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8)
(8)
연성 (42)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공지사항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타래료 청폐안(그가 왔어, 눈을 감아 / Love me if you dare) 에 나오는 보근언과 이훈연... 살다살다 이런 마이너를 파고 아이고... 모처에 4화로 나눠서 올린것을 한꺼번에 올립니다 크흡 완결 안났어요!





"절 찾으신다고 해서 왔는데요."


훈연은 잠시 기다렸다. 인터폰 너머로는 대답이 없었고, 주변에도 인기척이라고는 없다. 산에 박혀있는 별장은 운전 중 몇 번이나 잘못 들어 온 것인지 의심했을 만큼 뜬금없는 곳에 있었다. 세련됐지만 담쟁이 덩쿨이 자라있는 저택은 수상했고, 그리고, 아직도 대답이 없다. 훈연은 깁스를 하지 않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서장님이 말한 시간에 온 것 같은데. 문 앞에서 몇 걸음 멀어져 위층의 창문을 확인한다. 대낮에 커튼까지 쳐져있고, 아무래도 안에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인터폰도 연결 되지 않았을터다. 잘못 찾아왔나. 휴대폰에 찍힌 위치를 다시금 확인 하는데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밀거나 당기는 힘도 없이 슬쩍 열린 문을 쳐다본 훈연이 주위를 둘러봤다.


보근언이라는 사람인데. 기억하지? 출근 하자마자 호출에 불려간 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겠어요. 담백하게 웃는 얼굴에 마주 웃어준 서장이 좀 더 편하게 허리를 뉘였다.


보근언은 범죄 심리학자로 저번에 훈연이 팀장으로 맡았던 사건에서 자문을 담당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훈연의 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범인의 심중을 꿰뚫었고,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수사에서 범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검거하는 과정에서 훈연의 팔이 부러졌다.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범인에게 수갑을 채웠으니 훈연도 독한 사람이라고 서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더랬다. 사건을 해결한 방식도 그랬지만 응급처치를 해준 사람이 근언이었기 때문에 훈연은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었고, 자문을 받을 만큼 커다란 사건은 저번 이후로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 들을 일이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이다. 궁금해하는 훈연을 살펴보던 서장이 뺨을 긁었다.


그 사람이 조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입을 약간 벌린 훈연이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친다. 조수요? 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무언가를 막는듯 아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네 팔 때문에 빼려는거 아니야. 걱정하지마. 저도 모르게 다친 팔을 감쌌던 손을 어색하게 내린 훈연이 입술을 축였다. 아직도 부목을 대고 깁스로 감싼 팔은 완치까지는 거의 4개월이 남아있었다. 권고 받았던 입원기간은 모두 채웠지만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훈연은 퇴원 하자마자 이제까지 계속 출근을 하는 중이었다. 훈연은 팀장이었고, 오래 자리를 비우면 비울 수록 팀에 끼쳐지는 영향이 크다. 단순히 일처리라 더뎌진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되면 아예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쪽 바닥은 사람이 하나 빠져나가면 곧바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고, 그건 훈연이 어쩔 수 있는게 아니었다.


범인은 검거 했지만 팔을 부러뜨린건 큰 실수다. 밖에서는 영웅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게 경찰에게 무모함은 치명적인 자격결여였다. 거기다 근언이 오기 전까지 수사는 거의 5달 동안이나 진행되지 않았다. 수사를 시작했는데도 피해자가 5명이나 더 나왔고,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가 무색하게 훈연의 명성은 바닥을 쳤다. 그건 상관없었다. 퇴출되지만 않는다면 다시 쌓으면 되는 일이었고 그럴 자신도 충분했다. 하지만 맹세코 팔이 부러진건 정말 사고였다. 범인은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던 근언에게 달려들었고 훈연은 그걸 막을 수 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문이라는건 언제나 잔인해서, 떨어진 명성을 회복하기 위한 발악이라던가, 혹자는 일부러 팔을 부러뜨린거라고 떠들기 까지 했다. 젊은 나이에 팀장까지 도맡아 승진을 거듭하는 훈연이 아니꼬웠던 걸지도 몰랐다. 훈연이 기를 쓰고 서에 계속 출근하려는 이유도 사실 그런 소문들 때문이었다. 집에서 마음 놓고 요양이나 하다가는 정말 강등 당할 수도 있었다. 한 번 강등 당하고 나면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사정을 아는 동료들과 서장은 훈연에게 겉치례 걱정만 몇 번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팔 때문에 빼려는게 아니다'라는 말도 겉치례 걱정에 가깝다. 서장은 조심스럽게 훈연의 눈치를 봤다. 고개를 숙이고 붕대 끝을 노려보던 훈연이 다치지 않은 팔로 머리를 긁었다. 조수. 범죄 심리학자에게 조수가 필요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번 사건도 서에서 부탁한게 아니라 근언이 사건을 알고 먼저 컨택을 해왔던 것이었으니 근처 관할에 살고있을 확률이 높았고, 일반인 중에 조수를 찾는 것 보다는 경험이 있는 경찰을 잠시 빼오는 것이 더 편할테니까. 아마 남는 인력을 부탁했겠지. 생각나는 사람이 몇 있었지만 윗분들은 훈연을 지정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쉰 훈연이 자세를 바로 했다. 적어도 무통보 강등은 아니니 상황이 나았다. 서장은 동정과 미련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장은 훈연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특별히 아꼈던 사람이었다. 훈연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어디로 찾아가면 되나요?


훈연은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조용한 집이다. 문을 닫고 자연광만 있는 실내를 둘러보던 훈연이 목소리를 낼까 잠시 고민했다. 다행히 윗층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익숙한 얼굴이 계단을 내려왔다. 보 선생님. 안심한 듯 웃어보인 훈연이 겨우 뱉는다.


"이훈연입니다. 서로 보조인력을 부탁하셨다길래. 구면이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근언은 대답없이 훈연을 쳐다보기만 했다. 훈연은 이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근언과 협동조사를 하면서 쉽게 익숙해진 것이 있다면 이 남자의 괴팍함에 대한 것이었다. 약간 안하무인이긴 했지만 적응되고 나면 그리 크게 거슬릴 것도 없다. 근언의 시선은 다친 팔에 박혀있었고, 훈연은 어색하게 표정을 늘어뜨린채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타자를 치거나, 잘은 몰라도 총까지는 쏠 수 있을겁니다. 의도치 않게 씁쓸하게 나온 농담에 근언이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훈연이 다시 웃어보였다. 근언이 말도 없이 뒤를 돌아 응접실로 향해서 훈연도 서둘러 발을 옮겼다.


"제가 지시를 받고 온건 아니라서요, 정확히 어떤걸..."

"저번처럼만 하면 됩니다."


말을 뚝 끊은 근언이 갑작스레 뒤를 돌아본다. 훈연이 가까스로 부딪히지 않고 멈추자 근언이 다친 팔을 가리켰다. 그건 빼고. 대답도 안듣고 마저 걸음을 옮겨 응접실 쇼파에 앉은 근언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뒷머리를 긁은 훈연이 복도와 다르게 환한 응접실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는다.


"...혹시 제 팔을 신경 쓰신다면-"

"신경 안써요. 그 팔을 부러뜨린건 내가 아니라 범인이고, 그 사람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있으니까요. 내가 지켜달라고 소리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끼어든건 당신이고."


오히려 머슥해진 훈연이 눈을 굴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신문부터 펼쳐든 근언을 어색하게 쳐다본 훈연이 협탁에 있는 서류들에 눈길을 돌렸다. 노란 서류봉투에 반쯤 삐져나와있는 것들은 사건 보고서로 보였다. 한 팔을 뻗어 서류를 완전히 꺼내자 확실해졌다. 글자들을 읽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장저우 쪽 사건인데..."


사건 파일은 훈연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장저우 쪽에서 기승을 부리는 납치범에 관한 보고서다. 어느새 심각해져서 페이지를 넘기던 훈연이 근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조사하시는 사건입니까? 근언은 돌아보지 않고 콧소리로 긍정했다. 다시 파일을 살펴보던 훈연이 고개를 기울인다. 이 사건이 통시 관할로 넘어올만한 사유가 생겼다면 훈연이 모를리가 없다. 근언이 여전히 신문을 잡은채 말했다. 그 사건은 계속 장저우 관할일 겁니다. 범인은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거에요.


"그렇다면..."

"장저우로 거처를 옮길거라서요. 그쪽 사건을 먼저 받아왔습니다."


훈연의 얼굴이 구겨졌다. 장저우로 옮긴다구요? 근언은 말을 못들은 사람처럼 반응이 없었다. 훈연이 입을 열었다가 말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다물었다. 장저우로 옮긴다니. 그럼...


"보조인력은 그쪽 서에서 받아도 괜찮을텐데요."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근언이 드디어 시선을 들었다. 미간을 좁히고 사건파일과 근언을 번갈아보자 근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랐다. 장저우 관할에 요청할 수는 없었어요. 거기서 끊긴 말에 훈연이 더더욱 얼굴을 구겼다. 이유라도 있습니까? 근언은 물을 마셨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차를 탄 훈연은 목에 갈증이 베는 것을 느꼈다. 달각, 물병이 테이블에 다시 내려진다. 그쪽에는 당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그쪽으로 요청했습니다.


훈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것저것 생각들이 지나갔다. 가장 크게 치고 올라오는건 당황이었다. 일부러? 훈연은 잠시 저번에 함께했던 협동수사를 떠올렸다. 뭔가 잘못한게 있었는지 생각나질 않았다. 경찰에 몸을 담고 있진 않았지만 근언도 이쪽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알고 있을 터였다. 함께 수사하면서 훈연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있었을테고. 이런 절박한 타이밍에서 훈연을 일부러 빼오다니. 무통보 강등보다는 낫다지만 다시 서로 돌아가면 이미 자리가 없어져 있을 수도 있다. 복잡한 표정의 훈연을 넘겨보던 근언이 손에 든 물이 넘치지 않도록 의자에 앉았다.


"전 큰 사건들만 맡아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영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질 않는군. 일단 들어보려는 마음으로 훈연이 자세를 고쳤다. 근언이 다시 신문을 잡는다.


"저번 같은 연쇄살인범들이나 싸이코패스들을 전담하죠. 제 옆에서 일한다면 서에서 일하는 것 보다 훨씬 커다란 커리어를 쌓을겁니다. 아무리 당신을 싫어해도 돌아갔을 때 강등 당하는 일은 없을거에요. 겨우 시에 있는 서에서 팀장이나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고."


