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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 전력 60분

주제: 해피엔딩






갤리는 옛날 이야기를 알았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한 두개, 그나마도 두리뭉술하게 알 뿐이다. 누워서 사과를 먹는 아이에게 대고 어디의 공주마냥 새하얗게 될거라고 비아냥대는 정도였다. 여러가지가 섞인 것도 있었다. 인어공주가 자신이 인어인 것을 늑대에게 들켜서 결국 늑대를 돌로 때려죽였다더라, 예쁘고 가난한 여자가 야수를 만났다가 요정의 힘을 빌려 힘들게 탈출했다더라.


입에 올릴 때 마다 결말도 과정도 다르다. 글레이드에는 동화책이 없었다. 누구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모르고, 그걸 알아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옛날 이야기는 토마토를 자라게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토마토를 자라게 해줬으면 하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희망은 진짜가 아니었고.


"그래서 마녀를 쫓아내고 성을 지켜서 다들 잘 살았어. 얘기 끝."

"그거 거짓말이지? 그사람들이 마녀를 쫓아낼 수 있었을리가 없잖아."


척은 툴툴댔다. 어린애 취급을 받은 느낌인 모양이었다. 술을 들고 통나무에 대충 앉아있던 갤리는 벌건 얼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 애송아. 거짓말이다.


술이 넘어간다. 앞에는 모닥불이 있었다. 오랜지 빛이 넘나들며 풀들을 하얗게 새게 해버리고, 미로의 벽과 글레이더들에게 번진다. 그런 색채는 강렬했다. 수채화 보다는 싸인펜으로 죽죽 그어 놓은 그림 같다. 여기저기 겹치고 색이 덧발려서 더러운, 한없이 선명한. 그런 어린 아이의 그림에는 얼굴이 없다. 색이 덮여서 분간이 힘들다. 어쩌면 술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당연히 술 때문이지. 갤리는 손에 들린 술을 더 마셨다. 주황색 잉크가 엉망으로 꾹꾹 눌린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린다. 삐뚤삐뚤하게, 4살 짜리가 그리는 얼굴처럼 엉망으로. 노을에 담갔다 빼놓은 얼굴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웃는 얼굴도 있다. 자는 얼굴도, 하품을 하는 얼굴도, 멍한 얼굴도, 우울하거나 울거나, 한숨을 쉬는 얼굴도 있었다. 갤리는 얼굴들의 숫자를 세었다. 술을 더 마신다.


"성을 지킨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갤리는 시선을 내렸다. 색소에 반만 담궈진 커다란 빵이 떠들고 있었다. 갤리는 제가 떠올린 생각이 웃겨서 웃었다. 빵에도 얼굴을 그려넣는다. 궁금한 얼굴. 귀여운 얼굴. 가장 어린 얼굴.


"거짓말이라더니."

"마녀를 죽인게 아니라 그냥 쫓아낸거잖아.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 내 말은, 마녀가 그렇게 사악하다면 말이야."


갤리는 물끄러미 빵을 보았다. 내 말은 무시하고 조잘조잘 잘도 떠드네. 갤리는 술을 더 마셨다.


"그런 일은 없어."


빵이 구겨졌다. 다른 빵들은 흐물흐물 녹아서 모닥불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주황색으로 빛나니 머리가 불덩이인 요정들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잡고 모닥불 주변에서 원을 그리며 돈다. 춤이 점점 빨라져서 어쩌면 유성우 같기도 했다. 타는 것. 전부 타고 있다. 실제로 타는 것은 나무장작이었지만, 불은 모두를 태우고 있었다. 밝고 선명하게. 그렸던 얼굴들이 뭉게져서 갤리는 인상을 구겼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기도 했다. 해먹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그냥 풀밭에서 자고 싶었다. 벌레들이 많으니 그렇게는 안된다. 갤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럴 수도 있잖아. 마녀라며."

"멍청아, 내가 아까 뭐라고 했냐. 얘기 끝이라니까. 그 뒷 부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야. 해피엔딩이라고. 옛날 이야기 들어본 적 없냐?"


반죽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갤리가 위에 심통난 얼굴을 그렸다. 반죽은 옛날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궁에서 끌려나온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갤리도 그걸 알았다. 갤리는 술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반죽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반죽의 두피는 안에 뼈라도 들은 듯이 딱딱했다. 반죽이 고개를 털어버린다. 반죽 주제에. 갤리가 반죽의 목에 팔을 걸고 끌어왔다. 반죽은 반항하나 싶더니 헤드락을 걸고 머리를 더 쓰다듬자 곧 그만 두었다. 갤리는 불이 태운 오렌지 색 반죽을 한 팔에 가두고 웃었다.


"듣고 싶으면 옛날 이야기 정도는 계속 해줄게. 내가 약속한다."

"진짜? 언제라도?"


반죽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볼을 잡고 늘인 갤리가 새끼 손가락이라도 필요하냐고 비뚤게 웃었다. 반죽은 다시 화를 낼 테세다. 그래도 제안이 나쁘지 않았는지 얌전했다. 갤리는 반죽을 건 채로 통나무에서 일어났다. 흡사 인질을 갖고 있는 분위기다. 술 때문에 갤리의 몸이 휘청인다. 그래도 반죽을 놓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멀리서 새까맣게 탄 반죽이 소리친다. 신참 괴롭히지 마 갤리. 반죽이 벗어나려 버둥거린다. 갤리는 선심 쓰는듯 반죽을 놔줬다.


"진짜 옛날 이야기 계속 해줄거지?"

"그래 이새끼야. 어린게 말을 못믿어."

"전부 해피엔딩인걸로?"


갤리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안그래도 솟아있는 모양이 조명을 밀어내며 올라간다. 반죽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눈도 없으면서 신나서 갤리를 올려다본다. 갤리는 손을 들어 반죽의 이마와 눈을 덮었다. 반죽은 작아서 한 손에 들어온다.


"평생 해피엔딩만 들을 수 있게 해줄게. 땡깡 피우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반죽은 손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웃는다. 온 몸으로 웃는다. 손 안에서도 웃는다. 반죽은 갤리를 꼭 안아주고는 총총 해먹으로 뛰어갔다. 불에서 멀어지며 반죽이 탄다. 새까맣게, 새까맣게, 갤리가 그린 얼굴이 보이지도 않도록 새까맣게. 다른 아이들도 슬슬 일어나 불에서 멀어져갔다. 갤리가 술을 집어들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모닥불로 향했다. 지나치는 아이들이 툭툭 건드리며 자기 할 말을 하고 간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봐, 잘 자. 모든 반죽들이 탄다. 갤리는 모닥불 앞에 혼자 섰다.


마침내 불이 태우고 있는 것이 갤리 혼자가 되었을 때, 갤리는 마시다 남은 술을 불에 부었다. 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갤리는 발을 들어 약해진 불을 밟았다. 계속 밟는다. 장작이 무너져서 불이 꺼질 때 까지.


갤리는 탄 장작을 봤다. 아무것도 물들이지도, 태우지도 못하고 멀거니 남아 죽은 재를. 시체를.


그리고는 뒤를 돌았다. 알고 있는 모든 해피엔딩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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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톰 꿈 02

연성/Maze Runner / 2015. 9. 9. 03:50




********데스큐어 스포주의*********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고등학교 설정입니다. 따지자면 밑도 끝도 없지만 제가 편하기 위해.







식은땀이 끈적거린다. 뉴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눕게 된지 한 달이 지나가는 침대가 서늘하게 식어있다.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른 뉴트가 침대 옆 탁자의 물컵을 집었다. 비어있어서 다시 내려놓는다. 기대놓은 목발을 집어든 뉴트가 아래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냉장고 빛은 생강 같다. 매운 눈을 비비고 물을 꺼내 병째로 마신 뉴트가 식탁에 몸을 기댔다. 꿈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다. 반복재생. 끝나고 난 후에는 다시 반복재생. 랜덤 트랙처럼 뒤죽박죽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뉴트는 순서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오늘 꾼 것은 토마스의 시작이었다. 사실 아마도, 라고 짐작할 뿐이다. 뉴트의 시작은 머리가 텅 빈채로 알 수 없는 곳에 내던져지는 것이었으니 토마스의 시작도 그럴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전의 기억이 더 있는지 어떤지 알 길은 없다.

병원에 있는 한 달과 나온 한 달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번호는 교환했지만 이렇다할 연락이 주고받아진 적도 없었다. 뉴트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토마스도 마찬가지다. 뉴트는 사실 그냥 기다리는 중이었다. 멋대로 찾아가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만난 후로는 헌화는 그만 둔 모양인지 퇴원 직전에 들른 민호가 결국 범인을 못잡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변태새끼 얼굴이라도 봤어야하는건데. 여자면 어쩌려고? 여자라도 변태는 변태지, 완전 징그럽잖아. 혀를 내두르는 얼굴을 앞에 두고 환자복을 입은 뉴트는 웃었다. 변태가 아니라고 두둔해줄 생각도, 제가 얼굴을 봤노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내막을 알아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자신이 꿈에서 죽인 사람을 위해 헌화를 하다니.

토마스가 뉴트를 죽이는 꿈은 뭉게져있다. 인지상태가 바르지 않아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감정도 확실하지 않았다. 감정이 확실하지 않은지 오래된 상태라서 그랬다. 토마스는 장면이 뭉게지지도, 감정이 모호하지도 않은채로 뉴트를 죽였을 것이다. 고마워했는지, 그를 혐오했는지, 단순히 기뻤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뉴트는 죽었으니까.

다시 물을 마신다. 생강 빛이 닫히고 목발을 집어든다. 영상을 되새기며 계단을 오른다. 슬리퍼가 닿는 바닥이 어두웠다.




*




토마스는 뉴트 옆에 서있는 민호를 보고 입을 가만두지 못했다. 몇 번을 열었다 닫았다, 곧 확 다물고는 어색하게 인사한다. 안녕. 민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뉴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쟤가 그 변태라고? 뉴트는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야. 토마스, 이쪽은 민호. 다시 입이 벌려졌다가 닫혔다. 악수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안절부절, 가방끈을 쥐었다가 결국에는 똑같은 말이 나왔다. 안녕.

토마스를 발견하는건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다. 하교시간은 비슷했지만 짐작했듯 영재반이라서 강제야자였고, 언제쯤 저녁을 먹으러 나오는지도 확실치 않아서 내내 죽치고 있었다. 뉴트의 다리 때문에 월담이 불가능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변태를 만나게 해줄테니 같이 가자는 말에 혹해서 끌려왔던 민호는 하품만 대여섯번 하느라 눈밑이 부었을 정도다. 뒤늦게서야 매점이나 급식실에서 석식을 먹을 가능성을 생각해냈을 때는 민호가 당장 가방을 맸지만, 약간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 토마스가 나와서 어찌저찌 만남이 성립 된 것이다. 토마스는 뉴트와 민호를 보고서는 밀랍인형이라도 된 듯 꼼짝도 못했다. 덕분에 붙들기는 쉬웠지만.

"저녁 먹으러 나가?"
"대충..."

