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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루성, 아성 1인칭 독백








나는 사람의 거죽을 글자에서 얻었다.

글자들을 회반죽 처럼 두르고 나는 사람 행세를 했다. 멀쩡히 웃고 사랑받고 속였다. 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할 것을 억지로 했으며 가죽 안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의 자기애는 끝이 없어서, 단지 보이는게 자신들과 비슷하면 무턱대고 좋아하고 만다.

내가 가장 처음 얻은 거죽은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썼다. 명성. 명가의 아성.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글자였다. 나는 그 글자의 발음이 내 얼굴을 덮는 것을 느꼈고, 먹의 틈 사이로,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 전에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고아원의 원장이나 봉사를 나온 사람들이 지어주던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채 나를 동정하는 표정. 그러나 글자의 틈으로 보인 웃음은 그런것과는 달랐다. 그 웃음은, 형님의 웃음은 아주 밝았고, 나를 전혀 동정하고 있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그것을 좋게 생각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는데,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유로 나에게 동정은 좋은 것이었고, 그런게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표정을 정말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웃음을 따라했다. 얼굴에 씌여진 글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글자가 사람의 것이기 때문일거라고, 아주 오랜 날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첫 가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형님은 그 다음부터 글자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글자를 몸에 칠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칠하면 칠할 수록 칭찬 받는 일이 늘었고, 칭찬을 받으면 안심이 됐다. 칭찬 받지 않으면 굶는 생활을 했었으므로 나는 꽤나 필사적으로 가죽을 둘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활은 끝났다는걸 깨닫고 나서도 나는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게 싫었지만 너무도 쉬웠으며, 그저 버려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유일하게 내가 사랑 받아야 할 이유였다. 나는 명가가 주는 애정을 배부른줄 모르고 집어삼키며 혼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아가리가 넓은 입은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쑤셔넣었고, 한 번 늘어난 구멍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사람이 아닌 나는 절제라는 것 조차도 가죽으로 써야했기에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가죽을 덧씌우고 벗겼다가 깁는 것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두려움이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중의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문득 형님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화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파리로 온지는 이미 1년이 훌쩍 지나있었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명성의 가죽이 명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므로 그냥 놔두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자각한 후에, 나는 급하게 구역질을 했다. 매만지던 화초도 내버려둔채 욕실로 달려들어가 말 그대로 안에 있는걸 전부 게워내버리고는 옷을 벗었다. 온도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을 들이부었고, 손에 걸리는 타올로 상처가 날 정도로 몸을 닦고도 욕조에 잠겨 다음날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일주일간의 몸살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끔찍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 때서야 가죽이 안쪽을 좀먹기 시작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가죽의 표현이 나의 표현이 되고, 가죽이 느끼는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었으며, 가죽이 느끼는 통각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살을 앓는 중에도 끊임없이 속을 게워냈고, 몸살이 모두 나은 뒤에는, 거처에서 거울을 모조리 치웠다.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떨었을 때, 단지 그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사람은 아팠다. 사람은 주었으며, 사람은 잃었고, 사람은 무너진다. 가죽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받고 싶은걸 가지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글자들을 모두 박박 긁어내 발로 짓밟고 싶었다. 형님이 지어주었던 글자가 달라붙다 못해 스며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건, 무서웠다.


청자라는 가죽을 얻은 것은 그 때쯤이었다. 당에 가입할 의사를 비췄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중에 다시 연락이 왔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죽의 결정이었으나, 나의 본질은 신분을 위장 해야한다는 사실을 이빨에 박아넣고 씹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죽. 그것을 얻으면 다시 가죽과 본질을 유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명가의 아성이 아닌 청자로서 가죽을 다시 씌운다면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썩 잘 먹혀들어갔다. 청자의 가죽은 명성의 가죽과는 아주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이 썼던 먹으로 쓴 명성의 글자와 만년필 잉크로 휘갈겨 쓴 청자의 글자는 같은 검은색이어도 섞여 들어가 있는 색에 차이가 있었다. 그걸 같은 검은색으로 쳐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청자를 쓴 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몇 번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중요한 임무를 성공시키고는 했고, 신뢰도가 높아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자는 웃었으나 본질까지 감정이 전달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성공으로 쳤다. 계속 이렇게 청자의 가죽을 쓰고 산다면 유학을 끝내고 돌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형님의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점점 청자의 잉크가 스며들었던 먹 마저도 흡수하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재떨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나를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고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청자는 도구이므로, 그저 일만 잘 하면 되었다. 청자에는 꽃과 향수, 화약과 골목길의 글자가 쓰였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두려움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이 파리로 온다고 했을 때 꺼리지 않았다. '청자'는, 다른 가죽이어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들킬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약 들킨대도 다른 사람이 됐다고, 그 이상으로 추론하는건 불가능 할거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내가 글자를 가죽으로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눈치가 없었다기 보다는 그런걸 눈치 챌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형님도 가죽을 쓰게 됐다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가정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총성이 들렸을 때, 다시 돌아온 두려움으로 인해 청자의 가죽은 눈 위에 처참하게 버려졌다. 아직 덜 빠져나갔던 옛날의 먹이 묻은 채인 살점들은 여과없이 공기를 맞았고, 살점에 달라붙어있던 수증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결정들을 만들었다.


그 얼음과 눈으로 얇게 씌인 것의 이름은 명성이었다. 명루의 아성. 살점과 뼈에 달라붙어 긁어낼 수 없는, 가죽이 아닌 피부의 이름이었다.




*



그래도 여전히, 몇 번의 밤에서는 내가 가죽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그건 필시 내가 나의 본질을 앎이고, 원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끔 피부가 벗겨졌고, 살결 아래에서 얼굴을 구기며 필요할 때는 칼로 피부를 긁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점이 아닌 피부 위에 글자를 쓰고 덮는다. 모든 글자들은 피부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모든 나의 생각들은 피부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먹이 스며들까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이 아닐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내 것을 주지 않고 아파 할 필요도 없는, 웅크린 본질을 두껍게 감싼 가죽을 다시 갖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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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는 고개를 들었다.


넓은 방은 햇볕으로 채워져 있었다. 창호문은 대청을 향해 활짝 열려있었고, 바깥에서는 새소리가 났다. 임수는 손잡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괸채 맞은편을 보고 있었다. 지저귀는 소리가 꺽꺽대며 죽어가는 소리 처럼 들린다. 주의를 분산 시키는 것이 너무 많았다. 흠집이 많은 목재바닥, 떠다니는 민들레의 씨앗이나 반쯤 볕에 물든 경염의 머리카락, 다리 하나가 다른 것 보다 짧은 의자, 엎질러진 찻잔과 말라붙은 얼룩까지 모든 곳이 임수의 도피처다.


눈을 감으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속삭여지는 혼잣말이 실질적인 충고임을 알았지만, 임수는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뜨고 있어서 아려오는 눈 주위가 붉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경염은 웃고 있었다. 언제나 보던 얼굴이다. 항상 생각하고 떠올리던, 어떤 때는 물에 가라앉은듯 흐릿하기도 했던 얼굴.


경염의 앞에는 고리가 있었다. 아주 천천히, 경염이 의자 위로 올라선다. 삐걱, 균형이 맞지 않는 의자가 흔들렸다. 황자는 매듭이 제대로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을 몇 번 잡아당겼고, 목재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어떤 것이든지 소리가 너무 컸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던 천이 경염의 손에서 놓아졌고, 물든 눈이 임수를 향했다. 임수가 주먹을 그러쥔다.


머리를 넣어. 어떻게든 단호하게 끊어낸 목소리가 울린다. 경염은 말없이 고리를 목에 걸었다. 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간다. 경염의 시선은 임수를 따라가지 않고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이 섬세하게 조각된 등받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당기면 경염이 떨어질 것이다. 새는 이미 죽었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임수는 방의 끝 부분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곳은 모두 없어진지 오래다. 이곳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곳이었다. 경염의 방.


없애야 한다. 알고 있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떨어뜨려. 목소리가 들린다. 살아남아. 외침이 들린다. 수아야. 재촉이 들린다.


하지만 아버지. 나약하리만치 꺼져가는 소리에 임섭이 임수의 어깨를 쥐었다. 손톱이 벗겨지고 살이 까진 끔찍한 손. 이제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염은 눈을 내려깐채 침묵하고 있었다. 민들레 씨앗이 볕을 통과했다가 느리게 떨어진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임수의 손도 재로 뒤덮인다. 수아야. 임수의 눈이 감긴다. 수아야.


경염의 몸이 허공에 뜬다.


끔찍하리만치 조용하다. 임수는 본능적으로 발버둥치는 다리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햇볕은 불로 바뀌고, 발을 디딘 곳은 처형장으로 바뀐다. 재로 뒤덮인 매령은 붉다. 임수는 고개를 들어 목을 맨 시체를 보았다. 까무룩 죽어있는 감정 그 자체가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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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자랐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키가 커진 것 같다거나 얼굴이 성숙해졌다는 농담은 황제의 눈 밖에 밀려난 7황자를 기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궁에 가게되면 으레 몇마디씩 들려오는 기분나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라궁으로 향하는 중 만났던 예왕이 너스레를 떨며 좀 커진 것 같다고 말을 건넸을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익숙해진 기만을 듣고 새삼 화를 낼 성정도 아니었다.


예왕은 여전히 딱딱한 녀석이라며 길을 비켰고 경염은 정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지라궁에 찾아들었다. 정비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차리도록 명하며 언제나처럼 경염을 맞았지만, 백합탕을 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을 때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챘다.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떠야하는건 경염이었으나 어째 정비의 얼굴이 더욱 놀라있었으므로 엎질러진 탕은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머니? 의아하게 나온 목소리에 정비가 손을 놓기는 커녕 좀 더 가깝게 손을 끌어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보라고 답지않게 독촉을 했고, 영문을 모르는 경염은 명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경염은 약간 멍한 기분이었다. 몸이 자랐다니? 급히 시녀들을 시켜 관을 틀었던 머리까지 푼 경염은 세심하게 살펴보는 정비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당황스러워했다. 얼결에 바라본 손톱은 정말로 길이가 자라있었다. 한끗. 그러나 전장에서 다쳐도 딱 예전의 상태로만 돌아오던 손톱이 자랐다는건 무시하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키까지 재 본 결과 확실하게 자라있었다. 경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과거에는 매일 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랐는지 확인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습관이다. 손톱도 머리카락도 언제고 똑같았고, 몸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벗었던 겉의복을 다시 입혀주는 손에도 무슨 기분을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잡히는 단서가 없다. 경염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윤인이 죽은 부작용이었다. '윤인'은 천인과는 달라 능력이 없었으나 기의 파장이 비슷한 다른 천인을 받쳐줄 수 있었다. 모든 천인이 윤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평생 자신의 윤인을 만나지 못하는 천인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부작용이 없고 능력 또한 약했다. 기왕도 윤인인 기왕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겨우 돌맹이 하나 들어올리는 정도였지만, 기왕비를 만난 후로는 활 없이도 백 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경염처럼 거의 태어나자마자 윤인을 만난 경우는 역사서에서나 찾아볼 법하게 드문 일이었다. 천인은 천성적으로 기가 두 가지 있다고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천능의 기가 활발하여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있으나 조절에 미숙한 단점이 있다. 자라면서 윤인을 만나지 못하면 자연히 천능의 기가 막혀 점점 능력이 줄어든다. 그러나 경염은 제 윤인과 계속해서 함께 자랐고, 나이가 차면서 천능이 막히는 일 없이 조절법만 늘어갔다. 경염이 나서는 전장에는 항상 불이 따라왔으나 기가 폭주한 적도, 천능이 줄어든 적도 없었다. 불안정한 날들은 많았으나 임수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나 특별한 사람이 갑작스레 죽어 떠났을 때. 윤인에 사라진 것에 대한 부작용은 천인마다 모두 달랐다. 갑작스레 폭주를 하거나 천능을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몸이 끔찍하게 약해질 수도, 혹은 운이 좋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경염처럼 성장이 멈춰버린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시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윤인이 사라진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정비는 경염의 맥을 짚어본 뒤 천능 대신 다른 기가 막혀버렸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서 성장이 멈춘 대신 천능은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경염은 지금까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윤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막혔던 기가 갑자기 뚫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열 두 해 동안 자라지 않았던 몸이었다. 일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해보다 금릉에 좀 오래 머물고 있기는 했지만, 북방토벌을 워낙 깔끔하게 해버린터라 보낼 곳이 없어 그럴 뿐이었다. 특별히 의원을 찾아가거나 다른 탕약을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 시도들은 오래 전에 포기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경염을 앞에 둔 정비는 성정대로 차분해졌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관을 도로 틀어올린 경염은 무슨 말을 떼어야할지 몰랐다. 짐작되는 이유. 말아쥐어지는 경염의 손을 보던 정비가 눈을 내려깔았다.


