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 비상한 자가 그저 동정심으로 액유정의 노비를 꺼내오려 했을까. 마음에 걸리는 것 투성이였다. 다른 것 보다도 처음부터 나이를 물어본 것이 언짢았다. 그 뒤에 곧바로 꺼내주겠다 약조를 하였던 것도, 정말로 그 약조를 지킨 것도.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자를 거두는 데에 굳이 노비를 데려갈 이유도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줄을 설 신분이었다. 경염은 뒤로 공작을 펼치거나 정보를 캐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고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 호위도 물리고 녕국후부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정생을 데려온 이유라는게 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태자와 예왕. 랑야각에서 금낭을 받은 두 황자가 편으로 끌어들이려 온갖 공세를 한다는 기린재자는 경염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생을 구해내는 것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말하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염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제 판단에 의심이라고는 없는 그런 자신감.


대체 어떤 생각인걸까. 경염은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보았다. 손톱조차 자라지 않는 몸이었다. 자신에 대한걸 몰랐을리가 없다. 불길한 천인. 멈춰버린 황자. 그런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태자와 예왕을 두고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둘 중에 하나가 황제가 될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오래전에 막는 것을 포기한 수순이다. 뻔한 것을 고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당장 황제에게 문안을 드릴 때마다 살얼음판이 되는 본궁을 생각하면 더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둘과는 다른 성정을 믿는다 했나. 도박이라고 해두지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본디 남의 낯가죽 뒤를 뚫어보는 능력은 가진바가 없으나 매장소라는 인물은 정말 모호한 데가 있었다. 경염은 천하를 쥐어준다는 강좌맹의 종주에게 쉽사리 신뢰를 주고 싶지 않았다.


책사는 질색이다. 궁에서 떠도는 중상모략도, 그들이 떠드는 탁상공론도 듣고 싶지 않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만 해도.


경염은 공연히 힘을 주었던 손의 끝에서 그을림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타버린 책의 귀퉁이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버린다. 과연 그런가? 12년 전의 그 사건이 책사들의 간교한 말놀림 때문이었을까? 경염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온 나라에서 떠들기를 쉬쉬하는 이야기였고, 궁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온 궁에서 그 사건에 대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경염의 자라지 않는 몸 뿐이었다. 항명이라고 수근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눈이 떠졌다. 바스라지는 서책을 덮은 경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는 것은 없어도 확신하는 것은 있었다. 낯선 얼굴에게 말했던 대로 태자와 예왕, 그 두 사람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진흙탕이라는 제위다툼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해도.


하지만 이런 얼어버린 몸으로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악바리마냥 달라붙는 고민을 마지막으로 침전의 촛불이 꺼졌다.





*





"그러니까, 네 몸을 지키겠다고 태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말이냐?"


불 같은 목소리였다. 경염은 무릎을 꿇은채 눈을 내려깔았다. 호령 정도는 예상하고 한 행동이다. 월귀비가 피차 숨기자며 꺼낸 제안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몽 통령의 다급한 말을 듣고 소인궁의 경비들을 기절시켰을 때부터 뒤의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증인으로 왔다는 말로는 본궁에 들어오지 못할까봐 걱정했을 뿐.


월귀비와 태자는 시종일관 억울하다는 말을 삼았다. 정왕과 예황, 황후가 짜고 저희를 모함하는 것이라며 호소하는 월귀비가 얼마나 불쌍해보이던지 경염의 손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 예황군주를 해하려 했던 주제에 말만은 청산유수다. 그러나 외관과 다르게 경염은 열여덟의 소년이 아니었고, 예전처럼 의관에 그을림을 내거나 손에서 연기가 피어나오게 만들지는 않았다.


몽 통령이 사마뢰를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한 후로는 월귀비의 통탄도 통하지 않았다. 감히 운남왕부의 군주를 해하려 한 죄로 월귀비는 품계를 강등당했고, 태자는 3개월의 금족령에 봉해졌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미간 하나 구길 수 없었다. 어찌됐든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경염은 처벌을 기다렸다. 상황이 급박했다고는 하나 태자를 인질로 잡은 것은 궁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질문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소인궁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에 경염의 입이 다물렸다. 몽 통령의 덕분이라고 곧이곧대로 고할 수는 없었다. 금위군의 통령이 어째서 소인궁에 대한 일을 알았는지 경염조차 알지 못했다. 예황 군주에 관련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앞 뒤를 잴 것이 없었고, 몽 통령 본인도 뒤쪽에서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에 들어온 예왕이 황상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겠으나, 황상도 뜬금없는 예왕의 등장에 얼굴을 구긴 참이었다. 하는 말은 구구절절 그럴듯 한 것들이었다. 처벌을 내리려는 황상에게 선처를 구하는 예왕을 따라 정왕도 허리를 숙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일단 예왕의 말이 사실인것으로 믿게 해야한다는걸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의문은 머지 않아 풀렸다. 오랜만에 입궁했으니 지라궁에 들르려던 경염을 예황이 막아선 탓이다. 기어코 입에 올라오는 소철이라는 이름에 경염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몽 통령을 만나 자세한 내막에 대해 이야기 한 후에는 찾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언짢은 일이 있으시군요."


품에 맞춰 길이를 줄인 의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밖에는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고, 새로 돋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가지 않으려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임수는 목을 뻣뻣이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황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한없이 곧고 누구도 폄하할 수 없을 기개였다. 조금이라도 인물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허리를 굽힐 수 있을 남자다. 


언짢은게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황군주의 사건에 대해 물어볼게 있다는 말에 임수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맞은편을 권했으나 경염이 자리에 앉는 일은 없었다. 그 사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잔에 차를 따르며 섬긴 말에 경염의 옥패가 흔들렸다.


결과에 만족하냐는 물음에 매장소는 오히려 제가 만족해야하냐는 물음을 던졌다. 예황군주에게 위험에 대비하라 언질을 준 것도, 군주를 안전하게 구해낸 지략도 경염으로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명민한 수였다. 비상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게 사실이었다. 정왕이 예황을 구했으니 정쟁이 터진다면 운남왕부는 공식적으로 경염의 편을 들 것이고, 예왕을 이용해 동궁의 미움도 거둬냈다. 결국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정왕부였다. 경염이 몸을 돌려 책사를 마주보았다.


"난 예황군주 같은 충신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도 그들을 내 앞날의 발판으로 삼지 마셨으면 합니다만."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임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정쟁의 도구. 임수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금릉에 오는 것을 준비했다.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넣었고,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수를 짜놓았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금릉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뼈에 드는 한기는 여전하다. 끓인 물이 담긴 다기를 잔에 기울이며 임수의 눈이 내려갔다. 전하가 절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계셨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가볍게 위장한 목소리에도 경염의 시선은 비껴갈 줄 몰랐다.


혐오하는 눈. 열여덟의, 자주 물기를 담고는 했던 검은색은 자신의 몸처럼 얼어있었고, 이미 지나간 겨울을 생각하게 했다.


"전하께선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신 거군요."


경염이 자리를 옮겨 드러난 바깥을 시선에 담았다. 나를 군주로 모시겠다고 했으니, 내 규칙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겹의 옷으로 감싸여진 등에서는 열기가 피어났다. 감정에 기복이 생기면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미략한 것이니 의복이 타거나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옅게 부는 바람을 데우기에는 충분하다. 어릴적에는 조절이 더욱 미숙해서 여름이 되면 아무도 경염의 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동안 많은 책사를 봐왔소. 조용히 열린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황궁에 넘쳐나는 것이 그들이다. 장수들이 전장에 나가 싸울 동안 탁자에 앉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머리를 굴리는 자들. 간교하고 음험한 이야기와 속삭임. 그들의 중상모략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버텨내지 못했다. 임수는 잔 속에서 내려앉는 찻가루를 보았다.


"내 형님과 내... 절친한 벗조차도, 그들 때문에 사라져야 했지."


열기는 한층 거세어졌다. 절친한 벗. 이름을 꺼내는 것 조차도 조심스러운, 역모를 꾸민 임씨가문의 윤인. 경염의 책사에 대한 불신은 잘 알고 있었다. 정생의 일로 녕국후부에 발걸음을 했을 때 직접 말하기도 했으니까. 손 하나로 마을을 불태울 수 있었던 제 천인을 끝내 얼려버린 것이 무엇인지, 임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난 그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소."


경염이 믿지 못하는 것은 매장소였다. 경염이 혐오 하는 것은 중상모략을 들먹이는 필부였으며, 경염이 경계하는 것은 사람을 정쟁에 이용해 먹는 책사다. 임수가 아닌 매장소. 12년 전에 멈춰버린 사람과는 달리 한없이 변해버린, 친우도, 자신의 윤인도 아닌, 진훍을 뒤집어 쓴 바퀴.


"...염려 놓으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임수는 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고 확신했지만, 나중에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게 될 것을 알았다. 경염이 눈을 감자 끼쳐오던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임수가 손을 뻗지 않기 위해 힘을 넣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걸 알았음에도 열기가 그리웠다. 제 앞에서는 차갑게 식히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선생같은 책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알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허나 지켜줘야 할 사람과 해선 안 될 일은 분명히 해두는게 좋을겁니다."


매장소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쥐어준다 해도 자신을 내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천하여도, 설사 죽은 제 윤인이라고 해도.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셨으니, 저도 몇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경염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수그러듦에 따라 임수의 머리도 차가워졌다. 경염은 옷을 바로하여 매장소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몇 번 대면한 얼굴임에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한 몸은 구역질을 밀어내느라 바빴고, 흐려지는 표정을 다잡는 것은 배로 어려워진다. 익숙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태자와 예왕을 상대하는 것은 정왕의 열정만으론 부족했다. 임수가 있는 이유는 그들을 막기 위함이며, 그들과 맞서려면 그들보다 독해져야 했다. 제위다툼은 목이 걸려있는 일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도모하는 대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역모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그 위험에 관해서는 살아남은 7황자 만큼 잘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경염은 잠자코 매장소의 말들을 들었다.


"전하의 규칙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허니 앞으로 전하께서도 절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앳된 얼굴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쉽게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게 속이는 일도 있어선 안 됩니다. 다음으로 정생의 이름이 나오자 경염의 낯 빛이 달라진다.


정생을 구하는 것을 선물이라고 칭했을 때, 긴장을 풀었었다. 지금은 운남왕부에 있지만 머지않아 정왕부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이었고, 액유정에서 나온 궁노비에 관한 것은 금새 사그라들 화젯거리였다. 들키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는데. 난처하게 할 일은 없을거라는 말에 경염의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날 해할 생각이었으면, 정생의 비밀을 구실 삼아 협박을 했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하의 곁에 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후일에 태자와 예왕이 칼을 겨눌 때 무엇으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십니까. 오늘 이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앞으로 저를 절대적으로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협박에 가까웠다. 정왕이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매장소가 필요하다는. 아니, 사실은, 임수가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경염이 필요했다. 이것은 청원이었다. 적염군에게 씌워진 역모의 이름을 벗기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대업을 위한, 어쩌면 아직 제 이름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제 곧은 천인에게, 이탈해버린 바퀴가 절박히 원하는 것에 대한.


"폭풍은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임수는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열기가 섞이는 것을 느꼈다. 열 여덟의 어린 얼굴은 관을 틀고 있었고, 눈은 제 결정이 가져올 결과에 짓눌려 감겨있었다. 천인. 하늘이 내려준 사람. 차가운 한기에 몸을 얼려버린, 한시도 잊은적 없었던 정인.


"속히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경염이 대답 대신 남기고 간 열기가, 바퀴에 묻은 진흙을 쓸었다.





*




당신의 선함으로 당신의 어두운 나날들을 가져가겠습니다. 당신을 연모하기에,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저번편의 첫문장은 It's all coming back to me now, 이번 편의 첫과 끝은 Unconditionally. 한 부분만 가져온거라 따로 노래를 적지는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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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임수경염. 센티넬은 천인(天人), 가이드는 윤인(輪人) 으로 대체합니다. 천인인 경염과 윤인인 임수. 윤인이 꼭 없어도 천인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적염군 사태 이후 성장이 멈춰버린 경염에 대한 이야기.










너무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침전 속 나의 몸이 얼어버린 밤들이 있었습니다.




*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7황자인 소경염의 '부작용'은 금릉 뿐만 아니라 강호에 까지 이야기가 오갈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7황자가 출정을 나갈 때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관한 말은 저잣거리에서 꾸준히 화제로 올랐다. 언제나 드높게만 칭해지는 천인의 불길함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몇 없었다. 혹자는 경염이 그렇게까지 전장을 헤매는 이유가 그 부작용 때문일거라고 수근거리고는 했다. 7황자의 상태는 불길함의 징조였으니 금릉에 머물러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황실의 품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염이 출정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의 부작용 따위는 빛깔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황제는 천인이 아니었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에 대해 시기를 느끼고 있었다. 3대째나 천인인 황제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름에 부여된 의미를 중요시했다. 하늘이 점지해줬다던 능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황제의 의심은 커졌고, 죽은 기왕도, 내쫓기고 있는 경염도 그 시기의 여파가 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염이 황제의 눈 밖에 난 것은 부작용 하고는 상관없었다.


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매장소로 위장하고, 그 위에 소철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금릉에 들어온 임수는 아주 오랜만에 말을 잃었다. 빠른걸음으로 옆을 지나친 남자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내관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작은, 심하게 어린 남자는 황자의 호칭을 듣고 있었다.


정왕. 용서해달라고 비굴한 말을 주워삼던 내관이 월귀비의 이름을 올린다. 옆에 있던 예황이 채찍을 들고 나서자 바짝 엎드렸던 몸이 계단을 굴렀다. 감히 월귀비의 이름을 팔다니, 오만함이 끝을 모르는구나. 운남왕부 군주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퍼지는 동안 관을 튼 덜 자란 몸이 궁노비에게 돌아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이 시선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걸 알면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7황자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이 성장을 멈췄고, 더이상 머리카락 마저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어린 몸으로 선두에 서 전장을 호령한다는 이야기. 천인의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의 일종이라는 이야기. 그의 윤인이 죽은 것이, 그 불길한 부작용의 원인이라는 이야기.


"도움은 고마우나, 내관 하나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소."


임수는 앳된 목소리를 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관이 예황의 호통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급히 액유정의 노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예황이 저보다 한끗으로 눈이 낮은 경염을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기왕의 사건으로 처치가 곤란하신걸 압니다. 아랫것의 일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차분한 말에 경염이 알아들었다는듯, 혹은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돌아가려는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한다. 이름이 무어냐. 정생이라는 답이 돌아올 동안 옆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나이는? 열 한 살. 머릿속을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이 경염에게서의 주의를 돌렸다. 황자가 아끼는 액유정의 노비. 가능성을 잴 동안 마치 더이상 대답하지 말라는듯 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생.


임수는 뻣뻣한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는걸 알았다. 제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급하게 일어나 한 공수는 바르지 못했다. 정왕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소문의 7황자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한 손으로 마을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는 천인. 11년 전 부터 전혀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다는 불길한 존재. 황자라는 이름은 쉽게 가려지고는 했고, 그것에 불쾌해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경염은 그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좀 더 들어올렸다.


"당신은 누구요?"


창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입을 떼지 못하는 임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예황이 나서서 대신 소개를 올렸다. 소철 선생.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얼굴에 임수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필부입니다. 모르시는게 당연하지요.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자라지 않은 경염의, 11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주는 여파에 대한 것을. 경염은 꿈에서나 봤던 얼굴에 경계를 덧씌우고 있었고, 임수는 차라리 필부의 신분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눈칫밥을 먹으며 툭하면 금릉에서 쫓겨나는 7황자는 그에 비례해 감이 좋았다. 정생에게 물은 질문만으로도 주의를 샀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분명 경계가 더 심해질 것이다. 황자에게 제 때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을 신경 쓰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게 최선이다.


"궁문을 넘은데다 예황군주와 함께 있는데, 평범한 필부라. 궁을 자주 비우는 탓에 내가 모르는 걸 테지요."


다행히 차분한 목소리는 딱딱할지언정 의심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화제는 예황의 덕으로 정생에게 다시 넘어갔다. 순하고 학문에 뜻이 있기에 가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매끄러운 말을 듣던 임수가 정생을 일으켰다. 1년 중 금릉에 머무는 시간이 채 네 달이 안되는 황자였다. 정왕부는 궁의 바깥에 있고, 친왕이 아니니 궁에 있는 시간은 그것보다 더욱 적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액유정의 노비에게 정을 줄만큼, 맞닥뜨릴 일이 그리 많을까.


임수는 정생을 액유정에서 꺼내주겠다 약조했다. 이어지는 예황의 말은 줄줄이 맞는 말이었다. 액유정의 노비를 꺼낼 수 있었다면 황자인 경염이 진작에 그리 했을 것이다. 임수는 제 언행이 황자를 기만하는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요. 딱딱하게 굳은 어린 얼굴의 시선에 서리가 낀다.


임수는 그 시선을 받아서야 세월을 느꼈다. 지나치게 곧은 자세와 뻣뻣하게 들린 목. 저보다 큰 사람을 내리 누르는 위압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잘 웃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황자라지만 어린 몸에, 금릉의 모든 사람들이 7황자가 받는 대접을 알고 있다. 기만 당하는 일이 익숙해졌을 것은 당연했다. 자라지 않는 황자가 건너왔을 길은 굳이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 서슬퍼런 시선은 몸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었다. 시선이 아래에 있더라도 기만 당해 좋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무시당하는건 괜찮겠으나, 황자의 신분이다. 제가 기만 당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황실이나 정왕부에도 여파가 갈 것이 당연했다. 그런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다. 매장소의 얼굴이 미소를 만들었다.


"전장에 자주 나가 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실텐데, 제가 정생을 빼온다면 전하도 심려를 하나 덜지 않으시겠습니까."


경염이 눈을 내려깔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수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액유정의 노비에게 선처를 바라는 말은 상황에 맞춰 꺼내면 될 일이다. 황제에게 빚을 만들 일은 많았다. 자신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권모술수를 싫어하는 자신의 천인에게 환심을 사기에 아랫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기대하지. 결국 떨어지는 말에 임수의 고개가 숙여졌다. 짧은 대담은 그것이 전부였다. 황자는 저보다 작은 궁노비를 감싸듯이 품고 자리를 떠났고, 임수는 곧은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있나보군요."


예황의 목소리가 흘렀다. 임수는 그저 얌전히 웃었고, 그것으로 답은 충분이 되었다. 마주보도록 몸을 돌린 군주의 눈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들키면 죽을만큼 맞을걸 알면서도 책을 훔치는 아이긴 했지만, 액유정에서 노비를 꺼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당하게 꺼내오겠노라 장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나 강좌맹의 종주가 노비를 구하여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7황자는 정이 많으니 어떤 이유라도 갖다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쪽은?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몇 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국이었고, 사실 궁노비에 대한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예황은 질문을 넘겼다. 대신하여 경염이 사라진 복도가 까만 눈에 담겼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왕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과는 다른 분입니다."


소문. 임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예황은 정왕에 대해 알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 이후 경염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마치 그 전까지는 누군가가 밀어줬던 것처럼, 그 누군가가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였던 것 마냥. 이름도 언급할 수 없도록 사라진 사람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예황은 운남왕부로 보내졌고, 정왕은 단지 이유를 알고싶다고 청한 것 만으로 북방으로 밀려났다. 몇 년이 흘러 다시 마주 본 7황자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황은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경염의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황자에게 갖춰야 할 예를 취했고, 경염도 군주에게 해야 할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저잣거리에서는 7황자가 12년 전 부터 멈춰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하지요. 궁에서는 그것을 황제에 대한 무언의 항명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천인의 부작용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병을 앓았다. 황제에게 그 부작용은 경염이 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겉모습은 12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인데 머리에 벼루를 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정왕이 그것에 대해 항명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정도는, 궁에서 돌아다니는 말들이 사실이라는걸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저 똑같다는 말만 하였다. 12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임수는 눈에 들어오던 경계어린 눈을,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굳어버린 얼굴을 떠올렸다. 12년. 바퀴를 잃은 수레는 땅에 처박혔고, 바람은 나무를 삭혔다. 임수는 질문이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동안은 침묵이었다. 태황태후가 올린 수아라는 이름에 정왕까지 연달아 보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듯 예황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일텐데.


먹혀들어갔던 입술이 돌아왔다. 숙였던 고개를 든 예황이 입꼬리를 올렸다. 처지가 좋지 못해도 황자입니다. 다음에 만나실 때는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게 좋을듯 합니다만. 임수의 얼굴이 아래로 기울여졌고, 예황이 근처를 지나가던 내관을 불렀다. 소철 선생을 궁 밖까지 데려다 주시게. 고개를 조아린 내관이 임수의 앞에 서자 예황이 돌아섰다.


살펴가십시오. 단촐한 인사가 예황의 등을 따랐다. 내관은 눈치껏 사람이 없을 길목으로 임수를 이끌었다. 12년 만에 돌아온 궁은 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찬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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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살기로 했다고?"


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부자우는 이제 거의 질식해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웃으면서 테이블을 치지 않으려고 평생 쓸 인내심을 모두 그러모으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근언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바빠서 며칠 연락 못했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두 달 연락 안하면 우체통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청첩장을 생각하며 자우가 차를 마셨다.


훈연에 대한건 잘 알고 있었다. 통시에서 범죄자문을 할 당시에 자우도 옆에 있었고, 그 건실한 청년이 근언을 구하려다 팔을 다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옆에 있는게 다른 흉악 범죄자였어도 몸으로 막았을 훈연의 성정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설마 훈연이 아니라 근언에게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걸 문제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전보다 얼굴빛이 이상하게 좋아진 근언을 앞에 두고 자우가 턱을 괴었다.


"언제 소개 시켜줄거야?"


근언은 미간을 구겼다. 누군지 알잖아. 그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식으로 소개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걸 눈치채려면 얼마가 걸릴런지. 아마 기대도 안하는게 좋을 것이다. 괴상한 범죄 심리학자가 가진 유일한 친구의 눈동자가 드르륵 굴러갔다. 굳이 근언에게 소개 받을 이유도 없나. 생각하는 새에 시킨 요리가 나왔다. 실고추로 장식한 생선찜에 근언이 젓가락을 들었다.


조수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좀 웃긴 정도였는데 아예 같이 살기로 한데다 그 보근언이 일일이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근언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투였고, 자우는 제 행동이 이상한 이유를 모른다는 부분이 가장 웃긴 점이라고 생각했다. 꽃 식인마에게서 벗어난 후 통시의 저택을 요양처로 정했을 때만 해도 몇 개월 안에 죽는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사람 일이라는건 정말 어떻게 될런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사람도 생선 좋아한데? 너는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은 매끼마다 생선만 먹고 살 수는 없어."


흰 생선살에서 가시를 분리해 내며 묻자 근언이 입 안에 들은 것을 삼켰다. 다른 것도 해야지. 자우의 젓가락이 삐끗했다. 아연실색한 자우의 표정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요리를 해주겠다고? 네가 먹을 것도 아닌데? 황당해서 반 톤은 올라간 목소리에 근언이 얼굴을 구겼다. 그럼 팔을 다쳤는데 달리 어떻게 해. 너무나 상식인 같은 언행에 자우가 젓가락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전 모르는 사람하고는 밥을 안먹어서...


반쯤 일어나는걸 도로 앉히니 우려가 쏟아져 들어왔다. 너 고기 같은걸로는 한 번도 요리해 본 적 없잖아. 내가 요리사 알아봐줄까? 출장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많아. 제시간에 연락 주면 네가 한 것 처럼 꾸며주는 것도... 나불나불 떠드는 입을 익숙하게 넘겨버린 근언이 생선살에 소스를 찍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안해도 돼. 이상황에서 가장 믿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담는 입을 어이가 없다는듯이 바라본 자우가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이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안들어먹을 것이다. 주제를 넘기는 수 밖에.


"그럼 그 훈연씨는 언제 경찰서로 돌아가는데?"


근언의 젓가락이 멈췄다. 곧바로 움직이긴 했지만 자우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계약은 3개월이야. 그렇다면 두 달 남짓이 남았다. 콧소리를 낸 자우가 숟가락으로 탕을 떴다. 얼마 안남았군. 훈연이 경찰서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훈연은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듯한 경찰의 모범이었고, 근언의 조수일은 팔이 완치 될 때까지 커리어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승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통시로 돌아가겠지.


