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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대충 썼던거 수정해서 올려봄. 커플링 요소 크게 없으니까 민호+토마스.




눈보라가 친다. 토마스는 두껍지 못한 모포를 두르고 앉은채 멍하니 임시로 지어진 움막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글레이드의 다른 구조물들 몇 개는 지붕에 눈이 쌓여 무너졌고, 글레이더들은 건축팀이 급하게 삼각으로 대충 엮어만든 움막에 갇혀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척이 불안하게 말을 꺼냈다. 눈보라는 미로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미로에서 불어오는 시리게 찬 바람이 비를 눈으로 바꾸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미로의 문이 닫히면 눈보라도 멈출거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토마스를 포함한 러너들은 아침부터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미로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못했다. 글레이드에는 겨울이 없었다. 계절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변화는 미묘했고, 당연히 미로에서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일도 없었는데. 얼어붙지 못하는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 붙어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움막은 자리가 없어 같이 밀어넣어진 가축들이 가끔 내는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봐?"

토마스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민호가 머리에서 눈을 털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눈들이 앉아있는 토마스의 얼굴로 흩뿌려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토마스가 고개를 털어댄다.

"그냥. 신기하잖아."
"눈이?"

토마스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트는 한 번도 눈을 겪어보지 못한 농작물에 대한 걱정이 심했고, 건축팀은 눈이 내리는 밖에서 될 수 있는데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뉴트도 알비도, 버틸만한 다른 글레이더들도 돕기 위해 나갔다. 민호는 뗄감으로 쓰일 나무를 찾으러 나갔던거지만, 빈 손인걸 보면 젖지 않은 나무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미로에서 쫓겨나 움막에 쳐넣어진 후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소보다 더 멍한 토마스를 내려다보던 민호가 곧 토마스의 옆에 털썩 앉았다. 찬기운이 덮쳐와서 토마스가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이동했다. 민호가 짜증난 표정으로 토마스를 도로 끌어와 제 옆에 붙였다. 추워 죽겠는데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머슥한 표정을 지은 토마스가 두르고 있던 모포를 민호에게 내밀었다. 당장 모포로 몸을 감싼 민호가 토마스를 흘겼다.

"왜 그러는데."

차분한 목소리에 토마스가 눈을 깜박였다. 어깨를 굽히고 편하게 앉은 자세의 민호는 약간 힐난하는 표정으로 토마스를 보고 있었다. 토마스는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축의 냄새와 두려움이 내제된 수근거림. 눈은 비와는 달라서 수직으로 땅에 내려오지 않는다. 하얀 눈이 흙과 건축팀 아이들의 신발에 짓이겨지며 쌓이고, 그리고, 녹거나 녹지 않거나, 하여튼 토마스는 그냥 그것들을 보고만 있었다. 분주한 글레이더들의 모습은 움막 입구로 훤하게 보였다. 토마스가 답이 없자 민호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미로는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었잖아. 왜 지금은 그냥 틀어박혀서 보고만 있어? 별로 안신기하냐?"

눈보라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갤리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처음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미로가 닫히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답을 고민했다. 이번에는 민호도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윈스턴이 닭을 진정시키는 소리가 배경음 처럼 들렸고, 좁은 글레이드에는 벌써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그냥, 나랑 관련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민호는 미간을 구겨뜨렸다. 토마스는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뭐?"
"눈보라 말이야. 그냥...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내 말은, 그게... 탈출이랑은 관련 없어보이잖아."

말을 뭉개며 눈썹을 누그러뜨리는 토마스를 쳐다보던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3년만의 눈에 글레이더들은 전부 패닉에 빠져 있다. 눈의 무게를 버티도록 설계되지 않은 건축물들은 지반이 덜 단단한 곳 부터 위태하게 무너지고 있었고, 농작물들은 얼어붙고 있으며, 내일 미로를 달리다가 얼음 때문에 미끄러져 크게 다칠 위험도 있었다. 당장 여기저기서 일손을 부르느라 난리인데 관여할 일이 아니라니.

"그게 느껴져?"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민호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 눈보라가 탈출과 관련된 것이 아닌, 단순히 글레이더들의 대처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미로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처럼. 토마스는 그 느낌이 불편했다. 자신이 어째서 그런 것들을 알고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앉아서 눈을 보고만 있었다. 단순히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았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글레이더들과 그걸 보고있는 자신. 오래된 습관처럼 당연한 그림.

민호는 대답하지 않는 토마스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혀를 차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신참은 너무나 이상해서, 이해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게 더 나은 상황을 매우 많이 만들고는 했다. 조그만 머리통에서 뭐가 돌아가고 있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토마스는 민호의 안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건 토마스의 속사정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다. 민호에게 중요한건 토마스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민호는 목소리를 냈다.

"이거 태울 수 있지 않을까?"

뜬금없는 목소리에 토마스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민호를 쳐다봤다. 모포를 들어올리며 나름 심각한 목소리를 낸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토마스의 팔을 잡고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라이터나 성냥 가진 새끼 있냐? 움막 안에 있는 글레이더들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ㅈ,저기, 난 그냥 앉아있고 싶은데-"

끌려가다 싶이 하며 겨우 말을 꺼내자 민호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토마스를 돌아봤다. 한심함과 짜증이 섞여있는 특유의 표정에 토마스가 저절로 어깨를 움츠러뜨리고 눈치를 봤다.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화나게 하는데에 나름 괜찮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앉아있긴 뭘 앉아있어. 신참새끼가 힘든 일만 쏙 빠지려고 하고. 일 안하면 그나마 남은 밥도 굶게 되는 수가 있어."

으름장을 놓듯 말한 민호가 던져지는 성냥을 공중에서 잡았다. 젖었잖아. 장난하냐? 모포를 던지듯 토마스에게 넘긴 민호가 다른 아이들이 내미는 성냥을 확인하기 위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얼떨결에 혼자 남은 토마스가 멍하니 모포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바깥 쪽을 쳐다봤다. 여전히 신경질적인 갤리의 목소리와 눈속을 해치는 건축팀이 있다. 토마스는 문득 제가 왜 앉아있었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면 일을 하면 되는거였는데.

민호는 젖지 않은 성냥을 들고 돌아왔고 이번에는 토마스에게서 모포를 빼앗았다. 성냥에 붙은 불이 모포로 옮겨간다. 대충 움막 가운데에 모포를 놓고 나머지 글레이더들의 모포도 뗄감으로 넣어버린 민호가 토마스의 등허리를 발로 차 움막 밖으로 밀어냈다. 가서 다 불러와 똘추야. 나머지는 쉬던 새끼들이 할거라고 전하고. 토마스는 어중간한 자세로 눈보라를 그대로 맞고 서있다가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선 민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이새끼가 귀가 먹었나. 내 말 못들었어? 짜증섞인 발언에 토마스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눈을 헤쳤다.

그러나 토마스는 민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도로 민호에게 뛰어왔다. 민호는 단박에 얼굴을 구겼고 토마스는 추워서 그새 상기된 얼굴로 무릎에 손을 짚은채 민호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눈꽃이 매달려 있는 속눈썹 아래서 토마스의 눈이 고정됐다.

"고마워."

허.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듯 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저에게 향하는 무례한 행동의 의도를 잘 알아챘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걸 수도. 민호는 됐다는듯 손을 저어 가기나 하라는 뜻을 전했다. 토마스는 다시 몸을 돌려 눈을 삽으로 퍼내고 있는 갤리에게로 달려갔다. 그새 토마스의 머리에도 다른 글레이더들과 똑같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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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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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톰 Carcass

연성/Maze Runner / 2015. 7. 12. 00:03

갤리 전력 60분 글.
주제: 알코올

현대 학교AU





토마스는 토끼 앞에 앉아 있었다.

갤리는 비품을 들고 문 앞에서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수업은 끝났고, 학교에는 채 2할이 안되는 아이들만이 남아서 뛰거나 떠들고 있을 뿐이다. 내일이면 방학이었다. 자율학습실에 있는 짐들은 모두 빠졌고 교실의 사물함도 그랬다. 갤리도 부탁받은 과학실 정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가방도, 운동화도 없는 상태였다. 닳은 삼선 슬리퍼와 단추를 잠그지 않은 반팔 와이셔츠. 갤리가 걸을 때 마다 유리관들이 부딪혀 소리를 냈었다. 들어온걸 모르지 않을텐데 토마스는 뒤를 돌아보기는 커녕 계속 토끼를 보고있었다. 정확히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토끼의 내장을 멍하니, 가부좌를 튼 채 응시하며 갤리를 무시하고 있다.

토마스는, 겉도는 존재였다. 항상 그랬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그걸 눈치 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기껏해야 민호나 뉴트 정도일까. 뉴트는 관찰 했고 갤리나 민호는 일종의 감으로 어렴풋이 읽어냈다.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고 맡은 일은 전부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 토마스는 겉돌았다. 그는 생각이 많았고 친구가 없었다. 청소당번을 바꿔주거나 조를 짤 때 토마스를 넣어줄 아이들은 많았지만 집에 같이 가는 아이는 없다. 토마스가 어디에 살고, 학교가 끝난 후에 뭘 하는지, 그런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한 그는 자주 질문했다. 왜? 너는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러는건데? 갤리는 토마스가 짜증났다. 2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필요할 때 말고는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는 불편한데다 갤리와는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갤리는 문턱에서 걸음을 뗐다.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서 다시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의 바로 옆까지 걸어간 갤리는 뒤에 있는 하얀 대리석 책상에 바구니를 놓고 찬장을 열었다. 끼익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는 여전히 토끼를 보고 있었다. 비어있는 찬장에 방학기간 동안 실험 동아리가 쓸 비품들이 하나씩 들어찼다. 매미가 울 법도 한데 과학실은 정말 조용했다. 특유의 시약냄새들이 섞인 공기가 갤리와 토마스 주위에 멈춰있다.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고, 유리들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갤리는 토마스를 힐끔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의 앞에는 토끼 말고도 개구리나 뱀 같은 것들이 배를 까뒤집고 억지로 세워져 있었다. 인체 모형이 구석에서 둘을 지켜봤다. 벽에 걸린 시계도 마찬가지다.

"갤리."

쨍그랑. 갤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귀까지 올렸다. 토마스는 놀라서 몸을 옆으로 뺀 상태였다. 알코올 냄새가 순식간에 퍼졌다. 욕을 중얼거린 갤리가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넣을 때 까지만 기다려주지. 하긴, 갤리를 쳐다보고 말을 꺼낸 것 같지도 않았다. 1m가 넘는 곳에서 떨어진 알코올 램프는 토끼마냥 망연하게 내용물을 줄줄 꺼내놓고 있었다. 혼나겠네. 혀를 찬 갤리가 다리를 접었다.

"손으로 하면 다칠텐데."

아직 놀란게 안가셨는지 약간 올라간 톤으로 토마스가 말했다. 갤리는 힐끔 토마스를 쳐다봤다가 다시 유리조각에 집중했다. 토마스의 바지 끝단이 새어나온 에탄올에 젖어 들어있었다. 바닥에서 알코올 냄새가 심하게 났다. 당연한 일인데도 갤리는 얼굴을 구겼다. 유해한 화학물은 아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유리조각이 하나 둘 뭉툭한 손가락에 집혀 옆에 쌓인다. 토마스는 갤리를 보고만 있었다. 도와줄 생각이나 더 말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표정이 불안했다. 빗자루를 가져오면 좋을테지만, 일단 조각을 모아놓아야 솔에 알코올이 묻지 않을테니까.

갤리의 한쪽 눈이 반사적으로 약간 찌그러졌다. 토마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베였지? 갤리는 말이 없었다. 관심을 꺼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무시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말을 걸어서 램프를 놓치게 하질 않나, 한 순간이라도 주의를 빼앗기면 안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갤리의 무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토마스가 갤리의 손목을 쥐었다. 갤리는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토마스가 눈을 내려깔고 갤리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갤리는, 그냥 잠시 멍해졌다.