"...12년이나 되었잖니."


경염은 대답이 없었다. 12년. 긴 시간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 경염은 이제 서른을 넘었으며, 금릉 또한 너무도 바뀌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극심한 슬픔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천능은 요사스러운 것이어서 기의 주인의 마음을 신체적으로 반영시킨다고, 혹자는 그것이 부작용이라고 서술했다. 크게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황상에게서 정왕의 이름을 실추시키려고 하던 뭇 서생들이 계속 들고나왔던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정을 그렇게 놓은 후 생각하면. 경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자라버린, 굳은 살로 뒤덮인 손. 정녕 그런 것일까. 제가 임수를 잊어서, 임수에 대한 마음이나 그리움이 옅어졌기 때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일까. 그런걸까?


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경염은 막사촌 하나를 모조리 태웠다. 부관이 입단속을 시켜 황상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당시의 병사들은 그 때의 경염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막사에서 주저 앉아있는 황자. 재들이 타는 소리가 황자의 오열을 묻었고, 날이 지날 때까지 화마는 줄어들지 않았다.


잿더미에서 걸어나오는 천인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채인 경염의 눈은 극도로 형형했다. 바로 금릉으로 돌아가 이유를 물었으나 황상은 설명해주기는 커녕 경염을 북방으로 내몰았고, 몸은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경염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오래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미련했다. 그럼에도 경염은 주먹을 말아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제가 임수를 얼마나 그리워 했었는지, 그의 죽음에 얼마나 괴로워 했었는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허공에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몸을 항명이라고 칭하는걸 부정하지 않았던건, 경염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작용은 항명이었다. 기왕부의 사람들과 임씨 일가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믿는 경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고, 할수만 있다면 이 모습 그대로 임수를 만나고 싶다고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닳아버렸다고 한다면.


경염의 눈이 부정하듯 질끈 감겼다.




*



당신은 이렇게 날 떠났죠. 난 내색하지 않아요. 희망도, 사랑도, 영광도, 행복한 결말도 없다는 사실을요.




*





"정왕의 몸이?"


몽지는 확실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위군의 통령은 소문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 그라도 촉각을 세우는 이야기들이 몇 있었다. 죽은 의형제가 금릉으로 돌아온 뒤로는 정왕부의 소식이 그러했는데,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갈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급하게 녕국후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임수는 부탁한 저택의 일인줄 알고 몽지를 들였다가 손을 그러모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염의 성장이 멈춘 것은 윤인인 자신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금릉에 돌아온데다 지척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더이상 부작용이 계속 될 이유가 없다. 사실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한독이 기를 흐트려 놓았을거라 믿었기에 아직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몽지는 낭패어린 임수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임수도 생각 못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강좌맹의 종주가 금릉에 도착하자마자 경염의 부작용이 낫는다니. 예왕의 편인 척 할 계획이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경염이 눈치를 채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김에 말해버리자고 한탄하는 몽지에게 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대업을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경염이 제 정체를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닙니다. 윤인은 평생에 한 사람으로 정해지는건 아니니까요."


드물었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새로운 윤인을 만나게 되면 부작용이 사라진다는 사례는 고서에도 왕왕 나와있는 이야기였고, 마지막 천인 황제도 세 명의 윤인을 두었다. 천인과 마찬가지로 윤인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새 윤인이라니, 정왕이 당황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금릉으로 오자마자 부작용이 나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매장소가 정왕의 새 윤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예왕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예왕의 책사로 있으며 안으로는 정왕을 도울 계획이었는데, 천인과 윤인 사이의 각별한 애정에 대한 것은 온나라가 소비하길 좋아하는 소재였다. 정왕의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의심 많고 총명한 예왕이 뒷생각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해결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뒤집어서 보면,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다만 정왕에게는 조금 잔인한 수가 될 것이고, 신임을 얻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시기가 늦었으면 했는데. 어떤 계절이든 차기만 한 손이 찻잔을 쓰다듬었다.





*




 7황자의 부작용이 서서히 걷힌다는 소문은 빠르게 금릉을 돌았다. 경염은 되도록 정왕부의 바깥으로는 나서지 않았고, 소문은 무성하게 커졌다. 온갖 추측이 나돌았지만 다행히 매장소의 존재까지 이야기가 연결 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백리기의 무술 시합 때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었으니.


임수는 비류가 전해준 서신을 받았을 때 경염이 뭔가를 깨달았을거라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경염도 수상한 책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급하게 전해진, 만나야 한다는 서신을 봤을 때, 가능성이 스쳤을 것이다. 시기가 너무 꼭 들어맞았다. 책사와의 만남 후로 몸이 자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경염에게 몇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앞으로도 계속 자랄겁니다."


책사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경염은 시선을 아래에다 두고 올릴 줄을 몰랐다. 사실 몸이 자랐다는 것이 그렇게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깨가 조금 벌어졌고 섰을 때 반의 반뼘이 안되게 키가 컸을 뿐이다. 손은 소매에 가려지고 머리는 관을 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과 다르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정비와 임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윤인에 대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임수는 시선을 내렸다. 경염은 여전히 단단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자라는 몸에 대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음이 분명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부작용이 없어지는 가장 흔한 경우에 대해서.


서책으로는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책사를 보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였다. 예왕과 태자를 놔두고 절 황제로 올리겠다 선언한 책사가 윤인이라니. 우연이라쳐도 질이 너무 나빴다. 경염을 불러낸 것이나 첫마디까지만 고려해도 자신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듯 눈을 감은 경염이 숨을 뱉었다.


"내 전 윤인에 대해서도 들었을거라 생각한다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매장소가 눈을 감고 있었고, 경염은 시선을 비껴 다기들을 보았다. 적염군에 대한 이야기는 온 나라가 쉬쉬하면서도 밑으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금릉에 들어오며 임씨 가문에 대해 듣지 못했을리가 없고, 경염을 황제로 올릴 생각이라면 그의 윤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리가 없다. 경염의 말이 질문이 아닌 이유도 그런 탓이었다.


어떤 말이 나와도 시치미를 뗄 수 있었지만, 임수는 제가 화두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7황자 소경염은 고집이 세고 주변에 어둡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모순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파고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수에 대한 화제가 민감하면 민감할 수록 그럴테고, 그래서 윤인에 대한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나중에 하고 싶었다. 매장소가 임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준 다음에 나누어야 할 화제였는데. 


"매령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임수가 저에 대해 뱉을 말이 많지는 않았다. 경염은 제 손 끝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오히려 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감긴 임수의 눈꺼풀이 약하게 떨린다.


"그랬지."


찬 목소리였다. 매장소는 송구하다는듯 고개를 숙였고, 경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을 말한건데 어째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오. 차분해진 얼굴로 찻잔을 가져간 경염이 소매를 걷었다. 서책에서 읽었다고는 하나 자세한 건 모를테니 간단하게 얘기해주겠소.


"바퀴 윤자를 쓰는 것은 알고 있겠지. 천인이 가진 천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윤인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이오. 윤인은 천인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천인은 불가능하지."

"...전하는 살아계시지 않으십니까."


임수는 경염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랬으나 천인은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간결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윤인은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다. 천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천능을 증폭 시킬 수 있었고, 천인이 폭주할 때 몸을 닿게 하는 것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니 옆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역할의 8할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왕에게 넘어간 척 해야하니 둘은 옆에 있기는 커녕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한다. 조절이 미숙했을 때 만났다면 문제가 있겠으나 경염은 이미 윤인 없이도 천능을 다룰줄 알았다. 무리하게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설명에 매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능에 관한 것 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경염은 손을 가리고 있던 천을 위로 걷어 매장소에게 내밀었다. 검지의 손톱만이 유난히 길다. 매장소가 허락을 구해 손을 살펴볼 동안 나머지는 잘라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손톱 외에 손의 골격도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주 전이니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정왕부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소. 소문도 마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고. 선생을 안만난다고 자라지 않는 것 같지도 않으니, 윤인인걸 숨기는게 쉬울 것 같지는 않소만."


임수는 길다란 손가락을 쓸어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하의 윤인인 것은 반드시 숨겨야합니다. 예왕에게 의심을 사는건 피해야하니까요. 그것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염이 자연스레 손을 빼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묻는 목소리에 임수가 찻잔을 잡았다. 속여야지요.


"황상에게 전하가 적염군과 임수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하십시오. 둘도 없는 기회이니."


바람에 열기가 섞인다. 임수는 그러쥐어지는 주먹을 내려깔은 눈으로 보며 차를 흘려넣었다. 그을림을 낸다면 녕국후부에 자신이 왔었다는걸 알리는 꼴이 된다. 빠르게 열을 가라앉힌 경염이 목을 세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임수는 곧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쳐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미에 붙였듯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제위다툼에 나서 최종적으로 태자에 책봉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천대받는 처지부터 개선해야 한다. 12년 전의 일에서 미련을 털어버려 외관이 자란다고 한다면 경염을 보는 황상의 눈도 달라질 것이었다. 천인의 몸은 하도 불가사의한 것이라 온갖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거나 일정한 유형이나 '보통'이라 칭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윤인이 사라져 성장이 멈춘 몸이었다. 윤인에 대한 미련이 없어져 다시 자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물며 천인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황상이야 더 쉽게 속겠지. 천인에 대한 황상의 시기 탓에 예왕이나 태자도 그쪽에 능하지 않으니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라면 경염에게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것이 성정에 맞지 않으신걸 알지만,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신중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황상을 속이려면 단지 황상 혼자만을 속여서는 안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예왕이나 태자 같은 다른 황자들이나 심지어는 예황과 정비에게마저도 거짓말을 해야했다. 정생의 일만 따지더라도 거짓말을 하기 싫어할 뿐 못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으나, 무거운 것은 거짓말의 내용이었다.


임수와 기왕, 7만의 적염군에 대한 것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야하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며 지나간 일들이라고. 누구도 경염을 탓하지 않겠으나 경염은. 경염만큼은 제위다툼을 위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늦든 빠르든 몸이 자랐을테니 언젠가는 해야했을 거짓말이었지만 임수는 그 시기가 되도록 늦었으면 했다. 경염의 자책은 임수의 속마저 파먹을 것이었기에.


경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숙인 얼굴은 시선에 잡히지 않았고, 열기도 나서지 않았다. 못한다는 답이 들려도 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위험이 따랐고, 너무 위태스러운 작전이다. 경염이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으니 나올 결과를 알아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희생은 언제나 따르는 법이었으나 임수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구역질을 참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임수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약조해 줄 것이 있소."


오래 걸렸으나 망설임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경염의 고개가 들리는 듯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각거리는 단호한 소리.


"난 기왕 형님과 임씨 일가가 모반을 꾀했다고 믿지 않아. 사건을 재조사 해 그들의 결백을 밝혀내야 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고."


임수의 내려진 시선에는 아직 쥐어져있는 주먹만이 보였다. 정갈하게 놓여있는 손은 앞으로 12년의 세월을 빠르게 거칠것이다. 더 커지고 길어져 큰 칼이나 활도 가볍게 쥐게 되겠지. 몸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금의 얼굴은 흔적만 남고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 얼어있어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차가운 덩어리. 언제나 무시받았던,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얼음.


"그걸 막지 않는다고 약조 한다면. 선생의 계획이 무엇이든 따르겠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얼음에게서 새어나오는 열기가. 얼음에 갇혀있던 적염이. 덮쳐오는 화마가 너무나 그리워서, 임수의 눈이 감기었다.




*



이게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에요. 마치 영원한 것 처럼.

그리고 우린 남은 여생을 살아가죠, 하지만 함께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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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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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분량이 얼마 안돼서 기분이 이상하네;;; 임수경염 뱀파이어au... 군님 사랑해요....







흡혈귀라고 부른다.


경염은 그런 귀신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바깥의 무서움을 모르는 임수의 손에 끌려 정처없이 밤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돌아왔던 날이다. 임섭 장군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을 앉혀놓고 세상에 존재하는 귀신에 대해 가르쳤다. 죽은자의 몸으로 움직이는 강시,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각다귀, 행인을 끌고 들어가는 수귀, 긴 손톱을 가졌다는 산호.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흡혈귀라고 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해 거꾸로 매달아놓고 생피를 빼간다. 고통에 찬 비명은 귀신의 귀에는 닿지 않고, 절망스러운 얼굴과 그들의 애원은 귀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치 피를 전부 빼면 잠시 놔두었다가 사람에게 피가 차면 다시 매달아 놓고 일을 반복한다. 잘못해서 먹이가 죽어버릴 때 까지 계속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사람이란 먹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먹이에 대한 동정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흡혈귀에게 잡히면, 평생을 갇혀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된단다. 어렸던 경염과 임수는 마른침을 삼켰고, 다시는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작은 입들이 뱉었던 말은 결과적으로 잘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이 겁을 주기위해 한 허구의 이야기라는걸 알기까지는 몇 년 정도가 걸렸다.