자우가 눈치를 봤지만 근언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근언의 상태를 표정만으로 판단했다면 아마 자우가 근언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곁눈질한 자우가 헛기침을 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는걸 인정해야할 것 같았다. 다시 일 얘기인데.


"윤서인네 회사에서 뭐가 좀 터진 모양이야."


근언의 얼굴이 구겨진다. 거의 몇 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닮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복누나의 얼굴을 한쪽으로 치워버린 근언이 젓가락을 놀렸다. 그냥 무역회사잖아. 터질게 뭐가 있다고.


"사원 하나가 죽었다나봐."

"그래서?"

"누가 덮으려고 하고 있어."


젓가락에 걸린 음식을 집어넣고 자료를 꺼내자 근언이 받아들였다. 아직도 연락해? 무심하게 나온 목소리에 자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받았다던데. 얼마전에 있었던 부재중 전화를 생각해 낸 근언이 글자들을 훑었다. 일상 걸려오는 안부전화인줄 알았더니 맡길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없이 자료를 넘기던 근언이 반쯤 남은 요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까탈스러운 입맛에 맞춰서 일부러 찾아온 집이다. 30분도 채 안있었는데. 근언은 그렇다 치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점심부터 굶은 자우의 황망한 표정을 무시한 근언이 자켓을 챙겨들었다.


"맡으려면 얘기 해봐야 돼서."


세상 혼자 사는듯한 등이 망설임 없이 차키까지 들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자우의 젓가락에서 살이 미끄러졌다. 몇 분 후에야 얌전히 음식을 주워 입에 넣은 자우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정표 앱에서 정확히 두 달후의 날짜를 선택한 뒤 글자를 써넣는다. 청첩장이 와도 놀라지 말 것. 마음속으로만 성호를 그으며 자우가 앱을 종료했다.





*




근언은 잔뜩 불만인 표정이었다.


훈연은 근언을 의자에 앉혀놓은채 한 팔로도 멀쩡하게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근언이 손을 움찔거릴 때마다 보지도 않고 괜찮다고 먼저 말했다. 뚱한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빈공간에 척척 물건들을 끼워넣는걸 바라보던 근언이 무릎에 놓인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훈연은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야 했다. 훈연은 근언이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면-근언은 그걸 자각하고 있지 않더라도-자신이 그걸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을의 입장이어서 그런건 아니었고, 결국에는 그 전날 복도에서 봤던 그 창백한 얼굴 때문이었다. 그런걸 한 번 보면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밀어내는 짓은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총을 쏜 건 근언인데 왜 제가 이러고 있어야하는지, 훈연은 장장 하룻동안 그것을 고민했으나 결국 동거를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잘난 보근언은 훈연의 대답에 그럼 거절하려고 했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머리라도 짚고 싶었으나 아직 자신도 파악 못한 동거를 허락한 이유까지 줄줄이 떠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근언의 입장에서는 훈연이 거절할 이유가 없던게 맞았다. 삼시세끼 챙겨주고 옆에서 배려해준다는데. 거기다 경찰 관계자에게 연락이 오거나 책을 빌리러 쓸데없이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사가 그런 합리적인 이유로만 돌아간다면 훈연이 팔을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랫층은 이제 비었고, 세를 놓으면 며칠 안으로 입주자가 들어 올 것이다. 당연히 짐을 옮겨야 했는데, 몇 개 되지도 않은데다 겨우 윗층으로 옮기는 것이니 훈연은 사람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박스에 임시로 테이프를 감으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었고.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서 옮길 준비를 하는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당연히 근언이었다. 도와줄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니 훈연은 근언이 도와줬으면 하는 짐들을 따로 빼놓았는데,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팔을 잡혀 질질 끌려나왔다. 올라가 있으세요.


당황해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집에서 대놓고 쫓겨난 훈연은 바로 다음층에서 내려 계단으로 돌아왔다. 제가 옮긴다니까요! 복도를 울려댈 정도로 커다랬던 말싸움의 승자는 훈연이었는데, 훈연의 생각과는 다르게, 훈연이 밀고나가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근언이었다. 그건 근언이 훈연을 이해하고 말고에 대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근언은 아직까지 왜 훈연이 부득불 자기가 짐을 옮긴다고 소리를 질러댔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팔을 다쳤다. 근언의 팔은 멀쩡했고, 짐을 옮긴다고 해서 근언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딜봐도 근언이 짐을 옮기는 것이 타당했는데 훈연은 화분 같은 것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짐을 자신이 들었다. 심지어는 정리도 도와주지 못하게 억지로 앉혀놨고.


근언이 어떤 불만을 품고 있던 훈연은 알아서 정리를 마쳤다. 사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것 치고는 놀랍도록 빨리 끝난 편이었다. 훈연은 팔을 다친 다음에도 계속 혼자서 살았고, 따라서 정리 쯤은 문제 없었다. 근언은 이제 훈연이 사실은 한 팔로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집이 넓어서 다행이네요. 다 안들어갈까봐 걱정이었는데..."


하기야 다 안들어갈 것 같았다면 근언이 같이 살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언은 아까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책을 드디어 덮고 일어났다. 근언이 뭔가 말을 하기 전에 훈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침대가 들어갈 만한 곳이 없네.


"그건-"

"-같이 자도 된다는 말을 하시려는거면,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걸 말해드리죠. 절대."


단호한 목소리에 근언의 입이 다물렸다. 정말로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군. 한숨을 쉰 훈연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근언의 침대에 앉았다. 저는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이 잘 안와서요. 주워삼은 변명은 그럴싸했다. 훈연은 이제 어느정도 근언의 사고방식을 알았다. 안지 얼마 안된 사람하고 침대를 나눠쓰기는 싫다는 주장을 그대로 한다면 아마 같은 침대를 나눠쓰는 것에 대한 합리성을 역설하려고 들 것이다. 근언의 침대는 넓었으므로 우려하는 접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위생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블라블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잠이 안온다는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대꾸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제가 카우치에서 자죠."


훈연이 틀렸다. 팔짱을 낀 근언이 뒷목이 당겨오려고 하는 훈연을 내려다보았다. 떠보는 말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걸 알기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침대에서 주무시죠. 어금니 사이에서 새어나온 말에 근언이 보란듯이 카우치에 앉는다.


"회복이 먼저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깁스를 풀 때 까지는 훈연씨가 침대에서 자고, 그 후로는 다시 상의하는걸로 하는게 좋겠군요."


좋기는 개뿔이. 혼자서 결론을 내놓고 책을 집어드는 작태에 기함한 훈연이 목끝까지 올라온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결국 근언의 뜻대로 될 것이다. 몇 번의 말싸움으로 터득한 것들을 되뇌이며 훈연이 허리를 폈다. 제가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는게 거슬리시면, 다시 돌아가는 수 밖에 없겠네요.


근언의 눈썹이 꿈틀댄다. 침대를 들여올 공간이 없으니까요. 태연하게 말을 이은 훈연이 내용물을 꺼내놓고 황망히 입을 벌리고 있던 박스를 집어들었다. 옮기려면 옮길 수 있었다. 해가 지긴 했어도 내일 특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지도 않았으니. 긴 다리로 집을 가로질러 드레스룸에서 옷을 꺼내오자 근언히 급하게 일어나 옷걸이들을 뺏어들었다. 이렇게 나올겁니까? 이를 바득바득 가는 듯한 표정에 훈연이 웃었다. 그럼요.


근언이 팩 몸을 돌리더니 제 침대에 정장째로 올라가 누웠다. 단단히 삐진 모양새였다. 참지 못하고 어린애마냥 웃어버린 훈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근언을 쳐다봤다. 작은 매트리스 정도는 들여올 수 있을거에요. 전 거기서 자죠. 안마주치려고 작정한듯 구석으로 몰려갔던 근언의 눈이 돌아온다.


"선생님이 해주는 배려가 싫은게 아니에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형광등 대신 스탠드가 켜진 방은 그림자가 반쯤 빛을 먹어들고 있었다. 훈연은 근언이 뭔가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훈연이 몸이 불편하니 멀쩡한 제가 하는게 나을거라는 계산에서 오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다. 훈연도 근언의 팔이 불편했다면 똑같이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나 짐을 옮기거나 요리를 하는 것 같은 노동이라면 더더욱.


그냥 할 수 있는건 제가 하고 싶어요. 가만히 나오는 말은 얼핏 가볍게도 들렸다. 도움을 받는게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팔을 다친건 훈연의 잘못이었고 두 팔이 멀쩡한 사람보다 약한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훈연은 앞으로도 근언의 배려를 수없이 거절할 것이다. 원치않는 호의는 거절할 수 있다. 억지로 호의를 받는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근언이 이해해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장시간 침묵이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창문의 밖에서는 차들이 지나가는 일상적인 소리가 들렸다. 근언은 말 없이 훈연의 눈을 보고 있었다.


불시에, 훈연의 손이 뻗어졌다.


의식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근언의 머리는 침대에 눕는 과정에서 흐트러져 이마로 내려와 있었고, 그걸 정리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그림자를 만들자 근언이 반사적으로 물러난다. 중간에 손을 멈춰서야 얼마나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은 훈연이 어색하게 손을 접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좀..."


이마쪽을 손짓해보이자 근언이 반쯤 일어나 머리를 매만졌다. 너무 무례했죠. 머슥하게 뒷머리를 만진 훈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편의점에 갈건데 부탁할게 있냐는 말에 근언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고개를 끄덕인 훈연이 현관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딜봐도 탈출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근언이 급하게 소리를 내 발을 잡았다.


돌아오시면, 상의 할게 있어서요. 사건 관련으로... 훈연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 영원 같이 느껴졌다. 진한 눈썹이나 선이 확실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근언이 협탁을 더듬어 파일을 집어냈다. 정리할 때부터 눈에 띄었던 것이 등장하자 훈연이 감탄사를 낸다. 사건 파일이었구나. 분위기가 풀어지는 느낌에 근언의 어깨가 내려간다. 현관문 앞에 선 훈연이 눈이 접히도록 웃었다.


"빨리 다녀올게요."


달칵, 문의 잠금장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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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연은 장장 30분간 의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장저우로 옮긴 이틀째날 근언이 건네준 명함의 주인공이었는데, 실력은 좋은듯 보였지만, 아니, 깁스를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 구르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왔다면 어느 의사든 30분 정도는 잔소리를 했을것이다. 훈연은 고개를 숙이고 쏟아지는 잔소리를 맞았다. 뒤에 선 근언이 미안했는지 자꾸 시선을 힐끔댔다.


총을 피하려다 넘어졌다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신발 밑창이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변명은 정말 그럴듯 해 보였다. 어쨌든 실제로 총상이 있는게 아니었으니 넘어져서 다친게 맞기는 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총탄과 총은 근언의 침대 밑으로 들어갔고, 그제서야 안 사실이지만 근언이 사는 층에는 입주자가 없었다. 새건물이라 입주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게 다행중의 다행이었다. 구급대원들은 넘어졌다는 훈연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창백히 질려서 구급차까지 따라오려는 근언에게 이걸로 죽지는 않는다면서 만류했다. 근언의 얼굴만 봐서는 훈연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사람 같았다. 구급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총에 맞을뻔 했으니 틀린말도 아니긴 했지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근언은 꿋꿋하게 구급차를 같이 타고 병원으로 왔고, 처치는 제 때 끝났다. 다행히 뼈가 전부 어그러졌다거나 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예정 됐던 것 보다 한 주 정도 더 깁스를 해야한다는 말에 훈연의 어깨가 쳐졌다. 완치는 그렇다쳐도 깁스는 앞으로 3주면 풀 수 있었는데. 근언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같이 있었으면 좀 잡아줬어야지 대체 뭘 했어요?"


의사는 불시에 화살을 근언에게 돌렸다. 근언은 눈을 피했고, 훈연은 근언은 나중에 온 거라면서 손사레를 쳤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찬 의사가 처방을 내렸다. 어디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바로 오세요. 물리치료 꼬박꼬박 오고. 훈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가봐도 괜찮다는 말에 훈연이 일어섰다. 정말 긴 하루다.


"...미안합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서 다시 사과가 들려왔다. 훈연은 내려가는 숫자를 쳐다보다가 근언에게로 눈을 돌렸다. 단정하게 서있지만 눈도 고개도 한없이 내려가 있다. 픽 웃어버린 훈연이 고개를 저었다. 사격 실력이 형편 없던데요.


간단한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상자를 벗어나자 평소와는 달리 근언이 훈연의 뒤를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에 도착하자 훈연이 뒤를 돌았고, 근언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문 안으로 몸을 구겨넣은 훈연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내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차에 들어오니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근언은 차에 타고도 얼마간 시동을 걸지 않았다. 시트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훈연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근언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얹어진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훈연은 지금이 옳은 타이밍임을 알아챘다.


"왜 총을 가지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경찰이라서요. 덧붙인 말에 근언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죄책감 탓인지 아까부터 마주치기가 영 힘든 눈이다. 민간인의 총기 소유는 불법이다. 지금은 조수역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말마따나 훈연은 경찰이었다. 훈연도 공무중이 아니면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것이 근언의 침대 밑에 있다는건 보통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에서 살았을 때 허가 받았던 총기에요. FBI의 자문이어서. 목소리만큼은 변함없이 깔끔하다. 훈연은 왜 FBI의 자문이 총기를 갖고 있는지나 총기를 어떻게 중국에 반입했는지 까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주 중대한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총으로 죽었을 뻔 했는데도 훈연은 아직 신고를 넣을 생각은 없었다. 추문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지 근언이 훈연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없었던 사이에 신변의 위협이 될만한 사건을 맡았나요?"


그래봤자 길이 갈린지 2시간 남짓이다. 그랬을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훈연은 일단 그렇게 물었다. 근언은 약간 망설이는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훈연은 넘어갔을테지만, 거짓말을 모를 정도로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훈연은 눈을 굴렸다.


"그럼 악몽인가."


혼잣말이었지만 좁은 차안에서는 크게 들렸다. 어차피 몰래 말할 사항도 아니었다. 훈연은 뱉어놓고 조심스럽게 근언을 살폈다. 반쯤은 추론이었다. 훈연은 근언이 총을 쏘기 전에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걸 봤고, 이른시간이긴 했지만 서춘오에 대한 수사를 하면서 둘의 수면패턴은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워낙 예민한 사람이니 훈연이 20분간 문앞에서 서성였다면 인기척 때문에 반쯤 깼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 외의 근거는 좀 터무니 없는 것들이었다. 부축당할 때 본 팔의 흉터. 한쪽에 크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마치 난도질 당한듯한 모양새로 있었다. 그리고 간요가 말했던 유령저택에 관한 것도. 간훤의 얘기는 말도 안되는 것 처럼 들렸지만 그냥 과장됐을 뿐이라면 이상할 건 없었다. 기묘하게 마른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훈연은 수사 첫날에 근언을 봤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직 살이 덜붙어서 약간 패인 듯 했던 눈주변은 응당 그래야하는 것 보다 어두웠다. 지금은 괜찮아보였지만 아마 아직도 정상체중에는 못미칠 것이다. 다이어트를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심한 스트레스의 반작용이라고 보는게 근언의 이미지에 들어맞았다.


억지로 끼워맞추는 느낌이 강했으나 훈연은 그것들이 근언이 총을 가지고 있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훈연은 근언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메릴랜드 대학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자이니 월반을 좀 했을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여러번 반복했듯이, 훈연은 감이 좋았다. 근언이 눈을 감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말해줄 생각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따져도 괜찮았다. 일일이 캐묻거나 화를 내도 되었다. 사실 훈연이 지금당장 조수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근언은 할 말이 없었다. 훈연은 신변에 위협을 당했고, 구두뿐인 장담은 믿기가 어렵다. 총에 위협당하는 것은 절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훈연은 잠시 근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저녁은 먹고 들어가죠."


생선으로. 가벼운 말에 근언의 눈이 떠졌다. 훈연은 시선을 모른척 했다.






*





근처의 시장은 시끄러웠다. 한 시간 만의 쾌거에 훈연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지금이라도 차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겠냐고 세 번이나 물었던 근언은 무릎이라도 짚고 싶은 얼굴이었다.


근언은 훈연이 진짜 시장을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언이 아는 근처의 '시장'은 음식을 살 수 있는 5층짜리 대형마트와 백화점이었고, 그곳은 걸어서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훈연은 시장을 찾아야한다며 위치를 모르냐고 물었다. 근언은 눈을 깜박이다가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검색해 보죠.


위치는 나왔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다. 약간 거기서 거기같아 보이는 건물들과 길도 한몫 했지만 시장이 넓어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훈연은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고, 근언은 30분 전 부터 약간 지쳐서 훈연의 뒤를 따라갔다. 헤매서 그렇지 시장도 얼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는 훈연을 억지로 따라가며 근언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꼭 시장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훈연은 식재료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었고, 음식의 품질을 알아챌만큼 입맛이 예민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마켓이 어디있는지 몰랐을 때는 인터넷으로 식재료를 주문했다. 부득불 시장에 가야한다고 길바닥을 헤맨 이유는 근언을 메어두기 위해서였다.


훈연은 근언이 자신을 피할 것을 알았다. 총에 맞을 뻔한 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훈연이 시장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피곤하긴 해도 못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죄책감이 남아있던 근언은 거기에 대고 안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물론 그것까지 예상한 처방이었다.


근언은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 훈연이 먼저 피할거라고 생각했음이 당연했다. 훈연도 그래야한다는걸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근언이 총을 쏜 것은 실수고, 다시 그러지 않을거라는 것 정도는 빌라의 복도에서 눈치챘다. 훈연은 경찰이었고 범인이나 용의자가 총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은 질리도록 받았다. 무서워하길 바랬다면 수류탄 정도는 들고왔어야 했을 것이다.


증거로, 훈연은 오늘 아침 아주 태연하게 근언의 집에 열쇠를 꽂았다. 근언은 지난 밤 전혀 자지 않은듯한 얼굴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평생에서 세 번 정도나 지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너무 일찍 왔나요? 가볍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근언은 입을 다물었고, 곧 노트북을 닫았다. 준비하겠습니다.

 

"맛있을까요?"


훈연이 사과를 들이밀었다. 장 볼 목록을 적기는 했지만 꼭 그것만 사야하는건 아니었다. 근언은 인상을 살짝 구긴채 사과를 노려봤다. 너무 귀찮게 구나. 근언은 살 것도 없는데 훈연이 가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여지없이 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머슥하게 치우려는 찰나 근언이 사과를 제 손으로 옮겨왔다. 손으로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났다.


맛있을겁니다. 사과를 돌려주자 가판대에 서있던 주인이 당연히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전부 최상품이니 걱정하지말고 사가라는 홍보에 입꼬리를 올린 훈연이 몇 개를 골라냈다. 껍질째 먹어도 상관없으니 집에서 혼자 있을 때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가판대에서 멀어지며 훈연이 사과를 두드린 이유를 물었다. 맑은 소리가 나면 신선한거라는 대답에 훈연의 입이 동그래졌다. 아는게 많은줄은 알았지만 사과 감별법 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늘 사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건 식기였다. 군것질거리나 구경거리들을 그냥 지나치며 제일 첫번째로 보이는 식기판매점에 몸을 구겨넣자 근언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무젓가락으로 쓰레기통이 넘칠 지경이어서요. 젓가락들이 걸려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근언이 물음표를 띄웠다. 계속 나무젓가락을 쓰고 있었습니까?


"어차피 집에서 먹는 음식이야 배달음식이나 테이크아웃이니까요. 산다고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파는건 조금 그래서."


무늬가 없는 것을 아무거나 골라 세 쌍쯤을 든 훈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통시에 있을 때는 훈연을 불쌍하게 여긴 간요의 어머니가 간훤을 시켜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비행기를 타야하는 거리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보내주는 것에는 한계가 조금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면서 택배로 장조림 따위를 보내주겠다는 통화를 하기는 했어도 오려면 아직 삼사일은 남았을 것이다. 안그래도 바쁜 간요에게 음식을 부탁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결국 선택지는 좁다. 제대로 된 식기들은 아직 통시의 집에 있었다. 이사를 온게 아니었고 식기 정도야 사면 되는 일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내친김에 그릇들도 둘러보려는데 근언이 뒤늦게 사과 봉지를 가져갔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훈연이 물결무늬가 있는 접시를 집어들었다. 처음 자취 했을 때 샀던 접시보다 두 배 가량 비쌌다. 경찰의 박봉으로는 조금 무리인가. 도로 내려놓는데 시야에 스친 근언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슨 문제라도."


떨떠름한 목소리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말 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훈연은 얼굴을 구겼다. 뭐를? 근언이 훈연의 손에서 젓가락과 그릇을 뺏어들더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오랜만에 나온 무례한 행동에 훈연의 얼이 빠졌다. 뭐하시는... 근언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여분은 제 집에 있습니다. 훈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서너개 떠올랐다.


"깁스를 뺄 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지내죠."


아주 뜬금없는 주장이었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수습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런 문장이 튀어나왔는지 짐작이 안됐다. ㅇ,왜... 멋대로 걸음을 옮기는 근언을 따라가며 훈연이 말을 더듬었다. 불시에 멈춰선 근언이 훈연을 돌아봤다. 식사 때마다 올라오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ㄱ,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예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근언이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좀 벌어진 탓에 목소리가 커졌다. 치이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통과하며 따라잡으려니 어이없음도 커졌다. 정말이지 요리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혼자 살 때도 하루에 한끼 이상은 밖에서 먹었고, 한 주를 더 하고 있어야하긴 했지만 깁스를 풀기 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일단 깁스를 풀면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밥을 챙겨주는건 차를 탈 때 조수석을 열어주거나 장을 볼 때 짐을 들어주는 정도의 배려가 아니었다. 거기다 같이 산다니. 어떻게 논리가 비약하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팔을 다친건 제 문제고,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가 당신한테 총을 쐈죠."


훈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에 대한 사죄로 하죠. 뻔뻔한 얼굴이다. 어제 차 안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이 맞나 싶어 훈연이 기함을 토했다. 근언은 더 들을 것 없다는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훈연은 제자리에서 머리를 뒤섞었다. 말들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다.


어차피 아래층에 살고 있으니 식사시간 때 마다 올라가는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지,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식사를 대접 받아야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총은, 근언의 잘못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런식으로 갚을 필요는 없다. 뒤늦게 쫓아가며 훈연이 몇 번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 선생님! 다리는 제가 더 긴대도 길이 복잡해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식사따위를 챙겨주고 싶어하는거지? 간요의 어머니가 훈연의 식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훈연과 간요는 거의 같이 자라다 싶이 했으니까. 하지만 근언은. 거기까지 생각한 훈연이 불시에 걸음을 멈췄다.


근언은. 가까운 사이인가?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조금 얼얼했다. 그런가? 갑자기 생각이 복잡하게 꼬였다. 아주 먼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장저우에 와서는 하루에 적어도 6시간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까. 하지만 훈연도 근언도 서로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었고, 사적인 대화라고는 훈연이 책을 빌려가거나, 뭐 겨우 그정도가 다였다. 훈연이 매끼를 밖에서 사먹고 있다는걸 이제서야 안 것만 봐도 결론은 뚜렷했다.


하지만 훈연은 아까까지 근언의 옆에서 걸었다. 총으로 위협당한 이틑날에.


심지어 훈연은 자신이 총으로 위협당한 이유도 알지 못했다. 총이 무섭지 않은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럴만한 사이였나? 근언의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수 일을 그만두지 않는건 그럴만 했다. 하지만 시장에 끌고 나오는건? 훈연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근언이 거리를 둘 걸 알아서였다. 그건, 보통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일만 하면 되었다. 근언도 훈연도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있었고, 근언이 훈연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뭔가가 바뀔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공과 사를. 훈연의 입술이 먹혀들어갔다. 다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걸 구분하며 근언을 대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근언은 그렇게 하고 있었던가. 질문이 돌고 돌았다. 강등 당하거나 계속 통시에 있는 서에 있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조수로 골랐다고 했다. 능력을 높게 봐줘서. 이제와서 그걸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훈연은 근언이 했던 다른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근언이 저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명확했다. 그렇게 잘해주는데 눈치도 못챌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자신은?


