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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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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자랐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키가 커진 것 같다거나 얼굴이 성숙해졌다는 농담은 황제의 눈 밖에 밀려난 7황자를 기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궁에 가게되면 으레 몇마디씩 들려오는 기분나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라궁으로 향하는 중 만났던 예왕이 너스레를 떨며 좀 커진 것 같다고 말을 건넸을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익숙해진 기만을 듣고 새삼 화를 낼 성정도 아니었다.


예왕은 여전히 딱딱한 녀석이라며 길을 비켰고 경염은 정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지라궁에 찾아들었다. 정비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차리도록 명하며 언제나처럼 경염을 맞았지만, 백합탕을 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을 때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챘다.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떠야하는건 경염이었으나 어째 정비의 얼굴이 더욱 놀라있었으므로 엎질러진 탕은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머니? 의아하게 나온 목소리에 정비가 손을 놓기는 커녕 좀 더 가깝게 손을 끌어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보라고 답지않게 독촉을 했고, 영문을 모르는 경염은 명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경염은 약간 멍한 기분이었다. 몸이 자랐다니? 급히 시녀들을 시켜 관을 틀었던 머리까지 푼 경염은 세심하게 살펴보는 정비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당황스러워했다. 얼결에 바라본 손톱은 정말로 길이가 자라있었다. 한끗. 그러나 전장에서 다쳐도 딱 예전의 상태로만 돌아오던 손톱이 자랐다는건 무시하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키까지 재 본 결과 확실하게 자라있었다. 경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과거에는 매일 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랐는지 확인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습관이다. 손톱도 머리카락도 언제고 똑같았고, 몸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벗었던 겉의복을 다시 입혀주는 손에도 무슨 기분을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잡히는 단서가 없다. 경염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윤인이 죽은 부작용이었다. '윤인'은 천인과는 달라 능력이 없었으나 기의 파장이 비슷한 다른 천인을 받쳐줄 수 있었다. 모든 천인이 윤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평생 자신의 윤인을 만나지 못하는 천인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부작용이 없고 능력 또한 약했다. 기왕도 윤인인 기왕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겨우 돌맹이 하나 들어올리는 정도였지만, 기왕비를 만난 후로는 활 없이도 백 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경염처럼 거의 태어나자마자 윤인을 만난 경우는 역사서에서나 찾아볼 법하게 드문 일이었다. 천인은 천성적으로 기가 두 가지 있다고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천능의 기가 활발하여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있으나 조절에 미숙한 단점이 있다. 자라면서 윤인을 만나지 못하면 자연히 천능의 기가 막혀 점점 능력이 줄어든다. 그러나 경염은 제 윤인과 계속해서 함께 자랐고, 나이가 차면서 천능이 막히는 일 없이 조절법만 늘어갔다. 경염이 나서는 전장에는 항상 불이 따라왔으나 기가 폭주한 적도, 천능이 줄어든 적도 없었다. 불안정한 날들은 많았으나 임수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나 특별한 사람이 갑작스레 죽어 떠났을 때. 윤인에 사라진 것에 대한 부작용은 천인마다 모두 달랐다. 갑작스레 폭주를 하거나 천능을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몸이 끔찍하게 약해질 수도, 혹은 운이 좋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경염처럼 성장이 멈춰버린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시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윤인이 사라진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정비는 경염의 맥을 짚어본 뒤 천능 대신 다른 기가 막혀버렸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서 성장이 멈춘 대신 천능은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경염은 지금까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윤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막혔던 기가 갑자기 뚫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열 두 해 동안 자라지 않았던 몸이었다. 일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해보다 금릉에 좀 오래 머물고 있기는 했지만, 북방토벌을 워낙 깔끔하게 해버린터라 보낼 곳이 없어 그럴 뿐이었다. 특별히 의원을 찾아가거나 다른 탕약을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 시도들은 오래 전에 포기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경염을 앞에 둔 정비는 성정대로 차분해졌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관을 도로 틀어올린 경염은 무슨 말을 떼어야할지 몰랐다. 짐작되는 이유. 말아쥐어지는 경염의 손을 보던 정비가 눈을 내려깔았다.