그 뒤에도 흡혈귀에 대한 것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귀신의 소행이라며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짐승의 짓이거나 귀신의 짓으로 보이게 꾸민 일들이었다. 몇몇 사건들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어도 경염은 어린시절 이후로 그것들이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임섭의 말이 거짓이라는걸 먼저 알았던 임수가 하도 놀려대서 그랬던걸지도 몰랐다. 12년전, 툭하면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장난을 걸던 친우가 죽은 후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있음을 알기에 믿지 않았고.


알게 된 경위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제위 싸움에 덤벼드는 것을 결정했던 날. 매장소는 자신이 사람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말했고, 말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경염은 속을 알 수 없는 책사가 또 자신을 기만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어떤 반응을 내보이는지 살피는 걸 수도 있었고, 어쩌면 비유일 수도 있었다. 매장소는 침묵하는 경염을 보고 웃더니 견평의 이름을 불렀다. 대기하고 있었던 듯 뒤쪽에서 견평이 사발을 들고왔다. 안에는 세 모금 정도의 피가 차있었고, 매장소는 경염의 당황한 표정도 보지 않고 그것을 한번에 들이켰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흡혈귀에게 물려 가까스로 살았다고. 빈 사발을 건네받고 그것이 진짜 사람의 피임을 확인한 경염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사람을 죽이고 있는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저었고, 견평이 소매를 걷어 자상을 보였다.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만큼 피가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경염이 기묘한 표정을 했다. 사실 매장소는 경염이 어렸을 때 그렸던 흡혈귀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창백하기는 했지만 병환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색이었고, 번들대는 눈이나 커다란 이빨 따위도 없었다. 그나마 보통보다 신장이 커 팔다리가 길었으나, 그역시도 사람의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귀신이라 이름 붙일 외관이 아니다.


경염은 입안에 도는 질문을 섬기지는 않았다. 너무 무례한 의문들이었으니까. 경염을 대신하여 매장소가 나도는 소문들과 자신의 다른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매장소는 괴력을 가지거나 불사의 존재도 아니었고, 은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기실 보통의 완전한 흡혈귀는 그랬지만, 그들은 굳이 여러 인간의 피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매장소가 완전한 흡혈귀가 아닌 이유는 그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었고, 진짜 흡혈귀의 피를 마실 때까지는 인어마냥 반인반수의 상태일 수 밖에 없었다. 인간과 흡혈귀의 중간에 걸쳐진 귀신은 피를 마시지 못하면 눈꺼풀도 들지 못하는 천한 약골일 뿐이다. 경염은 매장소가 봄철이 되어서도 화로를 치우지 않는 것이나 강호인이면서도 칼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기억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온 금릉에 매장소를 제외하고 네명 뿐이었다. 호위인 비류와 견평, 려강, 그리고 경염. 잠시 침묵하던 경염은 어째서 자신에게 진실을 알렸냐고 물었다. 뒷얘기를 듣지 않고, 또는 듣고서도 믿지 않고 당장 악귀라며 목을 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말을 들은 반요는 눈을 휘며 웃었다. 서로 숨기는게 없도록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책사가 피를 먹는 귀신이라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새 저택에는 비밀통로가 만들어졌으며 궁에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서생은 차근차근 태자와 예왕을 무너뜨렸고, 신실한 충성으로 경염의 신뢰를 샀다. 자신이 귀신이라고 고백했던 날 뒤로 매장소가 경염의 앞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뿐만아니라 자신이 귀신이라는걸 떠올리게 할만한 어떠한 언행도 일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자 경염은 그날의 대화를 대부분 잊고 있었다. 매장소가 흡혈귀라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대화를 다시 상기 시키는 것은 꽤 오랜 날이 지나서였다. 침전에 침입자가 든 것을 알았을 때, 경염은 이미 팔이 붙잡힌 후였다.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집기도 전에 어리고 익숙한 얼굴이 불쑥 시야를 차지했다. 비류. 항상 제 책사의 곁을 지키던 호위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거거. 수거거가. 짧은 말로 뱉어내며 억지로 저를 일으키는 통에 경염의 얼굴이 굳어졌다.


급히 발걸음을 옮긴 소택의 침전은 엉망이었다. 깨진 사기그릇과 엎어진 서책, 날뛰고 있는 귀신, 그걸 막고 있는 장정 두 명까지. 경염은 제 쪽으로 날아오는 다기를 급하게 피하다가 문지방에 어깨를 부딪혔다. 난장판이다.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했던 책사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제발 진정해 달라고 애원하는 견평과 려강의 목소리도, 억지로 팔을 떼어놓으며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비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염이 어렸을 적 그렸던 귀신이다. 번들거리는 눈과 드러난 이빨이 흉측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생각이 스치자 행동은 빨랐다. 성큼 안쪽으로 발을 들인 경염은 정신이 없는 려강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제 팔을 그었다. 말릴 틈도 없이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잡아 억지로 제 팔을 향해 숙였고, 귀신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끔찍한 소리였다. 부러뜨릴듯 쥔 팔에 귀신의 손톱과 이가 박혀들어갔다. 경염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마자 새된 소리를 지른 두 부관의 등에 소름이 퍼졌으나 경염은 생소한 아픔에 어금니를 물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채였다. 피를 마신다기보다는 살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굳어버렸던 부관들은 경염의 낯빛이 창백해졌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달려들어 매장소를 떼어놓으려 들었다. 귀신의 반항이 거셌으나 비류가 뒤에서 힘으로 떨어뜨리자 팔에 박힌 이가 빠졌고, 그틈을 놓치지 않고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쳐 날뛰던 몸을 기절시켰다.


"지혈제, 당장!"


불호령에 쓰러진 종주의 몸을 떠받치던 견평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소매를 뜯어 상처 위쪽을 이빨로 단단히 묶은 경염이 비류가 붙잡은 매장소를 급히 살폈다. 제 피가 묻어있는 입의 안쪽에는 아직도 형형하게 송곳니가 나와있었다. 몸 곳곳에는 두드러기 같은 포진이 올라와 있었고, 피부도 시체마냥 차갑다. 무언가를 집어던지다가 생채기가 났는지 머리카락과 피가 엉겨붙은 손에도 상처가 있었다.


살피는 동안 지혈되지 않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향 때문에 도로 깨지는 않을지 어금니를 사려문 경염이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하고 있었던겐가! 하얗게 질린 려강은 고개를 숙였고, 비류는 매장소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울 것 같은 아이의 표정에 아연해진 경염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달빛에만 의존에 절 찾아다녔을 아이였다.  절박하게 제 형님을 부르던 얼굴이 의식이 없는 귀신의 품으로 사라진다. 머리가 아픈 것이 빈혈 때문일지 확신하지 못한채로 경염이 작은 등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을거다. 뱉은 말이 제 귀로 돌아온다. 등을 쓸어주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괜찮을거야. 조금 멀리서 지혈제를 든 려강이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





매장소가 눈을 뜬 것은 그 뒤로 이틀이 흐른 후였다. 정무를 보던 경염은 통로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옷을 갈무리하여 일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종을 울리라고 닥달을 해댔으니 늦게 울린 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한소리를 해야할 것이다. 전영도 물리고 혼자 비밀통로를 거쳐 소택에 걸음을 들인 경염은 침전에서 겨우 일어나 앉아있는 귀신을 마주했다. 전날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환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매장소는 허리를 숙여 예우를 차렸고, 경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귀신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말을 고르는듯도 했고 도저히 어떤 말을 뱉어야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시는 황자의 옥체에 흉을 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박아넣었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에는 경염이 직접 팔을 그었다지만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제 책사를 앞에 두고 경염이 먼저 말을 떼었다.


"생피를 먹으면 안된다고 하더군."


매장소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피를 내줬던 밤에 견평을 들볶아서 얻어낸 답이었다. 흡혈귀가 날뛰는데 충성스러운 부관들이 피를 주지 않고 진정하라 말만 했던 이유였다. 그 전까지는 반드시 피를 밖으로 꺼내 담아 이틀을 지낸 뒤 마셨다고 한다. 죽은 피의 식감은 진흙과도 같아 차라리 안먹느니만 못한 맛이지만, 생피를 한 번 맛 본 후에는 죽은 피를 먹을 수 없게 된다. 피를 내줄 충신은 널리고 널렸으나 강좌맹의 종주는 그들의 목숨을 갈취하여 제 목숨을 늘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은 피를 마시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반요의 몸이라는 것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반요가 피를 원하는 것은 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죽은 피로는 널뛰는 기를 잡아누르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그런 죽은 피마저 얼마간 들어가지 못하면 귀신의 기가 몸을 찬탈하게 되어있다. 강좌맹에서는 귀신을 억지로 붙잡을 동안 다른 사람이 피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이곳은 금릉이었다. 비류까지 달려들어도 진정 시키기 어려운데 왜 피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도 없는 금릉에서 갑자기 죽은 피를 구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비류가 경염의 침전까지 들이닥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디에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기에.


"나 때문에 생피를 입에 대었으니 일이 꼬였겠군. 급했다고는 하나 설명도 듣지 않고 피부터 내어준 내 잘못이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필요하다면 피는 내 것을 주도록 하지."


매장소가 말을 잃었다. 당황하여 반문 되어오는 말에 경염이 소매를 걷어냈다. 이런걸 무고한 사람에게 남길 수는 없으니까.


단단한 팔에 노랗고 붉게 새겨진 멍과 상처들에 매장소가 손을 그러모았다. 비틀리듯 새겨진 손자국들과 그대로 남은 손톱자국들이 괴사한 피부조직 위를 가르고 있었고, 아물기 시작한 자상의 흉터 주위로 귀신의 잇자국이 나있었다. 실로 끔찍한 몰골에 떨리는 책사의 손이 황자의 팔에 닿았다. 건드리지도 못하고 겨우 손만 주워 잡은채 고개를 숙이는 반요에게 경염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장에서 수십년을 구른 몸이오. 상처는 늘상 있는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게."


7황자 소경염은 몇 년에 한 번씩 금릉에 돌아오는 군왕이었고, 팔 밑이 멍드는 것 정도는 전쟁터에서 얻는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잃을뻔도 했던 팔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매장소가 침묵했다. 경염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팔을 빼어 소매를 내렸다.


"열병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무거운 목소리에 경염이 입꼬리를 올린다. 정왕부에도 심복을 숨겨두는 모양이로군. 귀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경염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실혈이 있었으니 몸이 그것을 회복하려 하는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루 만에 나았고 그 외에 몸이 아프거나 변한 점은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경염은 똑같이 피를 주겠노라 약조했을 것이다.


생피를 먹지 않고 귀신의 기를 누르기 위해 반요가 했던 노력을 경염이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힘들었을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날뛰는 제 종주를 보고 차라리 제 피를 내어주고 싶었을 부관들의 고충도 마찬가지다. 성급한 판단으로 경염이 귀신에게 생피를 먹였고, 그러니 책임도 경염이 져야하는게 맞았다. 긴 설득에 매장소는 쓴웃음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귀신에게 피를 뺏기고도 자책을 하다니, 얼마나 소경염다운 생각인지.


"잘못하면 제가 전하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에 경염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반대가 아니오. 목숨줄을 쥐고 있는건 선생이 아니라 나지. 뻔뻔한 말투에는 매장소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말이 옳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겁니다."

"선생은 내가 기분이 좋아지려고 팔을 그었는줄 아는 모양이군."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걸 아시지 않습니까."

"정확히 그런 문제네. 내가 칼을 든 것은 선생을 살리기 위해서였지. 내 피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고."


간결한 말에 매장소가 경염을 마주보았다. 한없이 바르고 솔직한 얼굴이었다. 귀신에게 피를 주는 것도,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신뢰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경염은 매장소가 반요라서 자신을 배신하거나 절 죽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귀신이 어떤지 직접 보았음에도.


"왜 저를 살리려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피를 내어준 밤과는 달리 단단히 관을 틀고 옷을 갖춰입은 황자가 눈을 깜박였다. 매장소는 뱉은 질문을 회수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저 답을 기다렸다. 대체 어느새 이렇게까지 신뢰가 두터워졌나. 매장소는 비열한 수를 쓰는 책사를 혐오한다고 말하던 경염의 얼굴을 기억했다. 대나무 같은 성정 탓에 신뢰를 얻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귀신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까지 내걸고 있었다. 경염은 곧 편안하게 웃었다. 소선생이 필요하니까.