"다칠거라고 했잖아. 아프겠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서야 갤리는 고개를 털었다. 갤리의 손을 내려놓은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와이셔츠를 벗어 손에 감았다. 남은 유리조각들이 빠르게 치워졌다. 갤리에게로 몸을 숙이느라 토마스의 교복 바지는 알코올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성실하게 유리를 모두 치운 토마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건실 가. 선생님한테 말하고 올게.

토마스는 아주 당연하게 걸어서 과학실을 나갔다. 램프가 깨졌을 때의 충격으로 멈춘 것 같았던 시계소리가 났다. 남은 알코올은 바닥에서 빠르게 증발 되고 있었다. 갤리는 토마스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끝이 얇게 찢어져 안이 보이는 검지. 토마스에게 잡혔던 손목에서 맥박이 뛴다.

갤리는 한참이나 제 손에 입을 맞추는 토마스에 대해 생각했다. 내려깔린 속눈썹과 두드러지는 점. 바닥에 닿아있는 무릎. 바닥은 차가웠고 토마스의 입술은 딱 그 정도 온도일 것 같았다. 그래, 마치, 해부된 토끼처럼. 갤리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앞니로 지긋이 눌렀다.

한 순간이라도 주의를 빼앗기면.

토마스에게 묻어있을 알코올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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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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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갓 늍갤

연성/Maze Runner / 2015. 6. 26. 20:44

퍼시잭슨... 이랑 비슷한 올림푸스 데미갓 세계관. 각각 아프로디테 뉴트 아레스 민호 헤르메스 토마스 하데스 갤리. 놔둬도 더 안쓸 것 같은데 길어서 안올리기 아깝길래... 이것도 적어도 5개월전 글. 빙님이 풀어주셧던 썰이었던 것 같다... 자잘한 설정 안쓸게여 귀찮음




"안녕, 갤리."
"아 제발."

갤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몸을 말아 엎드리고 말았다. 시발, 악몽이면 제발 깨기를. 특정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악몽 자체에 가까운 존재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런 소리를 지껄이게 만드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뉴트는 실실 웃으며 반으로 접힌 갤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다시 목소리를 지껄였다. 잘잤어?

이 극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데미갓이 햇빛이라고는 들지않는 지하세계에 뜬금없이 쳐들어온지 이제 이틀이 되었다. 밤낮 구분도 안되는 유황가스가 가득한 영혼의 둥지에 걸어다니는 대리석 조각이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몇몇 간수들이 뉴트가 페르세포네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 끌려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카더라 통신을 쑥덕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뉴트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사실 갤리의 입장에서는 그것말고도 문제가 많았다. 일단 간수들의 카더라 통신은 당연히 개소리였다. 갤리는 아버지가 저의 정부인을 지하세계로 끌어들인것 마냥 뉴트를 납치한 적이 없었다. 납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되도록이면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는게 사실이었다. 등장하면 모두가 알게모르게 한걸음씩을 물린다는 하데스의 데미갓은 이 자기 어머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받아온 대리석 조각의 옆에서 수근거림을 받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따라서 한 달에 두어번 있는 데미갓의 회의장에서도 절대로 뉴트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사실 갤리가 얘기를 섞는 데미갓이래봤자 몇 없기는 했다. 끽해야 토마스나 민호 정도일까. 그래도 뉴트는 갤리에게 있어 일종의 기피대상이었다. 그 외모를 보고 누가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회의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온갖 시선을 다 끌어오는건 갤리나 뉴트나 마찬가지였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과 기름, 전혀 비슷하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 자의 사랑을 받는 미의 여신의 아들과 산 자의 마지막을 받아가는 죽음의 신의 아들. 토마스가 계속 쳐다보는 것 같다고 옆구리를 찔러대도 정전기때문에 따갑다고 성질을 부린 것이 다였다. 그러니 더욱더 황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착선언이라는 해괴한것 말이다.

중요한 선언이 있다고 일어나길래 갤리도 당연히 뉴트에게 시선을 줬었다.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 허리에 손을 얹고, 뉴트는 자신의 인기가 너무 피곤하다는 말을 자기입으로 지껄였다. 어이가 없었으므로 갤리는 그쯤에서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뉴트는 말대로 외모 덕분인지 뭔지 남녀를 가리지않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므로 태클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신봉자는 아예 고개를 맹렬히 끄덕이거나 네가 귀찮게 해서 그런 것이라고 다른 사람의 팔을 찌르기도 했다.

지랄하네 진짜. 짧게 끝났을 회의를 굳이 이어붙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갤리는 앞에 나와있는 빵을 손으로 집어 하릴없이 입으로 넣었다. 두 번 정도 씹었을 때 뉴트가 이제 자신은 한사람에게 정착하고 싶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하긴, 이런데서 공식적으로 선언하면 더이상 작업이 걸리지 않을테니 원전차단의 현명한 방법이기는 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는건 아니라고 선언한다고 진짜로 작업이 끊길리는 없겠지만, 임시방편은 되겠지.

회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기대에 가득찬 눈을 한 사람이 못해도 열댓명은 되는 것으로 보아 피곤하다고 한 것 치고 자신의 인기를 있는데로 누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갤리는 빵을 여덟번 정도 씹었고 이제 빵은 목 뒤로 삼켜도 괜찮을 수준으로 뭉개졌다. 딱히 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갤리는 목울대를 움직였고, 동시에 뉴트가 여러 데미갓들 사이를 훑던 손가락을 갤리에게 겨누고는 여러사람 뒤로 넘어가게 만드는 웃음을 지었다. 난 이제부터 갤리한테만 붙어있을거야.

회의장은 경악에 물들었다. 갤리는 반쯤 넘어간 빵을 소리나게 삼켰고,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는 민호가 앉아있었고 그는 회의장에서 유일하게 평안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민호가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면 뉴트가 선택한게 저가 아니라 민호인줄 알았을 것이다. 갤리는 어깨에 올라온 민호의 손을 봤다가 곧 온세상의 놀라움과 영문모름을 끌어모은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워 본인을 가리켰다.

나? 너무 황당해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갤리는 입모양과 표정만으로 의사전달에 성공했다. 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장은 비로서 침묵을 깨고 태초의 혼란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몇 명은 울기까지 했다. 넓은 회의장 안에서 갤리와 뉴트를 보기위해 대부분의 데미갓이 중앙 쪽으로 몰려들었고, 엄청난 수근거림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갤리는 한 손에 먹다남은 빵을 든채로 입을 다물줄을 몰랐고 뉴트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갤리의 앞에서 멈춰서서는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시야가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더니 입에 빵이 아닌 것이 닿았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갤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다. 한 단어가 끊임없이 머리에서 돌아다니고 있기는 했다. 씨발.

그리고 3주를 지하에 쳐박혀있었다. 세상에. 갤리의 어머니는 지상에 돌아다니는 소문을 듣고는 지하의 입구까지 찾아와 아들에게 도망쳐다니는건 별로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충고했다. 엄마도 도망쳐다니다가 이꼴이 났잖니. 역마살까지 유전되는지 알았다면 지하세계로 보내지 않았을텐데.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은 다정했고, 갤리는 웃었지만, 그렇다고 지상에 다시 올라갈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재회가 끝나고 내려오자마자 입구의 가디언들에게 뉴트가 기웃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망할 새끼. 세간에서 사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저일텐데.

그리고 대망의 3주 후 갤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뉴트는 모로 누워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그리웠어, 내 사랑.

미친. 갤리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낙하의 고통에서 벗어난 갤리가 처음 한 일은 일단 뉴트의 몸을 미친듯이 더듬어보는 것이었다. 죽었어? 죽은거야? 패닉상태에 빠진 갤리를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날것만치 웃으며 보던 뉴트는 일단 갤리의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쪽. 멍해진 틈을 타 얄미운 목소리가 파고든다. 미인계 좀 썼지. 안죽었으니까 걱정마. 좀 더 만져줄래?

일단 주먹을 날릴 계획이었으나 그 곱상한 얼굴이 때릴거냐고 묻는 통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익은 얼굴로 당장 나가라고 윽박을 질러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팔을 뻗어 얽혀들어오는 통에 밀어내다가 또 떨어질 뻔 했다. 3주나 기다리게 해놓고 정말 너무하다고 우는척을 해대는걸 간수를 불러 끌어내려다가 하데스에게 허락 받고 들어온거라는 말이 너무 황당해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거짓말이지? 반 분이 지나서야 나온 한마디에 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그래서 뉴트는 갤리에게 뒷목이 잡혀 지상으로 질질 끌려갔다. 중간에 뱃사공과 문지기에게 유황불에 구워지고 싶냐는 윽박을 내지르는 것도 물론 잊어버리지 않았다. 햇빛 가득한 지상에 뉴트를 던져버리고 손을 턴 갤리는 미련없이 지하의 문을 닫으려고 했고, 뉴트는 재빨리 손을 집어넣어 강제로 틈을 만들고는 억지로 버텼다. 잠깐! 잠깐! 보여줄거 있어! 잠깐만 봐봐! 보면 마음이 바뀔거야!

되도않는 수작 부리지 말라고 억지로 문을 닫으려고 하는 갤리에게 뉴트가 다급하게 내민 것은 무려 석류알이었다. 시발. 육성으로 나오는 욕과 함께 순간적으로 갤리의 팔에서 힘이 빠진다. 틈을 놓치지않고 문을 열어재낀 뉴트가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득의양양한 표정이 아주 때려주고 싶을만큼 얄미워서 갤리가 뉴트의 정강이를 실제로 차버리고는 다시 윽박을 질렀다. 그거 내놔 이 미친 싸이코 새끼야!

당연한 얘기지만 뉴트는 석류알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한 번만 쫓아내려고 들면 이걸 먹어버릴거라고 협박을 일삼기까지 했다. 확인차 한 알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봐도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짜 지하의 석류알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뉴트의 손에는 아직도 다섯개가 넘는 석류알이 있었고, 확실히 말하지만, 이건 미친짓이었다. 대체 어디서 난거냐는 추궁에 뉴트는 페르세포네의 이름을 댔다. 뒷목이야. 갤리는 될 수 있다면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었다.

페르세포네. 지하세계의 안주인. 널리고 널린 데미갓들 중에서 하데스의 데미갓이라고 알려진 사람은 갤리가 유일했다. 하데스가 원채 지하세계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인 탓도 물론 있었지만, 안주인의 한이라는 것이 워낙에 강해서기도 했다. 하데스가 제우스같은 소위 난봉꾼이 아닌탓에 헤라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지하세계의 안주인 성정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꽃만 잘 피우다가 갑자기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인생이 저당답힌 이 불쌍한 여인은 수세기의 겨울동안 지하에 살면서 하데스의 옆을 지키다가 혹시라도 하데스가 불륜을 저지르면 친히 철퇴를 내렸다. 억지로 끌려와서는 지극정성으로 사랑받느라 미운정 고운정 다 들은 탓도 있긴했지만 약탈혼을 당했는데 남편이 불륜까지 저질렀을 때의 분노는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임이 당연했다.

갤리가 자신이 데미갓이라는 정체성을 깨달을 때 쯤 갤리의 어머니는 페르세포네에게 밟혀죽어 민트가 되었다는 님프인 멘테의 이야기를 해주며 살고싶으면 조용히 있는게 상책이라는 말을 해주었고 갤리도 이것에 동의했다. 데미갓이고 뭐고 아버지 없이도 자신을 이미 훌륭하게 키워낸 굉장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정부인에게 밟혀서 무언가의 풀로 변모하는 것은 갤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히 산다고 티가 안나는 것은 아닌듯 갤리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무려 페르세포네가 모자를 찾아왔다. 자기소개를 받자마자 갤리는 경악했고 어머니는 침착하게 야구배트를 들고 있었으나 페르세포네는 다행히 모자를 폭행하거나 어머니의 머리채를 쥐어뜯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일단 갤리를 안아주었다. 바짝 얼은 갤리가 어떻게도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는 중에 갤리에게서 떨어진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고생이 많으셨다는 얘기를 꺼냈고, 어머니는 야구배트를 든채로 울컥 울음을 토해냈다. 처음보는 눈물이었다. 어머니가 진정이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페르세포네는 원망은 하데스에게 모두 쏟아놓고 왔다면서 어쩔줄 모르는 갤리에게 웃어보였다.