훈연의 입이 벌어졌다. 근언은 무표정으로 컵을 기울였다. 훈연은 머리회전이 빨랐고, 무슨 말인지는 전부 알아들었다. 훈연의 손가락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이빨에 약간 씹힌 입 안 쪽이 곧 풀려났다. 저. 한마디를 꺼냈다가 목이 약간 매여서 헛기침을 한다.


"그렇게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근언이 고개를 돌렸다. 훈연은 가만히 눈을 마주봤다. 사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단순히 옆에서 허드렛일을 하는게 아니라 수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위치라면 근언의 말대로 전에 없을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서에 계속 출근을 했어도 훈연에게 돌아오는건 실종자를 찾는 정도의 일들이었을테고, 큰 사건을 맡으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그나마도 강등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훈연은 다친 팔이 아려오는걸 느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가 단순히 동정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건 필요 없었다. 어쨌든 훈연의 잘못이었다. 5달 동안 수사를 진행시키지 못한건 훈연의 능력이 모자라서였고, 팔이 부러진 것도 마찬가지다. 처벌을 받는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다. 곧은 눈을 마주보던 근언이 신문을 덮었다.


"팔 다친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시선이 내려간다. 물리치료를 하려면 한 달이 남았고, 아직도 움직이는대로 아픈 곳이었다. 깔끔하게 부러진게 아니라 거의 뼈가 밖으로 나왔었다. 가해자는 전문성이 있었고 처치가 늦었다면 평생 못썼을 수도 있다. 경찰 일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상해 중에 가장 큰 종류는 아니었지만, 훈연은 근언이 빠르게 응급처치를 하는 와중에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3주 정도 같이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런식으로 굳었던 얼굴은 처음 봤다.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그나마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간 눈을 맞추고 있던 근언이 고개를 돌려 다시 신문을 폈다. 훈연씨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훈연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팔을 다쳐서 잘릴 위기에 처한 사람을 최적의 기회가 있는 위치로 불렀다. 근언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습니까?"

"...아까워서."


볕을 받아 색이 옅어진 눈이 깜박여졌다. 근언은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부스럭대는 소리.


"나이가 어리다고 그런 곳에 있기도 아까운 능력이니까. 나중에 빼내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팔이 부러져서 적절한 이유가 생겼길래 빼낸 것 뿐이고. 애초에 지정이었는데 그것까지 전달 받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시침이 움직였다. 훈연은 입을 벌렸다가 그대로 닫았다. 능력이 아까워서? 눈에 띄게 당황한 훈연 때문인지 한숨을 내쉰 근언이 컵을 다시 기울였다. 버벅대던 훈연이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ㄱ,그 사건 거의 5달 동안... 근언이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온다. 파일을 좀 봤어요.


"실적이 괜찮더군요. 왜 아직까지 서에서 근무하는지 궁금했었습니다. 그 사건은 서에 있는 누가 맡았어도 1년은 걸렸을 사건이었고. 제가 가지 않았어도 몇 주 안에 해결했을텐데, 가로챈 것 같아서 미안한 지경이었어요. 태도를 보니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거의 겉핥기만 했던 수사였습니다. 선생님이 오지 않았으면..."

"핵심에서 한 발자국만 떨어진 겉핥기였죠. 전 그냥 엮기만 했을 뿐입니다. 며칠 더 생각하다 보면 제가 내놓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게 됐을테고. 그렇게 겸손한게 심하니 아직도 서에서 못나가고 있는겁니다."


날카로운 말에 훈연이 공연히 입술을 물었다. 부정하기라도 하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붙잡고 노려볼 기세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제가 해결했다고 생각하겠죠. 전 그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해서요. 마저 말을 마친 근언이 마저 물을 마셨다. 어느새 다리를 떨고 있던 훈연이 의식적으로 몸을 멈췄다.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겁니다. 팔이 나을 때가 되면 다시 서로 돌아가겠죠. 추천장이 필요하다면 써줄거고, 베이징까지 가는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테니 동정은 싫다는 핑계로 거절하려면 그만두는게 좋아요. 부족한게 없다는건 아닙니다. 가르쳐줄테니 배우라는거지. 이틀 뒤에 장저우로 가야해서, 괜찮다면 서명한 다음 집에 돌아가 짐을 싸줬으면 하는데."


테이블에 있던 다른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 때까지도 훈연은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칭찬을 했는데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고도의 돌려말하기일지도 모른다. 진한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가 곧 계약서가 받아들여졌다. 있던 펜으로 서명을 휘갈긴 훈연이 뺨을 긁었다. 감사합니다. 곧바로 계약서를 가져간 근언이 마치 훈연이 그곳에 없다는듯 시선을 돌렸다. 훈연은 그걸 나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였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자켓을 챙겨 일어났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에 훈연이 한 번 뒤를 돌았다.


"그, 장저우로 간다면 어디쯤에서 묵어야..."

"신경 안써도 됩니다. 집은 있으니까."

"집이 있습니까?"

"시간은 문자로 보낼게요."


그게 끝이었다. 더 질문해봤자 답하지 않을거라는걸 깨달은 훈연이 다시 뒤를 돌았다. 현관을 걸어가며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평생 마주칠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3주동안 어느정도 말문을 터놨다고는 하지만 오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한건 훈연 한 사람인 모양이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훈연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뒤돌아본 집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문득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혀뿌리를 친다. 말도 안되지. 예상되는 답에 픽 웃어버린 훈연이 고개를 저으며 발을 디뎠다. 먼지 쌓인 여행가방을 챙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






훈연은 엉망인 머리를 붙잡은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거의 꿈 속까지 들렸을 정도였다. 반쯤 눈을 감고 발을 옮기자 마자 무언가에 치여 비명이 목 뒤까지 올라왔다. 엉망으로 벌어진 여행용 가방을 가까스로 밀어낸 훈연이 욕을 삼킨채 현관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가구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어딘가 어수선했고, 가는 와중에도 옷가지와 지갑 같은 것이 발길에 치였다.


"네..."


짜증이 귀까지 차오른 채로 문을 열자 멀끔한 얼굴이 보였다. 커튼을 쳐놓은 방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불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훈연이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근언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옷 챙겨입으세요.


훈연이 빌라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은 근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게...? 단어 하나에 담긴 의미는 많았고, 근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 집은 위층이니까 필요할 때 찾아오세요. 그러고서 건네주는건 열쇠였다. 훈연은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여행용 가방 하나 덩그러니 가져온 훈연은 멍해진 채로 집에 남겨졌고, 근언은 뒤를 돌아서 나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굳어있던 훈연은 휑한 집을 몇 분 쳐다보다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생각은 복잡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훈연은 단지 며칠 정도만 묵을거라고 생각하고 짐을 쌌다. 집이 있다길래 장저우에 근언의 주택이 있고, 일하는 동안만 그곳의 방을 빌려 자게 해준다는 말인줄 알았지 이런식으로 원룸 하나를 대여해준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꽤 제대로 된 집인데다 심지어는 훈연이 혼자 사는 집보다 넓었다. 장식품 없이 침대와 테이블, 의자, 서랍장 정도만 있는 원룸은 구석에 드레스룸과 욕실이 있었고 새 집으로 보였다. 훈연은 그제야 단촐한 여행가방을 본 근언이 얼굴을 구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훈연은 낯선 천장을 봤다. 장저우로 간다는 얘기를 했을 때, 서장은 약간 불안한듯 전화기 너머로 침묵했다. 거기까지 가서 뭐하게? 훈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괜찮을거라고 말했다. 실적을 쌓게 도와주려는 모양이더라구요. 잡아도 될 것 같아요. 경찰이 된 다음부터는 항상 통시관할에서 있었던 터라 약간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서장은 이내 잘 갔다오라는 말을 했다. 통화는 간단하게 끊겼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같은건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능력이 아까워서 채용했다는건 생각했던 것 보다 특출나지 않으면 바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였다. 막상 잡은 기회를 그냥 날려먹기는 싫었다. 어차피 범죄자를 잡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야하기도 했고.


그러나 여전히 팔이 걸렸다. 다친건 왼손이니 글은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저번에 농담한 것 처럼 총을 쏘지는 못할 것이다. 훈연은 붕대를 만지작 거리다가 병원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옮기느라 다니던 병원에 연락도 하지 못했으니 그것도 해야했고. 비행은 피곤했다. 훈연은 공연히 붕대를 만지작대다가 가방을 열어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너무 졸렸고, 잠이 필요했다. 불을 끄자 낯선 풍경이 어느정도 지워졌고, 훈연은 눈을 감았다. 일어나면 호텔을 알아볼 생각으로.


"짐은 사람 시켰어요. 곧 올겁니다."


훈연은 엘레베이터 앞에서 기묘하게 얼굴을 구긴채 근언을 봤다. 네? 하루 종일 케이스 안에 있었던 터라 접힌 자국이 있는 회색 맨투맨이 근언의 쪽을 향해 돌았다. 무슨 짐이요? 답 정도는 예상을 하고 물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언이 '당신 짐'이라고 말했을 때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선생님.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다. 근언이 먼저 들어가서는 안올거냐는듯 눈썹을 휘어올렸다. 일단 들어가자 1층의 버튼이 눌렸고, 엘레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빈공간을 채웠다. 훈연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근언이 빨랐다. 적게 잡아도 3개월은 장저우에 있을겁니다. 호텔이나 숙박업체를 빌리는건 낭비에요.


"하지만-"

"제 소유 플랫이고 가까이 있어야 원하는 때에 불러낼 수 있으니 내준겁니다. 조수역할을 하는 동안 지급되는 돈에서 세를 뺄테니 불편해도 3개월 동안 참아요."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야 뭐. 긍정의 침묵에 근언이 자켓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넨다. 근처 병원이에요. 의사 하나를 아니까 이름을 대면 안내해 줄겁니다. 다친 팔 쪽에 서있던 탓에 훈연이 몸을 틀어 명함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정직하게 나오는 인사에 근언이 눈을 내려깔자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근언이 먼저 발을 뻗었고, 명함을 살피던 훈연이 뒤늦게 종종걸음을 쳤다. 서로 가는겁니까? 주차장으로 갈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근언은 길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이상하다는 눈으로 훈연을 쳐다봤다. 밥 먹어야죠.


"어......"

"일은 오후에 시작 할 겁니다. 저는 괜찮지만 훈연씨는 굶은채로 돌아다닐 타입도 아니고,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테니 일단 식당으로 갈거에요. 그 후에 근처를 둘러보는건 훈연씨 혼자 하도록 하고."


