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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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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임수경염. 센티넬은 천인(天人), 가이드는 윤인(輪人) 으로 대체합니다. 천인인 경염과 윤인인 임수. 윤인이 꼭 없어도 천인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적염군 사태 이후 성장이 멈춰버린 경염에 대한 이야기.










너무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침전 속 나의 몸이 얼어버린 밤들이 있었습니다.




*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7황자인 소경염의 '부작용'은 금릉 뿐만 아니라 강호에 까지 이야기가 오갈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7황자가 출정을 나갈 때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관한 말은 저잣거리에서 꾸준히 화제로 올랐다. 언제나 드높게만 칭해지는 천인의 불길함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몇 없었다. 혹자는 경염이 그렇게까지 전장을 헤매는 이유가 그 부작용 때문일거라고 수근거리고는 했다. 7황자의 상태는 불길함의 징조였으니 금릉에 머물러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황실의 품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염이 출정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의 부작용 따위는 빛깔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황제는 천인이 아니었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에 대해 시기를 느끼고 있었다. 3대째나 천인인 황제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름에 부여된 의미를 중요시했다. 하늘이 점지해줬다던 능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황제의 의심은 커졌고, 죽은 기왕도, 내쫓기고 있는 경염도 그 시기의 여파가 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염이 황제의 눈 밖에 난 것은 부작용 하고는 상관없었다.


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매장소로 위장하고, 그 위에 소철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금릉에 들어온 임수는 아주 오랜만에 말을 잃었다. 빠른걸음으로 옆을 지나친 남자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내관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작은, 심하게 어린 남자는 황자의 호칭을 듣고 있었다.


정왕. 용서해달라고 비굴한 말을 주워삼던 내관이 월귀비의 이름을 올린다. 옆에 있던 예황이 채찍을 들고 나서자 바짝 엎드렸던 몸이 계단을 굴렀다. 감히 월귀비의 이름을 팔다니, 오만함이 끝을 모르는구나. 운남왕부 군주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퍼지는 동안 관을 튼 덜 자란 몸이 궁노비에게 돌아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이 시선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걸 알면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7황자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이 성장을 멈췄고, 더이상 머리카락 마저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어린 몸으로 선두에 서 전장을 호령한다는 이야기. 천인의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의 일종이라는 이야기. 그의 윤인이 죽은 것이, 그 불길한 부작용의 원인이라는 이야기.


"도움은 고마우나, 내관 하나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소."


임수는 앳된 목소리를 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관이 예황의 호통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급히 액유정의 노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예황이 저보다 한끗으로 눈이 낮은 경염을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기왕의 사건으로 처치가 곤란하신걸 압니다. 아랫것의 일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차분한 말에 경염이 알아들었다는듯, 혹은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돌아가려는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한다. 이름이 무어냐. 정생이라는 답이 돌아올 동안 옆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나이는? 열 한 살. 머릿속을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이 경염에게서의 주의를 돌렸다. 황자가 아끼는 액유정의 노비. 가능성을 잴 동안 마치 더이상 대답하지 말라는듯 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생.


임수는 뻣뻣한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는걸 알았다. 제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급하게 일어나 한 공수는 바르지 못했다. 정왕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소문의 7황자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한 손으로 마을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는 천인. 11년 전 부터 전혀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다는 불길한 존재. 황자라는 이름은 쉽게 가려지고는 했고, 그것에 불쾌해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경염은 그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좀 더 들어올렸다.


"당신은 누구요?"


창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입을 떼지 못하는 임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예황이 나서서 대신 소개를 올렸다. 소철 선생.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얼굴에 임수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필부입니다. 모르시는게 당연하지요.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자라지 않은 경염의, 11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주는 여파에 대한 것을. 경염은 꿈에서나 봤던 얼굴에 경계를 덧씌우고 있었고, 임수는 차라리 필부의 신분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눈칫밥을 먹으며 툭하면 금릉에서 쫓겨나는 7황자는 그에 비례해 감이 좋았다. 정생에게 물은 질문만으로도 주의를 샀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분명 경계가 더 심해질 것이다. 황자에게 제 때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을 신경 쓰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게 최선이다.


"궁문을 넘은데다 예황군주와 함께 있는데, 평범한 필부라. 궁을 자주 비우는 탓에 내가 모르는 걸 테지요."


다행히 차분한 목소리는 딱딱할지언정 의심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화제는 예황의 덕으로 정생에게 다시 넘어갔다. 순하고 학문에 뜻이 있기에 가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매끄러운 말을 듣던 임수가 정생을 일으켰다. 1년 중 금릉에 머무는 시간이 채 네 달이 안되는 황자였다. 정왕부는 궁의 바깥에 있고, 친왕이 아니니 궁에 있는 시간은 그것보다 더욱 적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액유정의 노비에게 정을 줄만큼, 맞닥뜨릴 일이 그리 많을까.