솔직히, 같이 지낸 햇수가 몇인데 아들 하나 밖에서 만들었다고 예전처럼 분노 하기에는 좀 어렵죠. 페르세포네는 홍차를 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상에 돌아다니는 데미갓이 몇 명인데 한 명 정도는 있어도 아무렇지 않달까, 오히려 자기 아들이 생긴 것 같아서 기쁘다고 얘기하는 미모는 가히 인간의 것이 아닌게 확실해 보였다.

물론 한 세기쯤은 각방을 쓸거지만 어차피 갈릴레오씨도 꼬임 당한걸테니까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마친 페르세포네는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갤리 모자에게 지도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선명하게 적혀있는 Underground라는 글자에 갤리는 침묵했고, 페르세포네는 깔깔 웃으며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지하에 들어간다고 영영 헤어져야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원하는 때에 만날 수도, 원한다면 한 50년쯤 후에 와도 상관없다는 말에 갤리 모자는 서로를 마주봤다.

제가 심심해서 그래요. 페르세포네는 결정적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갤리와 갤리의 어머니는 초전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너무 오래 지하에 있었고, 지하에는 재밌는거라고는 끌려온 영혼들을 괴롭히는 것 정도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권태기고 뭐고 이제는 질투하기도 귀찮고, 남편의 아들이면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법하니 지하에서 일하는걸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다.

페이는 어떻게 되는데요? 이게 갤리가 겨우 뱉은 말이었다.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경제사정이 좀 어렵기는 했다. 어머니 혼자 벌어서 대기에는 학비가 갈 수록 비싸지고 있었고, 몇 달 뒤면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다. 페르세포네는 웃었다. 당연히 원하는 만큼 드리죠. 괜히 플루토스라고 불리는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갤리와 갤리의 어머니는 지하의 입구가 있는 근처의 도시로 이사왔다. 처음 마주한 하데스는 매우 무서웠다. 크고, 음, 컸다. 갤리도 덩치라면 어딜가도 뒤지지 않는다지만 신하고 비교해서야. 하데스가 갤리에게 처음 한 것은 사과였다. 갤리는 태어나서 17년만에 만난 아버지의 진심어린 사과를 얼결에 받아들였고, 정식 데미갓으로 인정 받은 뒤 지하의 업무를 담당했다. 어머니는 만날적마다 혈색이 좋아지더니 친구들과 다니는 여행에 대해서 떠들어주었다. 그동안 혼자 갤리를 키우느라 뼈빠지게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린다는 뿌듯함이 좋았고, 지하의 업무는 의외로 갤리의 적성에 맞았다. 원래부터 여기가 제자리였다는 양 지하는 매우 익숙했다. 몇 년 지나서는 영혼들이 유황불에서 질러대는 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잘 수도 있게 됐으니 그야말로 천직이라 하겠다.

이야기가 빠졌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자면, 페르세포네는 일단 갤리를 아꼈다. 아들처럼 생각된다고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갤리가 실수를 저지르면 하데스를 구슬려 벌을 받지 않게 해준다거나, 갤리가 바쁘지 않으면 온종일 같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지하에서 사는 것은 수세기가 지나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페르세포네는 또한 재미있겠다 싶은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뉴트가 미인계를 써서 산채로 지하에 들어와 자신이 회의장에서 저지른 일과 갤리가 3주동안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페르세포네에게 전했다면, 뉴트가 부탁도 하지 않은 석류알을 넘겨주며 갤리를 구워삶을 이야기를 들려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였다. 아, 양어머니. 차라리 갤리를 미워해서 한 일이라면 가서 따지기라도 하지.

결론적으로 갤리는 뉴트를 쫓아내지 못했다. 억지로 뺏으려고 하기가 무섭게 입에 털어넣어버리길래 기겁해서 뒤통수를 갈겨 뱉어내게 한 뒤로는 나가라는 말의 나자도 꺼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뉴트는 갤리가 하는 일을 구경하려다가 케로베로스에게 다리를 뜯길뻔하고 얌전히 페르세포네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종일 안보이길래 어쩌면 돌아갔겠구나 싶어서 안심했더니 잠자리에 눕자마자 문을 열어재끼고 뛰어들길래 다시 급하게 케로베로스를 불렀더랬다. 주인의 절규를 들은 케로베로스는 충직하게 뉴트를 방 밖으로 끌고나갔고, 그래서 나름대로 편안하게 간밤을 보냈는데.

"케로베로스는 대체 어쨌어? 방 앞에서 지키고 있었을텐데."
"공놀이 되게 좋아하던데. 페르세포네님 방에서 잘 놀고있을테니까 걱정마."

아, 양어머님. 단단하게 맞물린 팔을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갤리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뒤로 드러누웠다. 아주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타려는 몸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져버리자 뉴트가 징징대며 도로 몸을 붙여왔다.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돼. 갤리는 이제 막다른 길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도 도망쳐다니다가 이꼴이 났잖니. 젠장.

"뭐때문에 이따위로 나오는거야? 너 나 알아? 아주 매정한 사실을 하나 말해주자면, 난 너 모르거든. 언제 그렇게 얘기를 나눴다고 지금- 아니, 너 그런 눈 하지마. 하지말라고. 그만 못둬? 내가 열뻗쳐서 진짜."

버려진 사슴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뉴트에게 성질을 부린 갤리가 배게를 들어 뉴트의 얼굴에 대고 눌러버렸다. 저놈의 얼굴. 뉴트는 킥킥대며 갤리의 팔을 잡아내리더니 배게를 안고 손가락에 입술을 눌렀다. 잡힌 팔에 소름이 돋는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당장 빠져나가려는 손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던 뉴트가 기어이 혀를 내어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갤리가 두번째 배게로 뉴트의 얼굴을 강타해버린다.

"대답이나 해 미친새끼야! 너 나 아냐고!"

이젠 슬슬 진짜로 무서워진 갤리가 기겁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나한테 자기를 아녜! 데굴데굴 구르는걸 발로 차버려서야 겨우 멈춘 뉴트가 예고없이 벌떡 일어나서는 또 갤리에게 입을 맞췄다. 슬슬 얼굴이 다시 익기 시작한다.

"당연히 알지. 부끄러우면 성질내고, 스킨쉽하면 얼굴 빨개지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한테 약하고. 어떻게 모르겠어. 되게 섭섭한데. 설마 진짜로 몰랐어?"
"그러니까 대체 뭘-"
"내가 너 좋아하는거."

다시 배게가 얼굴을 강타한다. 이번에는 갤리도 당황했는지 반쯤은 과장스러운 액션으로 꽥소리를 내며 쓰러진 뉴트를 황급히 일으켜 세우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반사작용 급으로 쳐놓고 미안해하다니. 아직도 어버버거리는 얼굴을 앞에 두고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뉴트가 갤리의 얼굴을 주물거렸다. 갤리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니까 몰랐을만 하나. 네가 눈치가 조금만 있었어도 이런 도박수는 안뒀을거라고."

도박수라니. 자기자신도 이게 어이없는 짓이라는걸 알고 있다는 것이 제일 웃기는 부분이다. 갤리는 자신을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구겨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눈을 위쪽으로 굴렸다. 눈치, 눈치라. 페르세포네나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유도리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들은적은 있었지만 눈치라고 하면 나름 있는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응력이 뛰어났고, 지하의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으니 정말 뉴트의 말대로 눈치가 개똥이었다면 진작에 떨어져 나가버렸을 것이었다.

갤리는 여전히 구긴 얼굴로 다시 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아프로디테의 아들 타이틀에 걸맞는 훌륭한 얼굴이다. 갤리는 손을 들어 이번에는 자신이 뉴트의 얼굴을 잡고 주물럭대기 시작했다. 뺨을 쭉 늘렸다가 입이 튀어나오도록 눌러보기도 하고, 위아래로 흔들거나 휙휙 양옆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초반에 언급했다고 생각하지만 갤리는 뉴트와 딱히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미의 여신의 아들과 난봉꾼이라는 타이틀이 같이 곁들여져 있는 놈을 뭐가 좋아서 쳐다보겠는가. 그리고 말했듯이 물과 기름이다. 관심을 보였대도 연애쪽엔 영 경험이 없는 갤리로서는 알아봤을지 확실하지 않기는 했다. 갤리는 주물거리던 손을 멈추고 뉴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기억, 기억. 데미갓의 회의장에 나가게 된지는 꽤 오래됐다. 첫 날은 흐릿하다. 다만 하데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여러의미로 모든 청중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의장은 제우스의 데미갓인 알비였고, 민호와 프라이도 있었다. 토마스는 회의장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년이나 2년. 뉴트. 뉴트는 언제부터 있었나. 갤리는 지하에서도 깨끗하게 빛나는 금발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라고 물으면.

갤리는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뉴트의 얼굴을 놓았다. 회의장에 처음부터 있었대도 크게 달라질건 없다. 갤리가 신경쓸 일은 차고 넘쳤다. 지하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이 터지고, 회의장에서 하는거라고는 앉아있다가 의제나 의제에 따른 반응이 마음에 안들면 불퉁하게 얼굴을 구기는 것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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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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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민 Thinking

연성/Maze Runner / 2015. 6. 26. 16:45
나는 점점 미쳐가고있다.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사실이다.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제어하기 어려워지고 있었고, 평소에 내보이던 냉정함이나 합리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뇌를 갉아먹는 바이러스는 실제일리 없는 환청을 만들어 내며 나를 침식하고 있었으며 머지않아 나를 완전히 망가뜨릴 것이다.

알고있었다. 사실이다. 마치 점심매뉴를 읽는듯한 태도로 그 미치광이 같은 쥐 선생이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 부터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내 미래가 되었다. 다 상관없었다. 알비는 죽었고 다른 아이들도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 따위는 없었다. 미로에서 뛰어내렸던 그 때부터 쭉 그랬고 새삼스럽게 생존에 대한 갈망이 짙어지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끈을 끊어버리니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곧바로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없었다.

버그에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못생긴 쇼파에 누워있었다. 나간 일행들이 수확을 갖고 돌아올지에 대한 기대 같은건 없었다. 다만 우리는 탈출했고, 나는 목표를 달성했다. 어쨌든 우리는 위키드에게서 벗어났으니까. 그 한스라는 의사를 잘 찾는다면 민호와 토마스는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것 밖에는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온다. 지금 당장 발광을 하며 뛰어다녀도 아무도 모를 것을 알았지만 참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 따위는 보고싶지 않았다. 미쳐서 소리를 지르며 꽥꽥대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는 참을셈이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문득 쇠창살에 달라붙어 비명을 지르던 광인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토마스가 제 때 쪽지를 봐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손을 올려 얼굴을 덮었다. 모든 생각을 지운다. 뇌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은 바이러스를 억제하는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캄캄한 어둠 위로 얼굴이 떠오른다. 미쳐 소리지르는 것은 싫었고 있는대로 오열하는 것도 싫었지만 눈물 정도는 흘릴만 했다. 자신은 곧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미래를 불과 몇 걸음 남겨놓고 있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우스갯 소리로 삼을 수도 없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듣고있지 않다.

"민호..."

두려웠다. 미치도록. 다 거짓말이다. 살고싶다. 보고싶다. 적어도 마지막은 함께일거라고 생각했다. 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진작에 깨달았다면 좋았다. 미로를 탈출하고, 지하통로를 나가고, 햇빛에 몸을 그을려가며 도착한 끝에서, 전부 끝났다고 말하는 그 빌어먹을 입을 짓이겨버렸어야 했다. 희망 같은건 없었다. 끝나지도 않았다. 자신은 면역자가 아니었으며 그저 불쌍한 대조군 그룹의 쥐새끼였던 것이다. 애초에 함께할 수 있었을리가 없었다. 멍청한 자신. 빌어먹을 위키드.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모조리,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루로 만들어버린 후 자살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명단에 민호가 없었으니까.