둘은 함께 수사를 한다. 근언은 훈연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다. 훈연은 아무렇지 않게 근언이 열어주는 조수석으로 들어간다. 훈연은 근언의 책을 읽는다. 근언은 훈연에게 총을 쐈다. 훈연은 근언을 시장에 끌고왔다. 거리를 두기 싫어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훈연이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근언은 안보이게 된지 오래다. 머리를 뒤섞은 훈연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빌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에 묻혀버렸다.




두룹두뚜 뚜룹두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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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래료 청폐안(그가 왔어, 눈을 감아 / Love me if you dare) 에 나오는 보근언과 이훈연... 살다살다 이런 마이너를 파고 아이고... 모처에 4화로 나눠서 올린것을 한꺼번에 올립니다 크흡 완결 안났어요!





"절 찾으신다고 해서 왔는데요."


훈연은 잠시 기다렸다. 인터폰 너머로는 대답이 없었고, 주변에도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산에 박혀있는 별장은 운전 중 몇 번이나 잘못 들어 온 것인지 의심했을 만큼 뜬금없는 곳에 있었다. 세련됐지만 담쟁이 덩쿨이 자라있는 저택은 수상했고, 그리고, 아직도 대답이 없다. 훈연은 깁스를 하지 않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서장님이 말한 시간에 온 것 같은데. 문 앞에서 몇 걸음 멀어져 위층의 창문을 확인한다. 대낮에 커튼까지 쳐져있고, 아무래도 안에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인터폰도 연결 되지 않았을터다. 잘못 찾아왔나. 휴대폰에 찍힌 위치를 다시금 확인 하는데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밀거나 당기는 힘도 없이 슬쩍 열린 문을 쳐다본 훈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보근언이라는 사람인데. 기억하지? 출근 하자마자 호출에 불려간 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겠어요. 담백하게 웃는 얼굴에 마주 웃어준 서장이 좀 더 편하게 허리를 뉘였다.


보근언은 범죄 심리학자로 저번에 훈연이 팀장으로 맡았던 사건에서 자문을 담당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훈연의 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범인의 심중을 꿰뚫었고,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수사에서 범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검거하는 과정에서 훈연의 팔이 부러졌다.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범인에게 수갑을 채웠으니 훈연도 독한 사람이라고 서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더랬다. 사건을 해결한 방식도 그랬지만 응급처치를 해준 사람이 근언이었기 때문에 훈연은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었고, 자문을 받을 만큼 커다란 사건은 저번 이후로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 들을 일이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다. 궁금해하는 훈연을 살펴보던 서장이 뺨을 긁었다.


그 사람이 조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입을 약간 벌린 훈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친다. 조수요?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무언가를 막는듯 아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네 팔 때문에 빼려는거 아니야. 걱정하지마. 저도 모르게 다친 팔을 감쌌던 손을 어색하게 내린 훈연이 입술을 축였다. 아직도 부목을 대고 깁스로 감싼 팔은 완치까지는 거의 4개월이 남아있었다. 권고 받았던 입원기간은 모두 채웠지만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훈연은 퇴원 하자마자 이제까지 계속 출근을 하는 중이었다. 훈연은 팀장이었고, 오래 자리를 비우면 비울 수록 팀에 끼쳐지는 영향이 크다. 단순히 일처리라 더뎌진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되면 아예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쪽 바닥은 사람이 하나 빠져나가면 곧바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고, 그건 훈연이 어쩔 수 있는게 아니었다.


범인은 검거 했지만 팔을 부러뜨린건 큰 실수다. 밖에서는 영웅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게 경찰에게 무모함은 치명적인 자격결여였다. 거기다 근언이 오기 전까지 수사는 거의 5달 동안이나 진행되지 않았다. 수사를 시작했는데도 피해자가 5명이나 더 나왔고,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무색하게 훈연의 명성은 바닥을 쳤다. 그건 상관없었다. 퇴출되지만 않는다면 다시 쌓으면 되는 일이었고 그럴 자신도 충분했다. 하지만 맹세코 팔이 부러진건 정말 사고였다. 범인은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던 근언에게 달려들었고 훈연은 그걸 막을 수 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문이라는건 언제나 잔인해서, 떨어진 명성을 회복하기 위한 발악이라던가, 혹자는 일부러 팔을 부러뜨린거라고 떠들기 까지 했다. 젊은 나이에 팀장까지 도맡아 승진을 거듭하는 훈연이 아니꼬웠던 걸지도 몰랐다. 훈연이 기를 쓰고 서에 계속 출근하려는 이유도 사실 그런 소문들 때문이었다. 집에서 마음 놓고 요양이나 하다가는 정말 강등 당할 수도 있었다. 한 번 강등 당하고 나면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사정을 아는 동료들과 서장은 훈연에게 겉치례 걱정만 몇 번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팔 때문에 빼려는게 아니다'라는 말도 겉치례 걱정에 가깝다. 서장은 조심스럽게 훈연의 눈치를 봤다. 고개를 숙이고 붕대 끝을 노려보던 훈연이 다치지 않은 팔로 머리를 긁었다. 조수. 범죄 심리학자에게 조수가 필요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번 사건도 서에서 부탁한게 아니라 근언이 사건을 알고 먼저 컨택을 해왔던 것이었으니 근처 관할에 살고있을 확률이 높았고, 일반인 중에 조수를 찾는 것 보다는 경험이 있는 경찰을 잠시 빼오는 것이 더 편할테니까. 아마 남는 인력을 부탁했겠지. 생각나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윗분들은 훈연을 지정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쉰 훈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적어도 무통보 강등은 아니니 상황이 나았다. 서장은 동정과 미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장은 훈연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특별히 아꼈던 사람이었다. 훈연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어디로 찾아가면 되나요?


훈연은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조용한 집이다. 문을 닫고 자연광만 있는 실내를 둘러보던 훈연이 목소리를 낼까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 윗층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익숙한 얼굴이 계단을 내려왔다. 보 선생님. 안심한 듯 웃어보인 훈연이 겨우 뱉는다.


"이훈연입니다. 서로 보조인력을 부탁하셨다길래. 구면이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근언은 대답없이 훈연을 쳐다보기만 했다. 훈연은 이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근언과 협동조사를 하면서 쉽게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이 남자의 괴팍함에 대한 것이었다. 약간 안하무인이긴 했지만 적응되고 나면 그리 크게 거슬릴 것도 없다. 근언의 시선은 다친 팔에 박혀있었고, 훈연은 어색하게 표정을 늘어뜨린채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타자를 치거나, 잘은 몰라도 총까지는 쏠 수 있을겁니다. 의도치 않게 씁쓸하게 나온 농담에 근언이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훈연이 다시 웃어보였다. 근언이 말도 없이 뒤를 돌아 응접실로 향해서 훈연도 서둘러 발을 옮겼다.


"제가 지시를 받고 온건 아니라서요, 정확히 어떤걸..."

"저번처럼만 하면 됩니다."


말을 뚝 끊은 근언이 갑작스레 뒤를 돌아본다. 훈연이 가까스로 부딪히지 않고 멈추자 근언이 다친 팔을 가리켰다. 그건 빼고. 대답도 안듣고 마저 걸음을 옮겨 응접실 쇼파에 앉은 근언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뒷머리를 긁은 훈연이 복도와 다르게 환한 응접실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는다.


"...혹시 제 팔을 신경 쓰신다면-"

"신경 안써요. 그 팔을 부러뜨린건 내가 아니라 범인이고, 그 사람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있으니까요. 내가 지켜달라고 소리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끼어든건 당신이고."


오히려 머슥해진 훈연이 눈을 굴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신문부터 펼쳐든 근언을 어색하게 쳐다본 훈연이 협탁에 있는 서류들에 눈길을 돌렸다. 노란 서류봉투에 반쯤 삐져나와있는 것들은 사건 보고서로 보였다. 한 팔을 뻗어 서류를 완전히 꺼내자 확실해졌다. 글자들을 읽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장저우 쪽 사건인데..."


사건 파일은 훈연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장저우 쪽에서 기승을 부리는 납치범에 관한 보고서다. 어느새 심각해져서 페이지를 넘기던 훈연이 근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조사하시는 사건입니까? 근언은 돌아보지 않고 콧소리로 긍정했다. 다시 파일을 살펴보던 훈연이 고개를 기울인다. 이 사건이 통시 관할로 넘어올만한 사유가 생겼다면 훈연이 모를리가 없다. 근언이 여전히 신문을 잡은채 말했다. 그 사건은 계속 장저우 관할일 겁니다. 범인은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거에요.


"그렇다면..."

"장저우로 거처를 옮길거라서요. 그쪽 사건을 먼저 받아왔습니다."


훈연의 얼굴이 구겨졌다. 장저우로 옮긴다구요? 근언은 말을 못들은 사람처럼 반응이 없었다. 훈연이 입을 열었다가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다물었다. 장저우로 옮긴다니. 그럼...


"보조인력은 그쪽 서에서 받아도 괜찮을텐데요."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근언이 드디어 시선을 들었다. 미간을 좁히고 사건파일과 근언을 번갈아보자 근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랐다. 장저우 관할에 요청할 수는 없었어요. 거기서 끊긴 말에 훈연이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이유라도 있습니까? 근언은 물을 마셨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차를 탄 훈연은 목에 갈증이 베는 것을 느꼈다. 달각, 물병이 테이블에 다시 내려진다. 그쪽에는 당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그쪽으로 요청했습니다.


훈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것저것 생각들이 지나갔다. 가장 크게 치고 올라오는건 당황이었다. 일부러? 훈연은 잠시 저번에 함께했던 협동수사를 떠올렸다. 뭔가 잘못한게 있었는지 생각나질 않았다. 경찰에 몸을 담고 있진 않았지만 근언도 이쪽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알고 있을 터였다. 함께 수사하면서 훈연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있었을테고. 이런 절박한 타이밍에서 훈연을 일부러 빼오다니. 무통보 강등보다는 낫다지만 다시 서로 돌아가면 이미 자리가 없어져 있을 수도 있다. 복잡한 표정의 훈연을 넘겨보던 근언이 손에 든 물이 넘치지 않도록 의자에 앉았다.


"전 큰 사건들만 맡아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영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질 않는군. 일단 들어보려는 마음으로 훈연이 자세를 고쳤다. 근언이 다시 신문을 잡는다.


"저번 같은 연쇄살인범들이나 싸이코패스들을 전담하죠. 제 옆에서 일한다면 서에서 일하는 것 보다 훨씬 커다란 커리어를 쌓을겁니다. 아무리 당신을 싫어해도 돌아갔을 때 강등 당하는 일은 없을거에요. 겨우 시에 있는 서에서 팀장이나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고."


훈연의 입이 벌어졌다. 근언은 무표정으로 컵을 기울였다. 훈연은 머리회전이 빨랐고, 무슨 말인지는 전부 알아들었다. 훈연의 손가락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이빨에 약간 씹힌 입 안 쪽이 곧 풀려났다. 저. 한마디를 꺼냈다가 목이 약간 매여서 헛기침을 한다.


"그렇게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근언이 고개를 돌렸다. 훈연은 가만히 눈을 마주봤다. 사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단순히 옆에서 허드렛일을 하는게 아니라 수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위치라면 근언의 말대로 전에 없을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서에 계속 출근을 했어도 훈연에게 돌아오는건 실종자를 찾는 정도의 일들이었을테고, 큰 사건을 맡으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그나마도 강등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훈연은 다친 팔이 아려오는걸 느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가 단순히 동정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건 필요 없었다. 어쨌든 훈연의 잘못이었다. 5달 동안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한건 훈연의 능력이 모자라서였고, 팔이 부러진 것도 마찬가지다. 처벌을 받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다. 곧은 눈을 마주보던 근언이 신문을 덮었다.


"팔 다친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시선이 내려간다. 물리치료를 하려면 한 달이 남았고, 아직도 움직이는대로 아픈 곳이었다. 깔끔하게 부러진게 아니라 거의 뼈가 밖으로 나왔었다. 가해자는 전문성이 있었고 처치가 늦었다면 평생 못썼을 수도 있다. 경찰 일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상해 중에 가장 큰 종류는 아니었지만, 훈연은 근언이 빠르게 응급처치를 하는 와중에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3주 정도 같이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런식으로 굳었던 얼굴은 처음 봤다.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그나마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간 눈을 맞추고 있던 근언이 고개를 돌려 다시 신문을 폈다. 훈연씨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훈연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팔을 다쳐서 잘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최적의 기회가 있는 위치로 불렀다. 근언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습니까?"

"...아까워서."


볕을 받아 색이 옅어진 눈이 깜박여졌다. 근언은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부스럭대는 소리.


"나이가 어리다고 그런 곳에 있기도 아까운 능력이니까. 나중에 빼내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팔이 부러져서 적절한 이유가 생겼길래 빼낸 것 뿐이고. 애초에 지정이었는데 그것까지 전달 받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시침이 움직였다. 훈연은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닫았다. 능력이 아까워서? 눈에 띄게 당황한 훈연 때문인지 한숨을 내쉰 근언이 컵을 다시 기울였다. 버벅대던 훈연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ㄱ,그 사건 거의 5달 동안... 근언이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온다. 파일을 좀 봤어요.


"실적이 괜찮더군요. 왜 아직까지 서에서 근무하는지 궁금했었습니다. 그 사건은 서에 있는 누가 맡았어도 1년은 걸렸을 사건이었고. 제가 가지 않았어도 몇 주 안에 해결했을텐데, 가로챈 것 같아서 미안한 지경이었어요. 태도를 보니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거의 겉핥기만 했던 수사였습니다. 선생님이 오지 않았으면..."

"핵심에서 한 발자국만 떨어진 겉핥기였죠. 전 그냥 엮기만 했을 뿐입니다. 며칠 더 생각하다 보면 제가 내놓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게 됐을테고. 그렇게 겸손한게 심하니 아직도 서에서 못나가고 있는겁니다."


날카로운 말에 훈연이 공연히 입술을 물었다. 부정하기라도 하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붙잡고 노려볼 기세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제가 해결했다고 생각하겠죠. 전 그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해서요. 마저 말을 마친 근언이 마저 물을 마셨다. 어느새 다리를 떨고 있던 훈연이 의식적으로 몸을 멈췄다.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겁니다. 팔이 나을 때가 되면 다시 서로 돌아가겠죠. 추천장이 필요하다면 써줄거고, 베이징까지 가는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테니 동정은 싫다는 핑계로 거절하려면 그만두는게 좋아요. 부족한게 없다는건 아닙니다. 가르쳐줄테니 배우라는거지. 이틀 뒤에 장저우로 가야해서, 괜찮다면 서명한 다음 집에 돌아가 짐을 싸줬으면 하는데."


테이블에 있던 다른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 때까지도 훈연은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칭찬을 했는데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고도의 돌려말하기일지도 모른다. 진한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가 곧 계약서가 받아들여졌다. 있던 펜으로 서명을 휘갈긴 훈연이 뺨을 긁었다. 감사합니다. 곧바로 계약서를 가져간 근언이 마치 훈연이 그곳에 없다는듯 시선을 돌렸다. 훈연은 그걸 나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자켓을 챙겨 일어났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에 훈연이 한 번 뒤를 돌았다.


"그, 장저우로 간다면 어디쯤에서 묵어야..."

"신경 안써도 됩니다. 집은 있으니까."

"집이 있습니까?"

"시간은 문자로 보낼게요."


그게 끝이었다. 더 질문해봤자 답하지 않을거라는걸 깨달은 훈연이 다시 뒤를 돌았다. 현관을 걸어가며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평생 마주칠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3주동안 어느정도 말문을 터놨다고는 하지만 오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한건 훈연 한 사람인 모양이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훈연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뒤돌아본 집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문득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혀뿌리를 친다. 말도 안되지. 예상되는 답에 픽 웃어버린 훈연이 고개를 저으며 발을 디뎠다. 먼지 쌓인 여행가방을 챙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






훈연은 엉망인 머리를 붙잡은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거의 꿈 속까지 들렸을 정도였다. 반쯤 눈을 감고 발을 옮기자 마자 무언가에 치여 비명이 목 뒤까지 올라왔다. 엉망으로 벌어진 여행용 가방을 가까스로 밀어낸 훈연이 욕을 삼킨채 현관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가구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어딘가 어수선했고, 가는 와중에도 옷가지와 지갑 같은 것이 발길에 치였다.


"네..."


짜증이 귀까지 차오른 채로 문을 열자 멀끔한 얼굴이 보였다. 커튼을 쳐놓은 방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불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훈연이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근언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옷 챙겨입으세요.


훈연이 빌라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은 근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게...? 단어 하나에 담긴 의미는 많았고, 근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 집은 위층이니까 필요할 때 찾아오세요. 그러고서 건네주는건 열쇠였다. 훈연은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여행용 가방 하나 덩그러니 가져온 훈연은 멍해진 채로 집에 남겨졌고, 근언은 뒤를 돌아서 나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굳어있던 훈연은 휑한 집을 몇 분 쳐다보다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생각은 복잡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훈연은 단지 며칠 정도만 묵을거라고 생각하고 짐을 쌌다. 집이 있다길래 장저우에 근언의 주택이 있고, 일하는 동안만 그곳의 방을 빌려 자게 해준다는 말인줄 알았지 이런식으로 원룸 하나를 대여해준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꽤 제대로 된 집인데다 심지어는 훈연이 혼자 사는 집보다 넓었다. 장식품 없이 침대와 테이블, 의자, 서랍장 정도만 있는 원룸은 구석에 드레스룸과 욕실이 있었고 새 집으로 보였다. 훈연은 그제야 단촐한 여행가방을 본 근언이 얼굴을 구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훈연은 낯선 천장을 봤다. 장저우로 간다는 얘기를 했을 때, 서장은 약간 불안한듯 전화기 너머로 침묵했다. 거기까지 가서 뭐하게? 훈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괜찮을거라고 말했다. 실적을 쌓게 도와주려는 모양이더라구요. 잡아도 될 것 같아요. 경찰이 된 다음부터는 항상 통시관할에서 있었던 터라 약간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서장은 이내 잘 갔다오라는 말을 했다. 통화는 간단하게 끊겼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같은건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능력이 아까워서 채용했다는건 생각했던 것 보다 특출나지 않으면 바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였다. 막상 잡은 기회를 그냥 날려먹기는 싫었다. 어차피 범죄자를 잡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야하기도 했고.


그러나 여전히 팔이 걸렸다. 다친건 왼손이니 글은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저번에 농담한 것 처럼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다. 훈연은 붕대를 만지작 거리다가 병원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옮기느라 다니던 병원에 연락도 하지 못했으니 그것도 해야했고. 비행은 피곤했다. 훈연은 공연히 붕대를 만지작대다가 가방을 열어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너무 졸렸고, 잠이 필요했다. 불을 끄자 낯선 풍경이 어느정도 지워졌고, 훈연은 눈을 감았다. 일어나면 호텔을 알아볼 생각으로.


"짐은 사람 시켰어요. 곧 올겁니다."


훈연은 엘레베이터 앞에서 기묘하게 얼굴을 구긴채 근언을 봤다. 네? 하루 종일 케이스 안에 있었던 터라 접힌 자국이 있는 회색 맨투맨이 근언의 쪽을 향해 돌았다. 무슨 짐이요? 답 정도는 예상을 하고 물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언이 '당신 짐'이라고 말했을 때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선생님.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다. 근언이 먼저 들어가서는 안올거냐는듯 눈썹을 휘어올렸다. 일단 들어가자 1층의 버튼이 눌렸고, 엘레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빈공간을 채웠다. 훈연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근언이 빨랐다. 적게 잡아도 3개월은 장저우에 있을겁니다. 호텔이나 숙박업체를 빌리는건 낭비에요.


"하지만-"

"제 소유 플랫이고 가까이 있어야 원하는 때에 불러낼 수 있으니 내준겁니다. 조수역할을 하는 동안 지급되는 돈에서 세를 뺄테니 불편해도 3개월 동안 참아요."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야 뭐. 긍정의 침묵에 근언이 자켓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넨다. 근처 병원이에요. 의사 하나를 아니까 이름을 대면 안내해 줄겁니다. 다친 팔 쪽에 서있던 탓에 훈연이 몸을 틀어 명함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정직하게 나오는 인사에 근언이 눈을 내려깔자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근언이 먼저 발을 뻗었고, 명함을 살피던 훈연이 뒤늦게 종종걸음을 쳤다. 서로 가는겁니까? 주차장으로 갈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근언은 길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상하다는 눈으로 훈연을 쳐다봤다. 밥 먹어야죠.


"어......"

"일은 오후에 시작 할 겁니다. 저는 괜찮지만 훈연씨는 굶은채로 돌아다닐 타입도 아니고,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테니 일단 식당으로 갈거에요. 그 후에 근처를 둘러보는건 훈연씨 혼자 하도록 하고."


또 할 말이 없어진 훈연이 습관처럼 머리를 긁었다. 감사합니다. 식당은 이미 정해둔 듯 근언의 발은 막힘이 없었다. 이런식으로 배려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상의 없이 집에 밀어넣고 사람들에게 짐까지 꾸리게 시킨 것에 대한 사과일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는 딱히 대화랄게 없었고, 근언은 너무 고급스럽지 않은 브런치 까페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메뉴판을 보고 대충 커피와 식사메뉴 한가지를 골라 주문한 훈연은 앉자마자 파일을 꺼내드는 근언의 눈치를 봤다. 끌고와놓고는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아마 정말 안내가 목적인 모양이었다. 입맛이 없으신가봐요. 예의상 돌려물은 질문에는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에는 생선메뉴가 없어서요.


"생선 아니면 안드세요?"

"대부분은."


훈연의 눈이 굴러간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향 불균형 같은걸 초래하지 않나. 어쨌든 훈연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화제는 사건으로 넘어갔다. 저번의 그 납치범에 관한 파일이었고, 훈연은 계속 궁금했던 것 부터 입에 올렸다. 피해자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근언의 시선이 들렸다가 다시 종이에 박힌다.


"네."

"경찰은 단순 납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요."

"추정되는 피해자만 4명이에요. 요구가 없으니 죽였을겁니다."

"시장에 팔았거나 다른 용도로 납치했을 가능성은..."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니 고려해봐야죠. 서쪽에서는 수사도 그런쪽으로 잡고 있고. 하지만 전 죽였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시체가 나왔어요."


근언이 파일을 접었다. 돌아가면 자료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동시에 음식이 나왔다. 약간 몸을 비켜서 플레이트를 쉽게 하게 도와주는데 근언이 대뜸 음식과 식기를 가져간다. 드시게요? 당황해서 한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는 대답이 없었고, 얼마 안가 계란이 먹기 좋게 잘려 훈연의 앞으로 돌아왔다. 훈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먹지도 않을건데 굳이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나온 셈이다.


"한 손으로도 자를 수 있는데요."

"이게 더 편하니까. 검토는 나와서도 할 수 있고."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알아요. 내 마음대로 한거니까 고마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도 안마주치고 딱딱하게 뱉는 말이란. 훈연은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포크로 계란을 찍었다. 서에 가기 전에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근언은 파일을 넘겼다. 훈연씨가 주변 탐방을 끝내면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주고 바로 갈겁니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훈연이 최대한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탐방은 내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바로 돌아가죠.





*




"피해자들의 프로파일입니다. 자세한건 아까 드린 서면에 나와있어요. 지도에 표시 된 건 각각의 피해자들이 납치당한 장소 및 피해자들이 거주했던 곳이고."


종이를 넘기던 훈연이 화이트 보드에 써진 글자들로 눈을 돌렸다. 깔끔하게 정리 된 글자들은 납치 된 순서대로 피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 특징 등이 써져 있었고, 지도에는 지역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근언의 플랫은 훈연의 것보다 컸지만 장식품이 없다는건 똑같았다. 다만 온 벽면이 사건에 관련된 것들로 도배되어 있었고, 덕분에 훈연은 생각없이 들어왔다가 걸음을 잠깐 물렸었다.


"나왔다는 시체는 첫번째 피해자의 것인가요?"

"제가 추정하기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이중에는 없어요."