마른 것에 비해 덩치가 있는 모양새인데도 겁먹은 토끼 같은 얼굴이다. 불편해서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어하는게 눈에 뻔하게 보여서 민호가 혀를 찼다. 제가 한 짓이 변태 같았다고 알기는 하는 모양이지. 민호의 생각 보다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는 토마스는 뒷머리를 긁었다가 뭐라도 뱉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너희는? 이라는 질문을 돌렸다. 뉴트는 자기들도 그렇다는 답을 했다. 우리가 언제? 다치지 않은 발로 민호의 발을 콱 내려찍은 뉴트가 점점 더 하얘지는 토마스의 얼굴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같이 먹을래?




*



토마스는 답답할 정도로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었다. 평소에도 비슷하다고 변명을 하기야 했지만 얼굴에 속이 불편하다고 타이포그래피를 해놓아서야. 깨작거리기 보다는 아예 먹지를 않은 뉴트가 제가 시킨 음식을 덜어줬을 때는 정말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먹어, 토미. 일부러 쓴 것이 명백해 보이는 호칭에 토마스가 거의 세 번은 토한 듯한 얼굴로 음식을 밀어 넣었다. 옆에서는 진작에 제 몫을 끝낸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토미라고 했냐? 뉴트는 당연스럽게도 질문을 무시했다. 민호는 남아있는 뉴트의 몫을 끌어와 전부 먹었다.

"토마스라고?"

그나마 음식을 밀어넣고 있던 토마스가 목에 음식이 걸린 듯 급하게 물을 찾았다. 뭔 말을 못하게 해. 민호가 한껏 떨떠름한 얼굴을 할 동안 뉴트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물 한 잔을 다 들이켜서야 정신을 차린 토마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토마스인건 사실이었으니까.

"무슨 토마스인데? 토마스가 성이야?"
"이름인데, 성은 에덤스."

이번엔 뉴트가 눈을 깜박였다. 아, 하긴. 성이 없을리가 없겠군. 자신도 뉴트 아커만이었으니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민호는 별 감흥없이 콧소리를 냈을 뿐이다. 예의상 하는 질문에 불과했다. 뉴트가 노려봐서 토마스는 허겁지겁 다시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민호의 눈썹이 갈 수록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다. 애초에 왜 자신이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든 접시를 비워낸 토마스가 헛구역질 까지 목 뒤로 간신히 넘겼다. 핑계거리가 됐으면 좋겠는데 주워진 저녁시간은 30분이나 남았다.

"왜 책상에 꽃 따위를 놓은거야? 대답 잘하는게 좋을걸, 이거 물어보려고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면 놀랄거다."

일부러 인상을 구기며 하는 말에 토마스의 어깨가 쫄아들었다. 시선이 뉴트에게로 힐끔 향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호의 쪽은 꿈을 안꾸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설명해봤자 의미가 없다. 일부러 목을 가다듬지 않은 상태로 토마스가 목소리를 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말투.

"ㅊ,친구가, 쟤를 좋아해서, 부탁하는걸 들어준건데... 미안,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친구? 어떤 빌어먹을 친구길래 매일마다 꽃을 갈아치우는 중노동을 시키고 그걸 들어줘?"
"좋아하는 애였어. 내가."

뉴트의 입이 동그래진다. 민호가 약간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뭐? 토마스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민호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뉴트 앞에서는 못했던 빛깔 좋은 변명이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꽃을 주기를 원하고, 자신은 그 애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부탁을 들어준다. TV에서 봤던걸 좀 배끼기는 했지만 반쯤은 사실이었다. 뒤는 완전히 거짓말이었지만. 어쨌든 이정도까지 거짓말 같으면 거짓말이라는 생각도 못하게 된다. 민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친구가 누군데?"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
"뭐?"
"그것까지는 부탁 받지 않았어. 말하게 할 셈은 아니지? 진짜 잔인한 짓이라고."

이제는 민호를 노려보기까지 한다. 뉴트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호는 당황해서 어물어물 입을 닫았다. 하긴, 이름을 말해주면 대리고백을 해주게 되는 셈이다. 친구라는 사람한테나 토마스한테나 잔인한 일은 맞았다. 거짓말이라는게 문제긴 했지만. 결국 민호는 질문을 포기했다. 니들 알아서 해라. 가방을 집어들고는 가버리는데 토마스도 뉴트도 잡지 않았다.

민호가 유리문 밖으로 나가 사라지자 토마스가 속에 쌓인 한숨을 한 번에 뱉고는 테이블에 엎드렸다. 긴장이 풀려서 잠이라도 잘 수 있을듯 했다. 뉴트는 웃음을 최대한 절제하며 턱을 괴었다. 넌 꿈속의 너랑 대화도 해?

"그런건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을 것 같아서... 묻어주지도, 헌화를 하지도 못했잖아. 나는 그냥... 아, 내가 이걸 입밖으로 내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는듯 팔을 그러모아 머리를 쥐어뜯은 토마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걸 말할 생각은 없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토마스는 제 인생의 많은 시간을 꿈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분리 시키는 것에 쏟아부었다. 최근 몇 년까지도 잘 되지 않았던 일이었다. 환자취급을 피하려고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란스러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토마스가 뉴트한테 헌화를 하고 싶었을거라고 생각해?"

토마스는 팔 안에서 얼굴을 들었다. 뉴트는 여전히 턱을 괴고 있었다. 토마스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자세를 바르게 했다. 몇 번이고 반복된 꿈. 뉴트가 죽는 꿈은 가장 선명한 장면이었다. 다른 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장면은 어딘가에 칼로 새겨놓은 것 같았다. 가장 첫번째 꿈에서 건네받았던 나이프. 그것으로 뉴트의 이름 위에 가로선을 긋는 자신. 아니, 토마스. 토마스는 공연히 입안을 씹었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문질렀다.

"왜 3층에서 떨어졌어?"

작년에 시간떼우기를 위해 갔던 축제에서 뉴트를 보았고, 얼마전에 누군가가 3층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머는 자극적이다. 투신자살이 아니라 구조물이 약해져서 일어난 사고라고 이야기가 정정 됐지만 토마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담을 사이에 두는 남고에는 중학교 동창들이 많았고, 정보는 쉽게 얻었다. 소문의 아이가 뉴트라는 확신이 생기자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꿈 속과 자신을 분리해 놓은 벽. 사실 그건 벽이라기 보다는 댐이었다. 얼기설기 엮어놓았던 비버댐은 도움으로 인해 튼튼하게 지어올려졌다가, 축제에서 뉴트를 봤을 때 반쯤 무너졌고, 1년 새에 다시 단단해졌었다. 목숨은 건졌는데 다리가 부러졌데. 평생 절거라는데. 토마스는 꽃집에서 하얀 꽃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부탁 받았다는 생각은 억지로 설정한 한계선에 불과했다. 토마스는 뉴트를 원망했다. 잘 되어가고 있었던 공사가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꽃을 책상에 놓고 담을 넘은 후에는 항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몇번이고 확인하고, 그 후에서야 일어나 교실로 향했다. 목발을 짚은 뉴트를 만난 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번호를 교환했지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뉴트는, 역시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지만.

뉴트는 눈을 내려깔고 있었다. 모든게 너무나 꿈과 똑같았다. 토마스는 그것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꿈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엄청난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건 토마스가 한 일이 아니었다.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토마스는 꿈 속의 토마스를 너무 잘 알았고, 토마스는 그였으며, 뉴트와의 만남 이후 제 자아를 분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민호까지 봤다. 꿈을 꾸지 않는 모양이었고 토마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위기였지만, 그것을 빼고는 마찬가지로 꿈 속과 분리해내기가 어려웠다. 토마스가 눈을 감는다. 뉴트의 말이 귀로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같아지고 싶었거든."

같이 시켰던 음료수에서 얼음이 녹는다. 토마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뉴트는 빨대로 음료수를 젓다가 깁스가 되어있는 제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창틀의 구조물이 약해져 있었다는건 사실이었다. 헛디뎠다는건, 거짓말이었다. 뉴트는 교실 끝에서 열린 창문까지 전력을 다해 뛰었고, 뉴트가 몸을 들이받은 구조물은 부서졌다. 결과는 보는대로였다.

잘못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어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뉴트는 기억과 매우 닮아있는 꿈이 주는 괴리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꿈 속의 자신은 자신이었지만,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부모님이 있었고 원할 때 무언가를 먹거나 잘 수 있었으며 다리도 절지 않았다.

뉴트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만을 했다. 병원에서 일어났을 때 죽지 않았고 한쪽 다리만 부러졌다는 것과, 평생 절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뉴트는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뭔가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토마스를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의 책상에 헌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희열은 더 커졌다. 온통 잘못된 조각 뿐인 퍼즐판에 제대로 된 조각이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번호를 물어봤다. 되도록이면 계속 만나고 싶었다. 토마스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지만.

"난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굳게 닫힌 속눈썹이 떨린다. 뉴트는 빨대로 젓던 음료수 컵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탄산이 뭔가를 태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넘쳐흐른다. 댐이 무너진 저수지처럼.

토마스는 가방을 매고 나가는 뉴트를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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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톰 꿈 01

연성/Maze Runner / 2015. 9. 6. 23:32


*****데스큐어 스포주의******

톰른 전력 60분
주제: 꽃





입원한 뉴트의 책상에는 꽃이 있었다.

누군가는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책상에 꽃이라니.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뉴트와 친했던 아이가 꽤 큰소리로 투덜거려도 다음날도, 다음날에도 꽃이 있었다. 쌓이는게 아니라 하루 걸러 하루 씩 꽃이 바뀌고 있다. 누군지 몰라도 참 정성이지. 꽃은 항상 아침에 바뀌었고 소문은 무성했다. 매일 가장 먼저 오는 아이는 제가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지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꽃은 바뀌었지만 종류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얀 꽃. 백합, 국화, 뭐 그런 것들. 한 송이일 때도 있고 다발일 때도 있다. 기분이 나빠서든 신경을 안써서든 꽃이 치워지는 일은 없었다. 뉴트가 입원한지 두 달이 지난 요즘에는 옆학교 학생의 짓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아침에 담을 넘어서는 책상에 꽃을 올려놓고 다시 나간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멀리서 봤다는 못믿을 증언들이 몇 개 있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곳은 공학이었기 때문에 여학생의 짓인지에 대한 수근거림도 돌았다.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뉴트는 실제로 인기가 있었고, 놓여있는게 꽃이었으니까. 물론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꽃은 계속 놓여졌다. 그곳이 무덤인 것 마냥.

뉴트는 민호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한데? 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뉴트가 집중해서 깎아놓은 사과를 집어먹었다.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아다니기가 여의치 않아 시작한 취미였다. 이젠 제법 껍질을 끊지 않고 깎을 수 있게 됐다.

조심해, 널 죽이겠다는 협박일 수도 있다고. 짐짓 진지한듯 농담을 던지는 민호에게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을 돌린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반박할 말은 없다. 민호는 그쯤이면 됐다는듯 가방을 들어올렸다. 오기도 귀찮은데 언제쯤 퇴원해? 입원한 뒤로 처음 들리는거면서 생색만은 굉장하다. 뉴트는 간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한 달쯤 남았나. 민호가 혀를 찬다.

"평생 절거래?"

뉴트는 말이 없었다. 민호는 뒤통수를 좋을대로 헤집었다. 3층에서 떨어졌으니 다리만 부러진 걸로도 엄청난 행운이다.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뉴트는 발을 헛디뎠다고 했다. 창문이 열려있었고, 철창이 낡아서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고. 안믿을 이유가 없으니 다들 위로를 했다. 뉴트는 어깨만 으쓱였다. 어차피 몸 쓰는 일 하는 것도 아닌데요.