또 할 말이 없어진 훈연이 습관처럼 머리를 긁었다. 감사합니다. 식당은 이미 정해둔 듯 근언의 발은 막힘이 없었다. 이런식으로 배려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상의 없이 집에 밀어넣고 사람들에게 짐까지 꾸리게 시킨 것에 대한 사과일지도 몰랐다. 그 이후로는 딱히 대화랄게 없었고, 근언은 너무 고급스럽지 않은 브런치 까페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메뉴판을 보고 대충 커피와 식사메뉴 한가지를 골라 주문한 훈연은 앉자마자 파일을 꺼내드는 근언의 눈치를 봤다. 끌고와놓고는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아마 정말 안내가 목적인 모양이었다. 입맛이 없으신가봐요. 예의상 돌려물은 질문에는 엉뚱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에는 생선메뉴가 없어서요.


"생선 아니면 안드세요?"

"대부분은."


훈연의 눈이 굴러간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향 불균형 같은걸 초래하지 않나. 어쨌든 훈연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화제는 사건으로 넘어갔다. 저번의 그 납치범에 관한 파일이었고, 훈연은 계속 궁금했던 것 부터 입에 올렸다. 피해자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근언의 시선이 들렸다가 다시 종이에 박힌다.


"네."

"경찰은 단순 납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요."

"추정되는 피해자만 4명이에요. 요구가 없으니 죽였을겁니다."

"시장에 팔았거나 다른 용도로 납치했을 가능성은..."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니 고려해봐야죠. 서쪽에서는 수사도 그런쪽으로 잡고 있고. 하지만 전 죽였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시체가 나왔어요."


근언이 파일을 접었다. 돌아가면 자료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동시에 음식이 나왔다. 약간 몸을 비켜서 플레이트를 쉽게 하게 도와주는데 근언이 대뜸 음식과 식기를 가져간다. 드시게요? 당황해서 한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는 대답이 없었고, 얼마 안가 계란이 먹기 좋게 잘려 훈연의 앞으로 돌아왔다. 훈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먹지도 않을건데 굳이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나온 셈이다.


"한 손으로도 자를 수 있는데요."

"이게 더 편하니까. 검토는 나와서도 할 수 있고."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알아요. 내 마음대로 한거니까 고마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도 안마주치고 딱딱하게 뱉는 말이란. 훈연은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포크로 계란을 찍었다. 서에 가기 전에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근언은 파일을 넘겼다. 훈연씨가 주변 탐방을 끝내면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주고 바로 갈겁니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훈연이 최대한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탐방은 내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바로 돌아가죠.





*




"피해자들의 프로파일입니다. 자세한건 아까 드린 서면에 나와있어요. 지도에 표시 된 건 각각의 피해자들이 납치당한 장소 및 피해자들이 거주했던 곳이고."


종이를 넘기던 훈연이 화이트 보드에 써진 글자들로 눈을 돌렸다. 깔끔하게 정리 된 글자들은 납치 된 순서대로 피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 특징 등이 써져 있었고, 지도에는 지역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근언의 플랫은 훈연의 것보다 컸지만 장식품이 없다는건 똑같았다. 다만 온 벽면이 사건에 관련된 것들로 도배되어 있었고, 덕분에 훈연은 생각없이 들어왔다가 걸음을 잠깐 물렸었다.


"나왔다는 시체는 첫번째 피해자의 것인가요?"

"제가 추정하기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이중에는 없어요."


근언은 근처 책상에서 사진이 붙은 종이를 들어 건넸다. 흙에 반쯤 매장되어 있는 여성의 시체는 머리카락이 귀 위쪽까지 엉망으로 잘린채였고, 얼굴과 발목에 큰 자상이 나있었다. 사인은 질식사고 일주일 전에 발견된 시체라는 말에 훈연이 미간을 좁혔다. 가해자가 같다고 단정 지으시는 이유라도. 근언은 칠판에 다른 색 펜으로 훈연에게 건넨 피해자의 프로파일과 거주지, 매립 장소를 표시하고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맞춰봐요.


훈연은 자연스레 일어나 칠판에 가까이 다가갔다. 피해자들의 납치 추정 장소는 각각의 거주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시체의 매립 장소는 거주지와 한참 떨어져 있었다. 시체의 사망 추정 날짜는 4달 전이다. 단순히 시기 때문에 끼워맞추기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애초에 피해자끼리도 한눈에 보이는 공통점은 없다. 한참을 쳐다만 보던 훈연이 마카를 들어 입으로 뚜껑을 열고 몇 번 돌린다. 3초 정도 고민하고는 피해자들의 사진에 펜 끝을 갖다대자 근언이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관찰력이 있네요."


훈연은 근언의 말에 뺨을 긁었다. 피해자들의 얼굴형을 따라그리자 얼추 6명과 시체의 것까지 비슷한 모양이 나왔다. 대부분 머리카락 때문에 일부러 가려져서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시체의 머리카락이 잘려있지 않았다면 신경 쓸만한 공통점도 아니었고. 하지만 겨우 얼굴형을 공통점으로 잡기에는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데요. 근언이 다시 일어나 훈연의 손에서 시체의 사진을 가져가 피해자들의 사진 옆에 붙였다. 가장 큰 공통점은 맞췄어요. 물론 그것 한가지만은 아니죠.


"호연기를 포함한 5명 모두 광둥어(상하이, 홍콩 쪽 사투리)를 쓸 줄 알고, 모두 흑발에, 화장할 때 라인을 길게 빼고, 비슷한 악세서리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뒤의 두개는 너무 밋밋한 공통점에 수사할 때 쓰는 사진에서는 알기 힘드니 크게 신경쓰지 않고 광둥어 사용여부는 피해자 대부분이 보통화로 고쳐말하긴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죠. 아마 가해자가 광둥어를 쓸겁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들의 거주지를 알고 근처에서 납치했습니다. 첫번째 피해자로 추청하는 호연기도 아마 거주지 근처에서 납치 당했을거고, 매립지는 호연기의 거주지와 가깝지는 않지만 경찰이 파악한 첫번째 피해자인 사헌의 거주지 근처에 있는 유일한 산이죠."

"시체를 매립한 다음 다른 피해자를 찾는걸까요?"

"그렇게 보는게 맞을겁니다. 시기도 비슷하고."

"납치한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있지는 않을테니까요. 동선 상 계속 거주지를 옮기고 있으니 데리고 다니면 눈에 띄었을테고. 피해자들의 거주지 근처에 매립 할 만한 곳을 수색하면 시체를 찾을지도 모르겠군요."


근언이 훈연의 손에서 마카를 빼와 뚜껑을 닫았다. 브리핑은 맡겨도 되겠네요. 시곗바늘은 막 정오를 지나고 있었고, 근언은 빠르게 파일을 정리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한 손으로 하는 것 보다 보고있는게 빠를테니 훈연은 공연히 칠판을 한 번 더 쳐다봤다. 호연기에 대한건 어떻게 찾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에는 신문에서,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어제 근언이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신문을 기억해 낸 훈연이 감탄사를 냈다. 일주일 전 신문이었나. 물론 서에 연락해 추가자료를 받아내기는 했을테지만, 신문에서 보고 사건을 끼워맞췄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니 무심한 얼굴이 입을 움직였다.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범인이 왜 살인을 하고 다니는지는 알겠습니까?"

"아뇨. 심리학은 전공이 아니니까요. 증오살인의 연장선 같기는 합니다만."


음. 잠자코 침음을 낸 근언이 그정도면 됐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주시면 기쁘게 배우겠습니다. 건실한 답변에 픽 웃어버린 근언이 자켓을 들어 펼쳤다. 훈연이 기꺼이 등을 돌린다. 다가가 소매에 팔을 넣게 도와주며 근언이 낮은 소리를 냈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운전은 제가 하죠. 길을 알아서."


거리 탓인지 목덜미에 닿았던 숨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목을 감쌌던 손을 어색하게 내린 훈연이 서둘러 휴대폰과 지갑을 챙긴다.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를 쫓아 현관으로 나가며 고개가 빠르게 저어졌다. 확 올라갔던 심박수가 천천히 가라앉았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졌다. 정갈하게 벗어놨던 신발에 발을 끼워넣는다.


일부러, 일리는 없겠지. 아직 한기가 남아있는 목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훈연이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벌써 엘레베이터 앞에 서있는 근언은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오히려 편안해진 느낌에 훈연의 입에 미소가 얹어졌다. 복잡하게 생각할래도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숨결 한 번에 엉망으로 꼬였던 회로를 한 번에 풀어내며 복도로 발을 뻗는다. 오늘만 같다면, 생각보다 조수 일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낙관적인 생각으로 꼬리를 잘라낸 훈연이 약간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를 냈다.








*







훈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에는 어지럽게 종이들과 실들이 테이프 따위로 붙어 있었고, 너무 난잡해서 도저히 어떤 순서로 읽어야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훈연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기태연은 아직 살아있을까요? 의자에 앉아있던 근언도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아닐겁니다.


브리핑은 잘 끝났다. 장저우서의 관계자들도 근언이 내놓은 호연기와 납치사태의 연관성을 인정했고, 수색에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 보통이라면 훈연이 수색장소에 나가있겠지만 근언이 돌아왔기 때문에 훈연도 돌아왔다. 어차피 이런 팔로는 현장에 나갔어도 구경 하는 것 밖에 못했을 것이다.


훈연은 집으로-이제는 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돌아가거나 아침에 못했던 주변 탐방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엘레베이터에 올라와서도 층을 누르지 않고 약간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근언은 제 층을 누른 후 훈연을 한 번 쳐다봤을 뿐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엘레베이터는 그냥 올라갔고, 숫자를 보다가 제가 내릴 층을 지나쳤다는걸 알았을 때서야 훈연이 불쑥 말을 꺼냈다. 파일을 더 살펴봐도 될까요?


그리고 나서 3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사건파일을 다시 살펴보는건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수색은 들어갔고, 시체를 찾기 전에는 근언과 훈연이 딱히 할만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근언은 오늘 브리핑에서 말한 것 보다 범인에 대해 더 추측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확실할 때까지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만.


여분의 의자가 없어서 억지로 침대에 앉혀졌을 때만 해도 왜 들어오려고 했는지 자책했건만 사건파일이 아니라 책을 집으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근언은 기꺼이 책장에 있는 범죄심리학 책을 훈연이 읽도록 허락했고, 대화 한 마디 없는 집에는 편안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불편해서 30분 안에 나갈거라고 생각했는데 3시간이나 지난걸 보면 확실히 잘못 생각했다.


