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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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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갤 타투이스트AU... 메온에 낼 원고였는데 도저히 못쓰겠어서 4페이지만에 중단ㅎ 일단 그냥 올려봄.



남자는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갤리는 벨이 두 번 길게 눌러지지 않아도 남자가 자신에게 오고있음을 알았다.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발소리와 문 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는 남자를 상징한다. 갤리는 자신이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남자에게서 숨길 수 있었다. 느긋하게 눌러지는 초인종 소리를 들어도 몇 초간 움직이지 않다가 아주 천천히 도어락의 문고리를 내리는 것으로, 그리고 지겹다는 듯이 구겨지는 눈썹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나는 걸음으로. 그리고 남자는 그런 갤리의 연기에 속아줄 수 있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과 입꼬리로, 아무렇지 않게 현관 안으로 디딛는 가벼운 신발로.

남자는 꼭 한 달만에 갤리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목적의 특성상 한 달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텀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는 쇼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리모컨이 다인 거실을 지나친 남자는 곧바로 굳게 닫힌 안방의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익숙치 않은 염료 냄새를 뚫고 가정용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는 가죽의자에 앉는다. 가죽의자는 치과에서나 볼 듯한 생김새다. 뒤로 누울 수도 있고, 등받이를 올려 등을 기댈 수도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시술용 의자였다. 남자는 거부감도 없이 자신의 잠자리마냥 푹 기대어 눈을 감고있다.

"뉴트."

갤리는 조금 언짢은 듯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한쪽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갤리를 봤다가 허리를 일으켜 구부정하게 턱을 괴었다. 빙글빙글. 짖궂은 어린아이 마냥 웃는 입에서 가벼운 인사가 흘러나온다. 안녕, 갤리.

처음 본 남자의 몸은 백열등 같았다. 햇빛을 보지 못한 하얗고 창백한, 그리고 딱딱한, 열을 품은 몸. 갤리는 사실 백열등보다는 약간 생기를 돌게 한 대리석을 먼저 떠올렸다. 갤리는 남자의 몸을 조각하고 싶었고, 남자는 기꺼이 그것을 허락했다. 갤리의 집 초인종을 두 번 울리는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갤리의 직업이었고, 남자를 포함한 낯선이들이 힘을 들여 갤리를 찾아오는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남자의 몸에 처음 조각한 것은 오른쪽 갈비뼈의 녹각(한자)이었다. 색 없이 외곽선만 검은색으로 새긴, 실제의 녹각보다는 조금 복잡하고 섬세한 도안. 남자는 사실 도안을 생각하고 갤리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문신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갤리의 추천을 바랬을 뿐이다. 요구조건은, 단단한 것일 것. 갤리는 망설임 없이 녹각 도안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수긍했고, 갤리가 맥없이 누운 자신의 위에서 바늘로 조각을 마칠 때까지 갤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낯선 일은 아니었으므로 갤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살 아래에 잘못된 화학물질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갤리는 작업을 하는 중 입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상대가 계속해서 말을 걸면 마지못해 몇 마디 대답을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몇마디를 뱉게 된다. 바늘조각은 섬세한 작업이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그림을 망치는 것 보다는 무뚝뚝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 백배 나았다.

그러나 남자는, 보통의 재료들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숨소리조차 별로 나지 않아서 그 끈질긴 시선만 아니었다면 시체를 붙들고 있는줄 알았을 것이다. 남자가 갤리의 기억에 남은 것은 순전히 그 침묵과 시선 덕분이었다.

침묵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갤리는 밑그림부터 바늘로 직접 하는 편이었고, 요즘의 타투이스트들 처럼 기계를 쓰지도 않았다. 독한 술을 한 잔 정도 건네기는 하지만 마취제도 환각제도 주지 않는다. 그런것들에 기대어서 만들어진 상흔들은 조각이라고 불릴 가치조차 없었다. 조각될 상흔은 반드시 고통을 참아낸 결과물이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침묵으로 참아내지 못했다.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허세를 부린다. 갤리의 바늘을 찾는 사람들 중 제대로 고통을 이겨낼줄 아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이유는, 어쨌든, 엄청 아팠으니까.

그러니까 남자는 그 고통을 이겨낼줄 아는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다. 흉부 바로 아래의 갈비뼈는 바늘을 대기에는 지나치게 아픈 곳이다. 살집이 있는 체형이어도 그런데 하물며 남자의 몸은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멋모르고 해달라고 했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부위다. 괜찮겠냐고 짧게 물은 질문에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갤리는 남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까만 눈동자에 그대로 담기는 바늘과 자신의 손.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새겨진 녹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하얀 손가락. 갤리는 자신의 기분을 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자신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의례적인 인사나 빈말조차 입에 담지 않은채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값을 치룬 뒤 돌아갔다. 까맣고 평범한, 장식조차 없는 가죽지갑에서는 염료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갤리는 그 냄새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2주일 후 남자가 다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분명히 말하는데, 누구라도 당신의 몸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당신을 질 나쁜 갱이나 집착증을 가진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할거야."