그래. 민호는, 민호는 면역자였다. 광인이 아니었고 아직 살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나와는 다르게.

어떻게든 민호를 그 엿같은 곳에서 탈출시켜야만 했다. 다른걸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자신과 그것에 화를 내던 민호. 평소의 저라면 상상도 못했을 어처구니 없는 싸움. 이미 시작된 것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거라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살아야했다. 희망을 놓아서는 안됐다. 민호는 살 수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위키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미로니 시련이니 하는 진절머리 나는 것에서 벗어나서-

벗어나서?

생각을 멈춘다. 아니야. 아니라고. 버텨. 끌려가지마.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깊게 파고들지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뭐지?

나는 목표를 이뤘다. 민호를 탈출시켰고 그는 지금 광인이 들어갈 수 없는 도시에서 자신을 위키드의 손아귀에서 놓아줄 마법사를 찾고있다. 제어에서 벗어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면역인은 일자리가 많다고 했으니까. 몇년간 온종일 뛰어다니기만 했던 그가 직업을 얻는다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을, 인생을, 미래를 얻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없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다시 머리를 흔들고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내 역할은 끝났다. 남은 것은 뭐지? 서서히 미쳐가다가 토마스가 알맞은 때에 돌아와 나를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 미쳐서 발광하는 모습을 민호에게 보이고 그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것?

아니,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토마스가 쪽지를 펼쳐 볼 '알맞은 때' 라는 것은 내가 완전히 미쳐버렸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맞았지만, 그런 꼴을 민호에게 보이기 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죽는 것이 나았다. 그런걸 보일바에는 정말로, 죽는 것이.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않으려고 할 수록 이미지가 또렷해진다. 민호. 글레이드의 치프러너. 자신감 있게 웃는 얼굴, 휘어지는 눈, 다부진 어깨, 굵은 목. 조르는 상상을 한다. 손등에 힘줄이 붉어질정도로 세게. 터질듯이 빨라지는 맥박은 이기적이다. 나에게는 없는 면역항체가 돌아다닐 피. 박동. 멈췄으면 했다. 자신과 똑같이 되기를, 자신과 한시에 숨을 멈추기를.

차라리 명단에 민호의 이름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거다. 같이 의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행이 빠른쪽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광인으로 미쳐간대도 둘이라면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아니. 둘이라도 견디지 못했을지도,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빌어먹을 플레어 바이러스. 터져나온 울음이 결국 쇼파로 흘러든다. 진행수준이 가속도화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부터 생각한다. 민호는 살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 것이다. 행복하게, 평범하게, 바라던대로. 설사 자신이 옆에 없더라도.

버그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천 번하고도 스물네번째.

민호의 목이 졸린다.

손톱이 다 닳았다는걸 눈치채고 반대쪽 손을 든다. 까득까득까득. 그런 작은 소음 따위는 진작에 묻혀버린다. 비명소리. 여자의 비명소리. 끊임없이 소리친다. 드잡이하는 소리와 꽥꽥거리며 울음을 토해나는 소리.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 불타는 소리.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건 진작에 포기했다. 상관없었다. 그런 소리는 사방에서 나고 있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저 소리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참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이곳에 온지 얼마나 흘렀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한테 욕을 갈겼던 경비원의 머리를 짓이긴 다음 전기총을 뺏었고, 그나마 정신이 멀쩡해보이는 광인 그룹과 친분을 맺긴했지만 그뿐이다. 가까이 가고싶지 않았다. 혼자있고 싶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자초한 고립상황에서 뇌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든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박동이 멈춘다.

상상속에서 민호는 축 늘어져 생기를 잃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웃는다. 자지러지도록 웃어재끼며 늘어진 민호를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잠근 것 처럼 뚝 웃음을 멈췄다. 비디오처럼 장면이 다시 반복재생 된다. 다시 위에 올라타면 민호는 살아나 반항을 시작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민호는 웃고있다. 광인의 웃음. 내가 지었던 것과 같은 웃음.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목에 댄다. 죽여줘. 나를 죽여, 뉴트.

경비원 두명이 찾아와 친구들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나는 꺼지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냈다. 친구라는 말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안다. 만나기 싫었다. 아니, 만나고 싶었다. 토마스가 쪽지의 내용을 읽었을까. 죽이러 와준걸까. 꺼지라고 말해도 결국에는 찾아올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도망쳐도 소용없음을 안다. 어차피 도망쳐도 나갈 수 없다. 이 소름끼치는 감옥이 내가 있을 곳이었다. 모두가 미쳐가고 있으니 내가 미쳐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그들은 결국 찾아왔다.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민호. 멀쩡해 보인다. 상한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미쳐가고 있었는데 깨끗한 도시에서 뭘 하다 온건지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미웠다. 안심이 된다. 질투가 났다. 꺼졌으면하고 바란다. 아니, 사실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있는대로 악을 쓰고 싶었다. 꺼지라고, 다시는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원하던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는 한 것 같았다. 민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같이 가자고 설득하는 목소리가 퍽 간절했다. 내가 그 목소리를 비명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도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같이 가서는 안됐다. 언젠가는 민호를 죽여버리고 말것이다. 반드시. 언젠가는.

토마스는 쪽지를 읽어주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플레어 바이러스가 장치에도 영향을 주는건지 기억이 어느정도 돌아왔다. 그 뻔뻔한 상판으로 나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진절머리 났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하는거야? 빨리 죽여. 죽이라고. 죽여달란 말이야. 목소리가 갇혀 나오지 않는다. 민호 앞에서 해서는 안될말이라는걸 알았다. 아직 그런걸 생각할 이성은 있다. 민호는 토마스를 막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계획이 실행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돌아가면 쪽지를 읽겠지. 다시 찾아와 죽여주기를 바랄 수 밖에. 그래서 난 그저 노려보며 전기총을 겨눴다. 꺼져버려. 혼자 있게 해달라고. 난 광인이니까.

결국 토마스가 나머지를 끌고 갈 때까지 내 눈은 민호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주저 앉는다. 딱딱하고 차갑고 찝찝하다. 다 상관없다. 까득까득. 나에게만 크게 들리는 소음. 민호. 마지막까지 날 쳐다보던 민호. 내가 그의 상황이었다면 그를 두고 갈 수 있었을까? 이런 끔찍하고 미쳐버린 장소에?

답은 알 수 없다. 알아봤자 소용없다. 바이러스가 침투한 뇌가 만들어내는 추론 따위는 믿을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광인이고 그는 면역인이었다. 상상속에서와는 달리.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천 번하고도 스물 여섯번 째.

민호가 웃는다.





*





차 안에서 얼핏 토마스를 본 것 같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똑똑히 시야에 박혀있었다. 민호도 같이 있었는지 기억을 살리려고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나를 찾으러 온걸까. 벤의 상태 따위를 보면 그런건 아닌 것 같지만.

연기를 내며 출발했던 벤은 채 3m도 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토마스가 안에서 뛰어내린다. 민호는 없다. 차오르는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다행스러운 감정인지도 구분 되지 않는다. 차에서 내린 것이 민호가 아니라 토마스였으므로 나는 달려들지 않고 목석처럼 서있었다. 토마스의 허리춤에 권총이 끼어져있다. 얼굴이 엉망이다. 쪽지를 읽은 것 같았다. 희열이 차올랐지만 웃지 않았다. 광인처럼 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잊어버렸다.

말을 걸길래 그냥 지껄였다. 민호는 어디에 있어? 단순히 그 문장만이 아래까지 차올라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민호는? 같이 안왔어? 멀쩡해? 날 그리워해? 다치지는 않았어? 여전히 면역인이야? 내 이름을 부르지는 않아? 죽여달라고 소리치지는 않아?

모든 질문은 묻힌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나를 설득시키려는 태도가 무언가를 건드린다. 멀쩡한척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한계를 넘기 직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서로에게 던지는 빌어먹을 광인들의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린다. 진절머리가 났다. 저렇게 될 날을 손가락으로 세보며 두려움에 떠는 나날 따위는 지긋지긋했다. 대화가 한없이 늘어진다. 권총에 끊임없이 신경이 쏠린다.

토마스가 싫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그를 위해 뭐든지 했다. 미로에서 뛰었고, 그리버를 죽이고, 사막에서 걸었으며, 힘을 합해 그를 탈출시키기 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겨우 엿같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뻐겨댄다. 화가 치밀었다. 네가 싫어 네가 싫어 네가 싫어. 결국 민호랑 남는 것은 내가 아니다. 네가 싫어. 부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죽여버리고 싶어, 토미. 네가 싫어.

결국에는 다리를 저는 이유까지 지껄여버리고 말았다.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날 끌고와 살려낸 알비. 날 치료한 클린트와 옆에서 불같이 화를 냈던 민호. 알비는 죽었다. 클린트도 죽었다. 민호는 살았다. 더이상은 기쁘지 않았다.

다리를 절게 된 후 민호는 끊임없이 날 따라다녔다. 역할이 역할이다보니 낮시간에는 마지못해 미로로 돌아갔지만, 내가 언제 밧줄고리를 만들어 그 안에 머리통을 집어넣을지 불안해서 미칠 것 처럼 행동했다. 그짓거리를 그만 둔건 1년 남짓이었다. 내가 마지못해 자살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앞에서 맹세한 그 날. 서약이랍시고 반강제로 눈을 맞추며 목소리를 새겼던 그 날. 반드시 나를 미로 밖으로 데려다주겠노라 원하지도 않은 약속을 들었던 그 날. 다리와 함께 부숴진 희망이 돌아왔던 그 날.

총을 든 손을 잡았다. 죽여. 죽여줘. 제발 죽여. 그 총으로 날 죽여. 남아있는건 없다. 미래도 희망도 빛도 모조리 빌어먹을 위키드 새끼들이 가져갔다. 다 필요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나만 있으면 됐는데. 그것뿐이었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

민호. 민호. 나의 희망. 빛. 미래. 모든 것. 나와는 다른. 죽이고 싶은. 보고싶은. 결국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었던. 미쳐버릴 정도로 소중한.

"제발 부탁이야, 토미."

총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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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

연성/Maze Runner / 2015. 6. 22. 21:55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민호는 물을 마시다 말고 토마스를 내려다봤다. 완전 기진맥진해서 거의 쓰러져있다 싶이 하던 토마스는 이제 어느정도 안정된 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로의 벽으로 조각난, 구름이 움직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

토마스가 러너가 된지 이제 꼭 3일이었다. 여전히 토마스의 달리기는 형편 없었고, 잠깐 쉬자는 말을 던지자마자 무릎이 풀려 쓰러졌지만, 토마스는 어쨌든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며칠 더 뛰면 몸도 익숙해 질 것이다. 민호는 물을 마저 들이켰다.

"전혀."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짧은 답을 돌렸을 뿐이었다. 고향. 부모님의 얼굴이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마당에 그런게 머리에 돌아다닐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있었을터다. 민호와 토마스 뿐만 아니라 글레이드에 있는 모두에게도.

"너는 뭐 기억나는거 있어?"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 사는 곳이었겠지. 태평한 말에 민호가 싱겁다는 듯이 바닥에 앉았다. 토마스가 눈을 감은 동안 머릿속에서 스치는 영상들 중에 고향에 대한 그림은 한가지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 치부해도 될만큼.

"고향이 어땠는지 궁금해?"

토마스는 고개를 돌려 민호를 쳐다봤다. 계속 누워있으면 근육이 아예 풀려서 더 뛰기 힘들어질 것이다. 어제였다면 억지로 일으켰겠지만 민호는 시선을 맞춰오는 갈색을 직시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토마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하늘로 얼굴을 돌렸다. 담쟁이 덩굴이 벽위까지 뻗어서 시야 구석을 녹색으로 만든다.

"응."

토마스는 제 고향이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무척 더운 곳이거나, 무척 춥거나, 아니면 숲 또는 바다가 있었을 수도.