걱정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민호가 전부다. 가방을 든채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민호를 쳐다보던 뉴트가 새로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 날에 깎여나가는 붉은 껍질이 접시로 툭툭 떨어진다.

"설마 그놈의 빌어먹을 꿈 때문인건 아니지?"

결국 민호가 입밖으로 문장을 냈다. 뉴트의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꿈. 눈을 내려깔았던 뉴트가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벽과 미로. 끔찍한 기계음. 부유감. 항상 다리를 절던 자신. 껍질을 뚫고 나온 칼날이 엄지에 닿는다. 뉴트는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눈을 떴다. 간호사 누나한테 혼나겠군. 칼과 사과를 내려놓는다.

"그냥 헛디딘거라니까."

부정을 차단하는 목소리다. 민호는 찝찝한 얼굴이었다. 꿈에 대한 이야기는 입학 초기 이후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나마도 흘리듯이 말했을 뿐이다. 악몽을 꾸는데 항상 다리를 절어. 병신같이 절뚝거리며 뛰어다니는데, 너도 그곳에 나와. 웃기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선명한 꿈인데 말이야.

그당시의 민호는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소름끼치니까 농담이라고 해. 뉴트는 웃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고 흐지부지 넘어간 일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충격이 크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뉴트가 3층에서 떨어진게 충격이었거나, 아니면 꿈에서처럼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이 충격이었거나.

시계는 6시를 향해 가고 있다. 밥 먹으러 안가도 돼? 축객령에 민호가 여전히 찝찝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꽃 놓고 다니는 새끼 잡아놓을테니까 빨리 와. 뉴트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까와는 달리 미련 없는 태도로 민호가 병실을 나갔다.




*




"안녕."

어깨가 1m는 족히 튄다. 뉴트는 사각에 있는 그늘에 앉은채로 웃고 있었다. 목각인형 처럼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 선명하게 점이 찍혀있다.

오전 5시30분. 아무도 못 볼만 하군. 혹시 몰라서 거의 한시간쯤을 일찍 온 뉴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담에 매달려있는 아이를 훑었다. 옆 학교의 마크가 새겨진 와이셔츠가 잠겨지지 않은채로 검은 반팔 위에 입혀져있었다. 각도 때문에 명찰이 안보였다. 소문이 반쯤은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손에는 하얀 라일락. 뉴트는 문득 오늘 제 책상에 놓여있을 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목발을 짚고 일어선다.

"맞춰볼게. 영재반 소속이지?"

말이 없다. 옆 학교의 영재반은 6시 등교가 일반적이었다. 팔에 힘이 빠진건지 도망쳐도 아무것도 안될거라고 알았는지 아이가 담에서 뛰어내렸다. 명찰에 선명하게 이름이 써있다. 토마스.

식은땀과 담의 먼지가 범벅 된 손을 바지에 문지른 토마스가 입을 우물거리다 뒤통수를 긁었다. 말을 걸은데다 라일락를 뚫어져라 쳐다보는걸 보면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고는 말을 고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뉴트는 삐딱한 자세였다. 목발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토마스는 깁스가 되어있는 다리를 본 후로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절게 되는거야?"

뉴트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럴 것 같대. 목이 매이는 기분이라 헛기침을 해야했다. 꽃과 얼굴, 명찰의 이름까지. 그냥 단순한 추측이었다. 민호는 꿈을 꾸지 않는 모양이었고, 그럴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하필이면 네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토마스가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쉬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꽃은, 소문대로의 의미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네가 죽었으면 한다던가 그런게 아니라, 누군가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길래 무시할 수가 없어서... 물론 다른 소문 처럼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갖다놓은 것도 아닌데- 나는-"

이거 진짜 바보 같이 들리겠다. 갈수록 발음을 뭉게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말을 끊은 토마스가 짜증을 내며 머리를 거칠게 긁어댔다. 빛깔 좋은 변명 정도 만들어두면 좋았을텐데. 없다는건 아니었지만 본인 앞에서 변명을 꺼내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입원한 병원이 꽤나 멀었고, 들리는 얘기로는 퇴원은 2주나 남았다고 했는데. 목발을 봐서는 트리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게 아니야?"

토마스가 아래로 끌려갔던 얼굴을 든다. 뉴트는 한쪽 목발에 완전히 기댄채로 웃고 있었다. 토마스는 눈을 깜박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말이 제대로 안나와서 또 입술만 우물댄다. 떠보는 질문들은 싫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맞는건지 영 알 수가 없다. 답이 없는 토마스를 두고 어깨를 으쓱인 뉴트가 목발을 짚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춤 뒤로 물러났던 토마스가 착실하게 다가오는 뉴트를 곤혹스럽게 바라봤다. 마주칠 생각은 없었다. 평생 레벨로. 얼굴을 가까이 할 생각은 더더욱. 뉴트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손이 내밀어진다. 토마스는 의문스러운듯 미간을 구긴채로 뉴트와 손을 번갈아보다가 곧 제 손을 위에 올려놓았다. 웃음을 터뜨린 뉴트가 다른 손을 움직여 토마스의 손에 있는 라일락을 가져왔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 앞으로 라일락을 든 뉴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봄철도 아니니 구하기 힘들었을텐데. 가져온 보람없이 뉴트가 다시 토마스에게 라일락을 건넸다. 받아. 주는거니까.

"내가 산 건데...?"

얼빠진 목소리에 다시 뉴트의 웃음이 터졌다. 목발을 짚지 않았다면 어깨라도 두드려줬을 것이다. 안받기도 껄끄러운지 토마스가 라일락을 받았다. 불편한 얼굴로 라일락을 보는 토마스를 빤히 쳐다보던 뉴트가 손을 뻗어 라일락의 꽃잎을 하나 땄다.

"토미."

토마스가 훽 고개를 든다. 귀엽게까지 보일 정도라 입꼬리를 올린 뉴트가 꽃잎을 빙빙 돌렸다. 멍청하게 벌려져있던 입이 의식적으로 닫힌다. 토마스가 다시 라일락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뉴트가 웃는채로 입을 연다.

"휴대폰 번호라도 교환하는게 어때?"

학교 근처에서 마주치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하거든.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토마스가 몇 초 뒤에야 허둥지둥 폰을 꺼내들었다. 내주는 손에 라일락 향기가 베어 들어 있었다.





흰 라벤더의 꽃말: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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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톰 Waiting

연성/Maze Runner / 2015. 8. 16. 23:54



톰른 전력 60분

주제: 기다림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실텐데 민톰 맞습니다... 도저히 뭘 써야할지 생각이 안나서 예전에 썼던 썰의 뒷부분이라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런거 전력으로 내도 되나 너무 양심찔린다...





마지막 축제는 화려하게, 시작할 때 처럼.




"뭘 기다리고 있나요?"


상담사는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편안함을 주는 미색의 벽지와 천천히 돌아가는 햇볕. 의자가 너무 푹신해서 땅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상담사는 기다려주었다. 어차피 바로 대답을 하는 사람을 찾는다는게 더 어려운 일이다.


남자가 이 상담실을 찾은지 오늘로 꼭 두번째였다. 이런 후미진 바닷가 마을에는 병원도, 상담실도 적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더 적었고. 남자의 ID에 적힌 주소는 여기서 한참이나 떨어진 도시 근교였고,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일 때문에 체류중이라는 답이 나왔다. 무슨 일이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진작가거든요. 수중 사진 전문. 상담사는 남자가 이곳의 바다 때문에 무거운 카메라를 끌고 왔음을 깨달았다. 여기 바다가 좀 아름답기는 하죠. 남자는 바로 수긍했다. 그 뒤로는 대화가 끊기더니 도저히 안되겠다면서 뒷목만 긁다가 돌아갔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하늘이 무너지던 밤에."


남자는 상담사와 눈을 맞추지 않은채로 입을 열었다. 쏟아지는 별가루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죠. 상담사가 소리를 내지 않고 앞에 있던 차를 마신다.


"그 사람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별가루가 속눈썹에 맺혔고, 가끔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온 길에는 물에 잠긴 별가루들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블라인더에 조각조각 나뉘어진 햇볕이 차소리에 지워졌다가 다시 차오른다. 남자는 먼 일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약간 입을 벌리고 있다. 별가루. 사실은 말이지, 유성우가 타고 남은 조각 같은 로맨틱한 것을 말하는게 아니야. 조곤조곤한 목소리. 하늘이 무너지는 밤.


"셰익스피어인가요?"


상담사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웃었다. 남자는 픽 웃어버리고는 뒤통수를 긁었다. 역시 누군가한테 상담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상담사는 일어나는 남자를 잡지 않았다. 원래 그러지 않는게 암묵적인 룰이기도 했다. 떠나고 싶어하는 내담자를 잡을 권리는 상담사에게 있는게 아니니까.


남자는 외투를 챙겼고, 아직 식지도 않은 커피를 입에 털어넣어 삼켰다. 혀뿌리가 단번에 쓴 맛에 감싸여 찝찝함을 남긴다. 마시지 말걸 후회해도 식도에는 가라앉은 설탕이 들러붙어 필사적이었다. 그가 말한 별가루 처럼.


"정말 뭘 기다리고 있는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상담을 받는 목적에는 기억이 혼란스럽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어느 기억이 혼란스러운지부터를 묻는게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남자가 처음 입을 열었을 때 낸 것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나가면 역시 다시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문턱에서 뒤를 돌아봤다가 눈썹을 누그려뜨렸다. 약간 사나운 인상이었던 얼굴이 난감한 빛을 띄었다가 곧 한숨과 비슷한 웃음을 올렸다.


"인어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문을 나선다.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에서는 소금 냄새가 났다. 햇볕이 다시 한 번 차소리에 지워지고, 컵 바닥에 늘러붙은 커피에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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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님, 폴님 톰갤 트윈지에 들어갔던 축전. 내가 썼던 썰이 원작이라 책 내주시는거 정말 감사해서ㅠㅁㅠ 썰에 없었던 토마스랑 갤리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축전으로 줬었다... 4페이지 분량이라 짧지만 티슷에도 올려봄.





"좋아해."


갤리는 가방을 들쳐매다 말고 뒤를 돌았다. 강의실에는 아직 노을이 지지 않고 있었다. 넓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크기. 책상은 줄지어 늘어져있고 의자는 산만하게 흩어져있었다.


갤리는 칠판 위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갤리가 졸다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앞에, 아니 뒤에 있는 사람은 거진 30분을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갤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볼 필요성이 있었다. 하얀 얼굴에 짧은 앞머리, 별처럼 뿌려진 점. 형광등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매우 창백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이 하얀 것 보다는 좀 더, 뭐랄까, 입술도 파랗고. 갤리는 그제서야 남자가 방금 자신에게 뱉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아. 갤리가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를 뱉자 남자의 어깨가 튀었다. 앞으로 어깨가 굽어서 몸집이 더 작아보였다.