근언은 근처 책상에서 사진이 붙은 종이를 들어 건넸다. 흙에 반쯤 매장되어 있는 여성의 시체는 머리카락이 귀 위쪽까지 엉망으로 잘린채였고, 얼굴과 발목에 큰 자상이 나있었다. 사인은 질식사고 일주일 전에 발견된 시체라는 말에 훈연이 미간을 좁혔다. 가해자가 같다고 단정 지으시는 이유라도. 근언은 칠판에 다른 색 펜으로 훈연에게 건넨 피해자의 프로파일과 거주지, 매립 장소를 표시하고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맞춰봐요.


훈연은 자연스레 일어나 칠판에 가까이 다가갔다. 피해자들의 납치 추정 장소는 각각의 거주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시체의 매립 장소는 거주지와 한참 떨어져 있었다. 시체의 사망 추정 날짜는 4달 전이다. 단순히 시기 때문에 끼워맞추기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애초에 피해자끼리도 한눈에 보이는 공통점은 없다. 한참을 쳐다만 보던 훈연이 마카를 들어 입으로 뚜껑을 열고 몇 번 돌린다. 3초 정도 고민하고는 피해자들의 사진에 펜 끝을 갖다대자 근언이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관찰력이 있네요."


훈연은 근언의 말에 뺨을 긁었다. 피해자들의 얼굴형을 따라그리자 얼추 6명과 시체의 것까지 비슷한 모양이 나왔다. 대부분 머리카락 때문에 일부러 가려져서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시체의 머리카락이 잘려있지 않았다면 신경 쓸만한 공통점도 아니었고. 하지만 겨우 얼굴형을 공통점으로 잡기에는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데요. 근언이 다시 일어나 훈연의 손에서 시체의 사진을 가져가 피해자들의 사진 옆에 붙였다. 가장 큰 공통점은 맞췄어요. 물론 그것 한가지만은 아니죠.


"호연기를 포함한 5명 모두 광둥어(상하이, 홍콩 쪽 사투리)를 쓸 줄 알고, 모두 흑발에, 화장할 때 라인을 길게 빼고, 비슷한 악세서리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뒤의 두개는 너무 밋밋한 공통점에 수사할 때 쓰는 사진에서는 알기 힘드니 크게 신경쓰지 않고 광둥어 사용여부는 피해자 대부분이 보통화로 고쳐말하긴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죠. 아마 가해자가 광둥어를 쓸겁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들의 거주지를 알고 근처에서 납치했습니다. 첫번째 피해자로 추청하는 호연기도 아마 거주지 근처에서 납치 당했을거고, 매립지는 호연기의 거주지와 가깝지는 않지만 경찰이 파악한 첫번째 피해자인 사헌의 거주지 근처에 있는 유일한 산이죠."

"시체를 매립한 다음 다른 피해자를 찾는걸까요?"

"그렇게 보는게 맞을겁니다. 시기도 비슷하고."

"납치한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있지는 않을테니까요. 동선 상 계속 거주지를 옮기고 있으니 데리고 다니면 눈에 띄었을테고. 피해자들의 거주지 근처에 매립 할 만한 곳을 수색하면 시체를 찾을지도 모르겠군요."


근언이 훈연의 손에서 마카를 빼와 뚜껑을 닫았다. 브리핑은 맡겨도 되겠네요. 시곗바늘은 막 정오를 지나고 있었고, 근언은 빠르게 파일을 정리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한 손으로 하는 것 보다 보고있는게 빠를테니 훈연은 공연히 칠판을 한 번 더 쳐다봤다. 호연기에 대한건 어떻게 찾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에는 신문에서,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어제 근언이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신문을 기억해 낸 훈연이 감탄사를 냈다. 일주일 전 신문이었나. 물론 서에 연락해 추가자료를 받아내기는 했을테지만, 신문에서 보고 사건을 끼워맞췄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니 무심한 얼굴이 입을 움직였다.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범인이 왜 살인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겠습니까?"

"아뇨. 심리학은 전공이 아니니까요. 증오살인의 연장선 같기는 합니다만."


음. 잠자코 침음을 낸 근언이 그정도면 됐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주시면 기쁘게 배우겠습니다. 건실한 답변에 픽 웃어버린 근언이 자켓을 들어 펼쳤다. 훈연이 기꺼이 등을 돌린다. 다가가 소매에 팔을 넣게 도와주며 근언이 낮은 소리를 냈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운전은 제가 하죠. 길을 알아서."


거리 탓인지 목덜미에 닿았던 숨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목을 감쌌던 손을 어색하게 내린 훈연이 서둘러 휴대폰과 지갑을 챙긴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를 쫓아 현관으로 나가며 고개가 빠르게 저어졌다. 확 올라갔던 심박수가 천천히 가라앉았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졌다. 정갈하게 벗어놨던 신발에 발을 끼워넣는다.


일부러, 일리는 없겠지. 아직 한기가 남아있는 목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훈연이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벌써 엘레베이터 앞에 서있는 근언은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오히려 편안해진 느낌에 훈연의 입에 미소가 얹어졌다. 복잡하게 생각할래도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숨결 한 번에 엉망으로 꼬였던 회로를 한 번에 풀어내며 복도로 발을 뻗는다. 오늘만 같다면, 생각보다 조수 일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낙관적인 생각으로 꼬리를 잘라낸 훈연이 약간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를 냈다.








*







훈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에는 어지럽게 종이들과 실들이 테이프 따위로 붙어 있었고, 너무 난잡해서 도저히 어떤 순서로 읽어야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훈연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기태연은 아직 살아있을까요? 의자에 앉아있던 근언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아닐겁니다.


브리핑은 잘 끝났다. 장저우서의 관계자들도 근언이 내놓은 호연기와 납치사태의 연관성을 인정했고, 수색에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 보통이라면 훈연이 수색장소에 나가있겠지만 근언이 돌아왔기 때문에 훈연도 돌아왔다. 어차피 이런 팔로는 현장에 나갔어도 구경 하는 것 밖에 못했을 것이다.


훈연은 집으로-이제는 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돌아가거나 아침에 못했던 주변 탐방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엘레베이터에 올라와서도 층을 누르지 않고 약간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근언은 제 층을 누른 후 훈연을 한 번 쳐다봤을 뿐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엘레베이터는 그냥 올라갔고, 숫자를 보다가 제가 내릴 층을 지나쳤다는걸 알았을 때서야 훈연이 불쑥 말을 꺼냈다. 파일을 더 살펴봐도 될까요?


그리고 나서 3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사건파일을 다시 살펴보는건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수색은 들어갔고, 시체를 찾기 전에는 근언과 훈연이 딱히 할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근언은 오늘 브리핑에서 말한 것 보다 범인에 대해 더 추측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확실할 때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만.


여분의 의자가 없어서 억지로 침대에 앉혀졌을 때만 해도 왜 들어오려고 했는지 자책했건만 사건파일이 아니라 책을 집으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근언은 기꺼이 책장에 있는 범죄심리학 책을 훈연이 읽도록 허락했고, 대화 한 마디 없는 집에는 편안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불편해서 30분 안에 나갈거라고 생각했는데 3시간이나 지난걸 보면 확실히 잘못 생각했다.


근언은 몇 번 차를 끓이기 위해 커피포트가 있는 부엌과 의자를 서성댔지만 훈연에게 차를 권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책을 빨리 읽는 편인 훈연은 마지막 챕터를 남겨두고는 허리가 아파져 뒤로 누웠다. 남의 침대에서 하는 것 치고는 무례한 행동이라는건 알았지만 근언이 신경쓰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언급했던 기태연은 경찰이 파악한 마지막 피해자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고, 잡지 않는다면 다음 피해자가 나올 것이다.


"선생님."


대답이 없었다. 근언은 아까부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으로 계속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훈연은 3주동안 근언과 일한 경력이 있었고, 대답하거나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듣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한 팔을 고정시킨 채로 돌아다니다 보면 모든 일상이 배로 피곤해진다. 팔을 쓰지 않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앉아있기만 해도 기운이 빠졌고, 석고에서 올라오는 무기력함을 떨쳐내기가 어려워진다. 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일어났을 때, 훈연은 입 안쪽의 살을 씹고 또 씹었다. 너무 어리석었다. 연결된 링거로 무능력함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린나이에 팀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라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가 운이 따라줬다고 어깨를 두드렸다. 훈연은 웃었고, 그게 바른줄로만 알았다. 운이 좋았다고. 그리고 팔의 깁스는 그것의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은 떠도는 헛소문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거라면. 강등 당하는게 당연한 일이라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면. 강박감은 훈연을 억지로 일으켰고, 서로 이끌었다. 가봤자 할만한 일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눈도장을 찍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팔이 부러진 것은 무능력함의 반증이 될 수 없었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체감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이게 그동안 운이 좋았던 대가라고,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겸손하다고 생각하세요?"


근언은 여전히 논문에 눈을 박고 있었다. 훈연은 엉망인 천장을 쳐다봤다. 누웠을 때 까지 생각하려고 붙여놓은 것들이었다. 기태연은, 근언의 말마따나 이미 죽었을 것이다. 피해자를 납치하는 주기는 한달에 가까웠지만 피해자를 물색하는 기간도 포함한다면 기태연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미 매장 당했거나, 죽지 않았더라도 범인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에 감금 당해 두려움에 떨고 있겠지. 수사가 더디게 진행된다면 또 피해자가 생긴다. 훈연이 맡았던 사건처럼.


"아뇨."


근언의 대답에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논문을 넘기는듯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훈연은 근언이 제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 운이 따라줘서 팀장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원래는 이런 큰 사건을 맡을 재목이 아닌거라면, 훈연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살처분을 기다리며 통시에 있는 집에 있어야겠지.


장저우로 짐을 옮길 때 까지는 현실감이 없었지만, 막상 서에 가서 브리핑을 하고 보니 찬물을 맞은 느낌이었다. 제가 방해가 되어서 수사가 느려지는건 안될 일이었고, 훈연은, 불안해졌다. 전까지는 조수역도 생각보다 잘 해낼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거품이었던 듯 자신감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상황과 추론을 말하던 근언과 자신들 나름대로 그것을 분석하던 경찰들. 얼마전까지는 훈연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한 발자국 바깥에 있을 뿐이다. 원래라면 그것을 보고 있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렇게 있게 될 것만 같아서 팔이 아렸다. 그게 당연한거라고, 글자가 발끝에서부터 기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훈연은 강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살면서 이렇게까지 무너져 본 적은 없었으니까.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고, 정확히는 물어봐야만 했다. 제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을.


"전 훈연씨가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다는건 예의상 돌려말한 표현이었고."


단호한 말이 흘러나온다. 얼마간 침묵하던 훈연의 입에서 곧 웃음이 터져나왔다. 돌려말하는 법을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조롱처럼 들릴 수 있는 말에 근언은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가끔은 하죠. 설득해야할 때는 더더욱.


"선생님 같은 사람이 설득도 하나요?"

"심리학자가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숨을 깊게 내쉰 훈연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근언은 괜찮다는 듯 콧소리를 내보였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통의 저택에서 했던 말만으로도 확신을 가졌어야 했는데. 이건 신뢰의 문제였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은 무례한 행동이다. 근언이 직접 지정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근언의 안목을 믿는다면 그것에도 의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훈연은, 다른건 몰라도 근언의 눈이나 실력은 믿을 수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린 훈연이 아예 발을 땅에 디뎠다. 책은 하루만 빌려갈게요. 널브러진 자켓을 챙기려니 근언의 시선이 들렸다. 내려갈겁니까? 훈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근언이 따라서 일어났다. 정말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하자 근언이 종이를 정리했다. 사러 나갈게 있어서. 훈연은 잠자코 근언이 지갑을 챙기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습니다만."


근언이 힐끔 곁눈질을 했다. 아까와 비슷한 질문이라면 대답은 생략하겠습니다. 저를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몸을 눈으로만 따라가던 훈연이 어깨를 으쓱인다.


"왜 접니까?"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훈연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능력을 높게 봐주신건 알겠어요. 열리던 현관문이 멈췄고, 근언이 뒤를 돌아봤다. 몇 걸음 거리를 두고 눈이 마주친다. 반뼘이 안되게 높은 훈연의 시선이 곧았다. 다른 이유는 없나요?


볕에서 보면 연했을 눈은 문 뒤로 펼쳐진 불빛 그림자에 가려 진하게 보였다. 보통 사람보다 크게 트여있는 눈은 어떤걸 바라고 있었고, 근언은, 심지어는 훈연도 무슨 답을 바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택에서 만났던 날, 나가기 직전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하필이면 왜 나를. 근언의 영향력이라면 굳이 조수로 부르지 않았어도 입김 정도는 넣을 수 있을터였다. 막 경찰학교를 졸업 한 듯한 바르고 곧은 자세를 얼마간 쳐다보던 근언이 먼저 몸을 돌렸다.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좋았거든요. 같이 일하는거. 거의 중얼거리듯이 나온 말을 끝으로 근언이 발을 옮겼다.





*




시체가 나왔다.


근언과 훈연의 추측대로였다. 두번째 피해자인 사헌의 시체가 세번째 피해자인 정하옌의 거주지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틀만에 이뤄낸 일이었고, 서에서는 곧장 다른 피해자들의 거주지 근처에도 경찰견들을 풀었다. 시체를 숨길만한 장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게 유일한 희망점이다. 훈연은 연락을 받자마자 근언의 플랫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서 연속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안가 근언이 문을 열었다. 막 말을 시작하려던 훈연이 뒤로 보이는 상차림에 뺨을 긁었다.


"식사 중이셨나보네요."

"시체가 나왔습니까?"

"네. 부검 하기 전에 먼저 봐도 괜찮다고 해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식사는 하고 가도......"

"아뇨. 그냥 가죠.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바로 들어가 외투와 차키만 챙겨 나온 근언이 훈연의 옆을 지나치며 뭔가를 던졌다. 한 팔로 아슬아슬하게 잡아채자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손 안에 들어온 열쇠를 멀뚱히 바라보는데 근언이 엘레베이터를 안탈거냐며 재촉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어떻게든 발을 미끄러뜨린 훈연이 열쇠를 들어보였다. 이건 왜...


"귀찮으니까요. 호출할 일이 있으면 그냥 들어오세요.

"그래도 되는겁니까?"

"도둑질 할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되도록이면 훈연씨 열쇠도 줬으면 하는데."


뻔뻔하게 절 쳐다보는 눈을 어이가 없다는듯 보던 훈연이 약간 고민하다가 주머니를 뒤졌다. 차키와 함께 걸려있는 열쇠를 건네자 근언이 정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됐어요.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으로 알겠습니다.


이후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훈연의 황당한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근언의 무심한 말들에 번번히 막히고 말았다. 훈연이 따지면 그게 뭐가 이상한 일이냐고 답하는 식이었다. 차에 탈 쯤이 되어서는 훈연도 결국 이마를 짚고 말싸움 하기를 포기했는데, 며칠 까먹고 있었지만, 보근언이라는 사람은 원채가 남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건을 맡았던 때도 무슨 저런 사람이 다있냐고 수근대는 팀원들을 어르는게 범인 검거보다 더 힘들었을 정도다. 그 과정에서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서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사헌의 시체는 호연기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잘린채 얼굴과 발목에 자상이 나있었다. 사인도 질식사로 같았다. 이미 부패가 시작한터라 방부처리는 먼저 했다는 부검의의 말에 근언이 라텍스 장갑을 꼈다. 


잘린 머리카락 아래로 목을 조른 자국이 선명했고, 얼굴과 발목의 자상 모두 생전에 생긴 것들이었다. 어느새 근언의 옆에 서서 같이 살펴보던 훈연이 한 손에 장갑을 끼고 차가운 살을 만졌다. 실종당시보다 급격하게 살이 빠져있다. 훈연은 호연기의 몸도 비슷하게 말라있던 것을 기억했다. 머리카락이 잘린 것 말고도 군데군데 거의 뜯겨져 나간 듯이 두피가 드러나 있었고, 옷은 실종 당시에 입었던 차림과 똑같았지만 마치 일부러 낡게 만든듯한 느낌을 주었다. 콘크리트에 비볐거나 얼룩을 묻히는 식으로.


"일부러 이렇게 입힌걸까요?"


근언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심스럽게 사헌의 입을 벌렸다. 핀셋으로 점막에 남아있는 이상한 조각을 꺼내 살펴보자 훈연이 다가갔다. 그건... 눈이 좁아진다. 스티로폼 조각으로 보였다. 재갈 대신으로 물린 모양이다.


"호연기의 경우에는 낡은 헝겊으로 틀어막았었어요. 아마 그 때 그 때 쓸 수 있는걸 쓰는 모양입니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납치하는게 아니라는 말이군요."

"고문이 목적이 아닐테니까요. 충분히 살이 빠지기 전까지만 묶어놨다가 바로 죽인걸겁니다."

"일부러 체중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을테니까. 다른 시체들도 비슷한 패턴일거에요."


가져왔던 파일에서 호연기의 사진을 들어 비교해주고 도로 집어 넣은 근언이 옆에 있던 담당결찰에게로 몸을 틀었다. 1년에서 반 년 전까지 자살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메일이나 펙스로 충분할겁니다.


담당경찰은 거의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의 시체를 찾은 다음부터는 신뢰도가 현저히 올라간 모양이었다. 돌아가죠. 미련없이 장갑을 벗어버리는 것에 훈연이 눈을 깜박였다. 벌써요? 필요한건 다 얻었다는 말에 훈연이 시체와 근언을 번갈아봤다. 거의 10분도 살펴보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따라서 장갑을 벗은 훈연이 이미 저만치 멀어져있는 근언에게 붙었다. 


"자살한 사람들의 명단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범인이 살인을 하는건 죄책감과 관련이 있어요. 호연기를 죽이기 전에 가까운, 이를테면 딸이나 아내가 자살했을겁니다."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살인을 하고 다닌다는건가요?"


앞뒤가 안맞게 들리는 문장에 훈연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듯 휴대폰에 시선을 박은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근언이 부정의 답을 냈다. 아뇨. 한 텀을 두고 그린듯한 눈동자가 훈연에게로 올라간다.


"죽여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죠. "








*







"-이상으로 현재 장저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감금, 살해와 시체유기가 의심되는 사건에 대한 요약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장저우 서에서 열린 브리핑에는 사건의 관련자들이 의자에 늘어서 앉아있었다. 환풍구가 돌아가는 소리, 바깥의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 조차 없었다. 훈연은 리모컨으로 슬라이드를 넘겼다. 피해자인 호연기와 사헌, 바로 2시간 전에 발견 된 세번째 피해자인 정하옌의 생전 모습과 시체의 사진이 화면에 들어찼다. 충분히 텀을 두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긴다. 피해자에 속하지 않는 여자의 사진과 프로파일의 요약이 나왔고, 포인터로 여자를 가리킨 훈연이 마저 말을 이었다.


"서진. 약 반 년 전에 자택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 여성으로, 부모는 어렸을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하나뿐인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회의실이 잠시 술렁였다.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피해자라고 생각 하시는겁니까? 사건을 전면으로 맡았던 팀장이 발언했다. 훈연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목을 매었고, 동기도 충분하다. 밧줄을 다른 사람이 매었거나 외부의 압박이 있었다면 흔적이 있어야했다. 현장에서 찍힌 사진 중 그런건 발견 되지 않았고, 의심할 것 없는 진짜 자살이었다. 훈연의 설명에 경찰들이 자료를 넘겼다. 찍힌 현장 사진과 신고 내용, 순경이 작성한 보고서등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 여성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까? 질문에 훈연이 마저 슬라이드를 넘겼다. 서진과 어딘가 닮은 듯한 남성의 사진이 나타난다. 서춘오. 서진의 오빠. 경찰들이 다시 자료를 넘긴다.


"현상황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용의자라고 봅니다."


다시 회의실이 어수선해졌다. 요약은 서면으로 나와있습니다만, 시각자료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죠. 슬라이드가 넘어간다. 아까 잠깐 나왔던 피해자들의 사진이 비교하기 쉽게 일렬로 늘어섰다. 억지로 짧게 잘린 머리와 비슷한 얼굴형, 얼굴과 발목의 자상, 빠진 체중, 감금 당했던 흔적들을 포인터로 가리켜 설명한 훈연이 다시 서진의 슬라이드로 화면을 되돌렸다.


"서진의 자살 동기는 가난이었습니다. 서춘오에게는 도박빚이 있었고, 서진은 식당에서 일하다가 자살하기 3개월 전에 사고로 발목을 다쳐 쫓겨났죠. 인근 주민들이 사채업자의 독촉으로 신고를 넣은 적이 몇 번 있었구요. 비교했으니 아시겠지만, 피해자들이 살해당하기 전의 체중과 서진의 자살 당시 체중이 비슷한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상의 서진의 머리는 단발로 보이지만 돈이 궁해지면 자주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고 하더군요."


전 세기 만큼 값을 비싸게 쳐주지는 않지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돈이 되는 물건이다. 훈연은 더해서 서진이 자살하기 전날 밤 인근주민들이 서진과 서춘오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과, 서진이 항상 오빠가 자신을 죽여야한다고 울분을 토했다는 증언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죽고 싶은 것은 오빠 때문이니 오빠가 자신을 죽여야한다고, 술을 먹고나면 반드시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이웃들의 입에서 나왔다. 서진과 서춘오가 살았던 곳은 빈민촌에 가까운 곳이었고, 방음은 전혀 되지 않았다.


"서춘오에 대한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약쟁이. 실제로 약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군요. 약을 하지 못한 정키처럼 시종일관 불안해 했고, 이유없이 자주 울고, 부모님의 환청에 대해 큰소리로 떠들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알코올 의존증에 정신병력이 있었던걸 확인 했습니다. 서춘오는 서진의 장례식에서 두 달이 흐른 후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주민들은 상하이로 돌아갔을거라고 생각하더군요. 빚을 청산하면 돌아간다고 허세를 부렸다고. 빚은 서진의 사망보험금으로 갚은걸로 보입니다. 다음은 서진과 서춘오의 원래 거주지와 첫번째 피해자인 호연기의 거주지 위치입니다."


바로 윗동네였다. 사라졌다는 시기도 호연기의 사망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처음에 말했던 제물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아까보다 진중해진 목소리에 훈연이 다시 시체들의 사진을 띄웠다.


"용의자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을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환청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으니 서진이 자살을 하고 나서도 환청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구요. 항상 말했던 자신을 죽여줘야 한다던 목소리가 맴돌았을테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을 납치해 서진처럼 만들어 질식사 시켰을겁니다. 꼭 닮을 필요는 없고,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 얼굴형이 비슷하고 체중 정도만 맞춘다면 서진이라고 상상해 죽일 수 있었겠죠. 옷을 일부러 낡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서진이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동안은 한 번도 좋은 옷을 입어본 적이 없을테니까요."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눈에 보이는 공통점도 없었고, 겹치는 지역 없이 산발적으로 피해자가 나오는데다 시체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근언이 사헌의 시체가 나올 때 까지 추론을 하길 꺼려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훈연은 더해서 서진과 서춘오가 상하이 출신에 부모님이 광둥어를 썼으며, 서진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광둥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증언을 추가로 제시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광둥어를 쓸 줄 알았으니 이것도 공통점에 들어갔다. 경찰들이 노트북이나 서면에 글자들을 쓰는 동안 훈연이 화면을 껐다.


"이상이 선생님이 서춘오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이유입니다. 계속 거주지를 옮기고 있으니 한 번에 검거하기는 어렵겠지만, 지명수배를 내리고 장저우에서 머리카락을 사들이는 업자들을 조사해 본다면 행적을 추적할 수 있을겁니다. 피해자들을 서진이라고 생각했을테니 아마 생전에 했던대로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을 팔았을거에요. 흔하게 사고파는 종류는 아니니 금방 나올겁니다."


이만 마치죠.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에 관계자들이 하나 둘 씩 자리를 정리했다. 훈연이 프로젝터를 끄고 노트북을 정리하는 동안 앉아있던 근언이 일어섰다. 다가오는 몸에 살짝 시선을 올렸던 훈연이 전원이 꺼진 노트북을 닫았다.


"잘하네요."