"...12년이나 되었잖니."


경염은 대답이 없었다. 12년. 긴 시간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 경염은 이제 서른을 넘었으며, 금릉 또한 너무도 바뀌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극심한 슬픔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천능은 요사스러운 것이어서 기의 주인의 마음을 신체적으로 반영시킨다고, 혹자는 그것이 부작용이라고 서술했다. 크게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황상에게서 정왕의 이름을 실추시키려고 하던 뭇 서생들이 계속 들고나왔던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정을 그렇게 놓은 후 생각하면. 경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자라버린, 굳은 살로 뒤덮인 손. 정녕 그런 것일까. 제가 임수를 잊어서, 임수에 대한 마음이나 그리움이 옅어졌기 때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일까. 그런걸까?


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경염은 막사촌 하나를 모조리 태웠다. 부관이 입단속을 시켜 황상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당시의 병사들은 그 때의 경염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막사에서 주저 앉아있는 황자. 재들이 타는 소리가 황자의 오열을 묻었고, 날이 지날 때까지 화마는 줄어들지 않았다.


잿더미에서 걸어나오는 천인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채인 경염의 눈은 극도로 형형했다. 바로 금릉으로 돌아가 이유를 물었으나 황상은 설명해주기는 커녕 경염을 북방으로 내몰았고, 몸은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경염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오래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미련했다. 그럼에도 경염은 주먹을 말아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제가 임수를 얼마나 그리워 했었는지, 그의 죽음에 얼마나 괴로워 했었는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허공에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몸을 항명이라고 칭하는걸 부정하지 않았던건, 경염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작용은 항명이었다. 기왕부의 사람들과 임씨 일가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믿는 경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고, 할수만 있다면 이 모습 그대로 임수를 만나고 싶다고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닳아버렸다고 한다면.


경염의 눈이 부정하듯 질끈 감겼다.




*



당신은 이렇게 날 떠났죠. 난 내색하지 않아요. 희망도, 사랑도, 영광도, 행복한 결말도 없다는 사실을요.




*





"정왕의 몸이?"


몽지는 확실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위군의 통령은 소문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 그라도 촉각을 세우는 이야기들이 몇 있었다. 죽은 의형제가 금릉으로 돌아온 뒤로는 정왕부의 소식이 그러했는데,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갈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급하게 녕국후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임수는 부탁한 저택의 일인줄 알고 몽지를 들였다가 손을 그러모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염의 성장이 멈춘 것은 윤인인 자신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금릉에 돌아온데다 지척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더이상 부작용이 계속 될 이유가 없다. 사실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한독이 기를 흐트려 놓았을거라 믿었기에 아직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몽지는 낭패어린 임수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임수도 생각 못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강좌맹의 종주가 금릉에 도착하자마자 경염의 부작용이 낫는다니. 예왕의 편인 척 할 계획이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경염이 눈치를 채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김에 말해버리자고 한탄하는 몽지에게 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대업을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경염이 제 정체를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닙니다. 윤인은 평생에 한 사람으로 정해지는건 아니니까요."


드물었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새로운 윤인을 만나게 되면 부작용이 사라진다는 사례는 고서에도 왕왕 나와있는 이야기였고, 마지막 천인 황제도 세 명의 윤인을 두었다. 천인과 마찬가지로 윤인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새 윤인이라니, 정왕이 당황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금릉으로 오자마자 부작용이 나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매장소가 정왕의 새 윤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예왕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예왕의 책사로 있으며 안으로는 정왕을 도울 계획이었는데, 천인과 윤인 사이의 각별한 애정에 대한 것은 온나라가 소비하길 좋아하는 소재였다. 정왕의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의심 많고 총명한 예왕이 뒷생각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해결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뒤집어서 보면,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다만 정왕에게는 조금 잔인한 수가 될 것이고, 신임을 얻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시기가 늦었으면 했는데. 어떤 계절이든 차기만 한 손이 찻잔을 쓰다듬었다.