"내 형님과 친우의, 그리고 7만 적염군의 한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선생이 필요하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선생이 그리 해줄 것을 알고."


매장소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자주 만나면 전영이 의심할테니 밤이 되었을 때 만나는 것이 낫겠소. 필요하면 항상 그랬듯이 종을 울리시게. 편히 웃으며 그렇게 말한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따라 일어나 배웅하려는 것마저 앉힌 경염이 침전 문지방에 서있던 견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택을 벗어난다. 매장소는 반쯤 일어난 어정쩡한 자세를 겨우 무너뜨렸다. 견평이 놀라 달려와 부축한다.


"...내가 멍청했다."


한숨 섞인 말에 강좌맹의 타주가 어찌 그런말을 하느냐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주 오래전에, 흡혈귀의 이름만 꺼내도 경기를 일으키던 작은 아이를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생피를 빼간다는 말에 했던 겁먹고 두려운 표정을 짓던 아이는 제가 없는 동안 말쑥히 자랐고, 저보다도 강한 심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경염을 선택한 것인데도 임수는 소경염을 오래전의 어린아이로 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엉망인 팔을 생채기로 치부하던 얼굴을 떠올린 매장소가 눈을 내려깔았다. 생피를 먹는다면 기를 다스리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종주는 하던대로 제 피를 주는게 낫지 않겠냐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견평에게 웃어보였다.


황자가 내리는 은혜를 거절할 수야 있겠나. 금릉에 돌아온 뒤로 가장 편해보이는 목소리가 장난스레 갈라졌다.







이건 진짜 다음을 쓸지는 잘 모르겟다 쓰고 싶은거 다 써서... 참고로 린신이랑 비류는 반요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임. 매장소를 물어서 살린건 린신네 아버지. 견평이랑 려강이 막을 동안 비류가 피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건데 쓸 타이밍을 못잡았다. 참고로 피가 부족해서 날뛰는 반요는 진짜 흡혈귀보다 더 강함 살려고 발버둥 치는거라... 헉 설정충 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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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자네가 죽은지도 이제 반 년이 되어가는군. 대유국은 진작에 퇴각했고, 끈질기게 버티던 북연도 깔끔하게 진압했어. 양나라의 군사력이 만천하에 공개 되었으니 당분간 쳐들어올 일은 없을거야. 마음 놓아도 되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 같아서 쓰네만, 국상이 있었네. 자네와 내 예상보다는 조금 빨랐지. 자네가 준 화병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야. 자네의 연인이 이제 황상이니 해결될 건 다 된 셈이지. 해적들이 말썽이고 소주 쪽에는 재앙 같은 화마가 덮쳤지만 그정도야 언제나 있는 일이니 황상이 알아서 처신하고 있네. 조정을 갈아치우고 있는데도 일처리가 확실하니 덕망높은 황제가 나왔다고 입소문이 파다 해.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게지.


새로 개편한 북방쪽 군에 자네의 이름을 붙였다더군. 이정도만 전해도 황상의 상태가 어떤지는 나보다도 잘 알거라고 믿네. 랑야각은 다시 조정 일에서 완전히 빠졌어. 알다싶이, 계속 관여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가끔 대신들이 해결책을 물어본답시고 험한 산을 오르는데, 관심이 없어서 전부 돌려보내고 있네. 신조정이 그렇게 무능해서야 어디다 쓸 지 걱정이네만, 망한다 해도 손을 도와주지는 않을거야. 한 번 빌려줬다가 호된 꼴을 당하지 않았나. 다 자네 덕분이지.


한 번은 황상이 찾아왔었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믿든 안믿든 자네의 선택이다만, 어쨌든 내가 붓을 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호위도 없이 부관 하나만 데리고 왔더군. 겁도 없지.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네.


더 재밌는 얘기가 있어. 황상이 나한테 무릎을 꿇었거든. 태자였다면 놀라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황제인데, 바꿔말하면 양나라가 나한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 되지. 본 사람이 있었으면 재밌었을텐데 말이야.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사람을 황제로 만들 생각을 한건가? 일개 강호인한테 무릎을 꿇는 남자가 황제라니, 양나라도 정말 망할때가 된 것이야. 점성술을 봤을 때는 이례없는 태평성대가 될거라고 하던데, 하기사 점성술 따위를 어떻게 믿겠나.


양나라를 발 밑에 둔 기분을 좀 더 느껴보고 싶었네만, 일으킬 수 밖에 없었어. 아까워서 혀를 다 차고 싶더군.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아무 것도 안했으니. 내가 괜히 랑야각 각주겠나. 어차피 평민으로 분장하고 있어 황명을 내릴 상태도 못되었어. 뭐, 사실 그래서 그 가벼운 무릎따위도 꿇을 수 있었겠지. 나중에는 생각할 수록 분해서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만. 잘 달래서 돌려보냈지만,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사내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단 말이야. 내 직감이 점성술보다 낫지.


장소, 나도 이제 쉬어야겠네. 그 사내의 집착이 원채 무서워서 말이야. 당쟁에 끼어들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돌아서 랑야각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으니, 그야말로 적당한 때라고 할 수 있지. 거기다 양나라를 한 번 밑에 두었잖은가. 더 위로 올라갈 것도 없을 것 같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주겠네. 황상이 한 일을 가지고 너무 웃는다고 질책하지는 말아야할거야. 꼴이 정말 웃겼거든.


정리는 금방 끝날걸세. 랑야각을 아예 없애기는 아까우니, 후계를 정해야겠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후계에 대한 수업은 3년 정도 했어. 자네가 금릉으로 떠난 다음날 부터. 나보다는 못하지만 아주 명석한 사람이니 걱정 같은건 안해도 돼. 내가 떠난다면 랑야각에 대한 불신도 사그라들테니 만사해결이야.


풍경이 괜찮은 곳에 정자 하나를 짓고 술이나 마실 예정인데, 어디로 갈건지는 다음 서신에 써주겠네. 몇군데를 골라놓긴 했는데 비류녀석이 죄다 마음에 안든다고 퇴짜를 놓지 뭔가. 절대 안떠나겠다고 계속 도망치는 바람에 골치가 다 썩고있어. 견평과 려강이 있는 힘껏 잡아들이고는 있지만 고집을 꺾을 것 같지는 않네. 자네가 있었다면 설득은 일도 아니었겠지. 누가 살려준 목숨인데 양심도 없다니까. 어쨌든 협박을 하면 어떻게든 따라올거야. 비류 하나만 남겨놓고 가지는 않을테니까 걱정말고 다음 서신이나 기다리게나.


자네가 있는 곳에는 도화나무가 있다고 들었네. 도화나무는 없지만서도, 비류가 매일 같이 가지를 꺾는 바람에 엉망이 된 매화나무에 아직 꽃이 남아있어. 불쌍하긴 하지만 염치없게 한 가지를 더 꺾었네. 동봉해서 보내니 상하지않게 보관하게나. 꽃잎 하나라도 떨어져 있다간 화를 면치 못할거야.


장소. 내가 첫머리 부터 임수가 아니라 거짓이름을 써서 언짢았을거라고 생각하네. 내가 의도한 것이니 걸려들었다고 후회해도 괜찮아. 그리 똑똑하니 예상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앞으로 평생 그 호칭을 바꾸지 않을거라는걸 말이야.


자네는 매장소를 싫어했지. 난 그딴건 신경쓰지 않아. 내가 언제 자네 기분을 신경쓴 적이나 있는가? 자네도 포기하는게 좋을걸세. 무슨 협박을 해도 모자랄테니까. 황상이 또 다시 무릎을 꿇어도 마찬가지야. 나는 자네를 마음대로 부를 권리가 있어. 내가 자네를 마음대로 미워하고, 마음대로 욕하고, 마음대로 그리워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야. 자네가 원하든 말든 난 자네를 평생 매장소로 기억할거야. 모두가 자네를 임수라고 부른다고 해도.


다른 한 명도 자네를 평생 수거거라고 부르겠지. 솔직히 말해서 난 임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임수는 멍청해. 이름도 그게 뭔가? 매장소가 훨씬 품격있지.


내가 아는 매장소는 이기적이었지만, 임수는 어떤가. 임수는 잔인하지. 자네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잖아. 13년 동안을 잔인한 사람인 척 살았지만, 자네도 나도 사실이 아니라는걸 알지. 매장소는 잔인하지 않네. 임수는. 뭐, 확실한건 내가 임수를 싫어한다는거지.


황상이 왔을 때, 난 칼을 들었네. 일촉즉발이었지. 부관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리도 없을테고, 황상은 가만히 있었어. 정말 베어버릴 생각이었지. 역모가 다 뭔가. 툭하면 저질러지는거, 내가 못할건 또 뭐겠어.


매장소를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죽어도 마땅하다고. 하지만 전부 헛소리라는 것도 알았지. 그 멍청한 사내가 자네를 죽인게 아니지 않은가. 매장소를 죽인건 임수고, 임수는 내가 죽이기도 전에 가버렸으니. 역모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성질이 아니라 칼은 내렸네. 잘 참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해. 원래 뭔가를 참는 성격은 아니라는걸 알잖나.  


장소. 잘 지내고 있는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아. 답신을 보내줄 필요는 없네. 꿈에도 나타날 필요 없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게 놔둬. 그럼 나도 비류에게 그렇게 전할테니.


내가 자네를 만날 때에는, 잔인하지 않기를 바라네. 그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거라고 믿어. 도화나무 아래에서 질리도록 환하게, 이기적이게 웃고 있어주게. 나한테 술을 사주고, 내가 보낸 매화가지를 망가뜨렸다고 말하게. 그럼 비류가 오기 전에 비슷한 매화 나무를 찾아서 꽂아놓자고. 안그렇게 생겨서 눈치가 빠르니 알아챌지도 모르겠지만, 자네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문제 없을거야. 그냥. 그렇게 하자고.


자네한테 보내려면 서신을 불태워야 하니 또 아무도 내가 양나라를 발 아래에 뒀다는걸 모르게 되겠군. 천하에 떠들고 다니면 좀 더 빨리 만나게 될지도.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테지만 말이야. 나는 천수를 누릴 사주거든.


내가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테니 약속을 잊어버렸답시고 매화를 소홀히 하면 안될 것이야. 다음 서신은 내가 옮길 곳을 정한 직후에 쓰도록 하겠네. 임수에게 안부 전해주게. 욕도 함께. 나중에 보세나.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의원 린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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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이나 일곱 살 때 쯤. 임수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경염이 앞뒤 보지 않고 같이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금릉으로 흐르는 강은 맑지 못했고, 둘 모두 수영은 커녕 툭하면 넘어지며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어떤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뒤에서 둘을 보던 경우가 급히 뛰어들어 구한 물었을 경염은 답하지 못했다. 잘못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호령에 경염은 젖은 꼴로 땅에 누워있는 임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괜찮겠죠? 겨우 나온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물을 잔뜩 먹어 끝까지 내려간 목소리였다. 모두를 구하려 하는 바람에 뭍으로 건졌을 임수는 기절한 상태였다. 몸에 이상은 없을거라 말했지만 경염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차라리 매달리며 울었다면, 경우도 혼냈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일을 어찌 했느냐고. 경염은 저도 물에 빠져 죽을 했다는건 생각하지도 않는 같았다. 허우적거린건 임수만이 아니었고, 괴로웠을텐데.


임수는 얼마안가 깨어났다. 경염은 그제서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힘빠진 몸으로 임수를 부축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경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경염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쩌려고 그리 조심성이 없냐며 화를 내는 소리에 그제서야 떨림이 묻어있었다임수는 정신이 없는지 무거운 눈을 굴려 생쥐꼴을 경염을 쳐다보았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물에 빠져서도 보였던. 착각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으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났다작은 손이 뻗어진다. 강의 차가움이 그대로 옮아있는 얼굴이 평소보다도 창백했다. 손에 닿은 뺨은 이상하게 연약하다.


경염.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이 떨어졌다. 황자의 위엄과는 너무 맞지 않은 광경이었다. 항상 놀리고는 했던 짙은 눈썹은 쳐져있었고, 걱정과 두려움이 엉망으로 섞여있었다. 임수가 흐릿하게 웃었다너무 걱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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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치부들과 모든 불안감들이 눈을 깜박일 시간조차 주지 않아요.





*




기린재자라고 하였다. 손에 넣으면 천하를 쥐게 해준다는, 강호 강좌맹의 종주.