너무 자주 듣는 소리다 보니까 단어의 무게를 잊어버린 참이다. 갤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침음성이 차가운 벽과 인조 대리석에 부딪힌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제 입을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갤리는 남자를 훑어봤다. 같은 과, 는 아니다. 30분 전에 진행 된 강의는 교양이었고 전공 수업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살펴보고 있었지만 도저히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갤리는 문득 그런 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저한테 하신 말이에요?”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창백했던 얼굴이 점점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갤리는 잠자코 남자를 쳐다봤다. 모르고 물어본 질문일 리가 없었다. 강의실에 남은 건 갤리와 남자가 전부이고 남자가 유령을 볼 수 있을 확률도 희미했다. 단지 갤리는 말문을 틀만한 문장이 필요했다. 남자는 입을 어물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더니 소심하게 목을 움직였다. 갤리는 잠시 눈을 위로 굴렸다. 예상 못한 반응은 아니지만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갤리는 가방을 다시 들어올렸다.


“계속 앉아있었던 겁니까?”


남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깨우고? 이 질문에는 반응이 없었다. 갤리는 뱉은 직후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저도 모르게 좋아한다는 말을 뱉을 정도면 무슨 생각을 했었을지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깨웠을 리가. 갤리는 헛기침을 했다. 제 목에도 슬슬 열이 올라오고 있는 듯 했다. 강의실 공기 전체가 난감한 빛을 띄고 있다. 뻣뻣한 페인트 냄새.


남자는 선고를 기다리는 듯 한 분위기로 축 늘어져있다. 갤리는 제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키 탓으로 동그란 정수리가 정면으로 보였다. 입을 비뚤게 한 갤리는 신발바닥으로 강의실 바닥을 몇 번 비볐다. 문득 여기서 계속 있다가는 시계 초침이 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갤리는 발을 움직였다. 다른데서 얘기하죠. 남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얼굴을 더 창백하게 했다. 갤리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난감해져서 강의실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싫어요? 남자는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갤리는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 강의실을 나왔다. 남자가 급하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갤리는 자연스레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곧 기다리고 있을 얼굴들이 생각나서 방향을 돌렸다. 학교 안 까페도 괜찮아요? 몇 걸음 뒤에서 쫓아오던 남자는 뒤를 돌아보는 갤리 때문에 거의 넘어질 뻔 했다. 곧이라도 쓰러질 듯한 분위기에 갤리가 알맞은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웃음을 흘렸다.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갤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듣기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갤리는 대학 부지 내에 있는 까페로 향했고, 남자도 허둥지둥 갤리를 따라왔다. 약간 처음 기르는 개를 산책 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



“이름이?”


남자가 정말 기절할 것 같은 모양새라 갤리가 대신해서 커피를 받아왔다. 남자는 가늘고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마스. 흔한 이름이다. 갤리는 얼음이 떠있는 커피를 빨대로 저었다. 이 질문을 꺼내야할지 말아야할지. 습관대로 뒤통수를 긁은 갤리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우리?


“ㄸ,따로 만난 적은, 없고, 그러니까, 교양 몇 개가 겹치는데, 아까거랑, 역학 수업, 이, 그. 동기니까, 말은. 죄송합니다.”


남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역학 수업이라니, 강의명에 역학이 들어가는 강의가 몇 개인데 그런 설명을. 그러나 역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갤리는 질문을 참았다. 적어도 제 기억력이 잘못 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충분한 양의 커피가 빨대를 통해 갤리의 입으로 들어갔다. 멍한 머리가 약간 깨워지는 느낌에 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했던거지? 그냥 확인차.”


남자는 대답 없이 머리를 그대로 박고 있었다. 충분한 답이 되었으므로 갤리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까. 갤리는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말싸움을 하고 있을 두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에 있는 동그란 정수리를 쳐다봤다. 어떻게 반했는데? 마치 남의 연애담을 묻는 듯한 말투에 남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어물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릴 정도로 절박한 눈이 열기에 차있었다.


마치 이것만큼은 눈을 맞추고 말해야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시선.


“ㅊ,책을, 주워줬는데, 세 달 쯤 전에.”


세 달? 갤리는 약간 황당해져서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반문을 뱉었다. 세 달 전에 반했단 말이야? 갤리는 남자를 오늘 처음 봤다. 그 전 까지는 이름도 몰랐는데. 그보다 겨우 책을 주워줘서 반했다니. 갤리의 표정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초조하게 손을 말아쥐었다.


“복도였는데, 책이 완전 쏟아지는 바람에... 그냥 내가 주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이 나와서. 올려다 봤는데, 햇볕이, 그게-”


남자는 입을 몇 번 금붕어처럼 뻐끔대다 다시 엎드려버렸다. 뭔가 열심히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갤리는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세 달 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확실히 누군가의 책을 주워준 것 같은 기억. 후드를 뒤집어 쓰고, 안경을 쓴 채인. 햇볕에 반사되는 옅은 갈색 눈과 선명한 점. 갤리는 혀를 움직여 감탄사를 내었다. 그 때의.


“귀여웠던.”


남자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갤리는 뱉은 말을 수정하거나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귀 끝까지 붉어지는 창백한 얼굴과 색이 돌아오는 입술. 고른 치아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갤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통유리로 된 까페의 창문에서 세 달 전보다 훨씬 약한 햇빛이 들어왔다. 갤리는 빨대를 입에 넣고 언젠가 성격이 나빠보인다고 지적 받았던 웃음을 지었다. 좋아한다고 했지.


“사귈까, 그럼?”


남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악스럽게 벌려진 입에 갤리가 배를 잡고 웃어대는 소리가 의자가 넘어지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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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대충 썼던거 수정해서 올려봄. 커플링 요소 크게 없으니까 민호+토마스.




눈보라가 친다. 토마스는 두껍지 못한 모포를 두르고 앉은채 멍하니 임시로 지어진 움막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글레이드의 다른 구조물들 몇 개는 지붕에 눈이 쌓여 무너졌고, 글레이더들은 건축팀이 급하게 삼각으로 대충 엮어만든 움막에 갇혀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척이 불안하게 말을 꺼냈다. 눈보라는 미로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미로에서 불어오는 시리게 찬 바람이 비를 눈으로 바꾸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미로의 문이 닫히면 눈보라도 멈출거라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토마스를 포함한 러너들은 아침부터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미로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못했다. 글레이드에는 겨울이 없었다. 계절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변화는 미묘했고, 당연히 미로에서 눈폭풍이 불어닥치는 일도 없었는데. 얼어붙지 못하는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 붙어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움막은 자리가 없어 같이 밀어넣어진 가축들이 가끔 내는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봐?"

토마스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민호가 머리에서 눈을 털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눈들이 앉아있는 토마스의 얼굴로 흩뿌려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토마스가 고개를 털어댄다.

"그냥. 신기하잖아."
"눈이?"

토마스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트는 한 번도 눈을 겪어보지 못한 농작물에 대한 걱정이 심했고, 건축팀은 눈이 내리는 밖에서 될 수 있는데로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뉴트도 알비도, 버틸만한 다른 글레이더들도 돕기 위해 나갔다. 민호는 뗄감으로 쓰일 나무를 찾으러 나갔던거지만, 빈 손인걸 보면 젖지 않은 나무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미로에서 쫓겨나 움막에 쳐넣어진 후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소보다 더 멍한 토마스를 내려다보던 민호가 곧 토마스의 옆에 털썩 앉았다. 찬기운이 덮쳐와서 토마스가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이동했다. 민호가 짜증난 표정으로 토마스를 도로 끌어와 제 옆에 붙였다. 추워 죽겠는데 따뜻하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머슥한 표정을 지은 토마스가 두르고 있던 모포를 민호에게 내밀었다. 당장 모포로 몸을 감싼 민호가 토마스를 흘겼다.

"왜 그러는데."

차분한 목소리에 토마스가 눈을 깜박였다. 어깨를 굽히고 편하게 앉은 자세의 민호는 약간 힐난하는 표정으로 토마스를 보고 있었다. 토마스는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축의 냄새와 두려움이 내제된 수근거림. 눈은 비와는 달라서 수직으로 땅에 내려오지 않는다. 하얀 눈이 흙과 건축팀 아이들의 신발에 짓이겨지며 쌓이고, 그리고, 녹거나 녹지 않거나, 하여튼 토마스는 그냥 그것들을 보고만 있었다. 분주한 글레이더들의 모습은 움막 입구로 훤하게 보였다. 토마스가 답이 없자 민호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미로는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었잖아. 왜 지금은 그냥 틀어박혀서 보고만 있어? 별로 안신기하냐?"

눈보라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갤리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처음보다는 나았지만 역시 미로가 닫히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답을 고민했다. 이번에는 민호도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윈스턴이 닭을 진정시키는 소리가 배경음 처럼 들렸고, 좁은 글레이드에는 벌써 눈이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그냥, 나랑 관련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민호는 미간을 구겨뜨렸다. 토마스는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뭐?"
"눈보라 말이야. 그냥...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내 말은, 그게... 탈출이랑은 관련 없어보이잖아."

말을 뭉개며 눈썹을 누그러뜨리는 토마스를 쳐다보던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3년만의 눈에 글레이더들은 전부 패닉에 빠져 있다. 눈의 무게를 버티도록 설계되지 않은 건축물들은 지반이 덜 단단한 곳 부터 위태하게 무너지고 있었고, 농작물들은 얼어붙고 있으며, 내일 미로를 달리다가 얼음 때문에 미끄러져 크게 다칠 위험도 있었다. 당장 여기저기서 일손을 부르느라 난리인데 관여할 일이 아니라니.

"그게 느껴져?"

토마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민호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 눈보라가 탈출과 관련된 것이 아닌, 단순히 글레이더들의 대처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미로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처럼. 토마스는 그 느낌이 불편했다. 자신이 어째서 그런 것들을 알고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앉아서 눈을 보고만 있었다. 단순히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았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글레이더들과 그걸 보고있는 자신. 오래된 습관처럼 당연한 그림.

민호는 대답하지 않는 토마스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혀를 차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신참은 너무나 이상해서, 이해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게 더 나은 상황을 매우 많이 만들고는 했다. 조그만 머리통에서 뭐가 돌아가고 있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토마스는 민호의 안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건 토마스의 속사정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다. 민호에게 중요한건 토마스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민호는 목소리를 냈다.

"이거 태울 수 있지 않을까?"

뜬금없는 목소리에 토마스는 눈을 깜박이며 다시 민호를 쳐다봤다. 모포를 들어올리며 나름 심각한 목소리를 낸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토마스의 팔을 잡고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라이터나 성냥 가진 새끼 있냐? 움막 안에 있는 글레이더들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ㅈ,저기, 난 그냥 앉아있고 싶은데-"

끌려가다 싶이 하며 겨우 말을 꺼내자 민호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토마스를 돌아봤다. 한심함과 짜증이 섞여있는 특유의 표정에 토마스가 저절로 어깨를 움츠러뜨리고 눈치를 봤다.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화나게 하는데에 나름 괜찮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앉아있긴 뭘 앉아있어. 신참새끼가 힘든 일만 쏙 빠지려고 하고. 일 안하면 그나마 남은 밥도 굶게 되는 수가 있어."