바다. 바다라. 토마스는 바다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토마스가 알고있는 바다에는 강렬한 햇볕 같은 것이 없었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색조가 없는 차분한 바다.

제 고향에는 그런 바다가 있었을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는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바다는 검고 불투명하다. 토마스는 제가 바다에 빠진 경험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다. 흐릿한 기억들은 끌어올리려하면 엉망으로 흩어진다. 토마스는 눈을 깜박였다.

"너는 고향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민호는 눈을 굴렸다. 아까 전혀라고 대답했던 것과는 달리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스에서 눈을 떠 제가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잠이 오지 않거나 너무 힘들어서 토하고만 싶을 때 같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생겼으니까, 고향도 아마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까. 민호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자원했든 끌려왔든 이 글레이드에 오지 않았다면 저와 아이들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었을 것 같다는.

"별로."

토마스에게서의 반응은 없었다. 민호는 제 고향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민호에게 중요한 것은 미로의 출구를 찾아내 글레이드에서 탈출하는 일이었다. 고향이 어떻고 하는일은 올라온 초창기에나 고민했던 일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토마스는 올라온지 일주일도 안됐지. 토마스는 불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애된 휴식시간에서 1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민호는 반정도 남은 물병을 토마스에게 던졌고 토마스는 물병을 비우고 완전히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다.

"돌아갈 수 있을까?"

마저 일어서서 준비운동을 하던 민호는 토마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까만눈이 옆으로 굴러간다. 돌아간다, 라.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이 미로를 탈출한다면.

"글쎄."

우선과제는 미로를 탈출하는 것이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일단 탈출하고, 밖으로 나가면, 그 다음은? 그러나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만약 기적처럼 기억이 돌아온다면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게 될까. 고향에는 부모님이 있을까. 아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익숙한 나무와 그리운 표지판 같은 것이 있을까. 민호가 글레이드에 올라온지는 3년이었다. 무언가가 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토마스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민호는 말없이 그 웃음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부럽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어서. 토마스는 눈을 깜박였고 민호는 먼저 다리를 움직였다. 시간에 맞춰 글레이드로 돌아가려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지 않으면 안된다. 해는 언제나처럼 질 것이다.





모든 글레이더들이 갖고 있는 향수병에 관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자세하게 풀고말리라.. '돌아갈 곳'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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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의 눈은 굶주려 있었다. 토마스의 눈은 그것보다는 절박한 것에 가깝다. 갤리와 민호는 그 바짝 마른 진흙같은 감정들을 무시하는 법을 알았다. 모른척 지나친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다. 뉴트와 토마스는 제 감정들을 토악질 할 곳이 필요했다. 구멍 뚫린 쓰레기통. 악취나는 국물을 흘려보낼 구덩이.

뉴트와 토마스의 키스는 사실 키스라기 보다는 짐승들이 서로 혀를 물어 뜯으려는 행위와 더 비슷하게 보인다. 만약 뉴트와 토마스가 각자 자신들의 파랑새에게 키스를 한다면 훨씬 부드럽고 애정이 담기겠지만, 그건 배려일 뿐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키스가 얼마나 부드럽던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대의 혀를 물어뜯어 삼키는 것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상대의 일부분이라면 어딘가의 신화처럼 전부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렇게하면 도망가거나 거부당할테니까 부드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뉴트와 토마스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간다거나 거부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진정으로 원하는 키스를 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할 정도로 이를 세워 물어뜯고, 질릴 때 까지 상대를 취한다.

뉴트가 토마스에게 쏟아내는 것은 폭력에 가까웠지만 토마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토마스가 받아내는 것은 민호의 폭력이다.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뉴트는 갤리를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고 토마스는 민호가 저를 마음대로 다뤄줬으면 했다. 뉴트는 토마스가 관계중에 시선을 돌리거나 피하는 기색을 보이면 망설임 없이 뺨을 갈기고 이를 드러냈다. 토마스가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관계가 끝난 후 뉴트가 약을 던져주거나 미안해 하는 일도 없다. 둘의 이해관계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다른 그림의 퍼즐이 어쩌다가 귀퉁이가 끼워맞춰진 듯이.

관계가 끝난 후에 남겨지는 것은 토마스의 쪽이었다. 여운을 즐기거나 같이 풀밭에 누워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관계가 끝나면 같이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대부분 토마스가 제대로 일어나서 걷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뉴트가 알아서 떠나는 것이었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과 터진 코피나, 엉망진창인 하체를 두고 토마스는 온갖 애액이 튄 풀밭에 길게는 몇 시간이고 누워있고는 했다. 뉴트와 토마스가 숲에 들어간 이후에 토마스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글레이드의 누구도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이나 비료를 퍼오는 일이라면 정가운데를 통과하는 루트만을 이용했다. 직접 말이 나온적은 없지만 글레이드 안에서 네명의 관계를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토마스가 숲 밖으로 나오면 어김없이 척이 달려나와 부축해주려 힘쓰고, 토마스는 그걸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고마워 척. 해사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의 시선은 언제나 민호에게로 향한다. 하던걸 멈추고 못박힌듯 서서 자신을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토마스는 눈웃음을 짓는다. 안녕. 그러면 민호는 다시 못본척 시선을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것이다. 상태가 심한 날은 제프와 클린트에게 갈 때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해먹으로 향한다.

척은 상냥한 아이였다. 토마스를 부축 한 뒤에 따라오는 민호의 은근한 압박에도 꿋꿋이 토마스를 도와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척은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척은 넷 중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고, 그 사실은 토마스를 말리거나 뉴트를 찾아가거나, 민호와 갤리에게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보이는 부분마다 자줏빛으로 물들어있는 토마스를 보고도 태연히 제 일을 할만큼 무심한 성격이 되지도 못했다. 토마스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남기지만 척이 그런 토마스를 나무라거나 답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척은 방관자였고, 글레이드의 모든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어쨌든 구원을 바라지 않는 것은 네 명이었으니까.

어느 날에는 숲에서 나온 토마스의 목에 손자국이 나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목을 졸렸던 흔적이었고, 척은 대번에 놀라서 감자를 깎던 것을 팽개치고 토마스에게로 달려와 화를 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거라고, 처음으로 척이 타르 구체에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러너 장비를 고치는줄 알았던 민호가 보폭을 크게 해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토마스도 척도 망연히 민호를 올려다봤고, 민호는 망설임없이 토마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척의 비명에 다른 아이들도 놀라서 뛰어왔다. 기겁한 알비가 둘을 힘으로 떼어놓자마자 바닥으로 주저앉은 토마스가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알비를 신경도 쓰지 않고 민호가 한마디를 뱉었다. 두 번은 없어. 끝없이 기침을 토해내던 토마스는 충혈된 눈으로 민호를 올려다봤고, 흐려진 헤이즐에는 분명한 증오가 담겼다.

그 때의 민호의 표정이란. 토마스와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척은 할말을 잃고 마른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 희열. 그 끝도없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검은 눈에 들어찬 만족감. 상황이 달랐다면 토정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토마스는 기어코 바닥에 토악질을 쏟아냈고 민호는 자리를 떠났다. 웅성대던 아이들은 민호를 따라 자리를 뜨거나 속을 게워내는 토마스 곁에 남아 토마스가 제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물론 그런 용기있는 아이들은 척과 알비를 포함해 4명 정도였고, 토마스는 이번에도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이 토마스가 민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라는걸 척이 아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민호와 갤리는 뉴트와 토마스의 끝없는 애정을 전혀 받아주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공통점의 이유는 전혀 달랐다.

갤리. 갤리는 어떠한가. 갤리는 뉴트를 싫어했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갤리는 뉴트에게 무관심했고, 뉴트가 무엇을 하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것이 뉴트를 가장 상처줄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여서 썩어가는 증오의 출처는 오래된 글레이더들이라면 모두가 쉬쉬하는 어떠한 일 때문이었고, 그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갤리나 뉴트 본인들 마저도 그랬다. 갤리와 뉴트의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다. 치프빌더의 실력은 과연 훌륭해서 그 골짜기는 매우 견고하고 튼튼했는데, 갤리에게 삽을 쥐어준 장본인인 뉴트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민호는 어떻게 다른가. 일단 전제부터가 달랐다. 놀랍게도 민호는 토마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토마스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같았으나, 그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한하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하는 목적까지는 갤리와 같다. 그렇게 하면 토마스가 상처받을 테니까.

민호는 토마스가 처음 자신을 동경 이상의 감정으로 바라보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오의 햇볕보다 더욱 반짝이던 그 투명하고 곧은 눈. 자신이 몸을 움직일 때 마다 기적을 보고 있는 듯 경탄에 차던 시선. 민호는 그런 눈부신 감정들을 내비칠 수 있는 다갈색을 가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손가락을 넣어 눈알을 파낼 수준으로. 글레이드에는 룰이 있고 그중에서 다른 글레이더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항목은 1순위다. 거기다 토마스는 러너였으니 눈이 없어서는 달릴 수가 없다. 민호는 어쨌든 다른 방법을 추구해야만 했다. 손에서 직접 촉감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확실한 방법.

사실 이제 토마스의 눈은 반짝이지 않았다. 다갈색에 담기는 것은 햇볕이 아니라 민호의 검은 머리였고, 누군가는 토마스의 눈에 기름때가 꼈다고 표현했다. 다갈색은 도저히 다른 색을 눈에 담으려하지를 않았다. 한곳에 박힌 시선이 말하는 감정들은 민호의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진다. 봐줘. 봐. 나 좀 봐줘. 사랑해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심한 그 소리는 비올라에서 콘트라베이스까지 음역이 낮아진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같은 스펙트럼에 존재하는 감정들이다. 보이는 것이 어떻든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다갈색이 담는 감정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자신을 향했으면 했다. 다양하면 다양할 수록 좋다. 민호는 토마스가 하루빨리 망가지기를 바랬다. 민호가 없으면 움직이지는 것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그러니까, 지금의 민호는 말하자면 인내중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토마스가 뉴트를 자신의 대역으로 생각하고 섹스하는 것은 허용범위였다. 뉴트마저 토마스를 갤리의 대역으로 생각하니 더할나위 없다. 애초에 뉴트에게 귀띔을 넣은 것 자체가 민호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은 직접 보기까지 했다. 남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불러대는 토마스의 목소리.

토마스도 민호의 의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숲에서 엉망인 상태로 나올적마다 민호가 저를 쳐다보는 눈을 마주했을 때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호는 토마스를 싫어하는게 아니었다. 다소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민호는 토마스를 사랑했다.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민호가 원하는 수준까지 자신이 망가진다면 민호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이 관계에서 토마스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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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울었다.


갤리는 유리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시원한 나무바닥. 창틀이 갈라놓은 사각형이 갤리의 몸 굴곡에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민호는 신발을 벗고 스포츠백을 든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 몸이 땀범벅이다. 일사병으로 죽는건 아닐까 싶을 때에서야 세면대에서 찬 물이 쏟아졌다. 매미 소리에 물소리가 섞였다가 뚝 잦아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분다.


민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화장실을 나와 바닥에 버려져있는 스포츠백을 방에다 던졌다. 안에 들은 물병이 바닥과 부딪혀 덜그럭대는 소리를 냈다. 민호가 문턱 너머로 갤리쪽을 쳐다봤지만 미동도 없다. 침대도 쇼파도 전부 놔두고 이 더운 날에 햇빛에 누워 자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배게도 없이 팔을 베고. 옷까지 전부 갈아입은 민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갤리 앞에 섰다.


살짝 손 대본 갤리의 팔은 지나치게 찼다.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 중이다. 들어올 때는 시원했지만 아무래도 온도가 너무 낮은 것 같아서 민호가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껐다. 에어컨 틀어놓고 자지 말라고 이틀 전에 잔소리 한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얼굴로 자고있다. 혀를 찬 민호가 쇼파에 개어져있는 담요를 끌고와 갤리의 몸 위에 펼쳤다. 무늬 없는 남색 담요 위로 햇빛이 올라온다.