경염은 따가운 눈을 문질렀다. 밤이 늦었다. 서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오늘도 그런 날의 일부일 뿐이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침전에는 촛불 몇 개가 녹아가고 있다. 경염은 먹으로 쓰인 글자를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당신을 선택 할 겁니다. 낯선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경염은, 웃음이 나왔다. 예황군주의 혼삿일을 이용해 정생을 녕국후부로 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왕의 마지막 남은 핏줄은 천대받는 7황자가 숨기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단번에 알아보았다. 기왕비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액유정에서 아이 하나를 살리고 묘비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몰라도 경염만은 정생의 얼굴에 남아있는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인이 아니라는 것에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 본인조차 모르는 신분은 숨기기 쉬웠다. 당연히 액유정에서 꺼내주고 싶었으나 황상의 눈 밖에 난 불길한 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소철 선생이라는 자는 말을 꺼낸지 며칠만에 정말로 아이를 궁에서 꺼내왔다. 아직 노비 신분을 벗어나도록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될 것을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주변에 어두웠던 경염은 금릉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 비상한 자가 그저 동정심으로 액유정의 노비를 꺼내오려 했을까. 마음에 걸리는 것 투성이였다. 다른 것 보다도 처음부터 나이를 물어본 것이 언짢았다. 그 뒤에 곧바로 꺼내주겠다 약조를 하였던 것도, 정말로 그 약조를 지킨 것도.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자를 거두는 데에 굳이 노비를 데려갈 이유도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줄을 설 신분이었다. 경염은 뒤로 공작을 펼치거나 정보를 캐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고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 호위도 물리고 녕국후부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정생을 데려온 이유라는게 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태자와 예왕. 랑야각에서 금낭을 받은 두 황자가 편으로 끌어들이려 온갖 공세를 한다는 기린재자는 경염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생을 구해내는 것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말하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염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제 판단에 의심이라고는 없는 그런 자신감.


대체 어떤 생각인걸까. 경염은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보았다. 손톱조차 자라지 않는 몸이었다. 자신에 대한걸 몰랐을리가 없다. 불길한 천인. 멈춰버린 황자. 그런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태자와 예왕을 두고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둘 중에 하나가 황제가 될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오래전에 막는 것을 포기한 수순이다. 뻔한 것을 고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당장 황제에게 문안을 드릴 때마다 살얼음판이 되는 본궁을 생각하면 더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둘과는 다른 성정을 믿는다 했나. 도박이라고 해두지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본디 남의 낯가죽 뒤를 뚫어보는 능력은 가진바가 없으나 매장소라는 인물은 정말 모호한 데가 있었다. 경염은 천하를 쥐어준다는 강좌맹의 종주에게 쉽사리 신뢰를 주고 싶지 않았다.


책사는 질색이다. 궁에서 떠도는 중상모략도, 그들이 떠드는 탁상공론도 듣고 싶지 않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만 해도.


경염은 공연히 힘을 주었던 손의 끝에서 그을림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타버린 책의 귀퉁이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버린다. 과연 그런가? 12년 전의 그 사건이 책사들의 간교한 말놀림 때문이었을까? 경염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온 나라에서 떠들기를 쉬쉬하는 이야기였고, 궁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온 궁에서 그 사건에 대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경염의 자라지 않는 몸 뿐이었다. 항명이라고 수근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눈이 떠졌다. 바스라지는 서책을 덮은 경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는 것은 없어도 확신하는 것은 있었다. 낯선 얼굴에게 말했던 대로 태자와 예왕, 그 두 사람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진흙탕이라는 제위다툼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해도.


하지만 이런 얼어버린 몸으로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악바리마냥 달라붙는 고민을 마지막으로 침전의 촛불이 꺼졌다.





*





"그러니까, 네 몸을 지키겠다고 태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말이냐?"


불 같은 목소리였다. 경염은 무릎을 꿇은채 눈을 내려깔았다. 호령 정도는 예상하고 한 행동이다. 월귀비가 피차 숨기자며 꺼낸 제안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몽 통령의 다급한 말을 듣고 소인궁의 경비들을 기절시켰을 때부터 뒤의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증인으로 왔다는 말로는 본궁에 들어오지 못할까봐 걱정했을 뿐.


월귀비와 태자는 시종일관 억울하다는 말을 삼았다. 정왕과 예황, 황후가 짜고 저희를 모함하는 것이라며 호소하는 월귀비가 얼마나 불쌍해보이던지 경염의 손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 예황군주를 해하려 했던 주제에 말만은 청산유수다. 그러나 외관과 다르게 경염은 열여덟의 소년이 아니었고, 예전처럼 의관에 그을림을 내거나 손에서 연기가 피어나오게 만들지는 않았다.


몽 통령이 사마뢰를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한 후로는 월귀비의 통탄도 통하지 않았다. 감히 운남왕부의 군주를 해하려 한 죄로 월귀비는 품계를 강등당했고, 태자는 3개월의 금족령에 봉해졌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미간 하나 구길 수 없었다. 어찌됐든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경염은 처벌을 기다렸다. 상황이 급박했다고는 하나 태자를 인질로 잡은 것은 궁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질문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소인궁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에 경염의 입이 다물렸다. 몽 통령의 덕분이라고 곧이곧대로 고할 수는 없었다. 금위군의 통령이 어째서 소인궁에 대한 일을 알았는지 경염조차 알지 못했다. 예황 군주에 관련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앞 뒤를 잴 것이 없었고, 몽 통령 본인도 뒤쪽에서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에 들어온 예왕이 황상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겠으나, 황상도 뜬금없는 예왕의 등장에 얼굴을 구긴 참이었다. 하는 말은 구구절절 그럴듯 한 것들이었다. 처벌을 내리려는 황상에게 선처를 구하는 예왕을 따라 정왕도 허리를 숙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일단 예왕의 말이 사실인것으로 믿게 해야한다는걸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의문은 머지 않아 풀렸다. 오랜만에 입궁했으니 지라궁에 들르려던 경염을 예황이 막아선 탓이다. 기어코 입에 올라오는 소철이라는 이름에 경염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몽 통령을 만나 자세한 내막에 대해 이야기 한 후에는 찾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언짢은 일이 있으시군요."


품에 맞춰 길이를 줄인 의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밖에는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고, 새로 돋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가지 않으려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임수는 목을 뻣뻣이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황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한없이 곧고 누구도 폄하할 수 없을 기개였다. 조금이라도 인물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허리를 굽힐 수 있을 남자다. 


언짢은게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황군주의 사건에 대해 물어볼게 있다는 말에 임수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맞은편을 권했으나 경염이 자리에 앉는 일은 없었다. 그 사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잔에 차를 따르며 섬긴 말에 경염의 옥패가 흔들렸다.


결과에 만족하냐는 물음에 매장소는 오히려 제가 만족해야하냐는 물음을 던졌다. 예황군주에게 위험에 대비하라 언질을 준 것도, 군주를 안전하게 구해낸 지략도 경염으로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명민한 수였다. 비상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게 사실이었다. 정왕이 예황을 구했으니 정쟁이 터진다면 운남왕부는 공식적으로 경염의 편을 들 것이고, 예왕을 이용해 동궁의 미움도 거둬냈다. 결국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정왕부였다. 경염이 몸을 돌려 책사를 마주보았다.


"난 예황군주 같은 충신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도 그들을 내 앞날의 발판으로 삼지 마셨으면 합니다만."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임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정쟁의 도구. 임수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금릉에 오는 것을 준비했다.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넣었고,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수를 짜놓았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금릉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뼈에 드는 한기는 여전하다. 끓인 물이 담긴 다기를 잔에 기울이며 임수의 눈이 내려갔다. 전하가 절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계셨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가볍게 위장한 목소리에도 경염의 시선은 비껴갈 줄 몰랐다.


혐오하는 눈. 열여덟의, 자주 물기를 담고는 했던 검은색은 자신의 몸처럼 얼어있었고, 이미 지나간 겨울을 생각하게 했다.


"전하께선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신 거군요."


경염이 자리를 옮겨 드러난 바깥을 시선에 담았다. 나를 군주로 모시겠다고 했으니, 내 규칙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겹의 옷으로 감싸여진 등에서는 열기가 피어났다. 감정에 기복이 생기면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미략한 것이니 의복이 타거나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옅게 부는 바람을 데우기에는 충분하다. 어릴적에는 조절이 더욱 미숙해서 여름이 되면 아무도 경염의 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동안 많은 책사를 봐왔소. 조용히 열린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황궁에 넘쳐나는 것이 그들이다. 장수들이 전장에 나가 싸울 동안 탁자에 앉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머리를 굴리는 자들. 간교하고 음험한 이야기와 속삭임. 그들의 중상모략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버텨내지 못했다. 임수는 잔 속에서 내려앉는 찻가루를 보았다.


"내 형님과 내... 절친한 벗조차도, 그들 때문에 사라져야 했지."


열기는 한층 거세어졌다. 절친한 벗. 이름을 꺼내는 것 조차도 조심스러운, 역모를 꾸민 임씨가문의 윤인. 경염의 책사에 대한 불신은 잘 알고 있었다. 정생의 일로 녕국후부에 발걸음을 했을 때 직접 말하기도 했으니까. 손 하나로 마을을 불태울 수 있었던 제 천인을 끝내 얼려버린 것이 무엇인지, 임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난 그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소."


경염이 믿지 못하는 것은 매장소였다. 경염이 혐오 하는 것은 중상모략을 들먹이는 필부였으며, 경염이 경계하는 것은 사람을 정쟁에 이용해 먹는 책사다. 임수가 아닌 매장소. 12년 전에 멈춰버린 사람과는 달리 한없이 변해버린, 친우도, 자신의 윤인도 아닌, 진훍을 뒤집어 쓴 바퀴.


"...염려 놓으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임수는 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고 확신했지만, 나중에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게 될 것을 알았다. 경염이 눈을 감자 끼쳐오던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임수가 손을 뻗지 않기 위해 힘을 넣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걸 알았음에도 열기가 그리웠다. 제 앞에서는 차갑게 식히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선생같은 책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알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허나 지켜줘야 할 사람과 해선 안 될 일은 분명히 해두는게 좋을겁니다."


매장소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쥐어준다 해도 자신을 내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천하여도, 설사 죽은 제 윤인이라고 해도.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셨으니, 저도 몇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경염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수그러듦에 따라 임수의 머리도 차가워졌다. 경염은 옷을 바로하여 매장소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몇 번 대면한 얼굴임에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한 몸은 구역질을 밀어내느라 바빴고, 흐려지는 표정을 다잡는 것은 배로 어려워진다. 익숙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태자와 예왕을 상대하는 것은 정왕의 열정만으론 부족했다. 임수가 있는 이유는 그들을 막기 위함이며, 그들과 맞서려면 그들보다 독해져야 했다. 제위다툼은 목이 걸려있는 일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도모하는 대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역모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그 위험에 관해서는 살아남은 7황자 만큼 잘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경염은 잠자코 매장소의 말들을 들었다.


"전하의 규칙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허니 앞으로 전하께서도 절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앳된 얼굴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쉽게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게 속이는 일도 있어선 안 됩니다. 다음으로 정생의 이름이 나오자 경염의 낯 빛이 달라진다.


정생을 구하는 것을 선물이라고 칭했을 때, 긴장을 풀었었다. 지금은 운남왕부에 있지만 머지않아 정왕부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이었고, 액유정에서 나온 궁노비에 관한 것은 금새 사그라들 화젯거리였다. 들키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는데. 난처하게 할 일은 없을거라는 말에 경염의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날 해할 생각이었으면, 정생의 비밀을 구실 삼아 협박을 했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하의 곁에 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후일에 태자와 예왕이 칼을 겨눌 때 무엇으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십니까. 오늘 이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앞으로 저를 절대적으로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협박에 가까웠다. 정왕이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매장소가 필요하다는. 아니, 사실은, 임수가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경염이 필요했다. 이것은 청원이었다. 적염군에게 씌워진 역모의 이름을 벗기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대업을 위한, 어쩌면 아직 제 이름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제 곧은 천인에게, 이탈해버린 바퀴가 절박히 원하는 것에 대한.


"폭풍은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임수는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열기가 섞이는 것을 느꼈다. 열 여덟의 어린 얼굴은 관을 틀고 있었고, 눈은 제 결정이 가져올 결과에 짓눌려 감겨있었다. 천인. 하늘이 내려준 사람. 차가운 한기에 몸을 얼려버린, 한시도 잊은적 없었던 정인.


"속히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경염이 대답 대신 남기고 간 열기가, 바퀴에 묻은 진흙을 쓸었다.