근언은 몇 번 차를 끓이기 위해 커피포트가 있는 부엌과 의자를 서성댔지만 훈연에게 차를 권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책을 빨리 읽는 편인 훈연은 마지막 챕터를 남겨두고는 허리가 아파져 뒤로 누웠다. 남의 침대에서 하는 것 치고는 무례한 행동이라는건 알았지만 근언이 신경쓰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언급했던 기태연은 경찰이 파악한 마지막 피해자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고, 잡지 않는다면 다음 피해자가 나올 것이다.


"선생님."


대답이 없었다. 근언은 아까부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으로 계속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훈연은 3주동안 근언과 일한 경력이 있었고, 대답하거나 쳐다보지 않아도 그가 듣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한 팔을 고정시킨 채로 돌아다니다 보면 모든 일상이 배로 피곤해진다. 팔을 쓰지 않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앉아있기만 해도 기운이 빠졌고, 석고에서 올라오는 무기력함을 떨쳐내기가 어려워진다. 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일어났을 때, 훈연은 입 안쪽의 살을 씹고 또 씹었다. 너무 어리석었다. 연결된 링거로 무능력함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린나이에 팀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라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가 운이 따라줬다고 어깨를 두드렸다. 훈연은 웃었고, 그게 바른줄로만 알았다. 운이 좋았다고. 그리고 팔의 깁스는 그것의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주제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은 떠도는 헛소문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거라면. 강등 당하는게 당연한 일이라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면. 강박감은 훈연을 억지로 일으켰고, 서로 이끌었다. 가봤자 할만한 일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눈도장을 찍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팔이 부러진 것은 무능력함의 반증이 될 수 없었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체감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이게 그동안 운이 좋았던 대가라고,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겸손하다고 생각하세요?"


근언은 여전히 논문에 눈을 박고 있었다. 훈연은 엉망인 천장을 쳐다봤다. 누웠을 때 까지 생각하려고 붙여놓은 것들이었다. 기태연은, 근언의 말마따나 이미 죽었을 것이다. 피해자를 납치하는 주기는 한달에 가까웠지만 피해자를 물색하는 기간도 포함한다면 기태연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미 매장 당했거나, 죽지 않았더라도 범인이 임시로 머무는 거처에 감금 당해 두려움에 떨고 있겠지. 수사가 더디게 진행된다면 또 피해자가 생긴다. 훈연이 맡았던 사건처럼.


"아뇨."


근언의 대답에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논문을 넘기는듯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훈연은 근언이 제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 운이 따라줘서 팀장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원래는 이런 큰 사건을 맡을 재목이 아닌거라면, 훈연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살처분을 기다리며 통시에 있는 집에 있어야겠지.


장저우로 짐을 옮길 때 까지는 현실감이 없었지만, 막상 서에 가서 브리핑을 하고 보니 찬물을 맞은 느낌이었다. 제가 방해가 되어서 수사가 느려지는건 안될 일이었고, 훈연은, 불안해졌다. 전까지는 조수역도 생각보다 잘 해낼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거품이었던 듯 자신감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상황과 추론을 말하던 근언과 자신들 나름대로 그것을 분석하던 경찰들. 얼마전까지는 훈연도 그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한 발자국 바깥에 있을 뿐이다. 원래라면 그것을 보고 있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렇게 있게 될 것만 같아서 팔이 아렸다. 그게 당연한거라고, 글자가 발끝에서부터 기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훈연은 강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살면서 이렇게까지 무너져 본 적은 없었으니까.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고, 정확히는 물어봐야만 했다. 제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답을.


"전 훈연씨가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다는건 예의상 돌려말한 표현이었고."


단호한 말이 흘러나온다. 얼마간 침묵하던 훈연의 입에서 곧 웃음이 터져나왔다. 돌려말하는 법을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조롱처럼 들릴 수 있는 말에 근언은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가끔은 하죠. 설득해야할 때는 더더욱.


"선생님 같은 사람이 설득도 하나요?"

"심리학자가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숨을 깊게 내쉰 훈연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근언은 괜찮다는 듯 콧소리를 내보였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통의 저택에서 했던 말만으로도 확신을 가졌어야 했는데. 이건 신뢰의 문제였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은 무례한 행동이다. 근언이 직접 지정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근언의 안목을 믿는다면 그것에도 의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훈연은, 다른건 몰라도 근언의 눈이나 실력은 믿을 수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린 훈연이 아예 발을 땅에 디뎠다. 책은 하루만 빌려갈게요. 널브러진 자켓을 챙기려니 근언의 시선이 들렸다. 내려갈겁니까? 훈연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근언이 따라서 일어났다. 정말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하자 근언이 종이를 정리했다. 사러 나갈게 있어서. 훈연은 잠자코 근언이 지갑을 챙기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습니다만."


근언이 힐끔 곁눈질을 했다. 아까와 비슷한 질문이라면 대답은 생략하겠습니다. 저를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몸을 눈으로만 따라가던 훈연이 어깨를 으쓱인다.


"왜 접니까?"


대답 대신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훈연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능력을 높게 봐주신건 알겠어요. 열리던 현관문이 멈췄고, 근언이 뒤를 돌아봤다. 몇 걸음 거리를 두고 눈이 마주친다. 반뼘이 안되게 높은 훈연의 시선이 곧았다. 다른 이유는 없나요?


볕에서 보면 연했을 눈은 문 뒤로 펼쳐진 불빛 그림자에 가려 진하게 보였다. 보통 사람보다 크게 트여있는 눈은 어떤걸 바라고 있었고, 근언은, 심지어는 훈연도 무슨 답을 바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저택에서 만났던 날, 나가기 직전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하필이면 왜 나를. 근언의 영향력이라면 굳이 조수로 부르지 않았어도 입김 정도는 넣을 수 있을터였다. 막 경찰학교를 졸업 한 듯한 바르고 곧은 자세를 얼마간 쳐다보던 근언이 먼저 몸을 돌렸다.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좋았거든요. 같이 일하는거. 거의 중얼거리듯이 나온 말을 끝으로 근언이 발을 옮겼다.





*




시체가 나왔다.


근언과 훈연의 추측대로였다. 두번째 피해자인 사헌의 시체가 세번째 피해자인 정하옌의 거주지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틀만에 이뤄낸 일이었고, 서에서는 곧장 다른 피해자들의 거주지 근처에도 경찰견들을 풀었다. 시체를 숨길만한 장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게 유일한 희망점이다. 훈연은 연락을 받자마자 근언의 플랫으로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서 연속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안가 근언이 문을 열었다. 막 말을 시작하려던 훈연이 뒤로 보이는 상차림에 뺨을 긁었다.


"식사 중이셨나보네요."

"시체가 나왔습니까?"

"네. 부검 하기 전에 먼저 봐도 괜찮다고 해서 가겠다고 했습니다. 식사는 하고 가도......"

"아뇨. 그냥 가죠.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바로 들어가 외투와 차키만 챙겨 나온 근언이 훈연의 옆을 지나치며 뭔가를 던졌다. 한 팔로 아슬아슬하게 잡아채자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손 안에 들어온 열쇠를 멀뚱히 바라보는데 근언이 엘레베이터를 안탈거냐며 재촉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어떻게든 발을 미끄러뜨린 훈연이 열쇠를 들어보였다. 이건 왜...


"귀찮으니까요. 호출할 일이 있으면 그냥 들어오세요.

"그래도 되는겁니까?"

"도둑질 할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되도록이면 훈연씨 열쇠도 줬으면 하는데."


뻔뻔하게 절 쳐다보는 눈을 어이가 없다는듯 보던 훈연이 약간 고민하다가 주머니를 뒤졌다. 차키와 함께 걸려있는 열쇠를 건네자 근언이 정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됐어요.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으로 알겠습니다.


이후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훈연의 황당한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근언의 무심한 말들에 번번히 막히고 말았다. 훈연이 따지면 그게 뭐가 이상한 일이냐고 답하는 식이었다. 차에 탈 쯤이 되어서는 훈연도 결국 이마를 짚고 말싸움 하기를 포기했는데, 며칠 까먹고 있었지만, 보근언이라는 사람은 원채가 남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건을 맡았던 때도 무슨 저런 사람이 다있냐고 수근대는 팀원들을 어르는게 범인 검거보다 더 힘들었을 정도다. 그 과정에서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서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사헌의 시체는 호연기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잘린채 얼굴과 발목에 자상이 나있었다. 사인도 질식사로 같았다. 이미 부패가 시작한터라 방부처리는 먼저 했다는 부검의의 말에 근언이 라텍스 장갑을 꼈다. 


잘린 머리카락 아래로 목을 조른 자국이 선명했고, 얼굴과 발목의 자상 모두 생전에 생긴 것들이었다. 어느새 근언의 옆에 서서 같이 살펴보던 훈연이 한 손에 장갑을 끼고 차가운 살을 만졌다. 실종당시보다 급격하게 살이 빠져있다. 훈연은 호연기의 몸도 비슷하게 말라있던 것을 기억했다. 머리카락이 잘린 것 말고도 군데군데 거의 뜯겨져 나간 듯이 두피가 드러나 있었고, 옷은 실종 당시에 입었던 차림과 똑같았지만 마치 일부러 낡게 만든듯한 느낌을 주었다. 콘크리트에 비볐거나 얼룩을 묻히는 식으로.


"일부러 이렇게 입힌걸까요?"


근언은 고개를 끄덕였고, 조심스럽게 사헌의 입을 벌렸다. 핀셋으로 점막에 남아있는 이상한 조각을 꺼내 살펴보자 훈연이 다가갔다. 그건... 눈이 좁아진다. 스티로폼 조각으로 보였다. 재갈 대신으로 물린 모양이다.


"호연기의 경우에는 낡은 헝겊으로 틀어막았었어요. 아마 그 때 그 때 쓸 수 있는걸 쓰는 모양입니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납치하는게 아니라는 말이군요."

"고문이 목적이 아닐테니까요. 충분히 살이 빠지기 전까지만 묶어놨다가 바로 죽인걸겁니다."

"일부러 체중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을테니까. 다른 시체들도 비슷한 패턴일거에요."


가져왔던 파일에서 호연기의 사진을 들어 비교해주고 도로 집어 넣은 근언이 옆에 있던 담당결찰에게로 몸을 틀었다. 1년에서 반 년 전까지 자살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메일이나 펙스로 충분할겁니다.