임수는 정생을 액유정에서 꺼내주겠다 약조했다. 이어지는 예황의 말은 줄줄이 맞는 말이었다. 액유정의 노비를 꺼낼 수 있었다면 황자인 경염이 진작에 그리 했을 것이다. 임수는 제 언행이 황자를 기만하는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요. 딱딱하게 굳은 어린 얼굴의 시선에 서리가 낀다.


임수는 그 시선을 받아서야 세월을 느꼈다. 지나치게 곧은 자세와 뻣뻣하게 들린 목. 저보다 큰 사람을 내리 누르는 위압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잘 웃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황자라지만 어린 몸에, 금릉의 모든 사람들이 7황자가 받는 대접을 알고 있다. 기만 당하는 일이 익숙해졌을 것은 당연했다. 자라지 않는 황자가 건너왔을 길은 굳이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 서슬퍼런 시선은 몸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었다. 시선이 아래에 있더라도 기만 당해 좋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무시당하는건 괜찮겠으나, 황자의 신분이다. 제가 기만 당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황실이나 정왕부에도 여파가 갈 것이 당연했다. 그런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다. 매장소의 얼굴이 미소를 만들었다.


"전장에 자주 나가 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실텐데, 제가 정생을 빼온다면 전하도 심려를 하나 덜지 않으시겠습니까."


경염이 눈을 내려깔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수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액유정의 노비에게 선처를 바라는 말은 상황에 맞춰 꺼내면 될 일이다. 황제에게 빚을 만들 일은 많았다. 자신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권모술수를 싫어하는 자신의 천인에게 환심을 사기에 아랫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기대하지. 결국 떨어지는 말에 임수의 고개가 숙여졌다. 짧은 대담은 그것이 전부였다. 황자는 저보다 작은 궁노비를 감싸듯이 품고 자리를 떠났고, 임수는 곧은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있나보군요."


예황의 목소리가 흘렀다. 임수는 그저 얌전히 웃었고, 그것으로 답은 충분이 되었다. 마주보도록 몸을 돌린 군주의 눈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들키면 죽을만큼 맞을걸 알면서도 책을 훔치는 아이긴 했지만, 액유정에서 노비를 꺼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당하게 꺼내오겠노라 장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나 강좌맹의 종주가 노비를 구하여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7황자는 정이 많으니 어떤 이유라도 갖다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쪽은?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몇 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국이었고, 사실 궁노비에 대한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예황은 질문을 넘겼다. 대신하여 경염이 사라진 복도가 까만 눈에 담겼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왕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과는 다른 분입니다."


소문. 임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예황은 정왕에 대해 알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 이후 경염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마치 그 전까지는 누군가가 밀어줬던 것처럼, 그 누군가가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였던 것 마냥. 이름도 언급할 수 없도록 사라진 사람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예황은 운남왕부로 보내졌고, 정왕은 단지 이유를 알고싶다고 청한 것 만으로 북방으로 밀려났다. 몇 년이 흘러 다시 마주 본 7황자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황은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경염의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황자에게 갖춰야 할 예를 취했고, 경염도 군주에게 해야 할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저잣거리에서는 7황자가 12년 전 부터 멈춰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하지요. 궁에서는 그것을 황제에 대한 무언의 항명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천인의 부작용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병을 앓았다. 황제에게 그 부작용은 경염이 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겉모습은 12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인데 머리에 벼루를 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정왕이 그것에 대해 항명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정도는, 궁에서 돌아다니는 말들이 사실이라는걸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저 똑같다는 말만 하였다. 12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임수는 눈에 들어오던 경계어린 눈을,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굳어버린 얼굴을 떠올렸다. 12년. 바퀴를 잃은 수레는 땅에 처박혔고, 바람은 나무를 삭혔다. 임수는 질문이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동안은 침묵이었다. 태황태후가 올린 수아라는 이름에 정왕까지 연달아 보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듯 예황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일텐데.


먹혀들어갔던 입술이 돌아왔다. 숙였던 고개를 든 예황이 입꼬리를 올렸다. 처지가 좋지 못해도 황자입니다. 다음에 만나실 때는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게 좋을듯 합니다만. 임수의 얼굴이 아래로 기울여졌고, 예황이 근처를 지나가던 내관을 불렀다. 소철 선생을 궁 밖까지 데려다 주시게. 고개를 조아린 내관이 임수의 앞에 서자 예황이 돌아섰다.


살펴가십시오. 단촐한 인사가 예황의 등을 따랐다. 내관은 눈치껏 사람이 없을 길목으로 임수를 이끌었다. 12년 만에 돌아온 궁은 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찬 바람이 불었다.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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