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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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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루성, 아성 1인칭 독백








나는 사람의 거죽을 글자에서 얻었다.

글자들을 회반죽 처럼 두르고 나는 사람 행세를 했다. 멀쩡히 웃고 사랑받고 속였다. 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할 것을 억지로 했으며 가죽 안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의 자기애는 끝이 없어서, 단지 보이는게 자신들과 비슷하면 무턱대고 좋아하고 만다.

내가 가장 처음 얻은 거죽은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썼다. 명성. 명가의 아성.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글자였다. 나는 그 글자의 발음이 내 얼굴을 덮는 것을 느꼈고, 먹의 틈 사이로,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 전에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고아원의 원장이나 봉사를 나온 사람들이 지어주던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채 나를 동정하는 표정. 그러나 글자의 틈으로 보인 웃음은 그런것과는 달랐다. 그 웃음은, 형님의 웃음은 아주 밝았고, 나를 전혀 동정하고 있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그것을 좋게 생각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는데,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유로 나에게 동정은 좋은 것이었고, 그런게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표정을 정말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웃음을 따라했다. 얼굴에 씌여진 글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글자가 사람의 것이기 때문일거라고, 아주 오랜 날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첫 가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형님은 그 다음부터 글자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글자를 몸에 칠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칠하면 칠할 수록 칭찬 받는 일이 늘었고, 칭찬을 받으면 안심이 됐다. 칭찬 받지 않으면 굶는 생활을 했었으므로 나는 꽤나 필사적으로 가죽을 둘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활은 끝났다는걸 깨닫고 나서도 나는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게 싫었지만 너무도 쉬웠으며, 그저 버려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유일하게 내가 사랑 받아야 할 이유였다. 나는 명가가 주는 애정을 배부른줄 모르고 집어삼키며 혼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아가리가 넓은 입은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쑤셔넣었고, 한 번 늘어난 구멍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사람이 아닌 나는 절제라는 것 조차도 가죽으로 써야했기에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가죽을 덧씌우고 벗겼다가 깁는 것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두려움이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중의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문득 형님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화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파리로 온지는 이미 1년이 훌쩍 지나있었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명성의 가죽이 명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므로 그냥 놔두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자각한 후에, 나는 급하게 구역질을 했다. 매만지던 화초도 내버려둔채 욕실로 달려들어가 말 그대로 안에 있는걸 전부 게워내버리고는 옷을 벗었다. 온도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을 들이부었고, 손에 걸리는 타올로 상처가 날 정도로 몸을 닦고도 욕조에 잠겨 다음날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일주일간의 몸살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끔찍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 때서야 가죽이 안쪽을 좀먹기 시작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가죽의 표현이 나의 표현이 되고, 가죽이 느끼는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었으며, 가죽이 느끼는 통각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살을 앓는 중에도 끊임없이 속을 게워냈고, 몸살이 모두 나은 뒤에는, 거처에서 거울을 모조리 치웠다.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떨었을 때, 단지 그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사람은 아팠다. 사람은 주었으며, 사람은 잃었고, 사람은 무너진다. 가죽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받고 싶은걸 가지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글자들을 모두 박박 긁어내 발로 짓밟고 싶었다. 형님이 지어주었던 글자가 달라붙다 못해 스며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건, 무서웠다.


청자라는 가죽을 얻은 것은 그 때쯤이었다. 당에 가입할 의사를 비췄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중에 다시 연락이 왔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죽의 결정이었으나, 나의 본질은 신분을 위장 해야한다는 사실을 이빨에 박아넣고 씹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죽. 그것을 얻으면 다시 가죽과 본질을 유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명가의 아성이 아닌 청자로서 가죽을 다시 씌운다면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썩 잘 먹혀들어갔다. 청자의 가죽은 명성의 가죽과는 아주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이 썼던 먹으로 쓴 명성의 글자와 만년필 잉크로 휘갈겨 쓴 청자의 글자는 같은 검은색이어도 섞여 들어가 있는 색에 차이가 있었다. 그걸 같은 검은색으로 쳐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청자를 쓴 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몇 번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중요한 임무를 성공시키고는 했고, 신뢰도가 높아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자는 웃었으나 본질까지 감정이 전달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성공으로 쳤다. 계속 이렇게 청자의 가죽을 쓰고 산다면 유학을 끝내고 돌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형님의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점점 청자의 잉크가 스며들었던 먹 마저도 흡수하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재떨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나를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고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청자는 도구이므로, 그저 일만 잘 하면 되었다. 청자에는 꽃과 향수, 화약과 골목길의 글자가 쓰였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두려움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이 파리로 온다고 했을 때 꺼리지 않았다. '청자'는, 다른 가죽이어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들킬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약 들킨대도 다른 사람이 됐다고, 그 이상으로 추론하는건 불가능 할거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내가 글자를 가죽으로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눈치가 없었다기 보다는 그런걸 눈치 챌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형님도 가죽을 쓰게 됐다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가정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총성이 들렸을 때, 다시 돌아온 두려움으로 인해 청자의 가죽은 눈 위에 처참하게 버려졌다. 아직 덜 빠져나갔던 옛날의 먹이 묻은 채인 살점들은 여과없이 공기를 맞았고, 살점에 달라붙어있던 수증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결정들을 만들었다.


그 얼음과 눈으로 얇게 씌인 것의 이름은 명성이었다. 명루의 아성. 살점과 뼈에 달라붙어 긁어낼 수 없는, 가죽이 아닌 피부의 이름이었다.




*



그래도 여전히, 몇 번의 밤에서는 내가 가죽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그건 필시 내가 나의 본질을 앎이고, 원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끔 피부가 벗겨졌고, 살결 아래에서 얼굴을 구기며 필요할 때는 칼로 피부를 긁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점이 아닌 피부 위에 글자를 쓰고 덮는다. 모든 글자들은 피부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모든 나의 생각들은 피부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먹이 스며들까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이 아닐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내 것을 주지 않고 아파 할 필요도 없는, 웅크린 본질을 두껍게 감싼 가죽을 다시 갖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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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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