"수십번은 했던 거니까요. 맡겨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사실이긴 했다. 훈연은 경찰이었고, 사건에 대한 브리핑은 언제나 하는거니까. 근언이 브리핑을 대신 해달라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못할까봐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 8할은 근언의 추론이었는데 공을 가로채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당연히 근언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떠넘기는 것이니 해주는게 고마운거라고 훈연을 설득했다.


근언의 의도를 모르는건 아니었다. 수사에 참여 해 실적을 남겨준다고는 했지만 근언은 혼자 생각하는 타입이다. 조언을 구하거나 남의 추론을 듣기보다는 탐문수사나 자료를 찾는 것 같은 일을 시키고는 했고, 실제로 얼마나 고생을 했던 그건 남들이 알아주기는 힘든 공적이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들 앞에서 직접 브리핑을 한다면 좀 더 역할이 부각된다. 훈연이 괜히 뺨을 긁었다.


"잡히면 사형일까요?"

"범인이라면 그렇겠죠."


이제는 거의 익숙하게 근언을 따라 걸으며 훈연이 침음을 냈다. 아무리 그럴듯 해도 추론은 추론이다. 시체에서 서춘오의 DNA가 나온 것도 아니었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끝까지 발뺌하면 잡아넣을 방법도 없었다. 서춘오가 죽인게 맞다면 자백할겁니다.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근언이 얘기했다. 제 여동생이 자꾸 나타난다고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할테니까요. 


자연스럽게 조수석을 열어주는 손에도 이젠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손이라고 문을 못여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움이 안되는건 아니다. 깁스를 한 채로 차 문을 급하게 열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진 경험이 있는 훈연으로서는 묵묵히 배려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안으로 긴 몸을 구겨넣으며 훈연이 밖으로 얼굴을 뺐다.


"죄송하지만 중간에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갈 곳이 있어서......"


근언의 눈썹이 휘었다. 병원입니까? 훈연의 고개가 저어진다. 병원은 좀 더 나중에 갈 예정이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인데, 간요라고.


간요가 장저우에서 살며 회사에 다닌다는건 알았지만,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는 여유가 없었다. 연락은 자주 주고받았으나 훈연은 장저우로 옮기자마자 사건에 집중해야했고, 간요도 신입사원이다보니 쉽게 시간이 나지 않는 탓이었다. 이젠 서춘오의 이웃들에게 탐문수사를 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 훈연에게 여유가 났다. 문자로 알리니 점심에는 시간이 난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것이다. 간요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생각보다 빌라와 가까웠고, 근처에 있는 까페로 장소를 정했다.


근언은 잠깐동안 말이 없었다. 훈연은 눈을 깜박였다가 위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내일 시간 있으세요? 불쑥 나온 질문에 근언의 옆에 느낌표가 떴다. 그럴의도가 아니었음에도 훈연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렸다. 바빠서 아직도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나갔다가 길을 잃을까봐 조금 그래서, 귀찮지 않으시면 같이 둘러보고 싶은데.


"...그러죠."


그리고는 조수석의 문이 닫혔다. 운전석으로 들어오는 근언을 의식하며 훈연이 고개를 창문쪽으로 돌렸다. 턱을 괴는 척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으니 시동이 걸렸고, 앤디에게 불이 들어왔다. 재밌는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인공지능은 웃음참기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훈연은 근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




오랜만에 보는 간요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일이 잘 맞나봐. 가볍게 웃는 것으로 답한 소꿉친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깁스부터 훑었다. 완치까지는 얼마나 걸린데? 훈연은 팔을 들어보이며 4개월쯤 남았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무리 안하고 가만히 놔뒀을 때의 이야기다. 당분간 총을 들거나 석고를 방패막이로 써야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훈연은 굳이 그런 사족까지는 달지 않았다.


간요도 훈연의 팔이 어떻게 된건지는 알고 있었다. 장저우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부득불 병문안을 와야겠다며 며칠을 있다 가기도 했다. 경찰인 아버지를 살인범에게 잃었던 간요는 훈연이 경찰이 됐을 때부터 걱정을 떨어뜨려놓지를 못했다. 훈연은 경찰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의실현에 목표를 두고 있으니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걱정을 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간훤도 같은 핏줄이라, 훈연의 애원을 무시하고 쪼르르 가서 고해다 바쳐버렸다. 장저우에 오게 됐다고 했었을 때도 가장 먼저 팔에 대한걸 물었었으니 할 말 다한 셈이었다.


"조수 노릇은 어때?"


주문했던 커피와 차가 나왔다. 프랜차이즈 로고가 아닌 새 그림이 그려져있는 머그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데일만치 뜨거운 물을 익숙하게 넘기며 훈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할 만 해. 간요가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가 곧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거뒀다. 놀랍게도, 훈연의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사실 신참 때 했던 허드렛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탐문수사나 브리핑은 언제나 하는 일이고, 가끔 허락없이 들어와 자는 몸을 흔들어 깨우는 근본없는 무례함을 빼면 근언도 횡포를 부리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물론 경찰학교를 졸업한 훈연의 기준이었다.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간요도 회사생활에 '할 만 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예전부터 하고싶어했던 일이었고, 상사도 고소까지 고려하지는 않을 수준에서 깐깐했다. 지갑에 네가 제복입고 있는 사진 넣고 다녔더니 희롱도 잘 안하더라. 웃으며 하는 말에 훈연이 응당 그래야할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 나왔던 날에 훈연이 바로 쥐어주며 내린 처방이다. 심지어는 간요네 집 현관에도 액자로 걸려있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더니 효과가 있는지 대학생활을 하면서 부터 잘만 갖고 다녔다. 간훤의 지갑에도 마찬가지였고, 간훤의 경우에는 남자친구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는 이야기에 훈연이 크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그 보근언이란 사람 말이야."


화제가 넘어갔다. 훈연은 뒷말을 기다리며 마저 커피를 마셨다. 어쨌든 요즘 훈연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근언이 다였으니 간요가 화제를 끌고 오고 싶을 만 하다. 간훤이 난리를 폈어. 그 유령 저택에 있던 사람이냐고 말이야.


"유령 저택?"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저택이라면 통시에 있는 곳을 말하는건가. 간요는 우스갯소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해봐. 커피를 치우며 몸을 기울이는 작태에 부담스럽다는듯 자세를 물린 간요가 눈을 굴렸다. 알잖아, 간훤이 그런 이야기 워낙 좋아하는거. 무섭다면서 호러영화를 보고 밤에 보초를 서게 부탁했던 어린 얼굴이 눈에 선해서 훈연이 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합하자면 이랬다. 간훤의 친구가-진짜 그런 친구가 있는지는 둘째치고-근언이 살았던 저택 근처에 간적이 있었는데, 커튼 너머로 눈이 푹 패인 해골 같은 사람이 밖을 내려다보고 있더라는 얘기다. 분명 귀신일거라고 소문이 나 그 저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말에 훈연이 눈살을 구겼다. 눈이 푹 패인 해골 치고는 잘생겼던데. 사심없이 한 말에 간요가 그러게 말이야,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보 선생님 본 적은 있어?"


대충 나온 말이겠거니 싶어 웃었는데 간요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뭘 그런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입원했을 때 만났지. 주말 하나를 거기서 보냈던거 기억 안나?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훈연의 눈이 당황으로 커졌다. 입원했을 때? 이번엔 간요가 왜그러냐는듯 고개를 기울인다.


"한 번 마주쳤었어. 자고 있을 때라 너는 기억이 안나나."

"그사람이 왔었다고? 병실에?"


이제는 간요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냥... 네가 도와줬으니까. 아니야? 본인에게 그렇게 들었다는 말에 훈연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훈연은 병실에서 근언을 본 적이 없었다. 왔다갔다는 소리도 한 번도 못들었다. 간요는 그제서야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아랫입술을 먹었다. 훈연이 안색을 살피는 간요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좀 놀라서 그래. 간요는 나중에 온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훈연에게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훈연의 동료에게 팔을 어떻게 다쳤는지 들으며 근언에 대한 것도 들었던 간요로서는 방문이 수상쩍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말대로 나중에 찾아간줄 알아서 얘기를 꺼낸것이었는데.


"그럼 몰래 갔던거야?"

"그게... 그 날 찾아왔다가 못보고 그냥 그만 둔 걸수도 있고.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라..."


말끝을 흐린 훈연의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예를 들면, 통시의 저택에서 다친 팔에 대한 호의나 동정 때문에 조수로 고른게 아니라고 했던 것. 아니면 훈연에게 멍청하다고 했던 것.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날 문을 나서기 전에 했던 말. 그리고 오늘 차에 타기 전에 있었던 일.


훈연은 머리를 털었다. 이런걸 추측으로 끼워맞춘다는건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간요는 보기드문 이상한 모습에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애써 웃어보인 훈연이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세상에, 너 그러다가 화상입어! 입술에 묻은 커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낸 훈연이 화제를 바꿨다. 부모님은 잘 지내셔?





*




훈연은 거의 20분째 집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초등학생도 이렇게는 안하겠군. 머리를 뒤섞으며 손에 들린 열쇠를 내려다본다. 받은지는 꽤 지났지만 한 번도 써본 적은 없는 열쇠였다. 대부분은 근언이 먼저 훈연을 찾아왔고, 불러내야 할 때면 아예 문자를 해서 주차장에서 만났다. 훈연은 다시 머리를 감쌌다. 몇 번 앉았다가 일어난다. 그러고도 여전히 열쇠가 손에 있었다.


간요와는 1시간 전에 헤어졌고, 조금 멍한상태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다. 근언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훈연은 길을 잃는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지도를 볼 줄 알았고, 휴대폰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나서 훈연은 자신의 집에 가는 대신 근언의 집까지 올라와 문앞을 지키는걸 택했다. 특정한 이유는, 아니, 사실 있었다. 물어봐야 했으니까. 왜 병원에 찾아왔었는지, 그래놓고 왜 여태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물어보는 것도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까페에서 훈연이 말했던 대로 보러 왔다가 자고있어서 그만 뒀을 수도 있고, 나중에 찾아오려 했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 못온 걸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다시 찾아오기 전에 훈연이 퇴원을 했던지. 간요는 훈연의 퇴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왔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들이라면 일부러 말을 꺼내는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찌됐든 저번에 갔었는데 자고 있더라, 라고 친근하게 말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훈연은 근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근언도 훈연에게 존댓말을 쓴다. 근언이 아무렇게나 훈연의 집에 처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회적 거리감이라는게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떠돌았다. 훈연은 감이 좋았다. 누군가는 운이라고 표현했지만, '감'이라는건 엉망으로 흩어진 조각들을 무의식적으로 긁어모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타고나는 것이니 운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훈연의 감은 실적으로 나타났고, 어느정도 본인에게 신뢰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감의 문제점은 본인도 왜 그렇게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감은 감이었다. 훈연은 굳게 결심하고 열쇠를 문고리에 꽂아넣었다. 꼭 맞물리는 쇳조각을 옆으로 돌리자 가벼운 소리가 났다. 새로 지은 빌라의 문은 소음 하나 없이 열렸다. 도둑이라도 된 기분으로-실제적으로 무단침입을 하는 것은 맞았지만-훈연이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탕.


상황이 두가지로 갈렸다.


첫번째로, 훈연의 몸이 쓰러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며 총성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몸을 부딪힌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나왔고, 곧 몸이 본능적으로 웅크려졌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소리가 이빨 안에 갇혀 웅웅댄다. 부딪힌 머리 때문인지 이상한 울림 소리가 난다.


두번째로, 근언이 총을 떨어뜨렸다. 흔들림 없이 총신을 쥐고있던 손이 하릴없이 무너졌고, 몇 초간의 영원같은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나서 몸이 움직였다. 넘어지다 싶이 일어나며 급하게 밖으로 나온 근언이 바닥에 엎어진 훈연의 몸 밑에 무릎을 넣어 부축했다. 티 때문에 반절만 가려져있는 팔이 덜덜 떨린다. 다급히 몸을 살폈지만 출혈은 없었다. 총탄은 복도의 벽에 박혀있다. 아무래도 피하려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 모양이었다.


억지로 냉정하게 돌아온 근언이 훈연의 팔 부터 살폈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심하게 부딪힌 것 같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나오는 비명에 근언이 당장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완치까지는 한참 남았다. 겨우 붙어가고 있었을 뼈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구급차를 부르는데 훈연이 팔을 잡았다.


"ㄱ,그정도 까지는, 젠장, 운전으로 괜찮은데요."


식은땀 범벅인채로 겨우 그렇게 말하고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근언이 억지로 붙잡아놓고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 다시 생각하니 안되겠는지 훈연도 신음만 내며 근언을 말리지 않았다. 고통 때문인지 숨을 몰아쉬며 훈연이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눈이 마주친다.


"미안합니다."


거의 즉각적으로 사과가 튀어나왔다. 훈연보다도 창백한 얼굴이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쳐다보던 훈연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총구에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평소라면 그게 다였을텐데, 문고리라도 잡아 균형을 유지해야할 팔이 깁스에 매여있었다. 한순간 중심을 잃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기설기 맞춰져있던 뼈들이 크게 진동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돌아오자 근언의 얼굴이 보였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얼굴에 번져있는 패닉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심했다. 훈연은 기억을 더듬어 기시감을 찾아냈다. 훈연이 처음 팔을 다쳤을 때와 비슷했다. 지금이 천 배 정도 더 창백하다는걸 뺀다면.


"...저한테 열쇠를 준 이유가 이거라면, 실패해서 곤란하시겠네요."


끔찍히 아픈 와중에도 농담이 나왔다. 근언은 여전히 창백히 질린 얼굴로 인상을 구겼다. 지금 상황에 할 말이냐는 듯한 표정에 훈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물어볼게 산더미였다. 물어보려고 했던 병문안에 관한 것은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총을 어디에 숨겨두고 있었는지, 어째서 자신을 쏜 것인지, 소매 아래에 드러나고 있는 흉터에 대한 것이나 아니면 단순히, 내일 시장을 찾으러 가자고 하면 허락할 것인지, 대강 그런 것들이 벌처럼 윙윙댔다.


적어도 지금은 질문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훈연이 멀쩡한 손을 들어 근언의 뺨에 대었다. 식은땀이 잔뜩 베어나오는 차가운 얼굴. 근언의 눈이 커진다.


"일단 벽에 박힌 총탄 부터 제거하죠. 구급대원들하고 오해가 커지기 전에."


근언은, 힘겹게 눈을 휘어 웃는 얼굴을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제발 근언훈연 파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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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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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만 출근 안하면 안될까... 오늘만..."

배게에 얼굴을 파묻은채 내는 좀비 같은 소리가 퍽 서글프다. 옷까지 전부 갖춰입고 커피마저 든 채인 샘이 난감하게 침대를 내려다봤다. 알람이 울린지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건 지금이라도 일어나지않으면 꼼짝없이 지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딘, 일어나야 돼.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채 죽어가는 동물의 소리를 낸 딘이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다. 어제까지 포함해 무려 사흘 동안 밤을 샜으니 이런식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예사는 아니었다. 어제는 심지어 샘이 임팔라를 운전해 집으로 왔다. 웬만하면 재깍재깍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그정도 수준이라면 세상이 또 한 번 멸망한다고 해도 잠을 자야한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샘부터가 아직 자고 있겠지. 

결국 커피를 내려놓은 샘이 딘을 거의 안듯이 일으켜 세웠다. 세상을 살면서 들어볼 수 있는 가장 험한 욕들이 불경처럼 흘러나왔다. 샘, 진짜 죽는게 아닐까. 내 말은, 반 백 번도 더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짜로 말이야. 죽을지도 몰라. 죽을거야. 혼미한 정신으로 쏟아지는 오열을 달래듯 커피가 들이밀어졌다. 포션이라도 되는양 사약 같은 물을 들이킨 딘이 그제서야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딘은 그러고도 거의 5분 동안을 침대 헤드에 널브러진 채 회사에 저주를 퍼부었다. 샘이 미리 치약을 짜놓은 칫솔을 내밀자 포기한 듯 칫솔을 입에 넣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비틀거리는 통에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옷을 챙겨든 샘이 딘의 뒤를 쫓았다. 널찍한 집은 깔끔한 편이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결함이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나 단검, 낱장으로 된 프린트들이 이것저곳에 흩뿌려져 있었고, 비뚤어진 러그의 밑에는 악마의 덫이 반쯤 빠져나와 있다. 발에 채이는 권총 때문에 샘이 비명도 못지르고 몸을 구겼다. 며칠 안들어왔다고 이런 상태라니, 하기사 샘이 집에 못들어온다는 것은 딘도 정리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얘기기는 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임무성공과는 별개로 허탕이었던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원래 이런 일이라지만, 위쪽에서 질책이라도 하면 딘이 어떻게 나올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한 일이 있으니 해고 당할 일은 없겠지만 또 시말서라도 쓰게 되면 정말 스트레스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딘의 마인드는 군인에 가깝기는 했지만 뭣도 모르면서 예산이나 계속 들먹이는 상사는 상사로 쳐주지도 않았다. 그놈의 돈. 때려치우고 카드사기나 치면서 돌아다니자는 농담이 수시로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충 씻고 나온 딘이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지며 새 옷을 받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속옷차림으로 셔츠를 꿰입는 딘을 뒤에 두고 핸드폰과 총을 자켓 주머니에 끼워넣은 샘이 짧은 시간 동안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러그를 위치에 맞추고 단검을 케이스-세네개의 단검과 네댓개의 총이 있는 서류가방-에 던져넣거나 옷가지들을 줍던 샘이 셔츠 아래 깔려있던 술 병을 집어들었다. 텅 빈 스카치 병을 얼마간 노려보던 샘이 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바지까지 입고 손목시계를 차던 딘과 눈이 마주친다.

"이걸 다 마셨어?"
"음..."

대답을 미루며 괜히 손목시계를 절걱대는걸 노려보자 딘이 대놓고 시선을 피했다. 그냥 기분상 좀 마시고 싶어서... 샘이 기가 막힌다는듯 숨을 뱉는다. 혼자 있을 때는 안마시기로 약속 했었잖아. 따지고 드는 음성에 재빠르게 자켓을 껴입은 딘이 차키를 채왔다. 먼저 가있을테니까 천천히 와. 뻔뻔하게 뺨에 입까지 맞춰가며 도망치는걸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샘이 병을 대충 쇼파에 던졌다. 분명히 다 치워버렸던 것 같은데 아직도 남은 술이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청소 겸 집안을 다시 털 계획을 세운 샘이 밖에서 들리는 클락션 소리에 신발을 구겨신었다. 




5.
리더기에 카드를 읽히자 엘레베이터가 움직인다. 위쪽으로는 평범한 회사가 있었지만, 뒷문 쪽에 있는 엘레베이터는 고장 표시가 붙어있는데다 버튼도 없었다. 지하로 계속 내려가는 상자 안에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딘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술 때문에 단단히 골이 난건지 샘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TOSE UP의 본부는 기본적으로 지하에 있다. 애초에 비밀기관인데다가 노출 되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지부가 지하에 지어졌는데, 사원들은 갇혀서 노동하는 기분이라며 이 환경을 극도로 싫어했다. 채광 좋은 고층 빌딩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염원은 어느부서나 컸지만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근무시간 중 햇빛을 보는 사람들은 현장요원들 뿐이었다. 어차피 현장요원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환기 시스템이라도 고장나면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국장인 바비는 빗발치는 청원에 대해 '고층빌딩이 좋으면 옥상 난간에 올려줄 수는 있다' 고 대답해 원망을 끊어낸 전적이 있었다. 바비의 발언 이후 대놓고 항의서를 올리는 일은 없어졌지만 무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는 농담은 여전히 자주 쓰였다. 불만이 많아봤자 지하에 있는 본부를 위로 끌어올릴 능력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그럭저럭 다니고 있다.

도착을 알리는 전자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여전히 휴대폰을 보고있는 샘과 기지개를 펴는 딘이 거대한 악마의 덫을 익숙하게 밟고 지나갔다. 로비에는 출근으로 바쁜 사원들이 계단과 엘레베이터로 엇갈려 뛰어가고 있다. 지하에 있다는 것과 곳곳에 악마 방지용 주문이나 오컬트 상징들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극히 평범한 회사 풍경이었다. 다만 여기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반절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심히 편한 옷차림에 더해서 눈 그림자를 달고 있다. 입고있는게 죄수복이었다면 사실 회사보다는 수용소에 가까울 것이기는 했다.

억지로 왔다는 티를 팍팍내며 걷던 딘이 리더기에 사원증을 읽혔다. 가상 스크린에 정보가 떴다가 꺼진다. 이동용 엘레베이터에 탄 후에는 사냥 부서가 있는 버튼이 눌려졌다. 이어서 탄 사람들도 각자 맞는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닫혔다. 함께 탄 사람들이 딘과 샘을 힐끔거린다. 아포칼립스 이후로는 언제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꼭 이걸 나눠야 할까? 그냥 출입용에 버튼만 달면 되잖아.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딘의 투덜거림에 샘이 어린애 같이 징징대지 말라고 일갈했다. 대놓고 아직 화나 있다고 광고하는 말투였다. 머슥해진 딘이 층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엘레베이터에서 내린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인사를 대충 받아준 딘이 공용 테이블에 올려진 간식들을 채며 데스크로 향했다. 현장요원의 데스크는 규정상 파트너의 것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샘도 언짢은 얼굴로 딘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브리핑이 있으니 바로 나갈 수도 없고, 쌓여있는 딘의 물건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한 샘이 하도 안써서 거의 삐걱대는 의자에 앉았다. 분위기가 불안해서인지 부서 사람들이 둘을 힐끔거렸다. 부팅 된 컴퓨터를 붙잡은 딘이 어제 읽다만 서류들을 가져오며 입으로 잼쿠키의 포장을 뜯었다. 꼰대들한테 브리핑 하고, 할당량 검색하고, 항의서 내고, 이메일 확인하고, 들어온 조사요청 해치우고... 할 거 더럽게 많군. 스케줄을 속으로 외우며 혀를 찬 딘이 서류를 던지고 의자를 밀어 샘의 옆에 붙었다. 브리핑 자료를 훑어보는 눈이 퍽이나 서늘하다.

"데이트 할래?"
"아니."

단호한 거절이다. 아랫 입술을 내밀고 턱을 당긴 딘이 다시 의자를 원위치했다.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겠군. 애교를 피운다고 화를 풀 사안도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술병 따위는 진작에 밖에 버렸을텐데 계속 밤샘이 이어지다 보니 그런걸 챙길 정신이 없었다. 사실 언제 마셨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틀 째에 마셨던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최대한 멀리내며 폴더를 열자 끔찍하게 죽은 시체 사진들이 모니터를 빼곡하게 채운다. 감흥없이 잼쿠키를 먹으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누군가가 데스크 벽을 두드렸다.

"좋은 아침-"

거스가 해맑게 웃는 얼굴을 한 채 책 한 권을 내밀며 서있다. 쿠키를 입에 털어넣고 책을 받아든 딘이 우물대느라 바쁜 입 대신 손으로 인사를 돌렸다. 저번에 부탁했던 지역자료를 구해온 모양이었다. 회사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 백업요원은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현장 요원들에게 자주 부탁을 띄우고는 했다. 약간 해진 표지를 넘겨 대충 내용을 훑던 딘이 잼쿠키가 넘어간 입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마터면 플로리다까지 갔다와야할 판이었는데. 어차피 가는김에 구해온거라고 특유의 무해한 웃음을 지은 거스가 다른 곳보다 온도가 10도는 낮은 듯한 샘의 데스크를 보고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겼다. 싸웠어? 직구로 던져지는 질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어깨를 튀었다.

"아니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말끝을 흐린 딘이 책의 페이지를 성의없이 넘겼다. 샘은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둘을 번갈아서 바라보던 거스가 눈을 가늘게 했다. 보통 같이 출근하는 날에는 샘이 딘의 성질을 막아주니 부서가 훨씬 평화로운데 오늘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래서야 퇴근할 때 쯤이면 온 부서 사람들이 어깨에 담이 걸릴 지경이다. 헛기침을 한 거스가 아침은 먹었냐고 새로운 대화주제를 꺼냈다. 딘이 잼쿠키를 들어보인다. 샘은? 역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먹었다는 답이 들려왔다. 딘이 눈썹을 한쪽을 휘어올렸다.