*




 7황자의 부작용이 서서히 걷힌다는 소문은 빠르게 금릉을 돌았다. 경염은 되도록 정왕부의 바깥으로는 나서지 않았고, 소문은 무성하게 커졌다. 온갖 추측이 나돌았지만 다행히 매장소의 존재까지 이야기가 연결 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백리기의 무술 시합 때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었으니.


임수는 비류가 전해준 서신을 받았을 때 경염이 뭔가를 깨달았을거라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경염도 수상한 책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급하게 전해진, 만나야 한다는 서신을 봤을 때, 가능성이 스쳤을 것이다. 시기가 너무 꼭 들어맞았다. 책사와의 만남 후로 몸이 자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경염에게 몇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앞으로도 계속 자랄겁니다."


책사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경염은 시선을 아래에다 두고 올릴 줄을 몰랐다. 사실 몸이 자랐다는 것이 그렇게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깨가 조금 벌어졌고 섰을 때 반의 반뼘이 안되게 키가 컸을 뿐이다. 손은 소매에 가려지고 머리는 관을 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과 다르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정비와 임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윤인에 대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임수는 시선을 내렸다. 경염은 여전히 단단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자라는 몸에 대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음이 분명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부작용이 없어지는 가장 흔한 경우에 대해서.


서책으로는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책사를 보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였다. 예왕과 태자를 놔두고 절 황제로 올리겠다 선언한 책사가 윤인이라니. 우연이라쳐도 질이 너무 나빴다. 경염을 불러낸 것이나 첫마디까지만 고려해도 자신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듯 눈을 감은 경염이 숨을 뱉었다.


"내 전 윤인에 대해서도 들었을거라 생각한다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매장소가 눈을 감고 있었고, 경염은 시선을 비껴 다기들을 보았다. 적염군에 대한 이야기는 온 나라가 쉬쉬하면서도 밑으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금릉에 들어오며 임씨 가문에 대해 듣지 못했을리가 없고, 경염을 황제로 올릴 생각이라면 그의 윤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리가 없다. 경염의 말이 질문이 아닌 이유도 그런 탓이었다.


어떤 말이 나와도 시치미를 뗄 수 있었지만, 임수는 제가 화두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7황자 소경염은 고집이 세고 주변에 어둡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모순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파고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수에 대한 화제가 민감하면 민감할 수록 그럴테고, 그래서 윤인에 대한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나중에 하고 싶었다. 매장소가 임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준 다음에 나누어야 할 화제였는데. 


"매령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임수가 저에 대해 뱉을 말이 많지는 않았다. 경염은 제 손 끝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오히려 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감긴 임수의 눈꺼풀이 약하게 떨린다.


"그랬지."


찬 목소리였다. 매장소는 송구하다는듯 고개를 숙였고, 경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을 말한건데 어째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오. 차분해진 얼굴로 찻잔을 가져간 경염이 소매를 걷었다. 서책에서 읽었다고는 하나 자세한 건 모를테니 간단하게 얘기해주겠소.


"바퀴 윤자를 쓰는 것은 알고 있겠지. 천인이 가진 천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윤인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이오. 윤인은 천인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천인은 불가능하지."

"...전하는 살아계시지 않으십니까."


임수는 경염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랬으나 천인은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간결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윤인은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다. 천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천능을 증폭 시킬 수 있었고, 천인이 폭주할 때 몸을 닿게 하는 것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니 옆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역할의 8할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왕에게 넘어간 척 해야하니 둘은 옆에 있기는 커녕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한다. 조절이 미숙했을 때 만났다면 문제가 있겠으나 경염은 이미 윤인 없이도 천능을 다룰줄 알았다. 무리하게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설명에 매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능에 관한 것 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경염은 손을 가리고 있던 천을 위로 걷어 매장소에게 내밀었다. 검지의 손톱만이 유난히 길다. 매장소가 허락을 구해 손을 살펴볼 동안 나머지는 잘라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손톱 외에 손의 골격도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주 전이니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정왕부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소. 소문도 마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고. 선생을 안만난다고 자라지 않는 것 같지도 않으니, 윤인인걸 숨기는게 쉬울 것 같지는 않소만."