갤리의 질책에 뉴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후드는 간단히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대리석이었던 남자의 몸은 처음의 깨끗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오른쪽 갈비뼈와 왼쪽 어깨, 양 손목, 오른쪽 장골까지.

남자가 갤리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이번으로 다섯번째였다. 텀은 제각각이었지만 남자는 항상 한 달이 채워지기 전에 다시 가죽의자에 누웠다. 세번째로 남자를 봤을 때 갤리는 기묘한 예감이 배 아래서부터 엉켜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근거없고 서서히 안쪽을 눌러오는 감각. 단골 손님들은 몇 명 가지고 있었지만 갤리는 남자를 명부에 기록하지 않았다. 첫번째와는 달리 다음부터 남자는 원하는 도안을 가지고 왔고, 갤리는 묵묵히 바늘에 명주실을 감고 보기보다 복잡한 도안을 섬세하게 조각해냈다.

갤리가 뜻을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 문장으로 된 트라이벌(각주)이 감긴 손목이 가죽의자 위에 무기력하게 얹어진다. 갤리는 새로 받은 도안을 고개를 기울인채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국화꽃. 이런 분위기의 도안을 갖고 온 것은 처음이다.

"왜?"

남자는 입으로 뱉은 의문사와는 다르게 갤리의 시선을 예상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놓은 얼굴이 갤리가 들고 있던 도안으로 향한다. 남자가 들고 오는 도안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모양의, 의미보다는 보여주기 식의 도형이다. 손목의 트라이벌도 성경의 구절이라고 했고 주말의 아침에도 찾아오는 걸로 봐서는 남자에게 큰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형태가 확실한 선은 처음의 녹각이 전부다. 그런데 갑자기 국화꽃이라니.

남자는 갤리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죽은건 아니야. 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안에 들어찬 꽃송이가 들어갈 만한 곳을 상상했다. 문신을 여러 곳에 새기는 사람은 비단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마치 오래된 폐공장의 벽처럼 쓰고는 했다. 싸구려 그래피티로 가득 찬 회반죽. 갤리는 남자의 몸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경건함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약하고 희미해서, 한 번의 잘못으로 쉽사리 망가지고는 하는 것이다. 갤리는 불빛에 공연히 도안을 대보며 투명한 눈을 굴렸다. 남자는 작업실에 들어온 뒤에 갤리에게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

"왼쪽 허리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리가 마음대로 한 결정을 남자가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원하는 위치가 있으면 도안을 건넬 때 말한다. 남자가 지정하지 않는 사항은 온전히 갤리의 몫이었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남자가 눈을 감자 갤리가 찬장에서 염료를 꺼냈다.

가죽의자에 드러누운 남자는 체념이 무엇인지 아는 자세다. 갤리는 바늘귀를 들고 남자의 하얀 몸에 손가락을 얹었다. 피가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의 옅은 상처. 부어오르는 모양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조각의 밑그림이 된다. 바늘이 살에 닿는 느낌은 언제나 갤리를 긴장하게 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얇은 피부가 찢어질 것이다. 갤리가 끝을 대고 있는 것은 세상 어떤 것 보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가죽이었다.

갤리는 문득 바늘 하나만으로 남자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눈을 굳게 감은채로 부검을 기다리는 시체는 바늘이 좀 더 깊게 들어가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갤리가 바늘을 들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음에도 남자는 태평하게 꿈을 꾼다. 아니, 갤리는 남자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눈꺼풀 아래에 가려져 있어도 남자의 눈은 저를 향해있다. 갤리가 묵묵히 바늘을 움직였다.

시작하기 전에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일단 갤리가 바늘을 들면 좁은 방은 침묵에 잠겼다. 갤리는 호흡을 조절하며 자신이 이 남자에 대해 정확히 어떤 것을 아는지 가만히 생각했다. 나이는 갤리보다 어리거나 동갑이겠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나 회사에 다닌다고 하기에는 찾아오는 시간대가 지나치게 자유롭다. 그저 놀고 있는 취업준비생 정도일까. 그렇다면 갤리에게 망설임 없이 내놓는 현금들의 출처는 어디인지, 어째서 몸을 문신으로 뒤덮으려고 하는지, 모르는 것은 찬장에서 저를 보고있는 염료의 수만큼 많다.

"갤리."

갤리의 시선이 힐끔 남자에게 향한다. 남자는 미미하게 얼굴을 구긴채로 갤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집중. 입모양으로 말해지는 단어에 갤리가 다시 바늘로 눈을 돌렸다. 밑그림 자체는 완벽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과를 해야하는지 생각하던 갤리가 곧 말 없이 남자의 살을 바늘로 찔렀다. 잡생각은 옆으로 치워두려 했으나 그 직후에 생각의 결론이 났다. 갤리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이 전부다.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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