으름장을 놓듯 말한 민호가 던져지는 성냥을 공중에서 잡았다. 젖었잖아. 장난하냐? 모포를 던지듯 토마스에게 넘긴 민호가 다른 아이들이 내미는 성냥을 확인하기 위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얼떨결에 혼자 남은 토마스가 멍하니 모포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바깥 쪽을 쳐다봤다. 여전히 신경질적인 갤리의 목소리와 눈속을 해치는 건축팀이 있다. 토마스는 문득 제가 왜 앉아있었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면 일을 하면 되는거였는데.

민호는 젖지 않은 성냥을 들고 돌아왔고 이번에는 토마스에게서 모포를 빼앗았다. 성냥에 붙은 불이 모포로 옮겨간다. 대충 움막 가운데에 모포를 놓고 나머지 글레이더들의 모포도 뗄감으로 넣어버린 민호가 토마스의 등허리를 발로 차 움막 밖으로 밀어냈다. 가서 다 불러와 똘추야. 나머지는 쉬던 새끼들이 할거라고 전하고. 토마스는 어중간한 자세로 눈보라를 그대로 맞고 서있다가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선 민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이새끼가 귀가 먹었나. 내 말 못들었어? 짜증섞인 발언에 토마스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눈을 헤쳤다.

그러나 토마스는 민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도로 민호에게 뛰어왔다. 민호는 단박에 얼굴을 구겼고 토마스는 추워서 그새 상기된 얼굴로 무릎에 손을 짚은채 민호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눈꽃이 매달려 있는 속눈썹 아래서 토마스의 눈이 고정됐다.

"고마워."

허.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듯 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저에게 향하는 무례한 행동의 의도를 잘 알아챘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걸 수도. 민호는 됐다는듯 손을 저어 가기나 하라는 뜻을 전했다. 토마스는 다시 몸을 돌려 눈을 삽으로 퍼내고 있는 갤리에게로 달려갔다. 그새 토마스의 머리에도 다른 글레이더들과 똑같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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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톰 Carcass

연성/Maze Runner / 2015. 7. 12. 00:03

갤리 전력 60분 글.
주제: 알코올

현대 학교AU





토마스는 토끼 앞에 앉아 있었다.

갤리는 비품을 들고 문 앞에서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수업은 끝났고, 학교에는 채 2할이 안되는 아이들만이 남아서 뛰거나 떠들고 있을 뿐이다. 내일이면 방학이었다. 자율학습실에 있는 짐들은 모두 빠졌고 교실의 사물함도 그랬다. 갤리도 부탁받은 과학실 정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가방도, 운동화도 없는 상태였다. 닳은 삼선 슬리퍼와 단추를 잠그지 않은 반팔 와이셔츠. 갤리가 걸을 때 마다 유리관들이 부딪혀 소리를 냈었다. 들어온걸 모르지 않을텐데 토마스는 뒤를 돌아보기는 커녕 계속 토끼를 보고있었다. 정확히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토끼의 내장을 멍하니, 가부좌를 튼 채 응시하며 갤리를 무시하고 있다.

토마스는, 겉도는 존재였다. 항상 그랬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그걸 눈치 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기껏해야 민호나 뉴트 정도일까. 뉴트는 관찰 했고 갤리나 민호는 일종의 감으로 어렴풋이 읽어냈다.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고 맡은 일은 전부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 토마스는 겉돌았다. 그는 생각이 많았고 친구가 없었다. 청소당번을 바꿔주거나 조를 짤 때 토마스를 넣어줄 아이들은 많았지만 집에 같이 가는 아이는 없다. 토마스가 어디에 살고, 학교가 끝난 후에 뭘 하는지, 그런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또한 그는 자주 질문했다. 왜? 너는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러는건데? 갤리는 토마스가 짜증났다. 2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필요할 때 말고는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는 불편한데다 갤리와는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갤리는 문턱에서 걸음을 뗐다.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서 다시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의 바로 옆까지 걸어간 갤리는 뒤에 있는 하얀 대리석 책상에 바구니를 놓고 찬장을 열었다. 끼익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는 여전히 토끼를 보고 있었다. 비어있는 찬장에 방학기간 동안 실험 동아리가 쓸 비품들이 하나씩 들어찼다. 매미가 울 법도 한데 과학실은 정말 조용했다. 특유의 시약냄새들이 섞인 공기가 갤리와 토마스 주위에 멈춰있다.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고, 유리들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갤리는 토마스를 힐끔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의 앞에는 토끼 말고도 개구리나 뱀 같은 것들이 배를 까뒤집고 억지로 세워져 있었다. 인체 모형이 구석에서 둘을 지켜봤다. 벽에 걸린 시계도 마찬가지다.

"갤리."

쨍그랑. 갤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귀까지 올렸다. 토마스는 놀라서 몸을 옆으로 뺀 상태였다. 알코올 냄새가 순식간에 퍼졌다. 욕을 중얼거린 갤리가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넣을 때 까지만 기다려주지. 하긴, 갤리를 쳐다보고 말을 꺼낸 것 같지도 않았다. 1m가 넘는 곳에서 떨어진 알코올 램프는 토끼마냥 망연하게 내용물을 줄줄 꺼내놓고 있었다. 혼나겠네. 혀를 찬 갤리가 다리를 접었다.

"손으로 하면 다칠텐데."

아직 놀란게 안가셨는지 약간 올라간 톤으로 토마스가 말했다. 갤리는 힐끔 토마스를 쳐다봤다가 다시 유리조각에 집중했다. 토마스의 바지 끝단이 새어나온 에탄올에 젖어 들어있었다. 바닥에서 알코올 냄새가 심하게 났다. 당연한 일인데도 갤리는 얼굴을 구겼다. 유해한 화학물은 아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유리조각이 하나 둘 뭉툭한 손가락에 집혀 옆에 쌓인다. 토마스는 갤리를 보고만 있었다. 도와줄 생각이나 더 말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표정이 불안했다. 빗자루를 가져오면 좋을테지만, 일단 조각을 모아놓아야 솔에 알코올이 묻지 않을테니까.

갤리의 한쪽 눈이 반사적으로 약간 찌그러졌다. 토마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베였지? 갤리는 말이 없었다. 관심을 꺼줬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무시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말을 걸어서 램프를 놓치게 하질 않나, 한 순간이라도 주의를 빼앗기면 안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갤리의 무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토마스가 갤리의 손목을 쥐었다. 갤리는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토마스가 눈을 내려깔고 갤리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갤리는, 그냥 잠시 멍해졌다.

"다칠거라고 했잖아. 아프겠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서야 갤리는 고개를 털었다. 갤리의 손을 내려놓은 토마스가 무릎을 꿇고 와이셔츠를 벗어 손에 감았다. 남은 유리조각들이 빠르게 치워졌다. 갤리에게로 몸을 숙이느라 토마스의 교복 바지는 알코올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성실하게 유리를 모두 치운 토마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건실 가. 선생님한테 말하고 올게.

토마스는 아주 당연하게 걸어서 과학실을 나갔다. 램프가 깨졌을 때의 충격으로 멈춘 것 같았던 시계소리가 났다. 남은 알코올은 바닥에서 빠르게 증발 되고 있었다. 갤리는 토마스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끝이 얇게 찢어져 안이 보이는 검지. 토마스에게 잡혔던 손목에서 맥박이 뛴다.

갤리는 한참이나 제 손에 입을 맞추는 토마스에 대해 생각했다. 내려깔린 속눈썹과 두드러지는 점. 바닥에 닿아있는 무릎. 바닥은 차가웠고 토마스의 입술은 딱 그 정도 온도일 것 같았다. 그래, 마치, 해부된 토끼처럼. 갤리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앞니로 지긋이 눌렀다.

한 순간이라도 주의를 빼앗기면.

토마스에게 묻어있을 알코올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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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갓 늍갤

연성/Maze Runner / 2015. 6. 26. 20:44

퍼시잭슨... 이랑 비슷한 올림푸스 데미갓 세계관. 각각 아프로디테 뉴트 아레스 민호 헤르메스 토마스 하데스 갤리. 놔둬도 더 안쓸 것 같은데 길어서 안올리기 아깝길래... 이것도 적어도 5개월전 글. 빙님이 풀어주셧던 썰이었던 것 같다... 자잘한 설정 안쓸게여 귀찮음




"안녕, 갤리."
"아 제발."

갤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몸을 말아 엎드리고 말았다. 시발, 악몽이면 제발 깨기를. 특정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악몽 자체에 가까운 존재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런 소리를 지껄이게 만드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뉴트는 실실 웃으며 반으로 접힌 갤리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다시 목소리를 지껄였다. 잘잤어?

이 극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데미갓이 햇빛이라고는 들지않는 지하세계에 뜬금없이 쳐들어온지 이제 이틀이 되었다. 밤낮 구분도 안되는 유황가스가 가득한 영혼의 둥지에 걸어다니는 대리석 조각이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몇몇 간수들이 뉴트가 페르세포네와 똑같은 과정을 통해 끌려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카더라 통신을 쑥덕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뉴트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사실 갤리의 입장에서는 그것말고도 문제가 많았다. 일단 간수들의 카더라 통신은 당연히 개소리였다. 갤리는 아버지가 저의 정부인을 지하세계로 끌어들인것 마냥 뉴트를 납치한 적이 없었다. 납치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되도록이면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는게 사실이었다. 등장하면 모두가 알게모르게 한걸음씩을 물린다는 하데스의 데미갓은 이 자기 어머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받아온 대리석 조각의 옆에서 수근거림을 받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따라서 한 달에 두어번 있는 데미갓의 회의장에서도 절대로 뉴트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사실 갤리가 얘기를 섞는 데미갓이래봤자 몇 없기는 했다. 끽해야 토마스나 민호 정도일까. 그래도 뉴트는 갤리에게 있어 일종의 기피대상이었다. 그 외모를 보고 누가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회의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온갖 시선을 다 끌어오는건 갤리나 뉴트나 마찬가지였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과 기름, 전혀 비슷하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 자의 사랑을 받는 미의 여신의 아들과 산 자의 마지막을 받아가는 죽음의 신의 아들. 토마스가 계속 쳐다보는 것 같다고 옆구리를 찔러대도 정전기때문에 따갑다고 성질을 부린 것이 다였다. 그러니 더욱더 황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착선언이라는 해괴한것 말이다.

중요한 선언이 있다고 일어나길래 갤리도 당연히 뉴트에게 시선을 줬었다.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 허리에 손을 얹고, 뉴트는 자신의 인기가 너무 피곤하다는 말을 자기입으로 지껄였다. 어이가 없었으므로 갤리는 그쯤에서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뉴트는 말대로 외모 덕분인지 뭔지 남녀를 가리지않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므로 태클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신봉자는 아예 고개를 맹렬히 끄덕이거나 네가 귀찮게 해서 그런 것이라고 다른 사람의 팔을 찌르기도 했다.

지랄하네 진짜. 짧게 끝났을 회의를 굳이 이어붙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갤리는 앞에 나와있는 빵을 손으로 집어 하릴없이 입으로 넣었다. 두 번 정도 씹었을 때 뉴트가 이제 자신은 한사람에게 정착하고 싶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하긴, 이런데서 공식적으로 선언하면 더이상 작업이 걸리지 않을테니 원전차단의 현명한 방법이기는 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는건 아니라고 선언한다고 진짜로 작업이 끊길리는 없겠지만, 임시방편은 되겠지.