임수는 길다란 손가락을 쓸어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하의 윤인인 것은 반드시 숨겨야합니다. 예왕에게 의심을 사는건 피해야하니까요. 그것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염이 자연스레 손을 빼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묻는 목소리에 임수가 찻잔을 잡았다. 속여야지요.


"황상에게 전하가 적염군과 임수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하십시오. 둘도 없는 기회이니."


바람에 열기가 섞인다. 임수는 그러쥐어지는 주먹을 내려깔은 눈으로 보며 차를 흘려넣었다. 그을림을 낸다면 녕국후부에 자신이 왔었다는걸 알리는 꼴이 된다. 빠르게 열을 가라앉힌 경염이 목을 세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임수는 곧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쳐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미에 붙였듯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제위다툼에 나서 최종적으로 태자에 책봉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천대받는 처지부터 개선해야 한다. 12년 전의 일에서 미련을 털어버려 외관이 자란다고 한다면 경염을 보는 황상의 눈도 달라질 것이었다. 천인의 몸은 하도 불가사의한 것이라 온갖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거나 일정한 유형이나 '보통'이라 칭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윤인이 사라져 성장이 멈춘 몸이었다. 윤인에 대한 미련이 없어져 다시 자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물며 천인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황상이야 더 쉽게 속겠지. 천인에 대한 황상의 시기 탓에 예왕이나 태자도 그쪽에 능하지 않으니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라면 경염에게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것이 성정에 맞지 않으신걸 알지만,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신중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황상을 속이려면 단지 황상 혼자만을 속여서는 안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예왕이나 태자 같은 다른 황자들이나 심지어는 예황과 정비에게마저도 거짓말을 해야했다. 정생의 일만 따지더라도 거짓말을 하기 싫어할 뿐 못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으나, 무거운 것은 거짓말의 내용이었다.


임수와 기왕, 7만의 적염군에 대한 것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야하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며 지나간 일들이라고. 누구도 경염을 탓하지 않겠으나 경염은. 경염만큼은 제위다툼을 위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늦든 빠르든 몸이 자랐을테니 언젠가는 해야했을 거짓말이었지만 임수는 그 시기가 되도록 늦었으면 했다. 경염의 자책은 임수의 속마저 파먹을 것이었기에.


경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숙인 얼굴은 시선에 잡히지 않았고, 열기도 나서지 않았다. 못한다는 답이 들려도 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위험이 따랐고, 너무 위태스러운 작전이다. 경염이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으니 나올 결과를 알아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희생은 언제나 따르는 법이었으나 임수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구역질을 참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임수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약조해 줄 것이 있소."


오래 걸렸으나 망설임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경염의 고개가 들리는 듯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각거리는 단호한 소리.


"난 기왕 형님과 임씨 일가가 모반을 꾀했다고 믿지 않아. 사건을 재조사 해 그들의 결백을 밝혀내야 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고."


임수의 내려진 시선에는 아직 쥐어져있는 주먹만이 보였다. 정갈하게 놓여있는 손은 앞으로 12년의 세월을 빠르게 거칠것이다. 더 커지고 길어져 큰 칼이나 활도 가볍게 쥐게 되겠지. 몸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금의 얼굴은 흔적만 남고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 얼어있어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차가운 덩어리. 언제나 무시받았던,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얼음.


"그걸 막지 않는다고 약조 한다면. 선생의 계획이 무엇이든 따르겠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얼음에게서 새어나오는 열기가. 얼음에 갇혀있던 적염이. 덮쳐오는 화마가 너무나 그리워서, 임수의 눈이 감기었다.




*



이게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에요. 마치 영원한 것 처럼.

그리고 우린 남은 여생을 살아가죠, 하지만 함께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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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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