*




당신의 선함으로 당신의 어두운 나날들을 가져가겠습니다. 당신을 연모하기에,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저번편의 첫문장은 It's all coming back to me now, 이번 편의 첫과 끝은 Unconditionally. 한 부분만 가져온거라 따로 노래를 적지는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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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임수경염. 센티넬은 천인(天人), 가이드는 윤인(輪人) 으로 대체합니다. 천인인 경염과 윤인인 임수. 윤인이 꼭 없어도 천인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적염군 사태 이후 성장이 멈춰버린 경염에 대한 이야기.










너무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침전 속 나의 몸이 얼어버린 밤들이 있었습니다.




*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7황자인 소경염의 '부작용'은 금릉 뿐만 아니라 강호에 까지 이야기가 오갈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7황자가 출정을 나갈 때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관한 말은 저잣거리에서 꾸준히 화제로 올랐다. 언제나 드높게만 칭해지는 천인의 불길함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몇 없었다. 혹자는 경염이 그렇게까지 전장을 헤매는 이유가 그 부작용 때문일거라고 수근거리고는 했다. 7황자의 상태는 불길함의 징조였으니 금릉에 머물러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황실의 품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염이 출정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의 부작용 따위는 빛깔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황제는 천인이 아니었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에 대해 시기를 느끼고 있었다. 3대째나 천인인 황제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름에 부여된 의미를 중요시했다. 하늘이 점지해줬다던 능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황제의 의심은 커졌고, 죽은 기왕도, 내쫓기고 있는 경염도 그 시기의 여파가 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염이 황제의 눈 밖에 난 것은 부작용 하고는 상관없었다.


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매장소로 위장하고, 그 위에 소철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금릉에 들어온 임수는 아주 오랜만에 말을 잃었다. 빠른걸음으로 옆을 지나친 남자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내관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작은, 심하게 어린 남자는 황자의 호칭을 듣고 있었다.


정왕. 용서해달라고 비굴한 말을 주워삼던 내관이 월귀비의 이름을 올린다. 옆에 있던 예황이 채찍을 들고 나서자 바짝 엎드렸던 몸이 계단을 굴렀다. 감히 월귀비의 이름을 팔다니, 오만함이 끝을 모르는구나. 운남왕부 군주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퍼지는 동안 관을 튼 덜 자란 몸이 궁노비에게 돌아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이 시선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걸 알면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7황자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이 성장을 멈췄고, 더이상 머리카락 마저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어린 몸으로 선두에 서 전장을 호령한다는 이야기. 천인의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의 일종이라는 이야기. 그의 윤인이 죽은 것이, 그 불길한 부작용의 원인이라는 이야기.


"도움은 고마우나, 내관 하나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소."


임수는 앳된 목소리를 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관이 예황의 호통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급히 액유정의 노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예황이 저보다 한끗으로 눈이 낮은 경염을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기왕의 사건으로 처치가 곤란하신걸 압니다. 아랫것의 일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차분한 말에 경염이 알아들었다는듯, 혹은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돌아가려는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한다. 이름이 무어냐. 정생이라는 답이 돌아올 동안 옆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나이는? 열 한 살. 머릿속을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이 경염에게서의 주의를 돌렸다. 황자가 아끼는 액유정의 노비. 가능성을 잴 동안 마치 더이상 대답하지 말라는듯 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생.


임수는 뻣뻣한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는걸 알았다. 제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급하게 일어나 한 공수는 바르지 못했다. 정왕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소문의 7황자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한 손으로 마을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는 천인. 11년 전 부터 전혀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다는 불길한 존재. 황자라는 이름은 쉽게 가려지고는 했고, 그것에 불쾌해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경염은 그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좀 더 들어올렸다.


"당신은 누구요?"


창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입을 떼지 못하는 임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예황이 나서서 대신 소개를 올렸다. 소철 선생.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얼굴에 임수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필부입니다. 모르시는게 당연하지요.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자라지 않은 경염의, 11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주는 여파에 대한 것을. 경염은 꿈에서나 봤던 얼굴에 경계를 덧씌우고 있었고, 임수는 차라리 필부의 신분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눈칫밥을 먹으며 툭하면 금릉에서 쫓겨나는 7황자는 그에 비례해 감이 좋았다. 정생에게 물은 질문만으로도 주의를 샀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분명 경계가 더 심해질 것이다. 황자에게 제 때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을 신경 쓰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게 최선이다.


"궁문을 넘은데다 예황군주와 함께 있는데, 평범한 필부라. 궁을 자주 비우는 탓에 내가 모르는 걸 테지요."


다행히 차분한 목소리는 딱딱할지언정 의심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화제는 예황의 덕으로 정생에게 다시 넘어갔다. 순하고 학문에 뜻이 있기에 가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매끄러운 말을 듣던 임수가 정생을 일으켰다. 1년 중 금릉에 머무는 시간이 채 네 달이 안되는 황자였다. 정왕부는 궁의 바깥에 있고, 친왕이 아니니 궁에 있는 시간은 그것보다 더욱 적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액유정의 노비에게 정을 줄만큼, 맞닥뜨릴 일이 그리 많을까.


임수는 정생을 액유정에서 꺼내주겠다 약조했다. 이어지는 예황의 말은 줄줄이 맞는 말이었다. 액유정의 노비를 꺼낼 수 있었다면 황자인 경염이 진작에 그리 했을 것이다. 임수는 제 언행이 황자를 기만하는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요. 딱딱하게 굳은 어린 얼굴의 시선에 서리가 낀다.


임수는 그 시선을 받아서야 세월을 느꼈다. 지나치게 곧은 자세와 뻣뻣하게 들린 목. 저보다 큰 사람을 내리 누르는 위압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잘 웃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황자라지만 어린 몸에, 금릉의 모든 사람들이 7황자가 받는 대접을 알고 있다. 기만 당하는 일이 익숙해졌을 것은 당연했다. 자라지 않는 황자가 건너왔을 길은 굳이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 서슬퍼런 시선은 몸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었다. 시선이 아래에 있더라도 기만 당해 좋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무시당하는건 괜찮겠으나, 황자의 신분이다. 제가 기만 당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황실이나 정왕부에도 여파가 갈 것이 당연했다. 그런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다. 매장소의 얼굴이 미소를 만들었다.


"전장에 자주 나가 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실텐데, 제가 정생을 빼온다면 전하도 심려를 하나 덜지 않으시겠습니까."


경염이 눈을 내려깔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수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액유정의 노비에게 선처를 바라는 말은 상황에 맞춰 꺼내면 될 일이다. 황제에게 빚을 만들 일은 많았다. 자신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권모술수를 싫어하는 자신의 천인에게 환심을 사기에 아랫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기대하지. 결국 떨어지는 말에 임수의 고개가 숙여졌다. 짧은 대담은 그것이 전부였다. 황자는 저보다 작은 궁노비를 감싸듯이 품고 자리를 떠났고, 임수는 곧은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있나보군요."


예황의 목소리가 흘렀다. 임수는 그저 얌전히 웃었고, 그것으로 답은 충분이 되었다. 마주보도록 몸을 돌린 군주의 눈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들키면 죽을만큼 맞을걸 알면서도 책을 훔치는 아이긴 했지만, 액유정에서 노비를 꺼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당하게 꺼내오겠노라 장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나 강좌맹의 종주가 노비를 구하여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7황자는 정이 많으니 어떤 이유라도 갖다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쪽은?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몇 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국이었고, 사실 궁노비에 대한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예황은 질문을 넘겼다. 대신하여 경염이 사라진 복도가 까만 눈에 담겼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왕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과는 다른 분입니다."


소문. 임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예황은 정왕에 대해 알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 이후 경염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마치 그 전까지는 누군가가 밀어줬던 것처럼, 그 누군가가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였던 것 마냥. 이름도 언급할 수 없도록 사라진 사람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예황은 운남왕부로 보내졌고, 정왕은 단지 이유를 알고싶다고 청한 것 만으로 북방으로 밀려났다. 몇 년이 흘러 다시 마주 본 7황자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황은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경염의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황자에게 갖춰야 할 예를 취했고, 경염도 군주에게 해야 할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저잣거리에서는 7황자가 12년 전 부터 멈춰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하지요. 궁에서는 그것을 황제에 대한 무언의 항명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천인의 부작용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병을 앓았다. 황제에게 그 부작용은 경염이 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겉모습은 12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인데 머리에 벼루를 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정왕이 그것에 대해 항명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정도는, 궁에서 돌아다니는 말들이 사실이라는걸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저 똑같다는 말만 하였다. 12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임수는 눈에 들어오던 경계어린 눈을,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굳어버린 얼굴을 떠올렸다. 12년. 바퀴를 잃은 수레는 땅에 처박혔고, 바람은 나무를 삭혔다. 임수는 질문이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동안은 침묵이었다. 태황태후가 올린 수아라는 이름에 정왕까지 연달아 보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듯 예황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일텐데.


먹혀들어갔던 입술이 돌아왔다. 숙였던 고개를 든 예황이 입꼬리를 올렸다. 처지가 좋지 못해도 황자입니다. 다음에 만나실 때는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게 좋을듯 합니다만. 임수의 얼굴이 아래로 기울여졌고, 예황이 근처를 지나가던 내관을 불렀다. 소철 선생을 궁 밖까지 데려다 주시게. 고개를 조아린 내관이 임수의 앞에 서자 예황이 돌아섰다.


살펴가십시오. 단촐한 인사가 예황의 등을 따랐다. 내관은 눈치껏 사람이 없을 길목으로 임수를 이끌었다. 12년 만에 돌아온 궁은 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찬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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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살기로 했다고?"


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부자우는 이제 거의 질식해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웃으면서 테이블을 치지 않으려고 평생 쓸 인내심을 모두 그러모으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근언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바빠서 며칠 연락 못했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두 달 연락 안하면 우체통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청첩장을 생각하며 자우가 차를 마셨다.


훈연에 대한건 잘 알고 있었다. 통시에서 범죄자문을 할 당시에 자우도 옆에 있었고, 그 건실한 청년이 근언을 구하려다 팔을 다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옆에 있는게 다른 흉악 범죄자였어도 몸으로 막았을 훈연의 성정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설마 훈연이 아니라 근언에게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걸 문제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전보다 얼굴빛이 이상하게 좋아진 근언을 앞에 두고 자우가 턱을 괴었다.


"언제 소개 시켜줄거야?"


근언은 미간을 구겼다. 누군지 알잖아. 그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식으로 소개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걸 눈치채려면 얼마가 걸릴런지. 아마 기대도 안하는게 좋을 것이다. 괴상한 범죄 심리학자가 가진 유일한 친구의 눈동자가 드르륵 굴러갔다. 굳이 근언에게 소개 받을 이유도 없나. 생각하는 새에 시킨 요리가 나왔다. 실고추로 장식한 생선찜에 근언이 젓가락을 들었다.


조수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좀 웃긴 정도였는데 아예 같이 살기로 한데다 그 보근언이 일일이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근언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투였고, 자우는 제 행동이 이상한 이유를 모른다는 부분이 가장 웃긴 점이라고 생각했다. 꽃 식인마에게서 벗어난 후 통시의 저택을 요양처로 정했을 때만 해도 몇 개월 안에 죽는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사람 일이라는건 정말 어떻게 될런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사람도 생선 좋아한데? 너는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은 매끼마다 생선만 먹고 살 수는 없어."


흰 생선살에서 가시를 분리해 내며 묻자 근언이 입 안에 들은 것을 삼켰다. 다른 것도 해야지. 자우의 젓가락이 삐끗했다. 아연실색한 자우의 표정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요리를 해주겠다고? 네가 먹을 것도 아닌데? 황당해서 반 톤은 올라간 목소리에 근언이 얼굴을 구겼다. 그럼 팔을 다쳤는데 달리 어떻게 해. 너무나 상식인 같은 언행에 자우가 젓가락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전 모르는 사람하고는 밥을 안먹어서...


반쯤 일어나는걸 도로 앉히니 우려가 쏟아져 들어왔다. 너 고기 같은걸로는 한 번도 요리해 본 적 없잖아. 내가 요리사 알아봐줄까? 출장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많아. 제시간에 연락 주면 네가 한 것 처럼 꾸며주는 것도... 나불나불 떠드는 입을 익숙하게 넘겨버린 근언이 생선살에 소스를 찍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안해도 돼. 이상황에서 가장 믿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담는 입을 어이가 없다는듯이 바라본 자우가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이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안들어먹을 것이다. 주제를 넘기는 수 밖에.


"그럼 그 훈연씨는 언제 경찰서로 돌아가는데?"