회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기대에 가득찬 눈을 한 사람이 못해도 열댓명은 되는 것으로 보아 피곤하다고 한 것 치고 자신의 인기를 있는데로 누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갤리는 빵을 여덟번 정도 씹었고 이제 빵은 목 뒤로 삼켜도 괜찮을 수준으로 뭉개졌다. 딱히 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갤리는 목울대를 움직였고, 동시에 뉴트가 여러 데미갓들 사이를 훑던 손가락을 갤리에게 겨누고는 여러사람 뒤로 넘어가게 만드는 웃음을 지었다. 난 이제부터 갤리한테만 붙어있을거야.

회의장은 경악에 물들었다. 갤리는 반쯤 넘어간 빵을 소리나게 삼켰고,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는 민호가 앉아있었고 그는 회의장에서 유일하게 평안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민호가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면 뉴트가 선택한게 저가 아니라 민호인줄 알았을 것이다. 갤리는 어깨에 올라온 민호의 손을 봤다가 곧 온세상의 놀라움과 영문모름을 끌어모은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워 본인을 가리켰다.

나? 너무 황당해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갤리는 입모양과 표정만으로 의사전달에 성공했다. 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장은 비로서 침묵을 깨고 태초의 혼란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몇 명은 울기까지 했다. 넓은 회의장 안에서 갤리와 뉴트를 보기위해 대부분의 데미갓이 중앙 쪽으로 몰려들었고, 엄청난 수근거림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갤리는 한 손에 먹다남은 빵을 든채로 입을 다물줄을 몰랐고 뉴트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갤리의 앞에서 멈춰서서는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시야가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더니 입에 빵이 아닌 것이 닿았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갤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무 생각이 없는건 아니었다. 한 단어가 끊임없이 머리에서 돌아다니고 있기는 했다. 씨발.

그리고 3주를 지하에 쳐박혀있었다. 세상에. 갤리의 어머니는 지상에 돌아다니는 소문을 듣고는 지하의 입구까지 찾아와 아들에게 도망쳐다니는건 별로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충고했다. 엄마도 도망쳐다니다가 이꼴이 났잖니. 역마살까지 유전되는지 알았다면 지하세계로 보내지 않았을텐데.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손은 다정했고, 갤리는 웃었지만, 그렇다고 지상에 다시 올라갈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재회가 끝나고 내려오자마자 입구의 가디언들에게 뉴트가 기웃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망할 새끼. 세간에서 사신이라고 불리는 것은 저일텐데.

그리고 대망의 3주 후 갤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뉴트는 모로 누워 턱을 괴고 웃고 있었다.

그리웠어, 내 사랑.

미친. 갤리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낙하의 고통에서 벗어난 갤리가 처음 한 일은 일단 뉴트의 몸을 미친듯이 더듬어보는 것이었다. 죽었어? 죽은거야? 패닉상태에 빠진 갤리를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날것만치 웃으며 보던 뉴트는 일단 갤리의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쪽. 멍해진 틈을 타 얄미운 목소리가 파고든다. 미인계 좀 썼지. 안죽었으니까 걱정마. 좀 더 만져줄래?

일단 주먹을 날릴 계획이었으나 그 곱상한 얼굴이 때릴거냐고 묻는 통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익은 얼굴로 당장 나가라고 윽박을 질러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팔을 뻗어 얽혀들어오는 통에 밀어내다가 또 떨어질 뻔 했다. 3주나 기다리게 해놓고 정말 너무하다고 우는척을 해대는걸 간수를 불러 끌어내려다가 하데스에게 허락 받고 들어온거라는 말이 너무 황당해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거짓말이지? 반 분이 지나서야 나온 한마디에 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그래서 뉴트는 갤리에게 뒷목이 잡혀 지상으로 질질 끌려갔다. 중간에 뱃사공과 문지기에게 유황불에 구워지고 싶냐는 윽박을 내지르는 것도 물론 잊어버리지 않았다. 햇빛 가득한 지상에 뉴트를 던져버리고 손을 턴 갤리는 미련없이 지하의 문을 닫으려고 했고, 뉴트는 재빨리 손을 집어넣어 강제로 틈을 만들고는 억지로 버텼다. 잠깐! 잠깐! 보여줄거 있어! 잠깐만 봐봐! 보면 마음이 바뀔거야!

되도않는 수작 부리지 말라고 억지로 문을 닫으려고 하는 갤리에게 뉴트가 다급하게 내민 것은 무려 석류알이었다. 시발. 육성으로 나오는 욕과 함께 순간적으로 갤리의 팔에서 힘이 빠진다. 틈을 놓치지않고 문을 열어재낀 뉴트가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득의양양한 표정이 아주 때려주고 싶을만큼 얄미워서 갤리가 뉴트의 정강이를 실제로 차버리고는 다시 윽박을 질렀다. 그거 내놔 이 미친 싸이코 새끼야!

당연한 얘기지만 뉴트는 석류알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한 번만 쫓아내려고 들면 이걸 먹어버릴거라고 협박을 일삼기까지 했다. 확인차 한 알을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봐도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짜 지하의 석류알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뉴트의 손에는 아직도 다섯개가 넘는 석류알이 있었고, 확실히 말하지만, 이건 미친짓이었다. 대체 어디서 난거냐는 추궁에 뉴트는 페르세포네의 이름을 댔다. 뒷목이야. 갤리는 될 수 있다면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었다.

페르세포네. 지하세계의 안주인. 널리고 널린 데미갓들 중에서 하데스의 데미갓이라고 알려진 사람은 갤리가 유일했다. 하데스가 원채 지하세계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인 탓도 물론 있었지만, 안주인의 한이라는 것이 워낙에 강해서기도 했다. 하데스가 제우스같은 소위 난봉꾼이 아닌탓에 헤라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지하세계의 안주인 성정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꽃만 잘 피우다가 갑자기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인생이 저당답힌 이 불쌍한 여인은 수세기의 겨울동안 지하에 살면서 하데스의 옆을 지키다가 혹시라도 하데스가 불륜을 저지르면 친히 철퇴를 내렸다. 억지로 끌려와서는 지극정성으로 사랑받느라 미운정 고운정 다 들은 탓도 있긴했지만 약탈혼을 당했는데 남편이 불륜까지 저질렀을 때의 분노는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임이 당연했다.

갤리가 자신이 데미갓이라는 정체성을 깨달을 때 쯤 갤리의 어머니는 페르세포네에게 밟혀죽어 민트가 되었다는 님프인 멘테의 이야기를 해주며 살고싶으면 조용히 있는게 상책이라는 말을 해주었고 갤리도 이것에 동의했다. 데미갓이고 뭐고 아버지 없이도 자신을 이미 훌륭하게 키워낸 굉장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정부인에게 밟혀서 무언가의 풀로 변모하는 것은 갤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히 산다고 티가 안나는 것은 아닌듯 갤리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무려 페르세포네가 모자를 찾아왔다. 자기소개를 받자마자 갤리는 경악했고 어머니는 침착하게 야구배트를 들고 있었으나 페르세포네는 다행히 모자를 폭행하거나 어머니의 머리채를 쥐어뜯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일단 갤리를 안아주었다. 바짝 얼은 갤리가 어떻게도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는 중에 갤리에게서 떨어진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고생이 많으셨다는 얘기를 꺼냈고, 어머니는 야구배트를 든채로 울컥 울음을 토해냈다. 처음보는 눈물이었다. 어머니가 진정이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페르세포네는 원망은 하데스에게 모두 쏟아놓고 왔다면서 어쩔줄 모르는 갤리에게 웃어보였다.

솔직히, 같이 지낸 햇수가 몇인데 아들 하나 밖에서 만들었다고 예전처럼 분노 하기에는 좀 어렵죠. 페르세포네는 홍차를 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지상에 돌아다니는 데미갓이 몇 명인데 한 명 정도는 있어도 아무렇지 않달까, 오히려 자기 아들이 생긴 것 같아서 기쁘다고 얘기하는 미모는 가히 인간의 것이 아닌게 확실해 보였다.

물론 한 세기쯤은 각방을 쓸거지만 어차피 갈릴레오씨도 꼬임 당한걸테니까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마친 페르세포네는 나중에 일자리를 구하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갤리 모자에게 지도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 선명하게 적혀있는 Underground라는 글자에 갤리는 침묵했고, 페르세포네는 깔깔 웃으며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지하에 들어간다고 영영 헤어져야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원하는 때에 만날 수도, 원한다면 한 50년쯤 후에 와도 상관없다는 말에 갤리 모자는 서로를 마주봤다.

제가 심심해서 그래요. 페르세포네는 결정적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갤리와 갤리의 어머니는 초전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너무 오래 지하에 있었고, 지하에는 재밌는거라고는 끌려온 영혼들을 괴롭히는 것 정도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권태기고 뭐고 이제는 질투하기도 귀찮고, 남편의 아들이면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법하니 지하에서 일하는걸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다.

페이는 어떻게 되는데요? 이게 갤리가 겨우 뱉은 말이었다.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경제사정이 좀 어렵기는 했다. 어머니 혼자 벌어서 대기에는 학비가 갈 수록 비싸지고 있었고, 몇 달 뒤면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다. 페르세포네는 웃었다. 당연히 원하는 만큼 드리죠. 괜히 플루토스라고 불리는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갤리와 갤리의 어머니는 지하의 입구가 있는 근처의 도시로 이사왔다. 처음 마주한 하데스는 매우 무서웠다. 크고, 음, 컸다. 갤리도 덩치라면 어딜가도 뒤지지 않는다지만 신하고 비교해서야. 하데스가 갤리에게 처음 한 것은 사과였다. 갤리는 태어나서 17년만에 만난 아버지의 진심어린 사과를 얼결에 받아들였고, 정식 데미갓으로 인정 받은 뒤 지하의 업무를 담당했다. 어머니는 만날적마다 혈색이 좋아지더니 친구들과 다니는 여행에 대해서 떠들어주었다. 그동안 혼자 갤리를 키우느라 뼈빠지게 고생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린다는 뿌듯함이 좋았고, 지하의 업무는 의외로 갤리의 적성에 맞았다. 원래부터 여기가 제자리였다는 양 지하는 매우 익숙했다. 몇 년 지나서는 영혼들이 유황불에서 질러대는 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잘 수도 있게 됐으니 그야말로 천직이라 하겠다.

이야기가 빠졌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자면, 페르세포네는 일단 갤리를 아꼈다. 아들처럼 생각된다고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갤리가 실수를 저지르면 하데스를 구슬려 벌을 받지 않게 해준다거나, 갤리가 바쁘지 않으면 온종일 같이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지하에서 사는 것은 수세기가 지나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페르세포네는 또한 재미있겠다 싶은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뉴트가 미인계를 써서 산채로 지하에 들어와 자신이 회의장에서 저지른 일과 갤리가 3주동안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페르세포네에게 전했다면, 뉴트가 부탁도 하지 않은 석류알을 넘겨주며 갤리를 구워삶을 이야기를 들려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였다. 아, 양어머니. 차라리 갤리를 미워해서 한 일이라면 가서 따지기라도 하지.