3:4. 아슬아슬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민호가 자리를 옮겨 쇼파에 주저앉았다. 반바지 아래 맨살에 차갑게 식은 가죽이 닿아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돌던 현기증이 아래로 가라앉아 발끝으로 나간다. 민호는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배고픈데. 무료하게 TV 리모컨을 든 민호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팟.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 다음으로 탄산수 광고가 흘렀다. 하얀색 파란색 하늘색. 멍하니 TV를 쳐다보던 민호가 볼륨을 줄이고 일어섰다.


냉장고에는 먹을만한게 없었다. 재료들은 있었지만 음식이 없다. 민호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갤리를 넘겨다봤다가 그냥 냉장고를 닫았다. 지금 요리를 하기엔 너무 시끄러울테다. TV 광고마냥 연기가 흘러나오는 냉동고에는 한칸이 꽉 아이스크림으로 들어차 있었다. 저번에 마트에서 민호가 오기로 카트 안에 쏟아부은 것들이었다. 그깟 아이스크림 좀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갤리는 항상 민호의 건강문제에 연연했다. 고맙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엄마 같아서 짜증난다.


키위 아이스크림 하나를 뺀 민호가 포장지를 벗겨 대충 싱크대에 올려놨다. 나중에 갤리가 치워주겠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돌아오자 광고가 바뀌어 있었다. 손목시계. 그러고보면 얼마전부터 시계를 안차던데.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고장 난 것일터다. 갤리가 하는 시계야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 뿐이니 아마 본인이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살까. 쓸데없는거 샀다고 또 짜증이나 내겠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준 걸 차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TV 볼륨이 컸는지 갤리가 뒤척였다. 민호는 반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빼들고 갤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부스스한 머리통을 들고 일어난다. 잠에서 덜 깬 멍한 눈이 정면에 있는 벽을 노려보다가 휙 민호에게로 돌려졌다. 가늘어진 녹색 눈이 기울어진다.


"언제 왔냐."


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4시간 전에. 갤리는 지랄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뒤로 젖혀 TV 위에 있는 벽시계를 올려다 보고는 입을 비뚤게 한다. 대략 한시간은 잔 것 같았다.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담요를 들춰본 갤리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담요를 질질 끌고 걸어와 민호에게로 던지고는 옆에 앉는다.


"경기는?"

"이겼어."


감흥없는 말에 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에 묻지 않게 빼들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방울진다. 떨어지잖아. 짜증스러운 말에 민호가 투덜대며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물었다. 닦으면 되는 걸 가지고. 갤리에게서의 대답은 없었다. 채널을 바꾸자 브라운관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봤던 경기지만 돌리라는 말이 없어서 민호가 리모컨을 내려놨다. 갤리는 아직도 졸린 눈이다.


매미소리와 관중의 함성이 넘쳐나는데도 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채 나왔다. 어지간히 졸렸던 모양이라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듯 웃었다. 웃지마라. 어제도 야근했다고. 쏘아대는 말에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인 민호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이로 부러뜨렸다.


"또 씹어먹는다."


거의 경멸하는 수준의 시선이 와서 박히는 것에 민호가 입안에 들은 나무조각을 뱉었다. 삼키는 것도 아니고 좀 봐주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걸 왜 씹냐? 신경질적인 말 뒤에 무게 때문에 쇼파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졸려서 또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군. 옆을 돌아본 민호가 제대로 심술맞은 얼굴 앞에 부러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밀었다.


"궁금하면 씹어보던지."


미쳤냐는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갤리가 민호를 무시했다. 킥킥대며 웃은 민호가 쇼파에 가부좌를 틀고 갤리쪽으로 몸을 아예 틀었다. 끈질기게 내밀어지는 막대에 짜증이 폭발한 갤리가 화를 내려고 고개를 돌린다. 벌려진 입에 그대로 막대가 들어가는 바람에 갤리가 잠시 기침을 토했다. 뭔 개짓거리야. 원한 깊은 목소리에도 지지 않고 민호가 다시 막대를 내밀었다.


고양이한테 장난감을 흔드는 듯한 태도다. 깊게 한숨을 쉰 갤리가 결국 민호 손에 들린 막대를 입에 물었다. 이거 잘못하면 가시 박힐텐데.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민호가 막대를 움직여 갤리의 혀를 쓸었다. 하여튼 취향 더럽게 이상해. 들어갔다 나오는 나무막대를 따라 갤리가 혀를 움직였다. 민호의 눈이 가늘어진다.


몇 번은 그냥 왔다갔다 하는 듯 하더니 좀 지나고 나서는 거의 혀를 찔러대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새끼가 진짜. 어느정도 맞춰주려다 결국 허에 상처가 난 갤리가 신경질적으로 막대를 어금니로 물었다. 민호가 막대를 당기자 갤리의 얼굴도 따라왔다. 몇번 쥐고 흔들다가 노려보는 녹색 눈에 실실 웃던 민호가 결국 막대에서 손을 놨다. 바닥에 뱉어진 막대가 빙빙 돌며 밀려나다 멈춘다.


"저녁."

"볶음밥."


귀찮은 것만 골라서 해달라고 하지. 투덜대며 일어난 갤리가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TV에서 흘러나오는 경기는 후반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새끼야, 네가 먹은건 좀 버리라고! 부엌에서 외쳐대는 목소리에 민호가 아까 나왔던 탄산수 광고의 CM을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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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톰 Lack

연성/Maze Runner / 2015. 5. 22. 17:58

민톰



문을 열자마자 담배향이 훅 날아온다. 민호는 눈살을 구긴채로 성큼 안으로 발을 뻗어 창문부터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이 쇼파에 시체처럼 엎드려있는 토마스에게 밀려간다. 민호는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토마스를 발로 찼다. 토마스는 미동도 없었다. 일어나 머저리 새끼야. 섹스해주러 왔잖아. 토마스는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민호를 올려다봤다.

"일어나."

제대로 짜증이 난 목소리에 더해 옆구리가 발로 짓이겨진다. 토마스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일어나서 눈이 묻은 신발에 입을 대고 혀를 내었을 뿐이었다. 씹새끼. 욕을 거르지 않고 뱉은 민호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토마스는 민호의 다리를 기어올라와 얼어있다 싶이 하는 청바지의 버클을 풀고, 속옷 위를 느리게 핥았다. 젖은 천까지 함께 입에 넣고 익숙하게 블로우 잡을 시작하면 민호가 바로 토마스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토마스와의 섹스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민호가 저 좋을대로 분노를 퍼붓는 식의 섹스. 키스도 없고 애무 같은건 더더욱 없다.

어쩔 수 없이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일은 있었지만 거부하거나 그만하라는 말을 담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더 분노가 가중되는 것이다. 토마스는 섹스중에 제 애인의 이름을 불렀고, 그것은 대부분 소위 말하는 '눈이 돌아가는' 스위치가 됐다. 목을 조르거나 머리를 잡아채 바닥이나 딱딱한 곳에 박아버리는 일도 흔했다. 관계가 끝난 후의 토마스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뼈가 부러지거나 이마가 찢어지는 것쯤은 예사다.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토마스는 병원비 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민호와 토마스의 관계는 섹스 파트너였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민호가 먼저 마음이 생겼고 토마스는 민호를 찼다. 너무 깔끔하게 차여서 뭘 해 볼 수도 없었다. 민호가 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민호가 뭔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민호를 앉혀놓고 싫다는 말을 꺼냈다. 내가 너랑 만나는건 섹스 때문이고, 난 애인이 있어. 파트너가 된지 반 년인데 전혀 몰랐다. 물론 쓸데없는 얘기를 하기 보다는 1초라도 더 몸을 더듬는게 중요한 관계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민호는 포기했다. 당연히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노력했다. 그 날 이후로는 아예 연락을 끊었고 섹스 외에는 접점도 없었으니 각자 알아서 잘 살았다. 토마스가 갑자기 문자를 보낸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주소와 숫자 네 개. 지금. 민호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옷을 챙겨 나갔다. 문자에 나와있는 주소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도어락에 숫자 네 개를 쳐 잠금을 풀었다. 안은 온통 술 냄새로 범벅되어 있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토마스는 옷을 입은채로 욕조에 들어앉아 무릎을 감싼채 찬물을 맞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건지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도 보랏빛이었다. 핸드폰이 욕실 바닥에 엎어져 튕겨지는 물을 죄다 맞고 있다.

민호는 당연히 기겁해서 물을 잠그고 토마스를 일으켜세웠다. 얼음장 같은 몸이 힘없이 끌려오더니 민호를 올려다봤다. 충혈된 눈이 빨갛게 짓물러 번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으려던 입이 토마스의 입술에 막혔다. 그렇게나 물을 맞고 있었는데도 바짝 마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들어오는 혀를 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마스의 손은 수월하게 민호의 벨트를 풀었다. 폭주하는 생각들 중에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관계 도중에 모르는 이름이 나와서야 민호는 어렴풋이 토마스가 저를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 끝난 후에 잠이 드는건 토마스의 습관이었고 민호는 아침까지 남아야할지 돌아가야할지 망설였다. 결국 선택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 번으로 끝날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예상대로 토마스는 민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두 달 뒤까지는.

"저녁 먹고 가."

민호는 신발을 신다말고 뒤를 돌았다. 이마에 거즈를 붙인 토마스가 쇼파 등받이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또 무슨 지랄이야 저건. 눈이 녹아 축축해진 신발에서 불쾌한 냄새가 올라온다. 눈 안그쳤잖아. 창문 밖은 말대로 아직 온통 하얬다. 토마스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중간에 한 번 기절 했었다. 더 하고 싶은 것도 아닐터다. 민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민호가 머리를 뒤섞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토마스는 자세를 바로 해 몸을 담요에 파묻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물어보는 말도 없이 저 좋을대로 치즈피자를 시킨 토마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입술이 찢어져서 아픈지 반쯤 벌리다 그만 두기는 했지만. 민호는 얼굴을 구긴채로 그런 토마스를 뒤에 서서 보고 있었다. 앉으라는 권유도 없다. 토마스는 아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감색 체크담요가 둥글게 말린 몸에 붙어 움직였다. 물어뜯긴 상처들이 틈으로 얼굴을 내민다. 민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호는 토마스가 부를 때 마다 매 번 집을 찾았다. 토마스는 민호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었고, 민호가 오지 않는다면 토마스가 민호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아마 노력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민호가 토마스를 찾아오는 이유는 한가지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미련이 남아서라고 하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 그런 탓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가 났다. 저를 이용하는 토마스도, 휘둘리는 자신도. 찾아가서 패기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이유 중 하나로는 동정심도 꼽을 수 있었다. 민호는 첫 날 욕조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토마스를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가 없었다. 민호가 오지 않았다면 그상태로 며칠이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죽었겠지.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힌 채 숨소리 조차 내지 않는 토마스를 그려내는 것은 지나치게 쉬웠다. 다음도, 그 다음의 다음도 토마스는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자가 올 때 마다 벌겋게 짓무른 눈이 눈꺼풀 안에서 떨어지지를 않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토마스는 완전히 잠들었다. 민호는 무릎에 쳐박혀 있는 토마스의 얼굴 언저리에 확인차 손을 갖다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았다가 스러졌다. 너무 심하게 팬걸지도 모른다. 아마 당분간은 걷기도 힘들 것이다. 자업자득이야. 중얼거린다고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호는 손 때가 탄 쇼파에 주저앉아 공연히 토마스를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토마스의 체온이 끝도 없이 내려갈 것만 같았다. 좀 부스럭대나 싶더니 토마스가 편한 자세를 찾아 민호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민호는 토마스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얘기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다고 토마스를 밀쳐내거나 혼자 가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것인지, 문자가 다시 올 때 까지 얼마가 걸릴 것인지를 생각한다. 과연 다음이라는게 있을지 하는 생각도. 간격은 들쑥날쑥했다. 뭐때문에 그렇게 자주 헤어지는건지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다. 다만 토마스가 제 애인에게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매달리는지. 입 밖에 내면 정말 제 밑바닥이 보일 것 같아 민호는 질문을 삼켰다. 토마스에게서 익숙한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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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톰1

연성/Maze Runner / 2015. 5. 10. 13:03
갤리는 추운지방에서 자랐다. 1년중 300일은 구름 아래에서 걸었고, 200일 정도는 우산을 들었다. 갤리는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에 적응하는 것에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3년째에 접어들 무렵에 만난것이 토마스였다. 친구의 친구, 그 정도의 관계였다. 전공은 기계체조 쪽이라고 했다. 1학년이라는 나이도 한몫 했겠지만, 토마스는 지나치게 새파란 빛을 하고 있었다. 갤리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토마스에게 적응하는 것에 오랜시간이 걸릴 것을 알았다.