근언의 젓가락이 멈췄다. 곧바로 움직이긴 했지만 자우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계약은 3개월이야. 그렇다면 두 달 남짓이 남았다. 콧소리를 낸 자우가 숟가락으로 탕을 떴다. 얼마 안남았군. 훈연이 경찰서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훈연은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듯한 경찰의 모범이었고, 근언의 조수일은 팔이 완치 될 때까지 커리어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승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통시로 돌아가겠지.


자우가 눈치를 봤지만 근언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근언의 상태를 표정만으로 판단했다면 아마 자우가 근언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곁눈질한 자우가 헛기침을 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는걸 인정해야할 것 같았다. 다시 일 얘기인데.


"윤서인네 회사에서 뭐가 좀 터진 모양이야."


근언의 얼굴이 구겨진다. 거의 몇 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닮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복누나의 얼굴을 한쪽으로 치워버린 근언이 젓가락을 놀렸다. 그냥 무역회사잖아. 터질게 뭐가 있다고.


"사원 하나가 죽었다나봐."

"그래서?"

"누가 덮으려고 하고 있어."


젓가락에 걸린 음식을 집어넣고 자료를 꺼내자 근언이 받아들였다. 아직도 연락해? 무심하게 나온 목소리에 자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받았다던데. 얼마전에 있었던 부재중 전화를 생각해 낸 근언이 글자들을 훑었다. 일상 걸려오는 안부전화인줄 알았더니 맡길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없이 자료를 넘기던 근언이 반쯤 남은 요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까탈스러운 입맛에 맞춰서 일부러 찾아온 집이다. 30분도 채 안있었는데. 근언은 그렇다 치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점심부터 굶은 자우의 황망한 표정을 무시한 근언이 자켓을 챙겨들었다.


"맡으려면 얘기 해봐야 돼서."


세상 혼자 사는듯한 등이 망설임 없이 차키까지 들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자우의 젓가락에서 살이 미끄러졌다. 몇 분 후에야 얌전히 음식을 주워 입에 넣은 자우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정표 앱에서 정확히 두 달후의 날짜를 선택한 뒤 글자를 써넣는다. 청첩장이 와도 놀라지 말 것. 마음속으로만 성호를 그으며 자우가 앱을 종료했다.





*




근언은 잔뜩 불만인 표정이었다.


훈연은 근언을 의자에 앉혀놓은채 한 팔로도 멀쩡하게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근언이 손을 움찔거릴 때마다 보지도 않고 괜찮다고 먼저 말했다. 뚱한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빈공간에 척척 물건들을 끼워넣는걸 바라보던 근언이 무릎에 놓인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훈연은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야 했다. 훈연은 근언이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면-근언은 그걸 자각하고 있지 않더라도-자신이 그걸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을의 입장이어서 그런건 아니었고, 결국에는 그 전날 복도에서 봤던 그 창백한 얼굴 때문이었다. 그런걸 한 번 보면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밀어내는 짓은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총을 쏜 건 근언인데 왜 제가 이러고 있어야하는지, 훈연은 장장 하룻동안 그것을 고민했으나 결국 동거를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잘난 보근언은 훈연의 대답에 그럼 거절하려고 했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머리라도 짚고 싶었으나 아직 자신도 파악 못한 동거를 허락한 이유까지 줄줄이 떠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근언의 입장에서는 훈연이 거절할 이유가 없던게 맞았다. 삼시세끼 챙겨주고 옆에서 배려해준다는데. 거기다 경찰 관계자에게 연락이 오거나 책을 빌리러 쓸데없이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사가 그런 합리적인 이유로만 돌아간다면 훈연이 팔을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랫층은 이제 비었고, 세를 놓으면 며칠 안으로 입주자가 들어 올 것이다. 당연히 짐을 옮겨야 했는데, 몇 개 되지도 않은데다 겨우 윗층으로 옮기는 것이니 훈연은 사람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박스에 임시로 테이프를 감으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었고.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서 옮길 준비를 하는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당연히 근언이었다. 도와줄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니 훈연은 근언이 도와줬으면 하는 짐들을 따로 빼놓았는데,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팔을 잡혀 질질 끌려나왔다. 올라가 있으세요.


당황해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집에서 대놓고 쫓겨난 훈연은 바로 다음층에서 내려 계단으로 돌아왔다. 제가 옮긴다니까요! 복도를 울려댈 정도로 커다랬던 말싸움의 승자는 훈연이었는데, 훈연의 생각과는 다르게, 훈연이 밀고나가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근언이었다. 그건 근언이 훈연을 이해하고 말고에 대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근언은 아직까지 왜 훈연이 부득불 자기가 짐을 옮긴다고 소리를 질러댔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팔을 다쳤다. 근언의 팔은 멀쩡했고, 짐을 옮긴다고 해서 근언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딜봐도 근언이 짐을 옮기는 것이 타당했는데 훈연은 화분 같은 것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짐을 자신이 들었다. 심지어는 정리도 도와주지 못하게 억지로 앉혀놨고.


근언이 어떤 불만을 품고 있던 훈연은 알아서 정리를 마쳤다. 사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것 치고는 놀랍도록 빨리 끝난 편이었다. 훈연은 팔을 다친 다음에도 계속 혼자서 살았고, 따라서 정리 쯤은 문제 없었다. 근언은 이제 훈연이 사실은 한 팔로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집이 넓어서 다행이네요. 다 안들어갈까봐 걱정이었는데..."


하기야 다 안들어갈 것 같았다면 근언이 같이 살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언은 아까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책을 드디어 덮고 일어났다. 근언이 뭔가 말을 하기 전에 훈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침대가 들어갈 만한 곳이 없네.


"그건-"

"-같이 자도 된다는 말을 하시려는거면,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걸 말해드리죠. 절대."


단호한 목소리에 근언의 입이 다물렸다. 정말로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군. 한숨을 쉰 훈연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근언의 침대에 앉았다. 저는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이 잘 안와서요. 주워삼은 변명은 그럴싸했다. 훈연은 이제 어느정도 근언의 사고방식을 알았다. 안지 얼마 안된 사람하고 침대를 나눠쓰기는 싫다는 주장을 그대로 한다면 아마 같은 침대를 나눠쓰는 것에 대한 합리성을 역설하려고 들 것이다. 근언의 침대는 넓었으므로 우려하는 접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위생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블라블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잠이 안온다는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대꾸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제가 카우치에서 자죠."


훈연이 틀렸다. 팔짱을 낀 근언이 뒷목이 당겨오려고 하는 훈연을 내려다보았다. 떠보는 말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걸 알기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침대에서 주무시죠. 어금니 사이에서 새어나온 말에 근언이 보란듯이 카우치에 앉는다.


"회복이 먼저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깁스를 풀 때 까지는 훈연씨가 침대에서 자고, 그 후로는 다시 상의하는걸로 하는게 좋겠군요."


좋기는 개뿔이. 혼자서 결론을 내놓고 책을 집어드는 작태에 기함한 훈연이 목끝까지 올라온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결국 근언의 뜻대로 될 것이다. 몇 번의 말싸움으로 터득한 것들을 되뇌이며 훈연이 허리를 폈다. 제가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는게 거슬리시면, 다시 돌아가는 수 밖에 없겠네요.


근언의 눈썹이 꿈틀댄다. 침대를 들여올 공간이 없으니까요. 태연하게 말을 이은 훈연이 내용물을 꺼내놓고 황망히 입을 벌리고 있던 박스를 집어들었다. 옮기려면 옮길 수 있었다. 해가 지긴 했어도 내일 특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지도 않았으니. 긴 다리로 집을 가로질러 드레스룸에서 옷을 꺼내오자 근언히 급하게 일어나 옷걸이들을 뺏어들었다. 이렇게 나올겁니까? 이를 바득바득 가는 듯한 표정에 훈연이 웃었다. 그럼요.


근언이 팩 몸을 돌리더니 제 침대에 정장째로 올라가 누웠다. 단단히 삐진 모양새였다. 참지 못하고 어린애마냥 웃어버린 훈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근언을 쳐다봤다. 작은 매트리스 정도는 들여올 수 있을거에요. 전 거기서 자죠. 안마주치려고 작정한듯 구석으로 몰려갔던 근언의 눈이 돌아온다.


"선생님이 해주는 배려가 싫은게 아니에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형광등 대신 스탠드가 켜진 방은 그림자가 반쯤 빛을 먹어들고 있었다. 훈연은 근언이 뭔가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훈연이 몸이 불편하니 멀쩡한 제가 하는게 나을거라는 계산에서 오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다. 훈연도 근언의 팔이 불편했다면 똑같이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나 짐을 옮기거나 요리를 하는 것 같은 노동이라면 더더욱.


그냥 할 수 있는건 제가 하고 싶어요. 가만히 나오는 말은 얼핏 가볍게도 들렸다. 도움을 받는게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팔을 다친건 훈연의 잘못이었고 두 팔이 멀쩡한 사람보다 약한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훈연은 앞으로도 근언의 배려를 수없이 거절할 것이다. 원치않는 호의는 거절할 수 있다. 억지로 호의를 받는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근언이 이해해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장시간 침묵이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창문의 밖에서는 차들이 지나가는 일상적인 소리가 들렸다. 근언은 말 없이 훈연의 눈을 보고 있었다.


불시에, 훈연의 손이 뻗어졌다.


의식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근언의 머리는 침대에 눕는 과정에서 흐트러져 이마로 내려와 있었고, 그걸 정리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그림자를 만들자 근언이 반사적으로 물러난다. 중간에 손을 멈춰서야 얼마나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은 훈연이 어색하게 손을 접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좀..."


이마쪽을 손짓해보이자 근언이 반쯤 일어나 머리를 매만졌다. 너무 무례했죠. 머슥하게 뒷머리를 만진 훈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편의점에 갈건데 부탁할게 있냐는 말에 근언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고개를 끄덕인 훈연이 현관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딜봐도 탈출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근언이 급하게 소리를 내 발을 잡았다.


돌아오시면, 상의 할게 있어서요. 사건 관련으로... 훈연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 영원 같이 느껴졌다. 진한 눈썹이나 선이 확실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근언이 협탁을 더듬어 파일을 집어냈다. 정리할 때부터 눈에 띄었던 것이 등장하자 훈연이 감탄사를 낸다. 사건 파일이었구나. 분위기가 풀어지는 느낌에 근언의 어깨가 내려간다. 현관문 앞에 선 훈연이 눈이 접히도록 웃었다.


"빨리 다녀올게요."


달칵, 문의 잠금장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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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연은 장장 30분간 의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장저우로 옮긴 이틀째날 근언이 건네준 명함의 주인공이었는데, 실력은 좋은듯 보였지만, 아니, 깁스를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 구르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왔다면 어느 의사든 30분 정도는 잔소리를 했을것이다. 훈연은 고개를 숙이고 쏟아지는 잔소리를 맞았다. 뒤에 선 근언이 미안했는지 자꾸 시선을 힐끔댔다.


총을 피하려다 넘어졌다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신발 밑창이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변명은 정말 그럴듯 해 보였다. 어쨌든 실제로 총상이 있는게 아니었으니 넘어져서 다친게 맞기는 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총탄과 총은 근언의 침대 밑으로 들어갔고, 그제서야 안 사실이지만 근언이 사는 층에는 입주자가 없었다. 새건물이라 입주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게 다행중의 다행이었다. 구급대원들은 넘어졌다는 훈연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창백히 질려서 구급차까지 따라오려는 근언에게 이걸로 죽지는 않는다면서 만류했다. 근언의 얼굴만 봐서는 훈연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사람 같았다. 구급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총에 맞을뻔 했으니 틀린말도 아니긴 했지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근언은 꿋꿋하게 구급차를 같이 타고 병원으로 왔고, 처치는 제 때 끝났다. 다행히 뼈가 전부 어그러졌다거나 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예정 됐던 것 보다 한 주 정도 더 깁스를 해야한다는 말에 훈연의 어깨가 쳐졌다. 완치는 그렇다쳐도 깁스는 앞으로 3주면 풀 수 있었는데. 근언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같이 있었으면 좀 잡아줬어야지 대체 뭘 했어요?"


의사는 불시에 화살을 근언에게 돌렸다. 근언은 눈을 피했고, 훈연은 근언은 나중에 온 거라면서 손사레를 쳤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찬 의사가 처방을 내렸다. 어디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바로 오세요. 물리치료 꼬박꼬박 오고. 훈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가봐도 괜찮다는 말에 훈연이 일어섰다. 정말 긴 하루다.


"...미안합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서 다시 사과가 들려왔다. 훈연은 내려가는 숫자를 쳐다보다가 근언에게로 눈을 돌렸다. 단정하게 서있지만 눈도 고개도 한없이 내려가 있다. 픽 웃어버린 훈연이 고개를 저었다. 사격 실력이 형편 없던데요.