담당경찰은 거의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의 시체를 찾은 다음부터는 신뢰도가 현저히 올라간 모양이었다. 돌아가죠. 미련없이 장갑을 벗어버리는 것에 훈연이 눈을 깜박였다. 벌써요? 필요한건 다 얻었다는 말에 훈연이 시체와 근언을 번갈아봤다. 거의 10분도 살펴보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따라서 장갑을 벗은 훈연이 이미 저만치 멀어져있는 근언에게 붙었다. 


"자살한 사람들의 명단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범인이 살인을 하는건 죄책감과 관련이 있어요. 호연기를 죽이기 전에 가까운, 이를테면 딸이나 아내가 자살했을겁니다."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살인을 하고 다닌다는건가요?"


앞뒤가 안맞게 들리는 문장에 훈연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듯 휴대폰에 시선을 박은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근언이 부정의 답을 냈다. 아뇨. 한 텀을 두고 그린듯한 눈동자가 훈연에게로 올라간다.


"죽여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죠. "








*







"-이상으로 현재 장저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납치 및 감금, 살해와 시체유기가 의심되는 사건에 대한 요약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장저우 서에서 열린 브리핑에는 사건의 관련자들이 의자에 늘어서 앉아있었다. 환풍구가 돌아가는 소리, 바깥의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가는 소리를 제외하면 종이가 부스럭대는 소리 조차 없었다. 훈연은 리모컨으로 슬라이드를 넘겼다. 피해자인 호연기와 사헌, 바로 2시간 전에 발견 된 세번째 피해자인 정하옌의 생전 모습과 시체의 사진이 화면에 들어찼다. 충분히 텀을 두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긴다. 피해자에 속하지 않는 여자의 사진과 프로파일의 요약이 나왔고, 포인터로 여자를 가리킨 훈연이 마저 말을 이었다.


"서진. 약 반 년 전에 자택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 여성으로, 부모는 어렸을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하나뿐인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회의실이 잠시 술렁였다.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피해자라고 생각 하시는겁니까? 사건을 전면으로 맡았던 팀장이 발언했다. 훈연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목을 매었고, 동기도 충분하다. 밧줄을 다른 사람이 매었거나 외부의 압박이 있었다면 흔적이 있어야했다. 현장에서 찍힌 사진 중 그런건 발견 되지 않았고, 의심할 것 없는 진짜 자살이었다. 훈연의 설명에 경찰들이 자료를 넘겼다. 찍힌 현장 사진과 신고 내용, 순경이 작성한 보고서등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 여성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까? 질문에 훈연이 마저 슬라이드를 넘겼다. 서진과 어딘가 닮은 듯한 남성의 사진이 나타난다. 서춘오. 서진의 오빠. 경찰들이 다시 자료를 넘긴다.


"현상황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용의자라고 봅니다."


다시 회의실이 어수선해졌다. 요약은 서면으로 나와있습니다만, 시각자료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죠. 슬라이드가 넘어간다. 아까 잠깐 나왔던 피해자들의 사진이 비교하기 쉽게 일렬로 늘어섰다. 억지로 짧게 잘린 머리와 비슷한 얼굴형, 얼굴과 발목의 자상, 빠진 체중, 감금 당했던 흔적들을 포인터로 가리켜 설명한 훈연이 다시 서진의 슬라이드로 화면을 되돌렸다.


"서진의 자살 동기는 가난이었습니다. 서춘오에게는 도박빚이 있었고, 서진은 식당에서 일하다가 자살하기 3개월 전에 사고로 발목을 다쳐 쫓겨났죠. 인근 주민들이 사채업자의 독촉으로 신고를 넣은 적이 몇 번 있었구요. 비교했으니 아시겠지만, 피해자들이 살해당하기 전의 체중과 서진의 자살 당시 체중이 비슷한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상의 서진의 머리는 단발로 보이지만 돈이 궁해지면 자주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고 하더군요."


전 세기 만큼 값을 비싸게 쳐주지는 않지만 머리카락은 여전히 돈이 되는 물건이다. 훈연은 더해서 서진이 자살하기 전날 밤 인근주민들이 서진과 서춘오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과, 서진이 항상 오빠가 자신을 죽여야한다고 울분을 토했다는 증언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죽고 싶은 것은 오빠 때문이니 오빠가 자신을 죽여야한다고, 술을 먹고나면 반드시 그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이웃들의 입에서 나왔다. 서진과 서춘오가 살았던 곳은 빈민촌에 가까운 곳이었고, 방음은 전혀 되지 않았다.


"서춘오에 대한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약쟁이. 실제로 약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군요. 약을 하지 못한 정키처럼 시종일관 불안해 했고, 이유없이 자주 울고, 부모님의 환청에 대해 큰소리로 떠들며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알코올 의존증에 정신병력이 있었던걸 확인 했습니다. 서춘오는 서진의 장례식에서 두 달이 흐른 후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주민들은 상하이로 돌아갔을거라고 생각하더군요. 빚을 청산하면 돌아간다고 허세를 부렸다고. 빚은 서진의 사망보험금으로 갚은걸로 보입니다. 다음은 서진과 서춘오의 원래 거주지와 첫번째 피해자인 호연기의 거주지 위치입니다."


바로 윗동네였다. 사라졌다는 시기도 호연기의 사망시기와 얼추 일치한다. 처음에 말했던 제물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아까보다 진중해진 목소리에 훈연이 다시 시체들의 사진을 띄웠다.


"용의자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을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환청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으니 서진이 자살을 하고 나서도 환청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구요. 항상 말했던 자신을 죽여줘야 한다던 목소리가 맴돌았을테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을 납치해 서진처럼 만들어 질식사 시켰을겁니다. 꼭 닮을 필요는 없고, 머리카락을 잘랐을 때 얼굴형이 비슷하고 체중 정도만 맞춘다면 서진이라고 상상해 죽일 수 있었겠죠. 옷을 일부러 낡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서진이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동안은 한 번도 좋은 옷을 입어본 적이 없을테니까요."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눈에 보이는 공통점도 없었고, 겹치는 지역 없이 산발적으로 피해자가 나오는데다 시체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근언이 사헌의 시체가 나올 때 까지 추론을 하길 꺼려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훈연은 더해서 서진과 서춘오가 상하이 출신에 부모님이 광둥어를 썼으며, 서진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광둥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는 증언을 추가로 제시했다. 피해자들은 모두 광둥어를 쓸 줄 알았으니 이것도 공통점에 들어갔다. 경찰들이 노트북이나 서면에 글자들을 쓰는 동안 훈연이 화면을 껐다.


"이상이 선생님이 서춘오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이유입니다. 계속 거주지를 옮기고 있으니 한 번에 검거하기는 어렵겠지만, 지명수배를 내리고 장저우에서 머리카락을 사들이는 업자들을 조사해 본다면 행적을 추적할 수 있을겁니다. 피해자들을 서진이라고 생각했을테니 아마 생전에 했던대로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을 팔았을거에요. 흔하게 사고파는 종류는 아니니 금방 나올겁니다."


이만 마치죠.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에 관계자들이 하나 둘 씩 자리를 정리했다. 훈연이 프로젝터를 끄고 노트북을 정리하는 동안 앉아있던 근언이 일어섰다. 다가오는 몸에 살짝 시선을 올렸던 훈연이 전원이 꺼진 노트북을 닫았다.


"잘하네요."

"수십번은 했던 거니까요. 맡겨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사실이긴 했다. 훈연은 경찰이었고, 사건에 대한 브리핑은 언제나 하는거니까. 근언이 브리핑을 대신 해달라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도 못할까봐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 8할은 근언의 추론이었는데 공을 가로채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당연히 근언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떠넘기는 것이니 해주는게 고마운거라고 훈연을 설득했다.


근언의 의도를 모르는건 아니었다. 수사에 참여 해 실적을 남겨준다고는 했지만 근언은 혼자 생각하는 타입이다. 조언을 구하거나 남의 추론을 듣기보다는 탐문수사나 자료를 찾는 것 같은 일을 시키고는 했고, 실제로 얼마나 고생을 했던 그건 남들이 알아주기는 힘든 공적이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들 앞에서 직접 브리핑을 한다면 좀 더 역할이 부각된다. 훈연이 괜히 뺨을 긁었다.


"잡히면 사형일까요?"

"범인이라면 그렇겠죠."


이제는 거의 익숙하게 근언을 따라 걸으며 훈연이 침음을 냈다. 아무리 그럴듯 해도 추론은 추론이다. 시체에서 서춘오의 DNA가 나온 것도 아니었고,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끝까지 발뺌하면 잡아넣을 방법도 없었다. 서춘오가 죽인게 맞다면 자백할겁니다.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근언이 얘기했다. 제 여동생이 자꾸 나타난다고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할테니까요. 


자연스럽게 조수석을 열어주는 손에도 이젠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손이라고 문을 못여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움이 안되는건 아니다. 깁스를 한 채로 차 문을 급하게 열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진 경험이 있는 훈연으로서는 묵묵히 배려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안으로 긴 몸을 구겨넣으며 훈연이 밖으로 얼굴을 뺐다.


"죄송하지만 중간에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갈 곳이 있어서......"


근언의 눈썹이 휘었다. 병원입니까? 훈연의 고개가 저어진다. 병원은 좀 더 나중에 갈 예정이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인데, 간요라고.


간요가 장저우에서 살며 회사에 다닌다는건 알았지만,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는 여유가 없었다. 연락은 자주 주고받았으나 훈연은 장저우로 옮기자마자 사건에 집중해야했고, 간요도 신입사원이다보니 쉽게 시간이 나지 않는 탓이었다. 이젠 서춘오의 이웃들에게 탐문수사를 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 훈연에게 여유가 났다. 문자로 알리니 점심에는 시간이 난다고 해서 약속을 잡은 것이다. 간요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생각보다 빌라와 가까웠고, 근처에 있는 까페로 장소를 정했다.


근언은 잠깐동안 말이 없었다. 훈연은 눈을 깜박였다가 위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내일 시간 있으세요? 불쑥 나온 질문에 근언의 옆에 느낌표가 떴다. 그럴의도가 아니었음에도 훈연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렸다. 바빠서 아직도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나갔다가 길을 잃을까봐 조금 그래서, 귀찮지 않으시면 같이 둘러보고 싶은데.


"...그러죠."


그리고는 조수석의 문이 닫혔다. 운전석으로 들어오는 근언을 의식하며 훈연이 고개를 창문쪽으로 돌렸다. 턱을 괴는 척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으니 시동이 걸렸고, 앤디에게 불이 들어왔다. 재밌는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인공지능은 웃음참기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훈연은 근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무시하기로 했다.