고향은 플로리다라고 했다. 그런것 치고는 하얀데. 토마스는 플로리다 출신이라고 전부 태닝을 했을거라는건 편견이라고 투덜댔다. 기계체조는 실내체육이니까 뭐. 그래도 서핑은 좋아한다는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가 붙는다. 갤리는 평생 바다를 가본 적이 없었다. 수영장이라면 몇 번 가봤고 수영도 할 줄 알았다. 갤리는 소금물이 싫었다. 물 밖에서도 나는 지독한 비린내와 소금기 모두 마음에 안들었다.

그런것들은 금방 익숙해져요. 토마스는 강사라도 되는마냥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갤리는 지면에 발이 붙어있지 않은 것 처럼 걷는 토마스를 잠시 쳐다봤다. 익숙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갤리는 그 과정이 금방 되지는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쨌건 토마스와 갤리는 사사건건 반대였다. 그럼에도 둘은 꽤 자주 마주쳤다. 교양 중에 겹치는 강의가 있기도 했고, 갤리와 친한 몇 되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과 토마스가 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토마스의 사교성은 확실히 대단했다. 잘 웃는데다 배려심도 있었고 트러블을 만들지 않는 법을 알았다. 안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도 어색한 태도를 고치지 못하는 갤리에게조차 별다른 말 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갤리는 몇 달이 지나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최대한 토마스를 피해다녔다. 안맞는 사람이라는건 어떻게 하든 있기 마련이고, 갤리는 도저히 토마스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평생 플로리다의 햇볕을 받은 짙은 머리색과 투명한 헤이즐은 볼 때마다 갤리에게 울렁거림을 주었다. 위가 아니라 다른 것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계속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뭘 뱉어내고 싶은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 거북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토마스가 갤리를 일부러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피해다닌다는 것은 바로 들킨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말했듯이 토마스는 트러블을 만들지 않는 법을 알았다. 둘은 교양 강의에서 마주치거나 일행이 겹칠때면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석에서 만나지도 않았고 따로 문자나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평행선을 걷는 것 마냥 둘은 제 인생을 살았다.

가까워지거나 서로가 익숙해지는 일도 없는채로 몇개월이 그냥 지나갔다. 갤리는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있고, 기숙사에는 벌레가 너무 많았다. 방학내내 그것들과 씨름하지 않으려면 짐을 싸야한다. 토마스와는 한 달 만에 마주앉았다. 토마스가 먼저 있었던 일행에 갤리가 불려나온 경우였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라 대부분은 집으로 간다고 했다. 갤리는 집에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남는다는 말을 밖으로 뱉었다. 집에 간다고하면 고향을 밝혀야하니까. 나중에야 생각난 이유다. 친구들은 왠일로 안돌아가냐는 질문을 꺼냈고 갤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서 오지 말라네. 귀찮다고.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집은 내 방을 하숙방으로 내놨더라고. 프라이의 말에 한동안 웃음이 흘렀다. 토마스는 농담에는 웃었지만 갤리가 말을 꺼낸 이후로는 계속 갤리를 보고있었다. 얼음이 녹아서 갈수록 커피의 맛이 싱거워진다. 차례가 돌아오자 토마스는 빨대로 커피를 몇 번 저었다. 저는 집에 돌아가요.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자세한 사정을 물을 것도 없어 다음 사람에게로 질문이 넘어간다. 토마스는 휘젓던 빨대를 멈추고는 옆사람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말을 가로챘다.

"갈데 없으신거면 저희집으로 오실래요?"

토마스의 시선은 갤리에게 박혀있었다. 갤리는 목으로 얼음이 잘못 넘어간 듯한 느낌에 잠시 켁켁댔다. 질문은 갤리 대신 옆에 있던 동기가 했다. 뭐?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빨대로 다시 커피를 휘저었다. 시럽이 반통은 들어간 듯한 아메리카노는 유리잔 안에서 얼음과 함께 뱅글뱅글 돌았다. 사촌누나가 자취집을 구했대서 방이 하나 남거든요. 엄마가 쓸쓸하니 누구 하나 데리고 오래서.

터무늬 없는 제안이다. 모여있는 사람중 절반은 갤리가 토마스를 피해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라이가 자기도 갈데가 없다면서 징징대는 소리를 했다. 프라이 선배가 오셔도 상관없구요. 토마스의 태도는 심히 가벼웠다. 프라이는 갤리를 쳐다봤고 갤리는 미간을 있는대로 구기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저런 제안을 하는지 전혀 모를 일이었다. 집에 오라니. 걸어서 10분거리인 것도 아니고, 플로리다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한다. 값도 값이지만 갤리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집이랑은 거의 반대고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다. 거기다 마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한 상대와 방학내내 같은 집에서 지내다니.

남는 방은 한 개에요. 생각없이 뱉은 듯한 말이 갤리의 관자놀이를 찔렀다. 토마스는 정말 프라이가 와도 별 상관 없는 듯 했다. 갤리는 신경질적으로 빨대를 씹었다. 시비를 거는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토마스는 또 의미없이 커피를 저었다. 갤리는 뒷머리를 긁었다가 곧 빨대를 내려놓았다. 토마스는 이제 두 손으로 유리컵을 잡고 있었다.

"그러지 뭐."

몇몇은 얼굴을 구겼다. 갤리의 답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토마스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다가 얼음이 달각대는 소리와 함께 컵을 내려놨다. 엄청나게 기쁜 표정이라거나 당황한 표정도 아니다. 목요일에 갈건데 괜찮으시겠어요? 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요일이라면 3일 후다. 짐은 이미 다 싸놨고, 비행기표도 어떻게든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까 말이 가로채였던 옆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제프 선배는 기숙사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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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AU 민톰

토마스 안나옴 주의... 3편만 되면 모든게 엉망이 되는 징크스...






토마스의 전투능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터져나온 불호령에 토마스의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 든다. 전 센티넬이 지휘관이라고 했을 때 알아챘어야 하는건데. 거나하게 한숨을 쉰 민호가 컨트롤 박스로 걸어가 홀로그램 시스템을 다운시켰다. 평소보다 1.5배 정도 작아진 토마스의 몸은 온통 페인트 탄으로 범벅 되어 있었다. 실제 전투였다면 이미 한시간 전 쯤에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다. 토마스가 페인트 탄을 맞을 때마다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목이 아플 정도였다.

어디라도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한 토마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간 민호가 토마스의 손을 잡아채 노려봤다. 첫만남 때 잡았던대로 토마스의 손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정확히 총과 단검을 다룰 때 생기는 위치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꾸준히 생긴 종류였다. 실제로 명중률은 썩 훌륭한 수준이었으나, 반사신경이 심하게 엉망진창이다. 실제 전투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듯한 수준이었다.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보라는 식으로 노려보니 토마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다.

"사격훈련은 열심히 했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답답하다는듯 머리를 쓸어넘긴 민호가 한숨을 쉬고 아공간을 벌려 들고 있던 창과 바닥에 떨어진 다른 무기들을 쓸어 넣었다. 원래라면 무기들이 바닥에 떨어져있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부분이다. 필요하면 다른 무기를 바로바로 꺼낼 수 있다는 점에서 민호가 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텀은 굉장히 짧았다. 전쟁터에서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는건 적에게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자살행위였고, 민호의 무기는 아공간에서 나왔다가 역할이 끝나면 곧장 아공간으로 다시 던져넣어졌다. 지금은 토마스가 집중을 전혀 못하는 바람에 파장이 엉망진창이라 생각대로 아공간이 벌려지지 않았다. 홀로그램이었으니 무기를 줍지 않았던거지 실제였다면 공짜 무기상 역할을 했을 것이다.

80개라는 가공할만한 숫자를 견뎠으니 어느정도는 지금 상태로도 실전에 쓸 수 있을거라는 민호의 예상은 빛깔좋게 엎어졌다. 이상태라면 정신교감이 완전히 되고 나서도 나가자마자 헤드샷으로 원킬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대체 뭘 믿고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낸다느니 하는 호언장담을 했는지 모를일이다. 눈치를 보던 토마스가 또 입술을 오리마냥 내밀었다.

"기초로 맞춰줄테니까 그 악질적일 정도로 뻣뻣한 반사신경 부터 어떻게 해봐."
"샤워부터 하면 안될까?"
"샤워는 개뿔, 옷갈아입는데 3분 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에 즉각적으로 튀어나간 토마스가 가방을 채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은 뭐하러 가져가냐는 타박에 대답은 안하고 눈을 굴리던 이유가 밝혀진 셈이었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컨트롤 박스를 몇 번 조작하던 민호가 토마스가 놓고 간 권총과 단검도 아공간으로 던져 넣었다. 아직은 무기를 쓸만한 수준도 못된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제 가이드랍시고 왔던건지.

연단장의 문이 열린 것은 민호가 수준을 보기 위해 홀로그램을 활성화 시킨 직후였다. 페인트 탄으로 엉망인 공간으로 걸어들어온 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김새의 여자였고, 민호는 눈썹을 구겼다. 문에 잠금 걸어놨었는데. 여자는 민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샤워실 쪽으로 눈을 돌렸고, 민호의 시계가 3분이 지났음을 알리자마자 토마스가 안에서 뛰쳐나왔다.

"꼴이 그게 뭐니?"

웃겨 죽겠다는듯 튀어나온 여자의 목소리에 토마스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트리사! 주인 만난 강아지마냥 이름을 외친 토마스가 뒤집어진 반팔셔츠를 입은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민호는 그제야 말쑥한 생김새와 익숙한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트리사는 토마스의 머리에 온통 엉켜붙은 페인트탄을 삿대질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토마스는 쪽팔리지도 않은지 연신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기 바쁘다. 에어리스는 어쨌냐 잘 지내고 있었냐 폭포수 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얼굴이 지난 3일동안 최고조로 상기되어 있다.

"여긴 내 개인 연단장이거든. 그것도 문을 잠궈놨던."

민호는 손목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9번을 움직였을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재회가 끝나기를 기다려주고 있었으나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제 먹었던 저녁메뉴에 대해서 얘기를 이어가던 두 명의 시선이 민호에게 돌아간다. 토마스는 아차싶은 표정이었고 트리사는 입을 동그랗게 한 채로 토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토마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 뉴트와 갤리가 토마스를 처음보고 민호에게로 던졌던 시선과 비슷한 종류였던 듯 싶었다. 트리사가 발을 움직여 팔짱을 낀 민호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트리사에요. 알고 있겠지만.

"목소리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지휘관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일로."

손을 맞잡으며 잇는 말에 트리사에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트리사는 표정을 유지한채로 뒤를 돌아 토마스를 쳐다봤고 토마스도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이 꼭 '내가 뭐랬어' 라는 표정이다. 민호는 눈썹을 휘어 올렸다. 저 둘이 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만한 시간이 있었던가?

트리사가 편하게 대해달라는 말을 꺼내서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휘관이라고는 해도 센티넬의 계급은 모두 같다. 위키드에서 일한다는 타이틀만 아니었어도 전령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마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도 경계를 풀지 않는 눈에 트리사가 웃었다.

"토마스,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 좀 하는게 어때? 못봐주겠다."