간단한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상자를 벗어나자 평소와는 달리 근언이 훈연의 뒤를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에 도착하자 훈연이 뒤를 돌았고, 근언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문 안으로 몸을 구겨넣은 훈연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내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차에 들어오니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근언은 차에 타고도 얼마간 시동을 걸지 않았다. 시트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훈연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근언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얹어진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훈연은 지금이 옳은 타이밍임을 알아챘다.


"왜 총을 가지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경찰이라서요. 덧붙인 말에 근언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죄책감 탓인지 아까부터 마주치기가 영 힘든 눈이다. 민간인의 총기 소유는 불법이다. 지금은 조수역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말마따나 훈연은 경찰이었다. 훈연도 공무중이 아니면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것이 근언의 침대 밑에 있다는건 보통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에서 살았을 때 허가 받았던 총기에요. FBI의 자문이어서. 목소리만큼은 변함없이 깔끔하다. 훈연은 왜 FBI의 자문이 총기를 갖고 있는지나 총기를 어떻게 중국에 반입했는지 까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주 중대한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총으로 죽었을 뻔 했는데도 훈연은 아직 신고를 넣을 생각은 없었다. 추문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지 근언이 훈연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없었던 사이에 신변의 위협이 될만한 사건을 맡았나요?"


그래봤자 길이 갈린지 2시간 남짓이다. 그랬을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훈연은 일단 그렇게 물었다. 근언은 약간 망설이는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훈연은 넘어갔을테지만, 거짓말을 모를 정도로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훈연은 눈을 굴렸다.


"그럼 악몽인가."


혼잣말이었지만 좁은 차안에서는 크게 들렸다. 어차피 몰래 말할 사항도 아니었다. 훈연은 뱉어놓고 조심스럽게 근언을 살폈다. 반쯤은 추론이었다. 훈연은 근언이 총을 쏘기 전에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걸 봤고, 이른시간이긴 했지만 서춘오에 대한 수사를 하면서 둘의 수면패턴은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워낙 예민한 사람이니 훈연이 20분간 문앞에서 서성였다면 인기척 때문에 반쯤 깼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 외의 근거는 좀 터무니 없는 것들이었다. 부축당할 때 본 팔의 흉터. 한쪽에 크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마치 난도질 당한듯한 모양새로 있었다. 그리고 간요가 말했던 유령저택에 관한 것도. 간훤의 얘기는 말도 안되는 것 처럼 들렸지만 그냥 과장됐을 뿐이라면 이상할 건 없었다. 기묘하게 마른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훈연은 수사 첫날에 근언을 봤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직 살이 덜붙어서 약간 패인 듯 했던 눈주변은 응당 그래야하는 것 보다 어두웠다. 지금은 괜찮아보였지만 아마 아직도 정상체중에는 못미칠 것이다. 다이어트를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심한 스트레스의 반작용이라고 보는게 근언의 이미지에 들어맞았다.


억지로 끼워맞추는 느낌이 강했으나 훈연은 그것들이 근언이 총을 가지고 있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훈연은 근언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메릴랜드 대학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자이니 월반을 좀 했을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여러번 반복했듯이, 훈연은 감이 좋았다. 근언이 눈을 감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말해줄 생각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따져도 괜찮았다. 일일이 캐묻거나 화를 내도 되었다. 사실 훈연이 지금당장 조수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근언은 할 말이 없었다. 훈연은 신변에 위협을 당했고, 구두뿐인 장담은 믿기가 어렵다. 총에 위협당하는 것은 절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훈연은 잠시 근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저녁은 먹고 들어가죠."


생선으로. 가벼운 말에 근언의 눈이 떠졌다. 훈연은 시선을 모른척 했다.






*





근처의 시장은 시끄러웠다. 한 시간 만의 쾌거에 훈연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지금이라도 차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겠냐고 세 번이나 물었던 근언은 무릎이라도 짚고 싶은 얼굴이었다.


근언은 훈연이 진짜 시장을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언이 아는 근처의 '시장'은 음식을 살 수 있는 5층짜리 대형마트와 백화점이었고, 그곳은 걸어서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훈연은 시장을 찾아야한다며 위치를 모르냐고 물었다. 근언은 눈을 깜박이다가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검색해 보죠.


위치는 나왔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다. 약간 거기서 거기같아 보이는 건물들과 길도 한몫 했지만 시장이 넓어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훈연은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고, 근언은 30분 전 부터 약간 지쳐서 훈연의 뒤를 따라갔다. 헤매서 그렇지 시장도 얼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는 훈연을 억지로 따라가며 근언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꼭 시장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훈연은 식재료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었고, 음식의 품질을 알아챌만큼 입맛이 예민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마켓이 어디있는지 몰랐을 때는 인터넷으로 식재료를 주문했다. 부득불 시장에 가야한다고 길바닥을 헤맨 이유는 근언을 메어두기 위해서였다.


훈연은 근언이 자신을 피할 것을 알았다. 총에 맞을 뻔한 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훈연이 시장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피곤하긴 해도 못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죄책감이 남아있던 근언은 거기에 대고 안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물론 그것까지 예상한 처방이었다.


근언은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 훈연이 먼저 피할거라고 생각했음이 당연했다. 훈연도 그래야한다는걸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근언이 총을 쏜 것은 실수고, 다시 그러지 않을거라는 것 정도는 빌라의 복도에서 눈치챘다. 훈연은 경찰이었고 범인이나 용의자가 총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은 질리도록 받았다. 무서워하길 바랬다면 수류탄 정도는 들고왔어야 했을 것이다.


증거로, 훈연은 오늘 아침 아주 태연하게 근언의 집에 열쇠를 꽂았다. 근언은 지난 밤 전혀 자지 않은듯한 얼굴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평생에서 세 번 정도나 지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너무 일찍 왔나요? 가볍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근언은 입을 다물었고, 곧 노트북을 닫았다. 준비하겠습니다.

 

"맛있을까요?"


훈연이 사과를 들이밀었다. 장 볼 목록을 적기는 했지만 꼭 그것만 사야하는건 아니었다. 근언은 인상을 살짝 구긴채 사과를 노려봤다. 너무 귀찮게 구나. 근언은 살 것도 없는데 훈연이 가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여지없이 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머슥하게 치우려는 찰나 근언이 사과를 제 손으로 옮겨왔다. 손으로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났다.


맛있을겁니다. 사과를 돌려주자 가판대에 서있던 주인이 당연히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전부 최상품이니 걱정하지말고 사가라는 홍보에 입꼬리를 올린 훈연이 몇 개를 골라냈다. 껍질째 먹어도 상관없으니 집에서 혼자 있을 때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가판대에서 멀어지며 훈연이 사과를 두드린 이유를 물었다. 맑은 소리가 나면 신선한거라는 대답에 훈연의 입이 동그래졌다. 아는게 많은줄은 알았지만 사과 감별법 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늘 사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건 식기였다. 군것질거리나 구경거리들을 그냥 지나치며 제일 첫번째로 보이는 식기판매점에 몸을 구겨넣자 근언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무젓가락으로 쓰레기통이 넘칠 지경이어서요. 젓가락들이 걸려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근언이 물음표를 띄웠다. 계속 나무젓가락을 쓰고 있었습니까?


"어차피 집에서 먹는 음식이야 배달음식이나 테이크아웃이니까요. 산다고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파는건 조금 그래서."


무늬가 없는 것을 아무거나 골라 세 쌍쯤을 든 훈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통시에 있을 때는 훈연을 불쌍하게 여긴 간요의 어머니가 간훤을 시켜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비행기를 타야하는 거리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보내주는 것에는 한계가 조금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면서 택배로 장조림 따위를 보내주겠다는 통화를 하기는 했어도 오려면 아직 삼사일은 남았을 것이다. 안그래도 바쁜 간요에게 음식을 부탁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결국 선택지는 좁다. 제대로 된 식기들은 아직 통시의 집에 있었다. 이사를 온게 아니었고 식기 정도야 사면 되는 일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내친김에 그릇들도 둘러보려는데 근언이 뒤늦게 사과 봉지를 가져갔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훈연이 물결무늬가 있는 접시를 집어들었다. 처음 자취 했을 때 샀던 접시보다 두 배 가량 비쌌다. 경찰의 박봉으로는 조금 무리인가. 도로 내려놓는데 시야에 스친 근언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슨 문제라도."


떨떠름한 목소리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말 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훈연은 얼굴을 구겼다. 뭐를? 근언이 훈연의 손에서 젓가락과 그릇을 뺏어들더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오랜만에 나온 무례한 행동에 훈연의 얼이 빠졌다. 뭐하시는... 근언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여분은 제 집에 있습니다. 훈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서너개 떠올랐다.


"깁스를 뺄 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지내죠."


아주 뜬금없는 주장이었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수습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런 문장이 튀어나왔는지 짐작이 안됐다. ㅇ,왜... 멋대로 걸음을 옮기는 근언을 따라가며 훈연이 말을 더듬었다. 불시에 멈춰선 근언이 훈연을 돌아봤다. 식사 때마다 올라오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ㄱ,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예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근언이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좀 벌어진 탓에 목소리가 커졌다. 치이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통과하며 따라잡으려니 어이없음도 커졌다. 정말이지 요리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혼자 살 때도 하루에 한끼 이상은 밖에서 먹었고, 한 주를 더 하고 있어야하긴 했지만 깁스를 풀기 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일단 깁스를 풀면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밥을 챙겨주는건 차를 탈 때 조수석을 열어주거나 장을 볼 때 짐을 들어주는 정도의 배려가 아니었다. 거기다 같이 산다니. 어떻게 논리가 비약하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팔을 다친건 제 문제고,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가 당신한테 총을 쐈죠."


훈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에 대한 사죄로 하죠. 뻔뻔한 얼굴이다. 어제 차 안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이 맞나 싶어 훈연이 기함을 토했다. 근언은 더 들을 것 없다는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훈연은 제자리에서 머리를 뒤섞었다. 말들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다.


어차피 아래층에 살고 있으니 식사시간 때 마다 올라가는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지,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식사를 대접 받아야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총은, 근언의 잘못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런식으로 갚을 필요는 없다. 뒤늦게 쫓아가며 훈연이 몇 번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 선생님! 다리는 제가 더 긴대도 길이 복잡해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식사따위를 챙겨주고 싶어하는거지? 간요의 어머니가 훈연의 식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훈연과 간요는 거의 같이 자라다 싶이 했으니까. 하지만 근언은. 거기까지 생각한 훈연이 불시에 걸음을 멈췄다.


근언은. 가까운 사이인가?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조금 얼얼했다. 그런가? 갑자기 생각이 복잡하게 꼬였다. 아주 먼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장저우에 와서는 하루에 적어도 6시간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까. 하지만 훈연도 근언도 서로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었고, 사적인 대화라고는 훈연이 책을 빌려가거나, 뭐 겨우 그정도가 다였다. 훈연이 매끼를 밖에서 사먹고 있다는걸 이제서야 안 것만 봐도 결론은 뚜렷했다.


하지만 훈연은 아까까지 근언의 옆에서 걸었다. 총으로 위협당한 이틑날에.


심지어 훈연은 자신이 총으로 위협당한 이유도 알지 못했다. 총이 무섭지 않은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럴만한 사이였나? 근언의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수 일을 그만두지 않는건 그럴만 했다. 하지만 시장에 끌고 나오는건? 훈연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근언이 거리를 둘 걸 알아서였다. 그건, 보통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일만 하면 되었다. 근언도 훈연도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있었고, 근언이 훈연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뭔가가 바뀔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공과 사를. 훈연의 입술이 먹혀들어갔다. 다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걸 구분하며 근언을 대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근언은 그렇게 하고 있었던가. 질문이 돌고 돌았다. 강등 당하거나 계속 통시에 있는 서에 있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조수로 골랐다고 했다. 능력을 높게 봐줘서. 이제와서 그걸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훈연은 근언이 했던 다른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근언이 저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명확했다. 그렇게 잘해주는데 눈치도 못챌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자신은?


둘은 함께 수사를 한다. 근언은 훈연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다. 훈연은 아무렇지 않게 근언이 열어주는 조수석으로 들어간다. 훈연은 근언의 책을 읽는다. 근언은 훈연에게 총을 쐈다. 훈연은 근언을 시장에 끌고왔다. 거리를 두기 싫어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훈연이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근언은 안보이게 된지 오래다. 머리를 뒤섞은 훈연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빌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에 묻혀버렸다.




두룹두뚜 뚜룹두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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