*




오랜만에 보는 간요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일이 잘 맞나봐. 가볍게 웃는 것으로 답한 소꿉친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깁스부터 훑었다. 완치까지는 얼마나 걸린데? 훈연은 팔을 들어보이며 4개월쯤 남았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무리 안하고 가만히 놔뒀을 때의 이야기다. 당분간 총을 들거나 석고를 방패막이로 써야할 일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훈연은 굳이 그런 사족까지는 달지 않았다.


간요도 훈연의 팔이 어떻게 된건지는 알고 있었다. 장저우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부득불 병문안을 와야겠다며 며칠을 있다 가기도 했다. 경찰인 아버지를 살인범에게 잃었던 간요는 훈연이 경찰이 됐을 때부터 걱정을 떨어뜨려놓지를 못했다. 훈연은 경찰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의실현에 목표를 두고 있으니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말리지는 못했지만, 걱정을 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간훤도 같은 핏줄이라, 훈연의 애원을 무시하고 쪼르르 가서 고해다 바쳐버렸다. 장저우에 오게 됐다고 했었을 때도 가장 먼저 팔에 대한걸 물었었으니 할 말 다한 셈이었다.


"조수 노릇은 어때?"


주문했던 커피와 차가 나왔다. 프랜차이즈 로고가 아닌 새 그림이 그려져있는 머그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데일만치 뜨거운 물을 익숙하게 넘기며 훈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보다 할 만 해. 간요가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가 곧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거뒀다. 놀랍게도, 훈연의 말은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사실 신참 때 했던 허드렛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탐문수사나 브리핑은 언제나 하는 일이고, 가끔 허락없이 들어와 자는 몸을 흔들어 깨우는 근본없는 무례함을 빼면 근언도 횡포를 부리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물론 경찰학교를 졸업한 훈연의 기준이었다.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간요도 회사생활에 '할 만 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예전부터 하고싶어했던 일이었고, 상사도 고소까지 고려하지는 않을 수준에서 깐깐했다. 지갑에 네가 제복입고 있는 사진 넣고 다녔더니 희롱도 잘 안하더라. 웃으며 하는 말에 훈연이 응당 그래야할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 나왔던 날에 훈연이 바로 쥐어주며 내린 처방이다. 심지어는 간요네 집 현관에도 액자로 걸려있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더니 효과가 있는지 대학생활을 하면서 부터 잘만 갖고 다녔다. 간훤의 지갑에도 마찬가지였고, 간훤의 경우에는 남자친구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는 이야기에 훈연이 크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그 보근언이란 사람 말이야."


화제가 넘어갔다. 훈연은 뒷말을 기다리며 마저 커피를 마셨다. 어쨌든 요즘 훈연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근언이 다였으니 간요가 화제를 끌고 오고 싶을 만 하다. 간훤이 난리를 폈어. 그 유령 저택에 있던 사람이냐고 말이야.


"유령 저택?"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저택이라면 통시에 있는 곳을 말하는건가. 간요는 우스갯소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해봐. 커피를 치우며 몸을 기울이는 작태에 부담스럽다는듯 자세를 물린 간요가 눈을 굴렸다. 알잖아, 간훤이 그런 이야기 워낙 좋아하는거. 무섭다면서 호러영화를 보고 밤에 보초를 서게 부탁했던 어린 얼굴이 눈에 선해서 훈연이 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합하자면 이랬다. 간훤의 친구가-진짜 그런 친구가 있는지는 둘째치고-근언이 살았던 저택 근처에 간적이 있었는데, 커튼 너머로 눈이 푹 패인 해골 같은 사람이 밖을 내려다보고 있더라는 얘기다. 분명 귀신일거라고 소문이 나 그 저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결말에 훈연이 눈살을 구겼다. 눈이 푹 패인 해골 치고는 잘생겼던데. 사심없이 한 말에 간요가 그러게 말이야,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보 선생님 본 적은 있어?"


대충 나온 말이겠거니 싶어 웃었는데 간요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뭘 그런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입원했을 때 만났지. 주말 하나를 거기서 보냈던거 기억 안나?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훈연의 눈이 당황으로 커졌다. 입원했을 때? 이번엔 간요가 왜그러냐는듯 고개를 기울인다.


"한 번 마주쳤었어. 자고 있을 때라 너는 기억이 안나나."

"그사람이 왔었다고? 병실에?"


이제는 간요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냥... 네가 도와줬으니까. 아니야? 본인에게 그렇게 들었다는 말에 훈연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훈연은 병실에서 근언을 본 적이 없었다. 왔다갔다는 소리도 한 번도 못들었다. 간요는 그제서야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아랫입술을 먹었다. 훈연이 안색을 살피는 간요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좀 놀라서 그래. 간요는 나중에 온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훈연에게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훈연의 동료에게 팔을 어떻게 다쳤는지 들으며 근언에 대한 것도 들었던 간요로서는 방문이 수상쩍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말대로 나중에 찾아간줄 알아서 얘기를 꺼낸것이었는데.


"그럼 몰래 갔던거야?"

"그게... 그 날 찾아왔다가 못보고 그냥 그만 둔 걸수도 있고.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라..."


말끝을 흐린 훈연의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예를 들면, 통시의 저택에서 다친 팔에 대한 호의나 동정 때문에 조수로 고른게 아니라고 했던 것. 아니면 훈연에게 멍청하다고 했던 것.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날 문을 나서기 전에 했던 말. 그리고 오늘 차에 타기 전에 있었던 일.


훈연은 머리를 털었다. 이런걸 추측으로 끼워맞춘다는건 끔찍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간요는 보기드문 이상한 모습에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애써 웃어보인 훈연이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세상에, 너 그러다가 화상입어! 입술에 묻은 커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낸 훈연이 화제를 바꿨다. 부모님은 잘 지내셔?





*




훈연은 거의 20분째 집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초등학생도 이렇게는 안하겠군. 머리를 뒤섞으며 손에 들린 열쇠를 내려다본다. 받은지는 꽤 지났지만 한 번도 써본 적은 없는 열쇠였다. 대부분은 근언이 먼저 훈연을 찾아왔고, 불러내야 할 때면 아예 문자를 해서 주차장에서 만났다. 훈연은 다시 머리를 감쌌다. 몇 번 앉았다가 일어난다. 그러고도 여전히 열쇠가 손에 있었다.


간요와는 1시간 전에 헤어졌고, 조금 멍한상태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었다. 근언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훈연은 길을 잃는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지도를 볼 줄 알았고, 휴대폰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나서 훈연은 자신의 집에 가는 대신 근언의 집까지 올라와 문앞을 지키는걸 택했다. 특정한 이유는, 아니, 사실 있었다. 물어봐야 했으니까. 왜 병원에 찾아왔었는지, 그래놓고 왜 여태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물어보는 것도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까페에서 훈연이 말했던 대로 보러 왔다가 자고있어서 그만 뒀을 수도 있고, 나중에 찾아오려 했는데 시간이 나지 않아 못온 걸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다시 찾아오기 전에 훈연이 퇴원을 했던지. 간요는 훈연의 퇴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왔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들이라면 일부러 말을 꺼내는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어찌됐든 저번에 갔었는데 자고 있더라, 라고 친근하게 말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훈연은 근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근언도 훈연에게 존댓말을 쓴다. 근언이 아무렇게나 훈연의 집에 처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회적 거리감이라는게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떠돌았다. 훈연은 감이 좋았다. 누군가는 운이라고 표현했지만, '감'이라는건 엉망으로 흩어진 조각들을 무의식적으로 긁어모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타고나는 것이니 운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훈연의 감은 실적으로 나타났고, 어느정도 본인에게 신뢰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감의 문제점은 본인도 왜 그렇게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감은 감이었다. 훈연은 굳게 결심하고 열쇠를 문고리에 꽂아넣었다. 꼭 맞물리는 쇳조각을 옆으로 돌리자 가벼운 소리가 났다. 새로 지은 빌라의 문은 소음 하나 없이 열렸다. 도둑이라도 된 기분으로-실제적으로 무단침입을 하는 것은 맞았지만-훈연이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탕.


상황이 두가지로 갈렸다.


첫번째로, 훈연의 몸이 쓰러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며 총성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몸을 부딪힌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나왔고, 곧 몸이 본능적으로 웅크려졌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소리가 이빨 안에 갇혀 웅웅댄다. 부딪힌 머리 때문인지 이상한 울림 소리가 난다.


두번째로, 근언이 총을 떨어뜨렸다. 흔들림 없이 총신을 쥐고있던 손이 하릴없이 무너졌고, 몇 초간의 영원같은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나서 몸이 움직였다. 넘어지다 싶이 일어나며 급하게 밖으로 나온 근언이 바닥에 엎어진 훈연의 몸 밑에 무릎을 넣어 부축했다. 티 때문에 반절만 가려져있는 팔이 덜덜 떨린다. 다급히 몸을 살폈지만 출혈은 없었다. 총탄은 복도의 벽에 박혀있다. 아무래도 피하려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 모양이었다.


억지로 냉정하게 돌아온 근언이 훈연의 팔 부터 살폈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심하게 부딪힌 것 같았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나오는 비명에 근언이 당장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완치까지는 한참 남았다. 겨우 붙어가고 있었을 뼈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구급차를 부르는데 훈연이 팔을 잡았다.


"ㄱ,그정도 까지는, 젠장, 운전으로 괜찮은데요."


식은땀 범벅인채로 겨우 그렇게 말하고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근언이 억지로 붙잡아놓고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 다시 생각하니 안되겠는지 훈연도 신음만 내며 근언을 말리지 않았다. 고통 때문인지 숨을 몰아쉬며 훈연이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눈이 마주친다.


"미안합니다."


거의 즉각적으로 사과가 튀어나왔다. 훈연보다도 창백한 얼굴이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쳐다보던 훈연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총구에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평소라면 그게 다였을텐데, 문고리라도 잡아 균형을 유지해야할 팔이 깁스에 매여있었다. 한순간 중심을 잃으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기설기 맞춰져있던 뼈들이 크게 진동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돌아오자 근언의 얼굴이 보였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얼굴에 번져있는 패닉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심했다. 훈연은 기억을 더듬어 기시감을 찾아냈다. 훈연이 처음 팔을 다쳤을 때와 비슷했다. 지금이 천 배 정도 더 창백하다는걸 뺀다면.


"...저한테 열쇠를 준 이유가 이거라면, 실패해서 곤란하시겠네요."