토마스는 안절부절 못하던 눈을 토끼마냥 뜨고 트리사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직 트레이닝이. 거기까지 말하고 얼굴을 구긴 토마스가 트리사와 민호를 번갈아서 보더니 시선을 트리사에게 고정했다. 눈이 마주친채로 약 3분 정도가 지나서야 초조하게 옷에 손바닥을 문지른 토마스가 민호의 눈치를 본다. 민호는 토마스의 예상대로 아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안그럴리가 없지. 한숨을 내쉰 토마스가 터덜터덜 걸어 연단장의 입구로 향했다. 축쳐진 어깨에 뒷머리를 뒤섞은 민호가 손가락을 튕겨 입구 옆에 아공간을 벌린다.

"아까 숙소에도 하나 벌려놓고 나왔으니까. 안으로 들어가면 숙소에 열려있는 입구가 보일거야. 제대로 샤워하고 밥이나 먹고 있어. 티도 뒤집어 입고."

환해지는 얼굴이 봄철 벚꽃보다 더하다. 고맙다는 인사에 불퉁하게 팔짱을 낀 민호가 토마스가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아공간을 닫았다. 둘 만 남겨진 공기가 찝찝하기 그지없다. 트리사는 온 몸으로 이유를 묻고 있는 민호에게 유쾌하게 웃어줬다가 어제 토마스가 했듯 유리창문턱에 걸터앉았다. 민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토마스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그야 그렇겠지. 그것 외에 위대하신 지휘관님이 여기까지 발걸음한 이유가 뭐겠어. 비꼬는 생각을 속에만 담아둔 민호가 아공간에서 의자를 끄집어냈다. 멀리 있어도 안정적이다. 전투에 들어가면 정말 답이 없었지만, 어쨌든 토마스는 매우 훌륭한 가이드였다. 다른건 다 제쳐놔도 그것 하나는 민호도 인정하는 바다. 거의 열걸음 이상의 거리를 두고 마주앉는 민호와 눈을 맞춘 트리사가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 턱을 괴었다.

"토마스가 아직 나랑 연결을 끊지 않았다는거 알아?"

민호의 눈썹이 구겨진다. 트리사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내저었다.

연결이 되어있다는건 센티넬과 가이드가 정신교감을 하고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트리사의 말은, 이미 파트너가 아니게 되었고 새로운 센티넬이 파트너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가 트리사와의 교감을 끊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주는 영향은 몇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토마스가 현재 민호를 전혀, 손톱만큼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었다. 민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센티넬을 잃은 가이드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신교감이 끊어졌을 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히 센티넬 뿐만이 아니었다. 센티넬이 전사하여 교감이 끊어진 가이드들은 쉽게 우울증에 걸렸고, 교감의 정도에 따라 자살기도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센티넬이 겪는 부작용보다 훨씬 심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람에 따라 기간이 천차만별이었다. 그걸 줄이는 방법은 어쨌든 한가지다. 다른 센티넬과 정신교감을 하는 것.

민호는 현재의 토마스가 교감이 끊어진 후에 회복한 상태라고만 생각했다. 파트너로 배정 받았답시고 온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두 명의 센티넬과 정신 교감을 하는 것은 보통의 경우 미친짓이었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등급이 M이든 Z든 효율이 급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트리사가 온 이유도 어쨌든 그런 이유겠지. 트리사는 얼굴을 있는대로 구긴채로 정면을 노려보는 민호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봐, 그 애는 평생 동안 또래 애라고는 나나 에어리스 정도 밖에는 못만났던 아이야. 너는 우리가 3년 동안 파트너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더 오래됐어. 우리는 위키드 실험에서 첫번째로 성공한 페어중 하나야. 정확히 언제부터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5~6년 동안 계속해서 같이 있었다고. 토마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는 똑똑해. 이 연결이 끊어진 다음에 돌아올 부작용을 네가 받쳐줄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다면 당연히 끊었을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민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트리사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결좋은 머리를 긁어댔다. 그래봤자 이제 3일이다. 이렇게 말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건 트리사도 알고 있었다. 다만 상황이 정말로, 정말로 좋지 않았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트리사가 여전히 얼굴을 구기고 있을 뿐인 민호의 모습에 창턱에서 몸을 내렸다. 약간 정신없다고 느낄 정도로 주위를 서성이던 트리사가 불시에 민호에게로 걸어가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에어리스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민호는 뇌 구석에서 에어리스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지금 당장 가이드로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인력은 저와 에어리스가 끝이지만, 에어리스는 아직 전 파트너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거든요. 첫만남 때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다시 귀에 울린다.

"그건 네가 알아서 케어해야 할 부분 아닌가?"

거의 비꼬는듯한 어조에 트리사가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제발. 나도 너희에게 여유를 주고 싶어. 얼마였지? 2주? 너는 지나치게 짧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네 사정을 많이 봐줘서 책정한 기간이야. 토마스한테는 괜찮을거라고 했지만 정말 촉박하다고! 에어리스의 데미지가 심각해서 토마스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는 케어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 아이는 아예 문을 열려고 하지도 않고, 밖은 아직도 전쟁통이야. 난 빌어먹을 지휘관인데 가이드의 도움 없이는 명령을 전달할 수가 없어. 네가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토마스를 다시 데려와야하고, 그럼 그 가여운 에어리스가 네 담당이 되겠지.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아. 아무도."

강조하는 듯한 말까지 끝마치고 진정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은 트리사가 의자에서 떨어져나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최악이다. 이렇게까지 초조하게 굴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겨우, 겨우 3일째다. 3일째라고. 트리사는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토마스에게 자신이 전부 케어할테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라고 말한 것은 트리사였다. 당연히 약간은 허세였다. 부모한테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마냥 불안해하는 토마스를 진정 시켜주려는 목적이었고, 실제로 그 허세는 먹혔다. 하지만 트리사라고 에어리스의 상태가 이정도까지 심각할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계획에 맞추려면 2주나 여유를 줄 수가 없었다. 전쟁은 3개월 안으로 끝내야만 한다. 그걸 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지금 되는데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건 알고 있지?"

민호의 말에 트리사가 한숨을 쉬며 늘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래. 힘없이 뱉어지는 말에 민호가 뒷머리를 헤집었다. 들어왔을 때 부터 느낀거지만 이 지휘관은 납득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는 않다.

에어리스의 센티넬은 죽었다고 했다. 토마스가 만난 또래아이들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에어리스라는 사람도 위키드의 연구원일 것이고, 토마스와 트리사와 마찬가지인거라면 그 파트너와도 적어도 5년은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예상보다 심각하다느니 하는 말을 반복하며 불안해하는걸 보면 보통수준으로 생각해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민호는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이런 심각한 얘기를 언제 해주려고 했던건지.

"그래서, 원하는게 뭐야. 내가 그새끼를 막 태어난 강아지 다루듯이해서 따르게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거야?"
"그 애는 겁에 질려있을 뿐이야."
"왜, 그새끼가 연결이 끊겼답시고 우울해서 죽으려고 하면 내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토마스는 네가 자기를 좋아할리가 없다고 생각해."

냉정을 되찾은 듯 침착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에 어깨를 으쓱인 트리사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연결이 안끊어졌다고 했잖아.

트리사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일방적 텔레파시였지만, 가이드가 있는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조금 오래걸리긴 하지만 완벽하게 정신교감이 된다면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뇌를 이용하는 능력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가이드와 센티넬이 연결되면 감정공유 정도는 보통으로도 할 수 있다. 민호는 트리사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얼굴을 구겼다. 벤은 워낙 쉽게 우울해지는 성격이라 민호도 덩달아 머리위에 먹구름을 달고 살기도 했으므로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 역시 민호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짜증이 나는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위키드 실험에서 첫번째로 성공한 페어라고 했잖아. 토마스는 우리가 없었다면 위키드도 센티넬 관련 실험을 포기했을거라고 생각해. 나랑 자기가 머리가 터져 죽지 않은 것 때문에 너희들이 끌려와서 실험을 당한거라고 자책하고 있단 말이야. 거기다 위키드의 연구원이 되어서는 실험을 도왔으니까 더더욱."

민호는 어제의 일을 다시 머리에서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은 어쨌든 토마스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툭하면 쳐지는 어깨나 계속해서 눈치를 보거나, 작은 호의 하나에도 환해지는 얼굴들.

"말해두지만 우리가 연구원이 돼서 실험을 도운건 너희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였어. 우리라는 샘플이 나왔으니 위키드는 어쨌든 실험을 계속 할거고, 피해자를 줄이면서 실험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빨리 성공하게 하는거였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원인은 우리에게 있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원망하고 싫어하는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너는 특히나 악질적이었던 초기실험 참가자니까 보통의 센티넬 보다 적개심이 더 강할건 당연한거고."
"왜 그따위 가정을 마음대로 사실로 치부하는데?"
"글쎄? 네가 토마스에게 보여준 태도는 잘모르겠지만, 어쨌든 완벽하게 토마스를 싫어한 아이는 한 명 있었다며? 초기 가이드 실험 피해자라던 그."
"갤리녀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부 적대적이거든. 그리고 토마스가 잘못했던거고."
"나도 알아. 하지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 아이의 다리는... 토마스에게는 좀, 트라우마 같은 종류여서."

말을 아끼려는듯 입을 다물어버린 트리사가 고개를 젓고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너무 길게 끌면 토마스의 위가 스트레스 때문에 뒤집어질게 분명했다. 아니면 적어도 손톱이 보기힘들 정도로 엉망이 되겠지. 트리사의 행동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민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아공간을 열어 의자를 안으로 떨어뜨리는걸 보고만 있던 트리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토마스는 상황이 급박해지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말까지 했어."

짐을 챙기던 민호의 시선이 돌아간다. 트리사는 머리를 뒤섞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것 까지 말한걸 알면 화낼텐데.

"나랑 연결이 끊어진 데미지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한방향이라도 너한테 파장을 맞추겠다고 했다고. 말이 되니? 기계인간도 아니고. 난 그냥,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해. 토마스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그 아이는 강박증 비슷한 것에 시달리고 있어서... 전에는 내가 옆에서 다그쳐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신세 한탄을 하는 듯한 어조에 민호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채로 트리사를 쳐다봤다. 유치원 교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우리 아이 좀 잘 봐주세요. 땅콩에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가성으로 나온 민호의 목소리에 트리사가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토마스가 없는 3일은 생각보다 훨씬 불안한 나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시절 부터 항상 함께하던 사람이 곁에서 떨어진다는건 괜찮을거라고 다독였던 쪽이라도 무서운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크고 불안한 갈색 눈은 트리사의 뇌 구석에 아직도 깊게 박혀있었다. 토마스는 남자아이니까 널 지켜줄 수 있을거야. 위로랍시고 건넸던 연구원의 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부러 어른스럽고 강한척 새침하게 구는 트리사에게 토마스는 둥근 눈을 휘어 자주 웃어주고는 했다.

항상 어딘가 모자라고 얼빠진 아이. 생각하는게 너무 많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아이는 그럼에도 나이에 걸맞는 순수함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트리사는 더더욱 위키드와 이 전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투명한 그릇에 담겼던 맑은 물이 어떤식으로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는지 옆에서 지켜본 트리사는, 절대로.

"민호."

하릴없이 기지개를 펴며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민호가 트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 벽에는 벌써 아공간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숙소로 통하는 입구 너머에서 토마스가 손톱을 씹고 있을 것이다. 할말이 아직도 남았냐는듯 한쪽 눈썹을 올리는 민호에게 트리사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토마스의 것과 무척 닮은, 토마스에게 배운 웃음.

"그 아이를 사랑해줘."

그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나지막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민호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원하는 것도 많으셔라. 침묵이 지난 다음 나온 목소리에 트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모들이 원래 그렇잖아. 민호는 바로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트리사를 쳐다보다가 등을 돌렸을 뿐이다.

민호는 어제 식당에서 봤던 토마스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점점이 박혀있던 헤이즐. 깨끗한 경탄. 일정하게 울리던 손목의 심박수도.

"그건 내가 알아서해."

툭 말을 던지고 난 민호가 그대로 다리를 뻗어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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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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