"대충 먹었다고? 뭘 먹었는데?"
"스카치가 아닌거."

부서 사람들이 단체로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또 술 때문이구만. 거스도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주변 반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샘은 자료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 딘이 입을 여닫다가 머리를 헤집고는 의자를 아예 샘 쪽으로 돌렸다. 꼭 일하는데 이래야겠냐? 샘이 눈을 감고 입안을 씹더니 딘의 쪽으로 돌아 앉았다. 그럼 꼭 술을 마셨어야 했어? 미간을 눌러잡은 거스가 부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들으면 술 창고를 털어온줄 알겠다? 겨우 스카치 한 병이거든?"
"스카치 한 병은 술 아니야? 안마시기로 맹세까지 했잖아!"
"그래! 잘 지키고 있었잖아! 한시간에 한 병씩 비우는 것도 아니고 거의 한 달만에 딱 한 병 마신건데 그것도 못봐주냐!"
"마신건 마신거지! 그거 의존성 알콜중독이라고! 한 두번도 아니고 한 달 전에도 다시는 안마시겠다고 해놓고는 이러는데 화 안나게 생겼어?!"

죄송합니다. 나중에 돌아올 때 간식거리라도 사올게요.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하는 거스에게 괜찮다고 웃어보이는 얼굴들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딘과 샘은 TOES UP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들이었고, 그만큼 사냥 부서를 비롯해 온갖 부서의 크나큰 방패막이였지만, 비등하게 악명도 높았다. 주는 영향력이 큰 만큼 이런식으로 둘이 싸우기 시작하면 말릴 사람도 없었다. 꼼짝없이 사랑싸움 따위를 들어야하는 사냥 부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긴 했지만 기분파인 딘이 저기압으로 돌변하면 다른 부서 사람들도 한 번 들을 욕을 두 배로 먹고는 했다. 그와중에도 열 명이 할 분량을 둘이서 해치우는데다 도와달라고 비는 건 힘 닿는데까지 모두 해결해주니 욕을 하기도 애매한 것이다. 가끔 왈왈대며 싸우는걸 듣는게 대가라면 사실 밑지는 장사기도 하니 그러려니 넘어가지만, 듣기 괴로운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특히 딘의 알콜 중독 문제 같은 경우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열리는 이벤트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포칼립스 이후 샘이 딘에게 금주를 권했을 때, 딘을 포함해 누구도 그것이 성공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딘은 근무시간에도 데스크 아래에 버번병을 다섯개는 쟁여놓고 사는 심각한 알콜 중독자였고, 본인의 개선 의지마저 희박했다. 웬만하면 취하는 일도 없었고 물이 싱거워서 마시는 수준이었지만 건강에 안좋은건 물론이고 근무태도 평가에서 매번 마이너스를 찍었기 때문에 딘도 헬스장에 가는 사람마냥 한 번 해볼까, 싶은 태도로 샘과 약속을 했다. 이런식으로 끈질기게 싸워댈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을 것이다.

"나도 한 번에 끊는게 힘들다는거 알겠는데-"
"아는 놈이 이렇게 빡빡하게 구냐!"
"노력도 안하잖아!"
"한 달이나 안마셨잖아!"
"기록이 무슨 훈장이야?! 잘못해놓고 뭘 그렇게 당당하게-"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둘의 고개가 동시에 앞으로 숙여졌다. 강타당한 뒤통수를 부여잡고 책상에 엎어져 죽는 소리를 내는 둘의 뒤에서 바비가 욕을 뱉었다. 하여간 지랄맞은 것들. 회사가 너희집 안방이냐? 거스가 허리를 깍듯이 숙인다. 오셨습니까 국장님.

"이것들 좀 에덴 동산에 버리고 와라. 전직 구세주라는 것들이 이따위로 행동하니까 천사고 악마고 우릴 살붙은 뼈다귀로 밖에 안보는거 아니냐."
"아 무슨 축지라도 쓰세요? 오면 온다고 티 좀 내주면 안됩니까?"
"나불나불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만. 브리핑 준비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하라고 한게 언제인데 쳐싸우고 앉아있어? 네 눈에는 내가 갓 입사한 인턴 나부랭이로 보이냐? 다 늙은 국장이 오라고 부르면 재깍재깍 와야할거 아니야, 재깍재깍."

서류철로 딘의 머리를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비에게 성질이 꺾여버린 샘이 공손히 브리핑 자료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쪽은 제 때 사과를 하니 편하다. 자료를 받아든 바비가 마지막으로 딘을 한 대 더 때리고는 데스크에 늘어놔진 잼쿠키를 채와 뜯었다. 니들 싸운다고 이번 브리핑 망치면 구세주고 뭐고 얄짤없이 잘릴 줄 알아. 세금 도둑짓도 얌전히 해야 봐주지. 자료를 넘기며 투덜대듯 협박하는 바비의 앞에서 샘과 딘이 얌전한 개처럼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 국장이 악마에게 살해당한 이후 거의 반억지로 맡은 직위지만 바비는 투덜대면서도 전 국장보다 200배는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전 국장과는 다르게 30년이 넘게 직접 활동 했고, 샘과 딘을 도와 멸망까지 막아냈던 사람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정뱅이 낚시꾼 같은 차림으로 설렁설렁 부서를 돌아다녀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바비가 국장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사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은 TOES UP에서 깍듯이 인사를 받는 유일한 사람이다. 당연히 일일이 브리핑에 대한걸 검토하러 오지는 않았지만 이번 브리핑은 특별하기가 지나쳐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료를 끝까지 본 바비가 샘의 데스크에 종이뭉치를 던졌다.

"좀 부풀려서 말해. 피해자 수 뒤에 0 하나쯤 더 붙이고. 지옥의 왕이랑도 계약서를 쓰는데 그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딘과 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윗선들에게 브리핑을 자주하는 팀은 따로 있었지만, 이번건은 둘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건이었다.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이놈아. 마지막으로 딘을 한 번 더 내려친 바비가 그럼 수고하라며 부서를 나선다. 전 국장이었다면 죄다 일어나서 인사했어야겠지만 바비는 유독 그런걸 싫어하는 통에 목소리만 나왔다. 아직 앞에 서있던 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싸우는거 들으니 딘이 잘못했고, 샘도 고집스럽고, 내가 보기엔 둘 다 아주아주 바보 같았어. 그럼 난 플로리다로 돌아갈테니까 브리핑 잘 해! 나중에 보자-"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거스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던 샘과 딘이 닫히는 자동문에 그냥 서로를 마주봤다. 30초. Bitch. Jerk. 한마디씩 뱉고 나서 다시 등을 돌린 두명이 알아서 할 일을 시작한다. 한시름 놓은 부서 사람들도 각자 업무로 돌아갔다. 






6.
"그래서 그쪽을 중점적으로 조사해서..."
"잠깐, 그러니까 그 '용'들이, 연옥을 열려고 한다는거지. 고대에 아서왕한테 죽임 당했던?"
"...조사에 의하면-"
"걔들이 연옥을 열어서 뭘 어쩔 계획인데?"
"바베큐나 구워 먹겠죠, 물론."

샘이 딘의 발을 지긋이 밟았다. 빈정거림을 들은 소위 말하는 '윗선'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쉰 샘이 PPT를 넘겼다. 화면에 뜨는 끔찍한 시체의 사진에 윗선들이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이런 것 좀 빼면 안되겠나? 올 때마다 이런걸 봐야하니 원. 딘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오는걸 곁눈질한 샘이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 사과를 입에 담았다. 절차고 뭐고 죽은 사람들 사진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그따위라니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헛기침을 한 샘이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들어 괴물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몇 괴물들이 자신들의 알파에 대해 언급하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일삼고 있어요. 저희는 그들이 연옥에서 꺼내려는 것이, 그러니까 탈출 시키려는 것이 그 어머니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알파?"
"모든 괴물들에게는 시초가 있죠. 뱀파이어든 웨어울프든 용이든 스킨워커든, 처음 생겨난 시초. 별로 동족의식이 없는 괴물들도 그런 알파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수세기 동안 동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어머니에 대한 일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한걸로 추측됩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뭐 때문에 우리가 돈을 대준다고 생각해? 가서 죽이고 오라고. 모가지라도 댕겅 잘라서 로비에 장식해놓으면 되는 일 아니야?"

샘이 다시 한 번 딘의 발을 밟았다.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문 딘이 마른 세수를 했고, 샘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첫번째로, 괴물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문제가 됩니다. 의지로 거부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알파가 원한다면 자살무장이나 엇비슷한 것도 무릎 쓸 수 있구요. 평범하게 사람만 죽이려는 괴물들도 상대하기 힘든데 그런식으로 나오면 저희 요원들도 막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려고 하고 있어요. 스킨워커의 경우 개로 위장해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저를 키우는 사람들을 물어 변하게 하는 수법으로 이미 집계된 것만 세자리에 가까운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이런식으로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기관이 설립된 이후로도 처음 겪는 일이라 애를 먹고 있고, 직접적인 피해자를 줄이는게 우선이니 알파들에 대한 조사도 느려지고 있죠. 자길 보호할 군대도 만들고, 동시에 저희 시선까지 돌리고 있는겁니다."

윗선들의 얼굴이 드디어 심각해졌다. 이어서 알파에게는 평범한 사냥수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과 사실상 죽이는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 나오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확실한거냐는 물음에 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선 알파를 잡아야죠. 저희가 요청드리는건 천사의 그릇에 대한 지원의 확대와 크라울리와의 계약에 대한 허가입니다."
"크라울리? 콜트를 넘겨줬다는 그 교차로의 악마?"
"이제는 지옥의 왕이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겠네요. 네, 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쁜 점은 이 '크라울리'가 아주 다른 차원의 개자식이라는 것이고, 더 나쁜 점은, 새로운 지옥의 왕이 비즈니스맨이라는 겁니다."

지옥의 왕이라는 말에 파리하게 질렸던 얼굴들이 의문으로 일그러졌다. 샘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도 없던 의자에 갑자기 인영이 생긴다. 윗선들이 기겁해서 의자를 물리자 크라울리가 옷을 정리하며 일어나 아주 밝은 웃음을 지었다. Hello boys.

"크라울리입니다. 지옥의 왕이시죠."

딘이 소개하며 칼을 들어 금방이라도 크라울리를 찌를듯 등에 가져다댔다. 걱정마세요, 악마 전용 칼이니까요. 허튼짓을 하면 바로 죽여버릴 수 있습니다. 놀이기구 안내를 하듯 가볍게 나오는 말에 임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칼이 등에 닿든말든 셰익스피어 연극마냥 팔을 벌리고 허리를 숙인 크라울리가 자리를 마련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꺼냈다.

"사전 공지없는 등장에 대해서 사과의 말씀을 먼저 드리죠. 미리 알리면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걱정과는 다르게, 말을 안듣거나 무례하다고 해서 터뜨리지는 않을테니 너무 쫄지 마세요. 어차피 한 20년 후에는 아주 자주 보게될텐데 좀 일찍 본다고 탈 나지는 않을겁니다."

크라울리가 눈을 깜박여 검은눈을 보이자 윗선들의 얼굴이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샘은 자리에 앉아 천사의 칼을 던졌다 받았고, 크라울리가 손을 튕겨 회의실의 문을 잠갔다. 그럼 신사분들, 브리핑을 이어볼까요. 


예전에 썼는데 포스타입에는 안올려서.... 지금이라도 올림. 더 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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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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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침 먹을거야?"

샘이 임팔라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뒷자리 시트를 전부 차지하고 누운 헤일은 하품을 했고, 주유구 옆에 서있던 마일리는 딘이 던져주는 햄을 공중으로 뛰어 받아먹었다. 기본적으로 데몬은 음식을 먹지 않지만 마일리는 햄 종류라면 맛을 보기 위해 가끔 받아먹고는 했다. 칼로리바를 대충 뜯어먹은 딘이 오일건을 뽑아내고 운전석에 탔다. 마일리가 운전석 시트 아래로 들어와 딘의 옆으로 고개를 뺀다. 

제리코까지는 1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샘은 아직도 신용카드 사기를 치냐며 딘을 나무랐고 마일리가 대신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사냥꾼이라는게 벌이가 좋은 직업은 아니잖아. 헤일이 뒷좌석에서 코웃음을 쳤다.

"카세트 테이프부터 업데이트 하지 그래."
"카세트 테이프가 어디가 어때서?"
"메탈리카에 모터 헤드랑 블랙 새비스? 쓰레기 록들이잖아."
"말 조심해, 새미. 그리고 규칙 알잖아. 선곡은 운전수가 하고-"
"-조수는 입 닥치고 있는다."

샘과 헤일이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기는 동안 딘과 마일리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시동을 걸자 AC/DC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새미라고 부르지마. 어린애 같잖아. 투덜대는 목소리에 딘이 귀 옆에 손을 붙이고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고? 음악소리가 커서 잘 안들려! 샘이 됐다는듯 반대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마일리가 키득댔다. 2년이나 지났는데 도통 바뀐게 없다. 헤일도 같은 생각인지 눈을 감고 체념한 듯이 시트에 턱을 얹었다. 차를 꽉 채우는 음량을 약간 낮춘 딘이 웃는채로 샘을 힐끔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샘이 입을 비뚤게 틀었다. 행복하게. 마일리가 언짢은 얼굴로 시트를 넘어가 헤일을 습격했다. 등에 올라타 머리를 발로 꾹꾹 누르자 헤일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뒤로 돌렸다. 앞발로 헤일의 주둥이를 막은 마일리가 물리기전에 키득대며 시트 아래로 뛰어내렸다. 딘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우회전을 했다.

"자세히 말해줄만한건 없어? 제리였나? 여자친구 얘기 좀 해보던지."
"제시카야. 할 얘기 없어."
"딱딱하게 굴지 말고. 2년만인데."

시트에 얼굴을 얹은 마일리가 헤일의 얼굴을 장난치듯 크게 핥는다. 벌써 두번째로 한숨을 쉰 헤일이 느리게 마일리의 얼굴도 핥았다. 목적 달성 후 다시 앞좌석으로 넘어온 마일리가 시트에 기댄 딘의 등 뒤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머리만 샘 쪽으로 쏙 빼냈다. 어서 말하라는듯 저를 빤히 쳐다보는 마일리를 노려보던 샘이 다시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시카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 없어. 같은 과고 조별 과제하면서 만났었어. 헤일을 신경 쓰지 않는척 해줬었고."
"맞춰볼게. 똑똑하고, 아량 넓고, 이해심이 많은데다 엄마처럼 챙겨줬지?"
"물어보는 저의가 뭐야?"
"한 대 치겠다? 동생 애인이잖아! 소개 받아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 그리고 데몬이 보더 콜리였으니까.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딘의 말투도 얼굴도 별다른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생을 놀리는 즐거움이 담겨있는 정도다. 샘은 그게 화가 났고, 그 사실에 화가 난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화가 났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마일리가 딘을 쿡 찔렀다. 힐끔 샘을 쳐다본 딘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신호등이 임팔라를 멈춰세웠다.

"나도 2년 동안 잘 지냈어. 궁금하진 않겠지만."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에도 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왜저렇게 민감하게 구는거야? 어린애처럼 입이 나오려는걸 억누른 딘이 정면을 주시했다. 엄마처럼 굴어서? 혹시 '그 일'때문에 물어보는거라고 생각하는거라면-

딘은 고개를 털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대신해서 마일리가 딘의 등으로 더 파고들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신호등이 바뀜에 따라 딘이 엑셀을 밟았다.

"아버지는 금방 찾을 수 있을거야."

샘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헤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였고, 차 안은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딘이 말을 덧붙였다. 행복한 삶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임팔라가 약간 거칠게 속도를 올렸다.







3.
"저번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죠?"

보안관은 인상을 구기며 둘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옆에 서있는 헤일에게 향하는 눈을 가로막듯이 딘이 뱃지를 들어보였다. FBI입니다. 보안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요원을 하기에는 젊어보이시는데요. 여전히 헤일을 힐끔거리는 보안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딘이 현장을 둘러보며 질문을 반복했다.

"네, 1마일쯤 위에서요."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었나요?"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서로 모를 수가 없죠."

그의 데몬인 페렛이 옷 안에서 쑥 얼굴을 내민다. 보안관은 마일리에게 시선을 던진 후에는 경계심을 약간 푼 것 처럼 보였다. 군견을 데몬으로 가지면 이런점에서 혜택이 있었다. 딘이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동안 헤일과 마일리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았다. 모든 유령사건이 그렇듯이 피해자의 체취만 약간 감돌 뿐이다. 냄새를 쫓아서 다리 끝 쪽으로 가던 헤일을 마일리가 급하게 물었다. 뭐냐는듯 짜증스럽게 절 쳐다보는 노란 눈을 마일리가 경고하듯 노려봤다. 눈을 돌리자 꽤나 멀리 떨어져버린 제 인간들이 보였다. 드러냈던 이를 닫은 헤일이 조사를 포기하고 마일리를 따라 샘과 딘에게 돌아갔다. 뭔가 건진게 있냐는듯한 시선에 고개를 젓자 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같은 경찰에게 기대는 말아야겠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발 신경 좀 쓸 수 없어?"

경찰들이 멀어지자마자 마일리가 이를 문채로 목소리를 낮췄다. 헤일은 답이 없었고 샘은 눈썹을 휘어올린채 마일리를 쳐다봤다. 대답은 딘에게서 나왔다. 또 허용치 이상으로 멀어졌었어. 샘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진짜 FBI 요원들에게 태연하게 인사한 딘이 임팔라에 타 시동을 걸었다. 클래식 카가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동안 마일리가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그런식으로 해서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던거야?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데몬도 없었을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대학 생활하면서는 냄새 따위에 집중할 일이 없었다고!"
"오 그래? 그것 참 새로운 소식이네! 참 편하고 재밌었겠군!"

데몬들이 뒷좌석에서 싸우는 동안 샘과 딘은 말없이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몬과의 거리. 딘과 마일리는 아직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직 마일리가 족제비니 사나운 핏불이니 하는 것들로 변하기를 좋아했을 시절에, 둘은 혼자 남아서 블럭을 갖고 노는 샘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정말 좋지 않은 일.

작은 동물로 변해서 옷 속에 숨어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헤일은 보이지 않았고, 그건 딘과 마일리를 상당히 불안하게 했다. 헤일은 어디있어? 마침내 근처에 숨어있을 헤일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물었을 때, 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버스 정류장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가방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는데 그걸 가지러 갔다는 이야기였다.

샘도 물론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갑게 질린 딘의 얼굴과 털이 바짝 선 여우의 눈. 샘은 딘과 마일리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순진하게 깜박여지는 눈을 보고 마일리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당장 헤일 불러들여. 당장! 불호령에 놀란 샘은 블럭을 떨어뜨렸고, 딘도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보기 전에 당장 불러들이라고!

샘은 몰랐다. 존과 아퀼라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존이나 딘은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딘과 마일리는 항상 붙어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둘의 사이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샘도 헤일이 좋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옆에서 떨어뜨려놓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냥 그런거라고. 보통 사람들은 데몬과 떨어지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몰랐다. 샘은 그냥 제 느린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것보다는 새로 변한 헤일이 혼자 갔다오는게 편할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헤일이 아무리 멀어져도 샘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아버지한테 들키면 안돼. 딘은 거의 아플 정도로 샘의 어깨를 쥐고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고, 샘이 무서워할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뒤늦게 돌아온 헤일은 샘보다도 호되게 혼이 났다. 절대로 샘을 놔두고 혼자 나다니지마! 숫사자로 변한 마일리가 갈기를 곤두세우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고, 헤일은 영문도 모르고 쥐로 변해 샘에게로 숨어들었다. 이후로 헤일이 일정 거리 이상으로 벗어날때마다 딘과 마일리가 그것을 막았다. 데몬은 동물과는 달랐다. 셰퍼드 무리에 마일리가 껴있다고 해도 모두가 마일리가 데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 떨어져다니는 데몬을 말할 것도 없었다. 분리 훈련을 한 데몬들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어렸을 때는 형태를 바꿀 수 있으니 괜찮았지만 샘이 14살 무렵에 헤일이 늑대로 정착하고 나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늑대 데몬을 한 번 보고 잊어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딘은 일정거리 이상으로 데몬이 벗어나면 끈이 당겨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아프고, 모든 신경이 데몬에게 쏠려 당장 거리를 좁히지 않고는 못배긴다고. 샘은 혹시 헤일과 저의 유대가 약해서 그런건지 불안했지만 사실을 확인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샘과 헤일도 웬만해서는 정해진 거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처럼 헤일이 뭔가에 집중할 때면 잊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딘과 마일리는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적이게 굴었다. 

"...미안."

거의 으르렁대던 데몬들의 소리가 멈췄다. 마을쪽으로 차를 몰던 딘이 샘을 힐끔거렸다. 뭐가. 간단한 대답에 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여러가지. 얼버무렸지만 딘은 샘이 무엇을 사과하는지 알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딘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런걸로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거 알지?"

샘은 답이 없었다. 마일리는 귀를 뒤로 눕혔다가 앞좌석으로 건너와 시트 아래에 몸을 파묻었고, 헤일은 세웠던 다리를 굽히고 뒷좌석에 엎드렸다. 딘과 마일리가 화를 내는 것은 걱정 때문이다. 샘과 헤일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둘을 피했다. 늑대인 것 까지는 그런데로 괜찮았다. 드물기는 해도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데몬과 훈련없이 분리를 한다는건,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었다. 딘은 그런것에 샘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제 동생이 얼마나 평범해지고 싶어하는지를 아는 이상 더더욱.

차가 마을로 들어왔다. 적당히 주차할 곳을 찾아 임팔라를 멈춰세운 딘이 문을 열자 마일리가 먼저 뛰쳐나갔다. 딘이 내리고, 샘이 내리고, 헤일이 열린 창문으로 몸을 빼내 마지막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딘이 입을 비뚤게 틀었다. 그럼 에이미라는 사람부터 한 번 찾아볼까. 마일리가 호기롭게 한 번 짖고는 앞장섰다.







4.
[허위 신고라니, 새미. 불법이라는건 알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샘이 웃으며 헤일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칭찬 고마워. 얘기 좀 하자는 딘의 말을 시작으로 그간 알아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헤일 때문에 기자라는걸 믿도록 설득하는데 조금 걸렸지만 어쨌든 콘스탄스의 남편은 부정을 저질렀고, 상대하는게 백의의 여인인 것은 확실했다. 의문인건 왜 존이 시체를 진작에 태워버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라면 존도 시체가 옛 집의 뒷뜰에 묻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다. 이유야 어찌됐건 샘은 그 쪽으로 임팔라를 몰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도 그곳에 있을거라는 말에 번번히 말이 끊겼던 딘이 역정을 냈다. 아까부터 말하려던거잖아! 아버지는 제리코를 떠나셨어. 조수석에서 털을 고르고 있던 헤일이 인상을 구기며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아버지의 일기를 갖고 있거든.]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으시잖아."
[이번에는 그러셨는걸.]

헤일과 샘이 눈빛을 주고 받았다. 뭐라고 써있는데? 어디로 오라고 지시하실 때랑 똑같은 힌트라는 말에 샘이 골치가 아프다는듯 입 안을 씹었다. 좌표. 어디냐는 질문에 딘이 아직 모른다는 답을 냈다. 존이 아직까지 제리코에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했던게 멍청했다. 헤일이 대신하듯이 한숨을 쉬었다. 고생길이군. 동감한다는듯 입꼬리를 내렸던 샘이 휴대폰에서 들리는 잡음에 얼굴을 구겼다. 딘. 딘? 휴대폰을 툭툭 치며 이름을 반복하는 동안 헤일이 갑자기 털을 세우며 핸들에 앞발을 뻗었다. 동시에 뭔가를 친 임팔라가 도로에 급정거했다. 눈을 크게 뜬채 숨을 몰아쉬던 샘이 백미러에 잡히는 여자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넣었다. 데몬이 없다. Shit.

"집에 데려가 주세요."