끔찍히 아픈 와중에도 농담이 나왔다. 근언은 여전히 창백히 질린 얼굴로 인상을 구겼다. 지금 상황에 할 말이냐는 듯한 표정에 훈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물어볼게 산더미였다. 물어보려고 했던 병문안에 관한 것은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총을 어디에 숨겨두고 있었는지, 어째서 자신을 쏜 것인지, 소매 아래에 드러나고 있는 흉터에 대한 것이나 아니면 단순히, 내일 시장을 찾으러 가자고 하면 허락할 것인지, 대강 그런 것들이 벌처럼 윙윙댔다.


적어도 지금은 질문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훈연이 멀쩡한 손을 들어 근언의 뺨에 대었다. 식은땀이 잔뜩 베어나오는 차가운 얼굴. 근언의 눈이 커진다.


"일단 벽에 박힌 총탄 부터 제거하죠. 구급대원들하고 오해가 커지기 전에."


근언은, 힘겹게 눈을 휘어 웃는 얼굴을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제발 근언훈연 파줘 제발...

'연성 > 중드(랑야방, 위장자,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수경염  (0) 2016.03.09
[임수경염]Frozen2  (0) 2016.03.07
[임수경염]Frozen 1  (0) 2016.03.05
[타래료, 청폐안 / 근언훈연] Assistant 6  (2) 2016.02.29
[타래료, 청폐안 / 근언훈연] Assistant 5  (0) 2016.02.28
Posted by 콩식빵
, |


4.
"오늘만 출근 안하면 안될까... 오늘만..."

배게에 얼굴을 파묻은채 내는 좀비 같은 소리가 퍽 서글프다. 옷까지 전부 갖춰입고 커피마저 든 채인 샘이 난감하게 침대를 내려다봤다. 알람이 울린지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건 지금이라도 일어나지않으면 꼼짝없이 지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딘, 일어나야 돼.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채 죽어가는 동물의 소리를 낸 딘이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다. 어제까지 포함해 무려 사흘 동안 밤을 샜으니 이런식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예사는 아니었다. 어제는 심지어 샘이 임팔라를 운전해 집으로 왔다. 웬만하면 재깍재깍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그정도 수준이라면 세상이 또 한 번 멸망한다고 해도 잠을 자야한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샘부터가 아직 자고 있겠지. 

결국 커피를 내려놓은 샘이 딘을 거의 안듯이 일으켜 세웠다. 세상을 살면서 들어볼 수 있는 가장 험한 욕들이 불경처럼 흘러나왔다. 샘, 진짜 죽는게 아닐까. 내 말은, 반 백 번도 더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짜로 말이야. 죽을지도 몰라. 죽을거야. 혼미한 정신으로 쏟아지는 오열을 달래듯 커피가 들이밀어졌다. 포션이라도 되는양 사약 같은 물을 들이킨 딘이 그제서야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딘은 그러고도 거의 5분 동안을 침대 헤드에 널브러진 채 회사에 저주를 퍼부었다. 샘이 미리 치약을 짜놓은 칫솔을 내밀자 포기한 듯 칫솔을 입에 넣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비틀거리는 통에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옷을 챙겨든 샘이 딘의 뒤를 쫓았다. 널찍한 집은 깔끔한 편이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결함이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나 단검, 낱장으로 된 프린트들이 이것저곳에 흩뿌려져 있었고, 비뚤어진 러그의 밑에는 악마의 덫이 반쯤 빠져나와 있다. 발에 채이는 권총 때문에 샘이 비명도 못지르고 몸을 구겼다. 며칠 안들어왔다고 이런 상태라니, 하기사 샘이 집에 못들어온다는 것은 딘도 정리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얘기기는 했다. 그 고생을 했는데 임무성공과는 별개로 허탕이었던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원래 이런 일이라지만, 위쪽에서 질책이라도 하면 딘이 어떻게 나올지가 제일 걱정이었다. 한 일이 있으니 해고 당할 일은 없겠지만 또 시말서라도 쓰게 되면 정말 스트레스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딘의 마인드는 군인에 가깝기는 했지만 뭣도 모르면서 예산이나 계속 들먹이는 상사는 상사로 쳐주지도 않았다. 그놈의 돈. 때려치우고 카드사기나 치면서 돌아다니자는 농담이 수시로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충 씻고 나온 딘이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지며 새 옷을 받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속옷차림으로 셔츠를 꿰입는 딘을 뒤에 두고 핸드폰과 총을 자켓 주머니에 끼워넣은 샘이 짧은 시간 동안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러그를 위치에 맞추고 단검을 케이스-세네개의 단검과 네댓개의 총이 있는 서류가방-에 던져넣거나 옷가지들을 줍던 샘이 셔츠 아래 깔려있던 술 병을 집어들었다. 텅 빈 스카치 병을 얼마간 노려보던 샘이 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바지까지 입고 손목시계를 차던 딘과 눈이 마주친다.

"이걸 다 마셨어?"
"음..."

대답을 미루며 괜히 손목시계를 절걱대는걸 노려보자 딘이 대놓고 시선을 피했다. 그냥 기분상 좀 마시고 싶어서... 샘이 기가 막힌다는듯 숨을 뱉는다. 혼자 있을 때는 안마시기로 약속 했었잖아. 따지고 드는 음성에 재빠르게 자켓을 껴입은 딘이 차키를 채왔다. 먼저 가있을테니까 천천히 와. 뻔뻔하게 뺨에 입까지 맞춰가며 도망치는걸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샘이 병을 대충 쇼파에 던졌다. 분명히 다 치워버렸던 것 같은데 아직도 남은 술이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청소 겸 집안을 다시 털 계획을 세운 샘이 밖에서 들리는 클락션 소리에 신발을 구겨신었다. 




5.
리더기에 카드를 읽히자 엘레베이터가 움직인다. 위쪽으로는 평범한 회사가 있었지만, 뒷문 쪽에 있는 엘레베이터는 고장 표시가 붙어있는데다 버튼도 없었다. 지하로 계속 내려가는 상자 안에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딘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술 때문에 단단히 골이 난건지 샘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TOSE UP의 본부는 기본적으로 지하에 있다. 애초에 비밀기관인데다가 노출 되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지부가 지하에 지어졌는데, 사원들은 갇혀서 노동하는 기분이라며 이 환경을 극도로 싫어했다. 채광 좋은 고층 빌딩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염원은 어느부서나 컸지만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근무시간 중 햇빛을 보는 사람들은 현장요원들 뿐이었다. 어차피 현장요원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갈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환기 시스템이라도 고장나면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국장인 바비는 빗발치는 청원에 대해 '고층빌딩이 좋으면 옥상 난간에 올려줄 수는 있다' 고 대답해 원망을 끊어낸 전적이 있었다. 바비의 발언 이후 대놓고 항의서를 올리는 일은 없어졌지만 무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는 농담은 여전히 자주 쓰였다. 불만이 많아봤자 지하에 있는 본부를 위로 끌어올릴 능력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그럭저럭 다니고 있다.

도착을 알리는 전자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여전히 휴대폰을 보고있는 샘과 기지개를 펴는 딘이 거대한 악마의 덫을 익숙하게 밟고 지나갔다. 로비에는 출근으로 바쁜 사원들이 계단과 엘레베이터로 엇갈려 뛰어가고 있다. 지하에 있다는 것과 곳곳에 악마 방지용 주문이나 오컬트 상징들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극히 평범한 회사 풍경이었다. 다만 여기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반절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심히 편한 옷차림에 더해서 눈 그림자를 달고 있다. 입고있는게 죄수복이었다면 사실 회사보다는 수용소에 가까울 것이기는 했다.

억지로 왔다는 티를 팍팍내며 걷던 딘이 리더기에 사원증을 읽혔다. 가상 스크린에 정보가 떴다가 꺼진다. 이동용 엘레베이터에 탄 후에는 사냥 부서가 있는 버튼이 눌려졌다. 이어서 탄 사람들도 각자 맞는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닫혔다. 함께 탄 사람들이 딘과 샘을 힐끔거린다. 아포칼립스 이후로는 언제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꼭 이걸 나눠야 할까? 그냥 출입용에 버튼만 달면 되잖아.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딘의 투덜거림에 샘이 어린애 같이 징징대지 말라고 일갈했다. 대놓고 아직 화나 있다고 광고하는 말투였다. 머슥해진 딘이 층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엘레베이터에서 내린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인사를 대충 받아준 딘이 공용 테이블에 올려진 간식들을 채며 데스크로 향했다. 현장요원의 데스크는 규정상 파트너의 것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샘도 언짢은 얼굴로 딘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브리핑이 있으니 바로 나갈 수도 없고, 쌓여있는 딘의 물건들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한 샘이 하도 안써서 거의 삐걱대는 의자에 앉았다. 분위기가 불안해서인지 부서 사람들이 둘을 힐끔거렸다. 부팅 된 컴퓨터를 붙잡은 딘이 어제 읽다만 서류들을 가져오며 입으로 잼쿠키의 포장을 뜯었다. 꼰대들한테 브리핑 하고, 할당량 검색하고, 항의서 내고, 이메일 확인하고, 들어온 조사요청 해치우고... 할 거 더럽게 많군. 스케줄을 속으로 외우며 혀를 찬 딘이 서류를 던지고 의자를 밀어 샘의 옆에 붙었다. 브리핑 자료를 훑어보는 눈이 퍽이나 서늘하다.

"데이트 할래?"
"아니."

단호한 거절이다. 아랫 입술을 내밀고 턱을 당긴 딘이 다시 의자를 원위치했다.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겠군. 애교를 피운다고 화를 풀 사안도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술병 따위는 진작에 밖에 버렸을텐데 계속 밤샘이 이어지다 보니 그런걸 챙길 정신이 없었다. 사실 언제 마셨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틀 째에 마셨던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최대한 멀리내며 폴더를 열자 끔찍하게 죽은 시체 사진들이 모니터를 빼곡하게 채운다. 감흥없이 잼쿠키를 먹으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누군가가 데스크 벽을 두드렸다.

"좋은 아침-"

거스가 해맑게 웃는 얼굴을 한 채 책 한 권을 내밀며 서있다. 쿠키를 입에 털어넣고 책을 받아든 딘이 우물대느라 바쁜 입 대신 손으로 인사를 돌렸다. 저번에 부탁했던 지역자료를 구해온 모양이었다. 회사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 백업요원은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현장 요원들에게 자주 부탁을 띄우고는 했다. 약간 해진 표지를 넘겨 대충 내용을 훑던 딘이 잼쿠키가 넘어간 입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마터면 플로리다까지 갔다와야할 판이었는데. 어차피 가는김에 구해온거라고 특유의 무해한 웃음을 지은 거스가 다른 곳보다 온도가 10도는 낮은 듯한 샘의 데스크를 보고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겼다. 싸웠어? 직구로 던져지는 질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어깨를 튀었다.