결론적으로 갤리는 뉴트를 쫓아내지 못했다. 억지로 뺏으려고 하기가 무섭게 입에 털어넣어버리길래 기겁해서 뒤통수를 갈겨 뱉어내게 한 뒤로는 나가라는 말의 나자도 꺼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뉴트는 갤리가 하는 일을 구경하려다가 케로베로스에게 다리를 뜯길뻔하고 얌전히 페르세포네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루종일 안보이길래 어쩌면 돌아갔겠구나 싶어서 안심했더니 잠자리에 눕자마자 문을 열어재끼고 뛰어들길래 다시 급하게 케로베로스를 불렀더랬다. 주인의 절규를 들은 케로베로스는 충직하게 뉴트를 방 밖으로 끌고나갔고, 그래서 나름대로 편안하게 간밤을 보냈는데.

"케로베로스는 대체 어쨌어? 방 앞에서 지키고 있었을텐데."
"공놀이 되게 좋아하던데. 페르세포네님 방에서 잘 놀고있을테니까 걱정마."

아, 양어머님. 단단하게 맞물린 팔을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갤리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뒤로 드러누웠다. 아주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타려는 몸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져버리자 뉴트가 징징대며 도로 몸을 붙여왔다.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돼. 갤리는 이제 막다른 길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도 도망쳐다니다가 이꼴이 났잖니. 젠장.

"뭐때문에 이따위로 나오는거야? 너 나 알아? 아주 매정한 사실을 하나 말해주자면, 난 너 모르거든. 언제 그렇게 얘기를 나눴다고 지금- 아니, 너 그런 눈 하지마. 하지말라고. 그만 못둬? 내가 열뻗쳐서 진짜."

버려진 사슴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뉴트에게 성질을 부린 갤리가 배게를 들어 뉴트의 얼굴에 대고 눌러버렸다. 저놈의 얼굴. 뉴트는 킥킥대며 갤리의 팔을 잡아내리더니 배게를 안고 손가락에 입술을 눌렀다. 잡힌 팔에 소름이 돋는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당장 빠져나가려는 손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던 뉴트가 기어이 혀를 내어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갤리가 두번째 배게로 뉴트의 얼굴을 강타해버린다.

"대답이나 해 미친새끼야! 너 나 아냐고!"

이젠 슬슬 진짜로 무서워진 갤리가 기겁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나한테 자기를 아녜! 데굴데굴 구르는걸 발로 차버려서야 겨우 멈춘 뉴트가 예고없이 벌떡 일어나서는 또 갤리에게 입을 맞췄다. 슬슬 얼굴이 다시 익기 시작한다.

"당연히 알지. 부끄러우면 성질내고, 스킨쉽하면 얼굴 빨개지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한테 약하고. 어떻게 모르겠어. 되게 섭섭한데. 설마 진짜로 몰랐어?"
"그러니까 대체 뭘-"
"내가 너 좋아하는거."

다시 배게가 얼굴을 강타한다. 이번에는 갤리도 당황했는지 반쯤은 과장스러운 액션으로 꽥소리를 내며 쓰러진 뉴트를 황급히 일으켜 세우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반사작용 급으로 쳐놓고 미안해하다니. 아직도 어버버거리는 얼굴을 앞에 두고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뉴트가 갤리의 얼굴을 주물거렸다. 갤리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니까 몰랐을만 하나. 네가 눈치가 조금만 있었어도 이런 도박수는 안뒀을거라고."

도박수라니. 자기자신도 이게 어이없는 짓이라는걸 알고 있다는 것이 제일 웃기는 부분이다. 갤리는 자신을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구겨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눈을 위쪽으로 굴렸다. 눈치, 눈치라. 페르세포네나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유도리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들은적은 있었지만 눈치라고 하면 나름 있는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응력이 뛰어났고, 지하의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으니 정말 뉴트의 말대로 눈치가 개똥이었다면 진작에 떨어져 나가버렸을 것이었다.

갤리는 여전히 구긴 얼굴로 다시 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아프로디테의 아들 타이틀에 걸맞는 훌륭한 얼굴이다. 갤리는 손을 들어 이번에는 자신이 뉴트의 얼굴을 잡고 주물럭대기 시작했다. 뺨을 쭉 늘렸다가 입이 튀어나오도록 눌러보기도 하고, 위아래로 흔들거나 휙휙 양옆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초반에 언급했다고 생각하지만 갤리는 뉴트와 딱히 얽혀들고 싶지 않았다. 미의 여신의 아들과 난봉꾼이라는 타이틀이 같이 곁들여져 있는 놈을 뭐가 좋아서 쳐다보겠는가. 그리고 말했듯이 물과 기름이다. 관심을 보였대도 연애쪽엔 영 경험이 없는 갤리로서는 알아봤을지 확실하지 않기는 했다. 갤리는 주물거리던 손을 멈추고 뉴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기억, 기억. 데미갓의 회의장에 나가게 된지는 꽤 오래됐다. 첫 날은 흐릿하다. 다만 하데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여러의미로 모든 청중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의장은 제우스의 데미갓인 알비였고, 민호와 프라이도 있었다. 토마스는 회의장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년이나 2년. 뉴트. 뉴트는 언제부터 있었나. 갤리는 지하에서도 깨끗하게 빛나는 금발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라고 물으면.

갤리는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뉴트의 얼굴을 놓았다. 회의장에 처음부터 있었대도 크게 달라질건 없다. 갤리가 신경쓸 일은 차고 넘쳤다. 지하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이 터지고, 회의장에서 하는거라고는 앉아있다가 의제나 의제에 따른 반응이 마음에 안들면 불퉁하게 얼굴을 구기는 것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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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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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민 Thinking

연성/Maze Runner / 2015. 6. 26. 16:45
나는 점점 미쳐가고있다.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사실이다.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제어하기 어려워지고 있었고, 평소에 내보이던 냉정함이나 합리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뇌를 갉아먹는 바이러스는 실제일리 없는 환청을 만들어 내며 나를 침식하고 있었으며 머지않아 나를 완전히 망가뜨릴 것이다.

알고있었다. 사실이다. 마치 점심매뉴를 읽는듯한 태도로 그 미치광이 같은 쥐 선생이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 부터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내 미래가 되었다. 다 상관없었다. 알비는 죽었고 다른 아이들도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 따위는 없었다. 미로에서 뛰어내렸던 그 때부터 쭉 그랬고 새삼스럽게 생존에 대한 갈망이 짙어지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끈을 끊어버리니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곧바로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없었다.

버그에 혼자 남은 나는 멍하니 못생긴 쇼파에 누워있었다. 나간 일행들이 수확을 갖고 돌아올지에 대한 기대 같은건 없었다. 다만 우리는 탈출했고, 나는 목표를 달성했다. 어쨌든 우리는 위키드에게서 벗어났으니까. 그 한스라는 의사를 잘 찾는다면 민호와 토마스는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것이었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그것 밖에는 바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온다. 지금 당장 발광을 하며 뛰어다녀도 아무도 모를 것을 알았지만 참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 따위는 보고싶지 않았다. 미쳐서 소리를 지르며 꽥꽥대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는 참을셈이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문득 쇠창살에 달라붙어 비명을 지르던 광인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토마스가 제 때 쪽지를 봐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손을 올려 얼굴을 덮었다. 모든 생각을 지운다. 뇌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은 바이러스를 억제하는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캄캄한 어둠 위로 얼굴이 떠오른다. 미쳐 소리지르는 것은 싫었고 있는대로 오열하는 것도 싫었지만 눈물 정도는 흘릴만 했다. 자신은 곧 죽는 것이 차라리 나을 미래를 불과 몇 걸음 남겨놓고 있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우스갯 소리로 삼을 수도 없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듣고있지 않다.

"민호..."

두려웠다. 미치도록. 다 거짓말이다. 살고싶다. 보고싶다. 적어도 마지막은 함께일거라고 생각했다. 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진작에 깨달았다면 좋았다. 미로를 탈출하고, 지하통로를 나가고, 햇빛에 몸을 그을려가며 도착한 끝에서, 전부 끝났다고 말하는 그 빌어먹을 입을 짓이겨버렸어야 했다. 희망 같은건 없었다. 끝나지도 않았다. 자신은 면역자가 아니었으며 그저 불쌍한 대조군 그룹의 쥐새끼였던 것이다. 애초에 함께할 수 있었을리가 없었다. 멍청한 자신. 빌어먹을 위키드.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모조리,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루로 만들어버린 후 자살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명단에 민호가 없었으니까.

그래. 민호는, 민호는 면역자였다. 광인이 아니었고 아직 살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나와는 다르게.

어떻게든 민호를 그 엿같은 곳에서 탈출시켜야만 했다. 다른걸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자신과 그것에 화를 내던 민호. 평소의 저라면 상상도 못했을 어처구니 없는 싸움. 이미 시작된 것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거라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살아야했다. 희망을 놓아서는 안됐다. 민호는 살 수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위키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미로니 시련이니 하는 진절머리 나는 것에서 벗어나서-

벗어나서?

생각을 멈춘다. 아니야. 아니라고. 버텨. 끌려가지마.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깊게 파고들지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뭐지?

나는 목표를 이뤘다. 민호를 탈출시켰고 그는 지금 광인이 들어갈 수 없는 도시에서 자신을 위키드의 손아귀에서 놓아줄 마법사를 찾고있다. 제어에서 벗어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면역인은 일자리가 많다고 했으니까. 몇년간 온종일 뛰어다니기만 했던 그가 직업을 얻는다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을, 인생을, 미래를 얻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없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다시 머리를 흔들고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내 역할은 끝났다. 남은 것은 뭐지? 서서히 미쳐가다가 토마스가 알맞은 때에 돌아와 나를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 미쳐서 발광하는 모습을 민호에게 보이고 그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것?

아니,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토마스가 쪽지를 펼쳐 볼 '알맞은 때' 라는 것은 내가 완전히 미쳐버렸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맞았지만, 그런 꼴을 민호에게 보이기 전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죽는 것이 나았다. 그런걸 보일바에는 정말로, 죽는 것이.

다시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않으려고 할 수록 이미지가 또렷해진다. 민호. 글레이드의 치프러너. 자신감 있게 웃는 얼굴, 휘어지는 눈, 다부진 어깨, 굵은 목. 조르는 상상을 한다. 손등에 힘줄이 붉어질정도로 세게. 터질듯이 빨라지는 맥박은 이기적이다. 나에게는 없는 면역항체가 돌아다닐 피. 박동. 멈췄으면 했다. 자신과 똑같이 되기를, 자신과 한시에 숨을 멈추기를.

차라리 명단에 민호의 이름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거다. 같이 의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행이 빠른쪽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광인으로 미쳐간대도 둘이라면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아니. 둘이라도 견디지 못했을지도,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빌어먹을 플레어 바이러스. 터져나온 울음이 결국 쇼파로 흘러든다. 진행수준이 가속도화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부터 생각한다. 민호는 살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 것이다. 행복하게, 평범하게, 바라던대로. 설사 자신이 옆에 없더라도.

버그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천 번하고도 스물네번째.

민호의 목이 졸린다.

손톱이 다 닳았다는걸 눈치채고 반대쪽 손을 든다. 까득까득까득. 그런 작은 소음 따위는 진작에 묻혀버린다. 비명소리. 여자의 비명소리. 끊임없이 소리친다. 드잡이하는 소리와 꽥꽥거리며 울음을 토해나는 소리.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 불타는 소리.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건 진작에 포기했다. 상관없었다. 그런 소리는 사방에서 나고 있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저 소리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참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이곳에 온지 얼마나 흘렀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한테 욕을 갈겼던 경비원의 머리를 짓이긴 다음 전기총을 뺏었고, 그나마 정신이 멀쩡해보이는 광인 그룹과 친분을 맺긴했지만 그뿐이다. 가까이 가고싶지 않았다. 혼자있고 싶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자초한 고립상황에서 뇌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든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박동이 멈춘다.