헤일이 위협하듯 목울대를 울렸다. 상대하는게 데몬이거나 동물이었다면 즉각 효력이 있을 법한 무시무시한 소리였지만, 안타깝게도 늑대의 울음은 유령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집에 데려가 주세요. 갸냘프다기 보다는 화가 난 듯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마른침을 삼킨 샘이 부정의 답을 냈다.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문의 잠금장치가 잠겼다. 멋대로 눌러지는 엑셀과 돌아가는 핸들에 샘이 입안쪽을 씹었다. 하필 딘도 없을 때.

여자가 손을 젓자 덤벼들던 헤일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며 높은 소리를 냈다. 헤일! 덩치 큰 늑대가 꼼짝없이 늘어지는걸 급하게 감싸안는 새에 임팔라가 낡은 주택 앞에 멈춰섰다. 확인하지 않아도 콘스탄스의-여자의 집인 것 같았다. 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슬픈 목소리에 이를 악문 샘이 여자를 노려봤다. 집에 돌아가기 두려운가보지?

여자가 순식간에 샘의 위로 자리를 옮겼다. 손이 닿은 부분부터 얼어붙어가는 것 같았다. 샘이 아직 늘어져있는 헤일을 계속해서 곁눈질 했다. 잠깐 기절한 것 뿐인 것 같았고, 데몬은 회복력이 빠르니 금방 일어날 것이다. 시선이 돌아가는게 마음에 안드는지 여자가 손에 힘을 넣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속삭이는 듯이 낮은 목소리다. 너무 추워요. 트랙터가 몸을 짓누르는 것 처럼 움직일 수 조차 없다. 생경한 고통이 흉곽을 뚫듯이 퍼졌다. 

"날 죽일 수는 없을 걸...! 난 부정을 저지를 생각 없어,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 여자가 불쌍하다는 듯이 입을 비틀어 웃었다. 뺨에 닿는 손가락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Oh Deer, 하지만 그런 기분이잖아. 안그래?"

뱀처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샘이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힘을 줬다. 시야 구석에서 헤일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소용 없다는걸 알면서도 발톱을 세워 허공을 휘두르자 전파가 불안정한 TV 화면처럼 여자의 모습이 지직거렸다. 화를 돋군듯 이를 드러낸 여자가 더욱 무게를 싣는다. 샘이 터뜨리듯 비명을 내지르기 무섭게 총소리가 들렸다. 두 세번의 총성에 여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다시 총성. 마일리가 사납게 짖는 소리가 들린다. 여유를 찾자마자 허리를 일으킨 샘이 운전대를 잡았다. 원한다면 집에 데려다 주지. 딘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채 샘이 엑셀을 밟았다.







5.
"좌표에 쓰여있는건 여기야. 콜로라도의 블랙워터 릿지."

Sounds chaming.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시트를 도는 셰퍼드의 목을 눌러 제지시킨 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마나 멀어?

백의의 여인을 멋지게 처리한 뒤의 임팔라는 공기가 덥혀져 있었다. 샘도 딘도 분명 허리께니 등이니 하는 곳에 멍이 들어서 제대로 앉아있기도 아픈 상태였고, 운전석 쪽의 유리는 깨져있었지만,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어찌되도 상관 없는 것 같았다. 호흡을 맞춰본지 2년만이었는데도 나름 훌륭하게 잘 해냈고, 객관적으로도 멋들어진 마무리였다. 존의 다이어리에서 다음 목적지도 찾았고. 마일리도 신나 있었지만 헤일도 훌쩍 뒷좌석으로 건너간 마일리의 장난을 기꺼이 받아줬다. 덩치가 커서 겨우 차의 뒷좌석에서는 크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늘 새벽과 비교하자면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차 흔들리니까 적당히 해 마일리. 꾸중 같지도 않은 딘의 나무람에 거의 키득대듯이 웃은 샘이 아까의 질문에 답했다. 600마일 정도 걸려.

"괜찮네. 내일 아침 쯤에는 도착할거야."

불쑥 시트 위로 얼굴을 내밀며 말한 마일리가 딘의 무릎으로 뛰어내려왔다. 야, 야! 순간적으로 가려진 시야 때문에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좀 얌전히 있으라는 호통에 마일리가 자리가 좁아서 그런거라고 노래하듯 말했다. 한동안 둘이서만 다녔으니 조수석은 항상 마일리의 차지였는데 이젠 존이랑 다닐 때보다도 공간이 없다. 딘이 픽 웃어버릴 동안 샘이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저, 딘. 헤일이 뒷좌석에서 한쪽귀를 옆으로 돌렸다. 뭐냐는듯 올라가는 눈썹에 샘이 망설이는 목소리를 냈다. 난... 마일리가 핸들을 쥔 딘의 양 팔 사이로 훅 고개를 내밀었다.

"돌아갈거라고 하는건 아니지?"
"면접이 10시간 후에 있어. 가야해."

헤일이 고개를 들고 샘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상기 되어있던 공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얼굴을 구긴채인 딘이 샘을 힐끔거렸다. 헤일이 곧 시선을 거두고 평소처럼 엎드렸고,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일리가 먼저 팩 고개를 돌리고 딘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았다. 딘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핸들을 꺾어 좌회전을 했다. 마음대로 해. 데려다줄테니까.

"딘, 이해 해 줘야 해."
"이해라는게 언제부터 그렇게 강요적인 단어였냐?"

빈정대는 어투에 샘이 입 안쪽을 씹었다. 말이 다시 반복 되지는 않았다. 딘은 딱딱한 표정으로 차를 몰았고,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샘은 눈이 감기질 않았다. 헤일은 평소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제리코에서 스탠포드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샘은 시트에 기대 억지로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냥을 다니던 시절에는 매일 있었던 일이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유령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화상을 입은 듯 욱신댄다. 침묵의 밑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기어올라온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잖아. 안그래?

임팔라가 약간 거칠게 멈춰섰다. 눈을 감고 있던 헤일이 멎은 엔진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고, 샘도 내려놨던 짐을 집어들었다. 마일리는 여전히 등을 돌린채였다. 아버지 찾으면 연락 할거지?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딘이 약간 쓰게 웃었다. 차에서 완전히 내린 헤일이 열린 창문에 앞발을 올렸다. 나중에 도우러 갈게. 꼬리가 축 쳐진 마일리가 꾸물대며 몸을 돌렸다. 그래. 늘어진 귀가 퍽 미련을 남게 했다. 한참이나 마일리와 마주보고 있던 헤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망할 유령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거면, 넌 천하의 답 없는 멍청이야."

쓰인 단어치고는 차분하기만한 목소리에 샘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임팔라는 샘의 등이 사라지자마자 시동을 걸어 길을 빠져나갔다. 그런거 아니야. 안믿는다는듯 콧방귀를 뀐 헤일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열기나 하라는듯한 고갯짓에 샘이 더플백을 어깨에 매고 열쇠를 꺼낸다. 잠금쇠가 풀리는 동안 헤일이 눈을 가늘게 하고 문 밑으로 코를 디밀었다. 왜 그래? 몇 번 코를 킁킁거리던 헤일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떨떠름한 얼굴에 샘이 인상을 구겼다. 뭐 잘못 됐어? 답답하다는듯 재촉하는 소리에 헤일이 약간 멍한 목소리를 냈다. 믹의 냄새가...

"당장 문 열어."

낮은 목소리에 샘이 즉각적으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빠르게 풀린 잠금쇠에 문고리를 돌려 열자 헤일이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제시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간 집은 기괴한 정적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 제스? 불안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걸음을 뻗던 샘이 탁자에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쿠키 위에 얹어져있는 익숙한 필체. 보고 싶었어! 사랑해!

잉크가 눌러붙은 메모를 쥔 샘이 헤일이 사라진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끝에서부터 빠르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기시감. 속도를 올리는 박동이 채찍질하듯 샘의 걸음을 독촉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잡아 끄는듯 쉽사리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걸음씩 위태롭게 뻗던 걸음이 침실에 닿았다. 멍하니 위쪽을 쳐다보고 있는 헤일의 모습이 보였다. 

샘. 허망한 목소리였다. 하얀 시트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올려다본 천장에는 제시카가 있었다. 배가 갈린 채 샘을 내려다보는, 놀란 그대로 굳어버린 시체가.

"안돼..."

그건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다. 안돼! 비명을 신호탄으로 제시카의 시체에서부터 불이 뻗어져나왔다. 헤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으로 샘의 옷을 잡아당겼다. 가야 해! 타오르는 화마가 비현실적이다. 바깥에서 문을 차서 여는 듯한 큰 소리가 들렸다. 샘! 연기 때문인지 콜록이는 소리와 함께 마일리가 먼저 뛰쳐들어왔다. 일순 천장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어금니를 문 채 헤일을 도와 샘의 옷을 물어 힘껏 당긴다. 뒤늦게 들어온 딘이 아예 샘의 몸을 들쳐업다 싶이 집에서 끌고 나왔다. 안돼, 제스! 제스! 처절한 목소리가 타오르는 재들에게 먹혀들었다. 손에서 떨어진 제시카의 메모가 불에 닿아 순식간에 타버렸다. 버티려고 몸부림 치는 샘을 억지로 끌고 나오며 딘이 119를 호출한다. 아래나 옆에 사는 이웃들이 천으로 입을 막은채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완전히 나오자 유독가스 탓인지 죽을듯이 기침이 터져나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도로 들어가려는 샘의 어깨를 붙든 딘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정신차려 멍청한 새끼야! 이가 망가질 정도로 악다문 샘이 욕을 씹어뱉었다. 젠장, 구해야 한다고! 당장 놔! 

"이미 늦었어! 데몬이 없었다고! 다시 들어가는건 미친 짓이야!"

뱉어지는 말들이 수직으로 내려꽂혔다. 몸부림을 치던 샘이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제기랄, 망할- 휘청거리는 몸을 떠안은 딘이 입안쪽을 씹은채 타들어가는 건물을 바라봤다. 신고를 받은 구조대가 울리는 사이렌이 점점 가까워진다. 마일리가 다가와 딘의 다리에 몸을 바짝 붙였다. 군견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날과 똑같다. 메리가 죽었던 그 때와-

"우리 때문이야..."

새어나오는 소리에 딘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가지만 않았어도. 헤일이 허망한 눈으로 집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일리가 입을 열었지만 샘이 딘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야, 새미- 한 번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성큼성큼 뻗는 걸음이 임팔라로 향한다. 잡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보던 딘과 마일리가 시선을 마주쳤다. 어쩌면 위로를 하는게 가장 최악의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뜻은 아니었어."

임팔라의 트렁크에서 무기를 챙기던 샘이 아래쪽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못 돌아올거라고 했던거. 늑대의 목소리는 재를 들이켜 바짝 말라있었고, 답지않게 어수선했다. 장전되는 샷건 너머로 소방차가 도착한다. 정말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허망한 목소리가 공중에 뜬다. 난 그냥... 딘을 만나면, 제시카한테 돌아가지 못할거라는 뜻이었어. 쉬어버린 소리가 고해를 하듯이 작아졌다. 샘은 묵묵히 다른 총을 집어들었다. 늑대가 젖은 바닥에 다리를 굽히고 몸을 말았다. 아무것도 보기도 듣기도 싫다는 듯이 머리를 집어 넣고 최대한 작고 꼼꼼하게, 마치 스스로를 가두듯이.





에피 하나씩 골라서 이런식으로 쓰고 나머지는 건너뛰고 그럴듯. 1편에 몰아넣어야했던 내용들인데 길어서 나눔. 기본적으로는 슈내 스토리라인과 똑같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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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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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나침반에서 설정만 가져옴. 황금나침반 스포 없음. 왜냐면 저도.. 설정만 압니다.. 기본 설정은

1.인간들은 태어나서부터 '데몬'이라는 말하자면 소울 메이트와 같이 태어남. 정신적, 육체적으로 연결 되어 있고 일정거리 이상으로 떨어지면 고통스러우며 데몬이 죽으면 인간도 죽고 반대도 마찬가지. 소울메이트지 주종관계가 아니며 보통은 반대의 성별을 가지지만 드물게 같은 성별을 가질 수도 있음. 랜덤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님. 여기에서는 딘의 데몬은 여자, 샘의 데몬은 남자.

2.대부분은 동물의 형태고 어렸을 때는 형태를 바꿀 수 있다가 12~16살 정도에 인간의 성격? 본질?에 따라 한가지로 정착함. 기본적으로 먹지는 않지만 잠은 자고 피곤함이나 고통도 다 느끼는데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죽을 수도 있다.

3.먹지 않고 동물 형태라는 것만 제외하면 인간이랑 똑같음. 말하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다만 초면에 다른 사람의 데몬과 직접 이야기하거나 그에 대해 묻는건 무례한 행동. 특히 남의 데몬을 억지로 만지려고 하는건 매우 금기시됨.

이정도만 알면 되고 자세한건 글에서 언급하면서 설명함미다






1.
샘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근처에 그럴듯한 플랫을 구한 뒤의 새벽에 그는 대부분 누워 있었고, 잠드는 일 없이 눈을 감고 있기 일쑤였다. 제시카는 파티에 지쳤는지-아니면 그 이후에 있었던 일에 지쳤는지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으며 그녀의 데몬인 보더 콜리 믹은 시트에 몸을 파묻고 고롱대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제외한다면 사방이 조용했다. 눈꺼풀 안은 어두웠고,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만 더 버티다보면 어떻게든 잠에 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샘이 할로윈 파티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오늘은 괜찮은 날이었다. 월요일에 있는 면접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합격한거나 마찬가지였고, 그건 샘이 준비해가던 미래가 귀퉁이에 맞게 착착 진행 되어가고 있다는걸 의미했다.

그의 데몬인 헤일은 침대 밑에서 몸을 말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커다란 회색 늑대는 이따금 꼬리나 귀를 몇 번 움직였다. 잘못 될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샘은 바닥으로 절 잡아 당기는 듯한 불안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거품마냥 부푼다. 샘은 커다란 풍선에서 바람을 빼듯 그것들을 눌렀다.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다고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스탠포드로 혼자 떠나온 뒤로 그런 느낌은 꽤나 자주, 시도때도 없이 샘을 압도하려 들었다. 제시카를 만난 뒤로는 줄어들었지만 이런식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시점이 오면 어김없이 불안감이 들었다. 그건 혹시라도 일상이 망쳐질까봐 걱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헤일이 한쪽 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는 것을 알았지만 샘은 눈을 뜨거나 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불안감은 잦아들었고, 드디어 수마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닫힌 눈꺼풀 아래로 커튼이 내려왔다. 샘은 이불에 좀 더 몸을 파묻었다. 아무것도 이상한 건 없었다. 그는 그가 꿈꿨던 삶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헤일이 고개를 들었다.

단 한 번 부스럭거린 소리는 샘에게도 들렸다. 굳게 감겼던 눈꺼풀이 곧바로 뜨였고, 헤일은 이미 바닥에서 일어나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제시카를 돌아본 샘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나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믹이 소리를 들었을까? 창문에서 비춰지는 빛은 해가 뜨기 시작한 시간이라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샘이 헤일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늑대가 뒤로 걸음을 옮겨 침실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지만 문간에서 실루엣이 지나갔다. 샘은 심호흡을 한 후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광원이 적은 실내에서 그림자가 얽혔고, 침입자가 샘의 공격을 막으며 반격을 가했다. 내질러진 팔을 피하고 몸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샘은 미친듯이 주위를 둘러봤다. 데몬. 데몬이 어디있지? 그러나 침입자는 샘이 그의 데몬을 찾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샘은 밀려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겨우 뾰족한 귀의 형상을 봤을 뿐이다.

실랑이는 샘이 바닥에 밀어붙여지며 끝났다. 이를 악물고 벗어나려던 샘은 헤일이 다급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뉘앙스가 아니었다. 걱정이나 화가 났다기 보다는 마치 당장 그만 두라는 듯 꾸짖는 투였다. 약한 새벽빛에 침입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Easy Tiger.

"딘?"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 비현실적이었다. 머리맡에서 발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위쪽에서 블랙탄 셰퍼드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 샘. 아주 즐거운 표정이다. 놀랐잖아! 당황해서 한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딘의 웃음이 짙어졌다. 연습을 좀 더 해야겠는데. 당장 얼굴을 구긴 샘이 순식간에 자세를 반전시켰다. 딘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자 셰퍼드-마일리가 점잖게 말을 이었다. 혹은 아니거나.

"일으키기나 해."

딘의 위에서 내려온 샘이 손을 잡아 딘을 일으켰다. 헤일이 다가와 코를 찡그린다. 향수 뿌렸어? 탐색하듯 주위를 돌며 나오는 언짢은 목소리에 마일리가 콧소리를 냈다. 놀래켜주려고 내 코를 좀 희생했지. 헤일이 못마땅하게 코를 털었다. 장난이 성공한게 재밌는지 딘과 마일리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헤일의 노란 눈이 과장되게 굴러갔다.

"대체- 여기서 뭐하는거야?"
"맥주 좀 찾으러 왔지."
"딘. 여기서 뭐하는거냐고."

낮은 목소리에 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 얘기 좀 하자고. 샘의 옷을 툭툭 털어내며 말을 끝마치자 마자 불이 켜졌다. 문간에서 제시카가 눈을 문지르고 있었고, 믹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따라왔다. 샘? 졸음에 겨운 목소리에 마일리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오. 소리가 안났다고 해서 딘이 감탄 중이지 않은건 아니었다. 마일리가 재촉하듯 제 어깨로 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샘은 손으로 얼굴을 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둘을 소개시켰다. 딘, 이쪽은 내 여자친구인 제시카야.

"오, 혹시 형인 딘이에요?"
"저희도 스머프를 좋아하죠."

제시카가 난감하게 웃으며 제 티셔츠를 내려다봤다. 믹, 옷 좀 가져다줄래? 보더 콜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기 전에 딘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No를 반복하며 다가갔다. 지금도 괜찮아요. 정말로. 솔직히, 제 동생한테는 아까운 분이시네요. 매끄럽게 이어지는 말들에 제시카가 입꼬리를 더욱 올렸다. 마주 웃어준 딘이 샘에게로 약간 뒷걸음질을 했다. 죄송하지만 가족 일로 상의할게 있어서요. 잠깐이면 되는데. 믹이 약간 불안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헤일이 다가가 코를 부비자 마주 부벼주긴 했지만, 마일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셰퍼드는 무해한 얼굴로 허리를 바로 세우고 있었다. 샘은 딘과 데몬들을 쳐다봤다가 제시카에게 다가갔다. 아니, 뭐가 됐던, 제스 앞에서 말해도 돼. 이번엔 마일리가 과장되게 눈을 한바퀴 굴렸다.

"아버지가 안돌아오셔."
"자주 있는 일이잖아. 금방 돌아오실거야."

태평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린 딘이 무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아퀼라가 찾아왔었어."

믹에게 얼굴을 부비던 헤일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일리는 여전히 허리를 세운 채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고, 샘도 헤일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샘의 말을 막듯 딘이 나머지 말을 뱉었다. 사냥을 하러 가셨던거야. 며칠 동안 들어오지 않으셨고. 헤일의 관심이 믹에게서 완전히 떨어졌다.

"...미안 제스, 잠깐만 기다려줄래?"






*




"알겠지만 그냥 한밤중에 내가 사는 집에 쳐들어와서는 안돼!"
"아퀼라가 찾아왔었다니까."
"드물긴 하지만 큰 일은 아니잖아! 내 말은, 아퀼라와 아버지는 분리 훈련을 한지 꽤 오래 됐다고. 폴터가이스트 때 기억해? 한 달이나 집에 안돌아 오셨었잖아! 아퀼라가 두 세번 들렸었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며 하는 말에 마일리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아퀼라한테서 좋은 소식을 입수해서 파티하려고 온 것 같아? 헤일은 아까부터 얼굴을 찡그린채 말없이 따라오고만 있었다.

아퀼라는 존의 데몬의 이름이었다. 사냥꾼들 중 일부가 그렇듯이 분리 훈련을 한 매 데몬이었는데, 존이 사정이 안될 때면 들러서 사정을 말해주고는 했다. 파트너를 닮아 그녀 자신도 매우 무뚝뚝했고, 샘과 헤일은 그녀를 좋아해 본 전적이 없었다. 그녀가 물어다주는 소식이야 언제나 존이 무엇을 사냥하고 있고 언제쯤 돌아올 것 같다는게 끝이었고 후자는 지켜지는 일도 거의 없었다. 소식을 전하자마자 그녀는 곧장 존에게로 돌아갔고, 심지어 어렸을 때는 딘하고만 얘기한 뒤 돌아가기도 했다. 괴물들에 관해 몰랐을 때여서 그랬다고는 했지만 그녀는 적어도 어린 샘이 안도할 수 있게끔 존의 소식을 가려서 전달해줄 수도 있었다. 딘의 말로는 그 끔찍했던 사건 전에는 다정했다지만 샘이나 헤일의 알 바는 아니었다. 정말로.

"아퀼라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아버지가 뭔가를 찾고 있고,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그게 뭐?"
"그게 뭐? 듣기는 했냐? 럭비공이나 찾고 있는데 나한테 아퀼라까지 보냈을거라고 생각해? 분명 위험한거야. 우리가 도와야한다고."
"우리?"

딘의 걸음이 멈췄다. 자동적으로 샘도 몇 계단 위에서 멈췄고, 딘이 돌아봤을 때 계단의 난간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마일리는 거의 으르렁대고 있었다. 억지로 화를 누르는 듯한 표정의 딘이 잇사이로 목소리를 뱉었다. 도와줄거야 말거야? 샘이 입 안쪽을 씹었다.

"안 가. 사냥 같은건 그만뒀다고."
"아버지가 위험하다니까!"
"언제나 위험 하셨잖아! 이번에도 잘 하실거야. 난 그 생활에 질렸어. 지금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같이 안갈거야. 형은 우리를 내버려 둬야 해."

팽팽한 대립 상태가 이어졌다. 마일리와 딘은 샘을 노려보고 있었고, 헤일은, 계단 위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핥으며 둘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난간을 붙잡은 손에서 마디가 불거졌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집 얻어서 정착하고 여자친구랑 같이 사는게?"
"그래! 평범하고 안전한 삶이고, 내가 평생 동안 원했던거야. 형이 마음대로 쳐들어와서 전부 망쳐버릴 수는 없는거라고!"
"평범하고 안전한 삶?"

마일리가 코웃음을 쳤다. 헤일이 이를 드러냈지만 덩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헤일에게 겁을 먹는 일은 없었다.

"넌 윈체스터야!"
"그게 어쨌다는거야? 윈체스터는 평범하게 살면 안돼?"
"그냥 윈체스터도 아니고, 늑대 데몬을 데리고 있는 윈체스터지. 진심으로 이런식으로 계속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헤일을 강아지라도 되는듯이 포장시키면서?"

샘이 입을 다물었다. 딘은 시선을 피하는 헤일을 노려보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꽤나 노력했지, 안그래? 안봐도 뻔하다고. 네 여자친구의 데몬이 헤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데 얼마나 걸렸어? 한 달? 세 달? 헤일이 위협하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는듯 샘이 어금니를 물었다. 2주였어.

"그것 참 신기록이네."
"그래서 온거야? 우릴 비웃으러?"
"아니, 난 도움을 청하러 온거야. 마일리랑 둘이서만은 못하겠다고."
"할 수 있잖아!"
"그래,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말을 받은 마일리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다시 대치상태였다.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던 시선은 샘의 쪽에서 먼저 거둬졌다. 입술을 깨물며 아래로 고개를 내렸던 샘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대체 뭘 찾으신다는건데? 딘이 마저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알아내는 중이야.

"알아내는 중이라고?"
"아퀼라가 말해주질 않았어. 알잖아. 전할것만 전하고 휙 날아가버리는거."

딱딱하기 짝이 없는 매의 표정을 떠올린 샘이 언짢게 얼굴을 구겼다. 분리 훈련을 했어도 인간인 이상 데몬과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은 치명적이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들들에게는 좋지 못한 단점이었다.

바깥에는 익숙한 임팔라가 주차되어 있었다. 트렁크를 열자 절대 평범하지는 않은 무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마일리가 앞발을 트렁크에 기댄채 무언가를 물고 내려왔다. 반동을 이용해서 던지자 헤일이 받아낸다. 인쇄 된 종이 뭉치였다. 헤일이 건네는걸 받아들어 살펴보던 샘이 눈썹을 휘어올렸다.

"아버지랑 형이 조사하던거야?"
"정확히는 존이 조사하던거야. 나랑 딘은 다른 일이 좀 있었거든. 뉴올린스에서 부두교 관련으로."
"아버지가 너랑 형이 알아서 사냥하게 놔뒀다고?"
"우리 스물 여섯이거든."

이번엔 딘이 녹음기를 던졌다. 공중에서 잡아챈 샘이 미간을 구기고 녹음기를 살폈다. 긁힌 자국이 있는걸로 봐서는 아퀼라가 들고왔던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의 제리코에서 지난 20년간 10번이 넘는 실종사고가 일어났고, 점점 빈번하게 발생하는 터라 존이 조사를 하러 나갔다. 그리고 3주 후에 아퀼라가 찾아와 소식을 전하고는 녹음기를 주고 갔다는 것이다. 대체 왜? 헤일이 녹음기의 냄새를 맡는 동안 질문하자 딘이 어깨를 으쓱였다. 틀어봐.

"...목소리 뒤로 들리는거 EVP야?"
"실력은 녹슬지 않았는데."

씩 웃어보인 딘이 녹음기를 넘겨받으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속도를 느리게 하고, 돌비 채널로 돌린 후에, 잡음을 없앴더니 이런 소리가 났어. 녹음기에서 들리는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에 헤일이 반사적으로 털을 곤두세웠다.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유령인건 확실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조사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잠깐만, 그럼 존이 너희한테 사건을 맡겼다는거야? 자기가 없는 동안에 해결하라고?"
"아마도."
"그래서 형이랑 너는 이걸 맡을거고?"
"그래. 무슨 의미가 있든 어쩔 수 없이 그곳부터 시작해야해. 아는 단서라고는 그게 전부니까."

녹음기를 던져넣고 트렁크를 닫은 딘이 임팔라에 기대 샘과 헤일을 쳐다봤다. 갈거야? 마일리는 꼬리를 느리게 흔들며 기대감이 있는 눈으로 둘을 쳐다봤고, 샘은 약간 망설이는듯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2년 동안 귀찮게 한 적 없었잖아. 딘의 목소리는 약간 보채는 듯이 들렸다. 헤일은 샘의 옆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결정하든 지지할거라는 신뢰의 시선을 마주보며 샘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하지만 월요일 전까지는 돌아와야해.

"월요일은 왜?"
"면접이 있어."
"일자리? 그냥 못간다고 해!"
"로스쿨 면접이고, 내 인생이 달려있어."
"로스쿨?"
"그렇게 하기로 한거야. 여기서 기다려."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샘과 헤일이 빠르게 안으로 사라졌다. 약간 얼굴을 찌푸린채였던 딘이 입술을 물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일리를 쳐다봤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마일리는 입꼬리를 뒤로 당기며 딘을 올려다봤다. 최선이라는거 알잖아. 둘이서는 못해. 어두운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딘이 곧 다리를 접고 제 데몬의 목을 감싸 안아 얼굴을 묻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쳐진 꼬리가 힘없이 양 옆으로 흔들린다. 어깨에 기대 머리를 부비던 마일리가 딘의 얼굴을 애정 어리게 핥았다. 괜찮을거야. 다정한 목소리에 딘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




"하지만 가족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한적 없었잖아! 그래놓고 한밤중에 떠나서 주말을 보내고 오겠다니..."

믹이 불안하게 헤일의 주위를 맴돌았다. 헤일이 친근하게 귀를 핥아줬지만 그런다고 안심이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샘은 대충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더플백에 집어넣으며 제시카를 안심 시키기 위해 최대한 애썼다. 월요일에는 돌아올 것이고 잘못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샘은 제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그런 말들을 반복했다. 한숨을 쉰 제시카가 다리를 굽혀 믹을 안았다. 돌아오는거 맞지? 보더 콜리가 약간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샘은 제시카를 돌아봐야한다는걸 알았지만 쉽사리 고개가 돌려지지 않았다. 불안을 억지로 삼키며 샘이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괜찮을거야. 겨우 주말 동안인데 뭐."

제시카는 대답 대신 믹의 목을 쓰다듬었고, 샘은 지퍼를 잠근 더플백을 헤일에게 둘렀다. 돌아올거야. 약속할게. 제시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믹은 가늘게 한 번 울고는 옆을 지나치는 헤일에게 미련있는 시선을 던졌다. 그럼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주면 안될까? 복도를 빠르게 통과하던 샘이 멈출 생각도 못하고 급하게 목적지를 알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헤일이 샘을 계속 힐끔거렸다. 굳은 무표정이 딱딱하다. 헤일이 계단 중간에서 샘의 앞을 막아섰다. 괜찮겠어? 보통 성인보다도 커다란 체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간을 붙잡고 멈춰선 샘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게... 모르겠어."
"샘, 원한다면 거절해도 괜찮다는거 알잖아. 우린 머무를 수도 있어."

침착한 목소리에 샘이 머리를 긁으며 제시카가 있을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헤일의 말이 맞았다. 딘을 따라갈지 말지는 온전히 샘의 선택이었고, 싫다면 거절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정말 주말 뿐이었다. 존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샘은 월요일에 이곳으로 돌아올 터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샘은 불면증을 기억해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야기하는 수많은 원인들도. 그 꿈. 제시카가 천장에 붙어 타오르는, 반복되는 불길한 영상. 하지만 그것이 불면증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샘은 흔히 볼 수 있는 데몬과는 동떨어진 제 데몬을 내려다봤다. 늑대. 데몬들은 인간보다 덩치가 작은게 보통이었고, 마일리만 해도 데몬 중에서는 큰 편에 속했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포식자인 데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어준다. 그중에서도 늑대는. 제 데몬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떠올린 샘이 입술을 깨물고 헤일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괜찮을거야."

일부러 힘을 준 목소리에 헤일이 한숨을 쉬었다. 긴 몸으로 한 번에 세 칸씩 계단을 뛰어내린 헤일이 샘의 옆에 붙었다. 그냥 들어만 둬. 샘이 걸음을 재촉하며 헤일을 힐끔거렸다. 딘은 바깥에서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일리는 운전석 시트 아래쪽에 있겠지. 헤일이 움직임에 따라 등에서 더플백 속의 내용물이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우리는 다시 못돌아올거야."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였다. 입을 일자로 만든 샘이 문을 여는 소리가 약간 크게 들렸다. 







날조주의... 에피를 전부 쓰지는 않을거고 대충대충 넘길듯함. 참고로 데몬과 다른 인간끼리 얘기를 직접적으로 주고받는건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대부분 안그래서. 그래서 딘이랑 제시카가 말할 때 마일리와 믹이 조용한거고. 왜 이런거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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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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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슨스미스au




1.
스산한 골목에서는 불길한 냄새가 났다.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총을 든채로 조심스럽게 갈라진 시멘트 바닥을 밟았다. 워커의 밑창에 돌가루들이 깔려 조용히 비명을 지른다. 전파가 잘 안통하는지 잡음이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인이어를 몇 번 문지른 남자가 바닥처럼 갈라진 모퉁이에 붙었다. 셋하면 돌면서 겨눠. 귀에서 들리는 명령에 남자가 총을 고쳐잡는다. 모퉁이 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철컥, 총이 장전된다. 둘. 워커가 땅을 단단히 디뎠다. 셋.

"움직이지마!"

좁은 골목에 높은 비명소리가 울렸다. 쓰레기통 위에서 몸을 겹치고 있던 남녀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다. Oh, shit. 욕을 뱉은 샘이 짜증난다는듯 이를 사려물었다. 남녀는 무슨일인지 전혀 모르겠다는듯 서로에게 달라붙어 떨었고, 샘은 총을 내리고 다시 지지직거리는 인이어를 만졌다. 진짜 재미없거든, 딘. 이어커프 너머에서는 또 잡음만 흐른다. 망할 무전기. 그렇게 바꿔달라고 찔러도 들은 척도 안한다니까. 총을 뒷주머니에 찔러넣은 샘이 죄송하다는듯 손을 들어보이고 뒤를 돌았다.

시골도 아닌데 무슨 전파가 이렇게 안터지는지 모를일이다. 임팔라에 스무디를 쏟은게 일주일 전인데 아직도 그걸로 심술을 부린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한참 지지직거리던 인이어가 드디어 제대로 된 소리를 낸다. 사과할테니까 근무시간에 이딴 장난 좀 그만쳐. 억울한 말에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멍청아, 여자!

뒤에서 훅 끼쳐오는 살기에 샘이 황급히 다리를 접었다. 바로 위를 통과하는 발톱이 흉흉하게 샘의 머리카락을 스친다. 욕을 뱉으며 바로 총을 뽑아들자 하이힐이 손을 후려쳤다. 날아간 총이 바닥에 쳐박히자 샘이 되는대로 여자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정통으로 맞고도 데미지가 없는지 순식간에 여자의 팔이 샘의 팔에 감긴다. 부러지기전에 여자의 배를 발로 차 밀어낸 샘이 몸을 던져 총을 잡았다. 발목이 잡혀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된다. 쏴! 인이어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샘이 여자의 이마에 총알을 박았다. 피가 터지며 발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샘이 뒤늦게 욕을 뱉었다.

[살았냐?]
"그래, 빌어먹을."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샘이 확인차 여자의 시신에 총알을 두어개 더 박았다. 스크린을 꺼내 드러난 이빨과 발톱을 대조해보던 샘이 찾아다니던 웨어울프가 맞음을 확인했다. 딘이 보고 받았다는 형식적인 말을 꺼낸다. 한시름 놨다는듯 한숨을 쉰 샘이 아직 구석에서 떨고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뻐끔대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남자의 쪽으로 한 발을 뻗는다. 남자는 거의 쓰레기통에서 떨어질뻔 했다. 손을 들어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어보인 샘이 주머니를 뒤져 명함 한장을 꺼냈다. 남자가 겁먹지 않도록 바닥에 천천히 명함을 내려놓은 뒤로 몇걸음을 무른다. 옷차림이 다 흐트러진 남자가 거의 기어서 몸을 내밀고 글자를 확인했다.

"그, 오늘 본 것에 대해서 혹시 상담을 받고 싶으시면 적혀진 전화번호로 연락 해주시면 됩니다. 전문 상담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남자가 정신없이 명함과 샘을 번갈아보다가 폭탄이라도 집는마냥 명함을 주워들었다. 어색하게 웃은 샘이 다시 인이어를 만졌다. 복귀한다는 말에 딘이 파이나 사오라고 말하고는 먼저 통신을 끊었다. 왜이렇게 신경질적이래. 고개를 저은 샘이 남자에게 다시 한 번 웃어주고는 여자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남자는 샘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명함의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깔끔한 디자인의 직사각형에는 검은색으로 글자가 써져있다.

TOSE UP
The Organization Examinating Supernatural&Uncanny Phenomena

S.Wesson. / Hunting department

P. ***-***-****




2.
"아 그러니까 그걸 왜 우리한테 떠넘기냐고! 천사들 뒤치다꺼리는 천계부서 담당이잖아! 우리가 왜 네피림을 찾아? 뭐? 이것들이 말이라고- 야, 나도 너희들 일하기 좆같은거 알겠는데, 여기라고 팽팽 놀고있는줄 알아? 윗선한테 찌르던가! 툭하면 인원부족 핑계대는거 지겹지도 않냐?!"

마이크를 터뜨릴 기세로 울려대는 목소리에 샘이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유리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인사해주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준 샘이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있는 딘의 데스크까지 다가가 파이 상자 중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마에 힘줄을 달고 알아서 하라고 빽 소리를 지른 후에는 인이어가 데스크 벽에 던져졌다. 신경질적으로 파이 상자를 채온 딘이 인사도 안하고 파이부터 베어물었다. 다람쥐마냥 부푼 뺨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본 샘이 인이어를 주워든다. 허구한날 던져대니 전파수신이 그따위지. 순식간에 한조각을 다 먹어치운 딘이 식어버린 커피를 원샷했다. 옆에 늘어선 커피잔들이 고개를 젓는 것 같이 보였다.

"좀 친절하게 하면 안돼? 무시 당하는게 일상인 사람들인데."
"잔소리 하지 말고 보고서나 내놔."

파이 한 조각을 마저 들며 딘이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다는듯 가져온 보고서를 손에 얹어준 샘이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무리는 더 없는 것 같고, 알파에 대해서도 몰랐던 것 같아. 빼곡한 글자들을 대충 읽던 딘이 그거면 됐다는 듯 보고서를 한켠에 던졌다. 사람이 정성껏 쓴걸. 기력이 빠지거나 말거나 모니터 앞으로 의자를 끌어온 딘이 잔뜩 떠있는 탭들을 훑었다. 샘이 보내온 사진들을 포함해 시체 처리에 대한 허가서와 다른 부서에 보내는 항의서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습관처럼 컵을 기울였다가 커피가 없자 유리를 깨뜨릴 기세로 컵을 내리친다.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박은채인 딘이 손을 내저었다. 여긴 됐으니까 찰리한테 가봐.

"데이트 할래?"
"아니."

단호한 거절이다. 가상의 귀를 축 늘어뜨린 샘이 데스크벽에 팔을 얹고 매달렸지만 끈질긴 퍼피아이도 쳐다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커피잔의 수도 그렇고 거의 이틀은 밤을 샌 것 같았다. 그말인 즉슨 오늘도 데이트는 커녕 살가운 대화조차 없다는 뜻이다. 샘은 빠르게 포기하고 그냥 명령대로 기술부서로 가는쪽을 택했다.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조디가 어깨를 거의 땅에 붙이고 있는 샘을 보고 눈썹을 휘어올렸다. 거의 세 발자국으로 거리가 좁혀져서야 조디를 알아본 샘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우리 카우보이가 또 심술 났나봐?"
"말도 말아요. 아까 저주 담당 부서에서 저번 레코드건을 우리 부서 책임으로 떠넘기는 바람에 완전 폭풍이었어요. 딘이 밥도 못먹고 항의 하느라 세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니까요. 그와중에 웨슨씨 백업하고, 끝났다했더니 천계쪽에서 네피림 건까지 떠넘기려고 해서... 하여간 여기가 봉이죠 뭐."

도나가 조디에게서 보고서를 넘겨받으며 한탄을 늘어놨다. 총이나 칼 쓸 일만 생겼다하면 온갖 부서에서 죄다 일을 떠넘기려 하니 딘이 최전선에서 막아주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입사 초기만 해도 저렇게 입이 거칠지는 않았는데, 하기사 이곳에서 6년이나 굴러먹다보면 자연스럽게 욕이 붙기는 했다. 샘만 해도 예전에 비하면 거의 갱단마냥 욕을 써대고 있었으니 할 말 다한 셈이다. 조디가 알만 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도나에게 커피와 도넛을 내밀었다. 원래도 밝은 얼굴이 태양마냥 밝아지는걸 흐뭇하게 바라본 조디가 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웨어울프건 끝났으니까 내일이면 여유 뜰거야. 힘내라고.

"그러길 바래야죠. 조디는 그 유니콘건 어떻게 됐어요?"
"샷건으로 쐈는데 사라지기만 하고 다시 나타나더라고. 마녀 짓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웃기는 짓거리라..."
"트릭스터가 아닐까 해요. 진짜 트릭스터요."
"대천사가 또 내려온거라면 이번에야말로 그 부서 전체를 해고 시켜야할걸."

천계 부서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샘도 그부분에서는 동의하는 바였다. 진짜 트릭스터면 처리하기 전에 사진이라도 찍어주세요. 가브리엘한테 좀 보내게. 도나가 맡겨만 주라는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믿음직한 사람들이다. 그럼 수고하라며 손인사를 한 샘이 긴 다리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뒤쪽에서 인이어에 대고 다시 화를 내는 딘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3.
"자. 보안 프로그램 업데이트 했어."

건네지는 스크린을 받아든 샘이 좀 더 간편하게 바뀐 보안화면을 훑었다. 고마워 찰리. 돈받고 하는 일이라고 어깨를 으쓱인 찰리가 커피가 든 컵을 기울였다. 이쪽도 눈그림자가 장난이 아니다. 기술부서야 밤샘이 보통이라고는 하지만, 저번에 악마들한테 보안이 뚫린 후로 무지막지하게 들볶인 것이 틀림 없었다. 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엎어져있는게 초파리만 날아다닌다면 멸망 후의 모습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침까지 흘리며 자고있는 애쉬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본 샘이 파이 상자를 전달했다. 일어나면 나눠먹어. 환호할 기운도 없는지 힘없이 고맙다는 말만 전한 찰리가 눈을 비볐다.

"웨어울프건 성공했다며. 인이어 전파가 불량하다고 하던데."
"딘이 하도 던져대서 그런 것 같아. 그냥 새로 지급만 해주면 해결 될거야."

방해전파 때문이었다면 또 3일 밤을 새야했을거라고 농담아닌 농담을 한 찰리가 잔뜩 쌓여있는 인이어 상자 중 하나를 건넸다. 가장 자주 부숴지는 물건 중 하나다보니 아예 쌓아놓고 주기로 한 모양이다. 백업팀이 인이어를 망가뜨리는 일은 몇 없었지만 현장 요원들의 인이어는 임무 하나당 하나씩 망가뜨려오는 형국이었다. 날아가고 쳐박히는게 일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나마 샘은 깔끔하게 가지고 돌아오는 편이지만, 반대로 딘이 허구한날 망가뜨려서 어차피 팀으로 치면 비등비등하다. 미안하다는 얼굴을 해보인 샘에게 찰리가 이것도 가져가라면서 케이스를 하나 내밀었다.

안에 들은게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샘과 찰리가 떠들어도 반응도 없던 기술부 사람들이 노이로제라도 걸린것 처럼 단체로 고개를 들었다. 카스티엘이 원래 무엇이였는지 모를 기계를 들고 어색하게 서있자 찰리가 거의 기절할듯 창백해졌다.

"또! 또!! 미치겠네 정말!! 내가 제발 제대로 갖고오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카스티엘이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숙였다. 샘이 둘이 대화할 수 있도록 물러나며 카스티엘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샘의 인사를 받아준 카스티엘이 두 손으로 공손히 망가진 기계를 전달했다. 어쩌다 이랬냐는 불호령에 차에 치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샘이 기겁했다. 베슬 몸 좀 아껴달라니까! 총체적으로 변명할 말이 없는지 카스티엘이 눈을 굴려댔다. 어차피 치유했을테니 죽을 일이야 없겠지만, 목격자라도 있으면 곤란해지는건 베슬인 지미와 천계부서였다. 상황에 따라서는-어떤 메커니즘인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사냥 부서가 뒤치다꺼리를 해야할 수도 있었다.

"임무는 해결했다."
"그래요, 카스티엘. 그건 사냥 부서에 보고하고... 아... 이거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찰리를 따라 온 부서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쥐거나 데스크에 머리를 박았다. 아포칼립스 이후 카스티엘과 발티자르 같은 천사들이 남아 용병일을 해주는 것은 임무 성공에 있어 뛰어난 효율을 가져왔지만, 기술팀에게는 매우 악몽 같은 일이었다. 천사들은-특히 카스티엘과 사만드리엘 같은 경우 건네주는 장비들을 모두 부숴서 오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감안해줄 수 있지만 굳이 부숴서 오는 것은 무어란말인가. 찰리가 부숴진 기계를 붙잡고 딘에게 보고 할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카스티엘이 손으로 얼굴을 덮고 창세기 때부터 살아온 생명체만이 낼 수 있는 한숨을 쉬었다. 부숴진 기계의 잔해가 너무나 적나라 했으므로 아무도 카스티엘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교통사고 건도 말할거야."
"제발, 샘... 자비를 가져라."
"저번에 모텔 위에서 뛰어내린 것 때문에 투신자살 기사까지 났었잖아! 더는 안돼. 제대로 잔소리 듣고, 또 기사가 나면 재커라이어한테 항의할테니까 그렇게 알아. 근신처분 당해도 안도와줄거야."

카스티엘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기술팀들이 단체로 무언의 응원눈빛을 보내온다. 천사한테 막대할 수 있는 사람이야 온 부서를 통틀어서 딘이나 샘 정도가 다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카스티엘이 모습을 감췄다. 사냥 부서에 보고하러 간 모양이다.

불쌍한 지미. 찰리가 고개를 젓는다. 성실한 회계사가 피곤한 일에 익숙한듯 웃는 모습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때려쳤을텐데, 안타깝게도 지미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베슬들에게 들어가는 입금액이 천문학적이라도 샘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베슬역이라면 질색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샘의 경우는 좀 다른 이유이긴 했지만, 하여간 베슬들은 마주치기만하면 온 부서 사람들에게 토닥임을 받는 존재들이었다. 알피가 보고서 때문에 공강시간에 들리면 간식이니 선물이니 하는 것들을 팔에 쌓느라 한바탕 난리가 날 정도다.

찰리가 기계를 흔들며 새 일거리라고 절망적인 목소리를 냈다. 곳곳에서 곡소리와 신음들이 솟구친다. 관련 없는 샘이야 힘내라고 위로를 해주는 수 밖에. 대표격으로 찰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 아직 손에 들려있는 케이스를 열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이 얌전하게 들어있는걸 확인한 샘이 눈썹을 휘어올렸다.

"성유에 그을린 안경이야.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서 하나씩 지급하래."
"교차로 악마들 계약에는 손대지 않는게 룰이잖아. 일을 얼마나 늘이려고..."
"비상 상황이라니까. 크라울리가 헬하운드로 감시망이라도 깔까봐 걱정하는 모양이던데."

하여간 쓸데없는 걱정들은 잘하는 양반들이다. 안경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샘이 케이스를 닫았다. 딘 것도 있으면 전해주겠다는 말에 현장 요원들만 해당하는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딘은 반쯤은 현장 요원이잖아. 백업하다 안되면 뛰쳐나오기 일쑤인 제 파트너를 떠올리며 말하자 찰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백업 안할 때는 계속 같이 있잖아. 괜찮은거 아니야?

딱히 할말이 없어진 샘이 따라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케이스를 주머니에 꽂아넣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4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할일이야 보고서를 내는게 끝이었으니 진작에 퇴근했어도 됐지만, 먼저 들어갔다가 딘한테 무슨 원망을 들을지 생각하면 피가 식었다. 백업팀이나 현장요원이나 명줄 짧은건 똑같은데 왜 백업팀만 온갖 잡무를 떠맡는지 모를 일이다. 띵즈나 스트레스나 사망원인으로는 비등한데. 예전에 백업팀이었을 때 생각했던 불만을 그대로 되새긴 샘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온 문자가 없는걸 보면 아직도 천계부서와 씨름하고 있거나 저주 부서에서 깽판을 치고 있을 것이다. 가는거냐고 묻는 찰리에게 그래야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인 샘이 인이어 박스를 흔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작작 던지라고 좀 해줘. 공장제지만 귀여운 애들이라구.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인 샘이 나중에 보자면서 웃어보였다.


"그래, 그 전에 과로로 죽지만 않는다면야..."

힘없이 웃은 찰리가 고철 덩어리를 올려놓는다. 어색하게 웃어준 샘이 고갯짓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유리문을 나섰다. 일 합시다, 일- 듣기만해도 지쳐보이는 목소리를 따라 똑같이 지친 목소리들이 영혼 없는 환호성을 냈다.






헌팅도 보고 싶고 회사생활도 보고 싶으면 짬뽕 시키면 되지! 아포칼립스 이후고 샘과 딘은 사귄지 꽤 된 배경. 과거 일은 더 쓰게 되면 천천히 풀 듯.


약자인 TOES UP은 직역하면 발가락을 들고 걷는다는 숙어로 '죽어서' 라는 뜻이 있음. The Organization Examinating Supernatural&Uncanny Phenomena 은 번역하자면 초자연적이고 밝혀지지않는 현상들을 조사하는 기구. 간단하게 Crime of Supernatural Investgation으로 하려고 했는데 줄이니까 CSI라서..ㅋㄱㅋㄱㄱㄱㅋㄱㄱㅋㄱㅋㄱㅋㅋ핑구님 진짜 감사합니다.. 핑구님 천재.. 핑구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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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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