상상속에서 민호는 축 늘어져 생기를 잃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웃는다. 자지러지도록 웃어재끼며 늘어진 민호를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잠근 것 처럼 뚝 웃음을 멈췄다. 비디오처럼 장면이 다시 반복재생 된다. 다시 위에 올라타면 민호는 살아나 반항을 시작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민호는 웃고있다. 광인의 웃음. 내가 지었던 것과 같은 웃음.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목에 댄다. 죽여줘. 나를 죽여, 뉴트.

경비원 두명이 찾아와 친구들이 찾아왔다고 말한다.

나는 꺼지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냈다. 친구라는 말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안다. 만나기 싫었다. 아니, 만나고 싶었다. 토마스가 쪽지의 내용을 읽었을까. 죽이러 와준걸까. 꺼지라고 말해도 결국에는 찾아올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도망쳐도 소용없음을 안다. 어차피 도망쳐도 나갈 수 없다. 이 소름끼치는 감옥이 내가 있을 곳이었다. 모두가 미쳐가고 있으니 내가 미쳐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그들은 결국 찾아왔다.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민호. 멀쩡해 보인다. 상한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미쳐가고 있었는데 깨끗한 도시에서 뭘 하다 온건지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미웠다. 안심이 된다. 질투가 났다. 꺼졌으면하고 바란다. 아니, 사실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있는대로 악을 쓰고 싶었다. 꺼지라고, 다시는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원하던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는 한 것 같았다. 민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같이 가자고 설득하는 목소리가 퍽 간절했다. 내가 그 목소리를 비명으로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도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같이 가서는 안됐다. 언젠가는 민호를 죽여버리고 말것이다. 반드시. 언젠가는.

토마스는 쪽지를 읽어주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아가 치밀었다. 플레어 바이러스가 장치에도 영향을 주는건지 기억이 어느정도 돌아왔다. 그 뻔뻔한 상판으로 나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진절머리 났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하는거야? 빨리 죽여. 죽이라고. 죽여달란 말이야. 목소리가 갇혀 나오지 않는다. 민호 앞에서 해서는 안될말이라는걸 알았다. 아직 그런걸 생각할 이성은 있다. 민호는 토마스를 막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계획이 실행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돌아가면 쪽지를 읽겠지. 다시 찾아와 죽여주기를 바랄 수 밖에. 그래서 난 그저 노려보며 전기총을 겨눴다. 꺼져버려. 혼자 있게 해달라고. 난 광인이니까.

결국 토마스가 나머지를 끌고 갈 때까지 내 눈은 민호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주저 앉는다. 딱딱하고 차갑고 찝찝하다. 다 상관없다. 까득까득. 나에게만 크게 들리는 소음. 민호. 마지막까지 날 쳐다보던 민호. 내가 그의 상황이었다면 그를 두고 갈 수 있었을까? 이런 끔찍하고 미쳐버린 장소에?

답은 알 수 없다. 알아봤자 소용없다. 바이러스가 침투한 뇌가 만들어내는 추론 따위는 믿을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광인이고 그는 면역인이었다. 상상속에서와는 달리.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천 번하고도 스물 여섯번 째.

민호가 웃는다.





*





차 안에서 얼핏 토마스를 본 것 같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똑똑히 시야에 박혀있었다. 민호도 같이 있었는지 기억을 살리려고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나를 찾으러 온걸까. 벤의 상태 따위를 보면 그런건 아닌 것 같지만.

연기를 내며 출발했던 벤은 채 3m도 가지 못하고 멈춰섰다. 토마스가 안에서 뛰어내린다. 민호는 없다. 차오르는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다행스러운 감정인지도 구분 되지 않는다. 차에서 내린 것이 민호가 아니라 토마스였으므로 나는 달려들지 않고 목석처럼 서있었다. 토마스의 허리춤에 권총이 끼어져있다. 얼굴이 엉망이다. 쪽지를 읽은 것 같았다. 희열이 차올랐지만 웃지 않았다. 광인처럼 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잊어버렸다.

말을 걸길래 그냥 지껄였다. 민호는 어디에 있어? 단순히 그 문장만이 아래까지 차올라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민호는? 같이 안왔어? 멀쩡해? 날 그리워해? 다치지는 않았어? 여전히 면역인이야? 내 이름을 부르지는 않아? 죽여달라고 소리치지는 않아?

모든 질문은 묻힌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나를 설득시키려는 태도가 무언가를 건드린다. 멀쩡한척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한계를 넘기 직전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서로에게 던지는 빌어먹을 광인들의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린다. 진절머리가 났다. 저렇게 될 날을 손가락으로 세보며 두려움에 떠는 나날 따위는 지긋지긋했다. 대화가 한없이 늘어진다. 권총에 끊임없이 신경이 쏠린다.

토마스가 싫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그를 위해 뭐든지 했다. 미로에서 뛰었고, 그리버를 죽이고, 사막에서 걸었으며, 힘을 합해 그를 탈출시키기 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겨우 엿같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뻐겨댄다. 화가 치밀었다. 네가 싫어 네가 싫어 네가 싫어. 결국 민호랑 남는 것은 내가 아니다. 네가 싫어. 부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죽여버리고 싶어, 토미. 네가 싫어.

결국에는 다리를 저는 이유까지 지껄여버리고 말았다.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날 끌고와 살려낸 알비. 날 치료한 클린트와 옆에서 불같이 화를 냈던 민호. 알비는 죽었다. 클린트도 죽었다. 민호는 살았다. 더이상은 기쁘지 않았다.

다리를 절게 된 후 민호는 끊임없이 날 따라다녔다. 역할이 역할이다보니 낮시간에는 마지못해 미로로 돌아갔지만, 내가 언제 밧줄고리를 만들어 그 안에 머리통을 집어넣을지 불안해서 미칠 것 처럼 행동했다. 그짓거리를 그만 둔건 1년 남짓이었다. 내가 마지못해 자살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앞에서 맹세한 그 날. 서약이랍시고 반강제로 눈을 맞추며 목소리를 새겼던 그 날. 반드시 나를 미로 밖으로 데려다주겠노라 원하지도 않은 약속을 들었던 그 날. 다리와 함께 부숴진 희망이 돌아왔던 그 날.

총을 든 손을 잡았다. 죽여. 죽여줘. 제발 죽여. 그 총으로 날 죽여. 남아있는건 없다. 미래도 희망도 빛도 모조리 빌어먹을 위키드 새끼들이 가져갔다. 다 필요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나만 있으면 됐는데. 그것뿐이었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었는데.

민호. 민호. 나의 희망. 빛. 미래. 모든 것. 나와는 다른. 죽이고 싶은. 보고싶은. 결국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었던. 미쳐버릴 정도로 소중한.

"제발 부탁이야, 토미."

총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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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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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

연성/Maze Runner / 2015. 6. 22. 21:55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민호는 물을 마시다 말고 토마스를 내려다봤다. 완전 기진맥진해서 거의 쓰러져있다 싶이 하던 토마스는 이제 어느정도 안정된 호흡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로의 벽으로 조각난, 구름이 움직이지 않는 새파란 하늘.

토마스가 러너가 된지 이제 꼭 3일이었다. 여전히 토마스의 달리기는 형편 없었고, 잠깐 쉬자는 말을 던지자마자 무릎이 풀려 쓰러졌지만, 토마스는 어쨌든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며칠 더 뛰면 몸도 익숙해 질 것이다. 민호는 물을 마저 들이켰다.

"전혀."

토마스는 민호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짧은 답을 돌렸을 뿐이었다. 고향. 부모님의 얼굴이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마당에 그런게 머리에 돌아다닐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있었을터다. 민호와 토마스 뿐만 아니라 글레이드에 있는 모두에게도.

"너는 뭐 기억나는거 있어?"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 사는 곳이었겠지. 태평한 말에 민호가 싱겁다는 듯이 바닥에 앉았다. 토마스가 눈을 감은 동안 머릿속에서 스치는 영상들 중에 고향에 대한 그림은 한가지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 치부해도 될만큼.

"고향이 어땠는지 궁금해?"

토마스는 고개를 돌려 민호를 쳐다봤다. 계속 누워있으면 근육이 아예 풀려서 더 뛰기 힘들어질 것이다. 어제였다면 억지로 일으켰겠지만 민호는 시선을 맞춰오는 갈색을 직시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토마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하늘로 얼굴을 돌렸다. 담쟁이 덩굴이 벽위까지 뻗어서 시야 구석을 녹색으로 만든다.

"응."

토마스는 제 고향이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무척 더운 곳이거나, 무척 춥거나, 아니면 숲 또는 바다가 있었을 수도.

바다. 바다라. 토마스는 바다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토마스가 알고있는 바다에는 강렬한 햇볕 같은 것이 없었다. 무척이나 조용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색조가 없는 차분한 바다.

제 고향에는 그런 바다가 있었을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는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바다는 검고 불투명하다. 토마스는 제가 바다에 빠진 경험이 있었을거라고 생각했다. 흐릿한 기억들은 끌어올리려하면 엉망으로 흩어진다. 토마스는 눈을 깜박였다.

"너는 고향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민호는 눈을 굴렸다. 아까 전혀라고 대답했던 것과는 달리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스에서 눈을 떠 제가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잠이 오지 않거나 너무 힘들어서 토하고만 싶을 때 같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생겼으니까, 고향도 아마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까. 민호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자원했든 끌려왔든 이 글레이드에 오지 않았다면 저와 아이들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없었을 것 같다는.

"별로."

토마스에게서의 반응은 없었다. 민호는 제 고향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민호에게 중요한 것은 미로의 출구를 찾아내 글레이드에서 탈출하는 일이었다. 고향이 어떻고 하는일은 올라온 초창기에나 고민했던 일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토마스는 올라온지 일주일도 안됐지. 토마스는 불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애된 휴식시간에서 1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민호는 반정도 남은 물병을 토마스에게 던졌고 토마스는 물병을 비우고 완전히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섰다.

"돌아갈 수 있을까?"

마저 일어서서 준비운동을 하던 민호는 토마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까만눈이 옆으로 굴러간다. 돌아간다, 라.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이 미로를 탈출한다면.

"글쎄."

우선과제는 미로를 탈출하는 것이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일단 탈출하고, 밖으로 나가면, 그 다음은? 그러나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만약 기적처럼 기억이 돌아온다면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게 될까. 고향에는 부모님이 있을까. 아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익숙한 나무와 그리운 표지판 같은 것이 있을까. 민호가 글레이드에 올라온지는 3년이었다. 무언가가 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토마스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민호는 말없이 그 웃음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부럽네."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어서. 토마스는 눈을 깜박였고 민호는 먼저 다리를 움직였다. 시간에 맞춰 글레이드로 돌아가려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뛰지 않으면 안된다. 해는 언제나처럼 질 것이다.





모든 글레이더들이 갖고 있는 향수병에 관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자세하게 풀고말리라.. '돌아갈 곳'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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