"아니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말끝을 흐린 딘이 책의 페이지를 성의없이 넘겼다. 샘은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둘을 번갈아서 바라보던 거스가 눈을 가늘게 했다. 보통 같이 출근하는 날에는 샘이 딘의 성질을 막아주니 부서가 훨씬 평화로운데 오늘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래서야 퇴근할 때 쯤이면 온 부서 사람들이 어깨에 담이 걸릴 지경이다. 헛기침을 한 거스가 아침은 먹었냐고 새로운 대화주제를 꺼냈다. 딘이 잼쿠키를 들어보인다. 샘은? 역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먹었다는 답이 들려왔다. 딘이 눈썹을 한쪽을 휘어올렸다.

"대충 먹었다고? 뭘 먹었는데?"
"스카치가 아닌거."

부서 사람들이 단체로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또 술 때문이구만. 거스도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주변 반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샘은 자료에만 시선을 박고 있었다. 딘이 입을 여닫다가 머리를 헤집고는 의자를 아예 샘 쪽으로 돌렸다. 꼭 일하는데 이래야겠냐? 샘이 눈을 감고 입안을 씹더니 딘의 쪽으로 돌아 앉았다. 그럼 꼭 술을 마셨어야 했어? 미간을 눌러잡은 거스가 부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과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들으면 술 창고를 털어온줄 알겠다? 겨우 스카치 한 병이거든?"
"스카치 한 병은 술 아니야? 안마시기로 맹세까지 했잖아!"
"그래! 잘 지키고 있었잖아! 한시간에 한 병씩 비우는 것도 아니고 거의 한 달만에 딱 한 병 마신건데 그것도 못봐주냐!"
"마신건 마신거지! 그거 의존성 알콜중독이라고! 한 두번도 아니고 한 달 전에도 다시는 안마시겠다고 해놓고는 이러는데 화 안나게 생겼어?!"

죄송합니다. 나중에 돌아올 때 간식거리라도 사올게요.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하는 거스에게 괜찮다고 웃어보이는 얼굴들이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딘과 샘은 TOES UP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들이었고, 그만큼 사냥 부서를 비롯해 온갖 부서의 크나큰 방패막이였지만, 비등하게 악명도 높았다. 주는 영향력이 큰 만큼 이런식으로 둘이 싸우기 시작하면 말릴 사람도 없었다. 꼼짝없이 사랑싸움 따위를 들어야하는 사냥 부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긴 했지만 기분파인 딘이 저기압으로 돌변하면 다른 부서 사람들도 한 번 들을 욕을 두 배로 먹고는 했다. 그와중에도 열 명이 할 분량을 둘이서 해치우는데다 도와달라고 비는 건 힘 닿는데까지 모두 해결해주니 욕을 하기도 애매한 것이다. 가끔 왈왈대며 싸우는걸 듣는게 대가라면 사실 밑지는 장사기도 하니 그러려니 넘어가지만, 듣기 괴로운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특히 딘의 알콜 중독 문제 같은 경우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열리는 이벤트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포칼립스 이후 샘이 딘에게 금주를 권했을 때, 딘을 포함해 누구도 그것이 성공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딘은 근무시간에도 데스크 아래에 버번병을 다섯개는 쟁여놓고 사는 심각한 알콜 중독자였고, 본인의 개선 의지마저 희박했다. 웬만하면 취하는 일도 없었고 물이 싱거워서 마시는 수준이었지만 건강에 안좋은건 물론이고 근무태도 평가에서 매번 마이너스를 찍었기 때문에 딘도 헬스장에 가는 사람마냥 한 번 해볼까, 싶은 태도로 샘과 약속을 했다. 이런식으로 끈질기게 싸워댈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거절했을 것이다.

"나도 한 번에 끊는게 힘들다는거 알겠는데-"
"아는 놈이 이렇게 빡빡하게 구냐!"
"노력도 안하잖아!"
"한 달이나 안마셨잖아!"
"기록이 무슨 훈장이야?! 잘못해놓고 뭘 그렇게 당당하게-"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둘의 고개가 동시에 앞으로 숙여졌다. 강타당한 뒤통수를 부여잡고 책상에 엎어져 죽는 소리를 내는 둘의 뒤에서 바비가 욕을 뱉었다. 하여간 지랄맞은 것들. 회사가 너희집 안방이냐? 거스가 허리를 깍듯이 숙인다. 오셨습니까 국장님.

"이것들 좀 에덴 동산에 버리고 와라. 전직 구세주라는 것들이 이따위로 행동하니까 천사고 악마고 우릴 살붙은 뼈다귀로 밖에 안보는거 아니냐."
"아 무슨 축지라도 쓰세요? 오면 온다고 티 좀 내주면 안됩니까?"
"나불나불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구만. 브리핑 준비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하라고 한게 언제인데 쳐싸우고 앉아있어? 네 눈에는 내가 갓 입사한 인턴 나부랭이로 보이냐? 다 늙은 국장이 오라고 부르면 재깍재깍 와야할거 아니야, 재깍재깍."

서류철로 딘의 머리를 내려치며 화를 내는 바비에게 성질이 꺾여버린 샘이 공손히 브리핑 자료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쪽은 제 때 사과를 하니 편하다. 자료를 받아든 바비가 마지막으로 딘을 한 대 더 때리고는 데스크에 늘어놔진 잼쿠키를 채와 뜯었다. 니들 싸운다고 이번 브리핑 망치면 구세주고 뭐고 얄짤없이 잘릴 줄 알아. 세금 도둑짓도 얌전히 해야 봐주지. 자료를 넘기며 투덜대듯 협박하는 바비의 앞에서 샘과 딘이 얌전한 개처럼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 국장이 악마에게 살해당한 이후 거의 반억지로 맡은 직위지만 바비는 투덜대면서도 전 국장보다 200배는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전 국장과는 다르게 30년이 넘게 직접 활동 했고, 샘과 딘을 도와 멸망까지 막아냈던 사람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정뱅이 낚시꾼 같은 차림으로 설렁설렁 부서를 돌아다녀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바비가 국장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사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은 TOES UP에서 깍듯이 인사를 받는 유일한 사람이다. 당연히 일일이 브리핑에 대한걸 검토하러 오지는 않았지만 이번 브리핑은 특별하기가 지나쳐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료를 끝까지 본 바비가 샘의 데스크에 종이뭉치를 던졌다.

"좀 부풀려서 말해. 피해자 수 뒤에 0 하나쯤 더 붙이고. 지옥의 왕이랑도 계약서를 쓰는데 그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딘과 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윗선들에게 브리핑을 자주하는 팀은 따로 있었지만, 이번건은 둘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건이었다.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이놈아. 마지막으로 딘을 한 번 더 내려친 바비가 그럼 수고하라며 부서를 나선다. 전 국장이었다면 죄다 일어나서 인사했어야겠지만 바비는 유독 그런걸 싫어하는 통에 목소리만 나왔다. 아직 앞에 서있던 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싸우는거 들으니 딘이 잘못했고, 샘도 고집스럽고, 내가 보기엔 둘 다 아주아주 바보 같았어. 그럼 난 플로리다로 돌아갈테니까 브리핑 잘 해! 나중에 보자-"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거스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던 샘과 딘이 닫히는 자동문에 그냥 서로를 마주봤다. 30초. Bitch. Jerk. 한마디씩 뱉고 나서 다시 등을 돌린 두명이 알아서 할 일을 시작한다. 한시름 놓은 부서 사람들도 각자 업무로 돌아갔다. 






6.
"그래서 그쪽을 중점적으로 조사해서..."
"잠깐, 그러니까 그 '용'들이, 연옥을 열려고 한다는거지. 고대에 아서왕한테 죽임 당했던?"
"...조사에 의하면-"
"걔들이 연옥을 열어서 뭘 어쩔 계획인데?"
"바베큐나 구워 먹겠죠, 물론."

샘이 딘의 발을 지긋이 밟았다. 빈정거림을 들은 소위 말하는 '윗선'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쉰 샘이 PPT를 넘겼다. 화면에 뜨는 끔찍한 시체의 사진에 윗선들이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이런 것 좀 빼면 안되겠나? 올 때마다 이런걸 봐야하니 원. 딘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오는걸 곁눈질한 샘이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 사과를 입에 담았다. 절차고 뭐고 죽은 사람들 사진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그따위라니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헛기침을 한 샘이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들어 괴물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몇 괴물들이 자신들의 알파에 대해 언급하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일삼고 있어요. 저희는 그들이 연옥에서 꺼내려는 것이, 그러니까 탈출 시키려는 것이 그 어머니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알파?"
"모든 괴물들에게는 시초가 있죠. 뱀파이어든 웨어울프든 용이든 스킨워커든, 처음 생겨난 시초. 별로 동족의식이 없는 괴물들도 그런 알파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수세기 동안 동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어머니에 대한 일 때문에 움직이기 시작한걸로 추측됩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뭐 때문에 우리가 돈을 대준다고 생각해? 가서 죽이고 오라고. 모가지라도 댕겅 잘라서 로비에 장식해놓으면 되는 일 아니야?"

샘이 다시 한 번 딘의 발을 밟았다.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문 딘이 마른 세수를 했고, 샘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첫번째로, 괴물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문제가 됩니다. 의지로 거부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알파가 원한다면 자살무장이나 엇비슷한 것도 무릎 쓸 수 있구요. 평범하게 사람만 죽이려는 괴물들도 상대하기 힘든데 그런식으로 나오면 저희 요원들도 막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려고 하고 있어요. 스킨워커의 경우 개로 위장해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저를 키우는 사람들을 물어 변하게 하는 수법으로 이미 집계된 것만 세자리에 가까운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이런식으로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기관이 설립된 이후로도 처음 겪는 일이라 애를 먹고 있고, 직접적인 피해자를 줄이는게 우선이니 알파들에 대한 조사도 느려지고 있죠. 자길 보호할 군대도 만들고, 동시에 저희 시선까지 돌리고 있는겁니다."

윗선들의 얼굴이 드디어 심각해졌다. 이어서 알파에게는 평범한 사냥수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과 사실상 죽이는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 나오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확실한거냐는 물음에 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선 알파를 잡아야죠. 저희가 요청드리는건 천사의 그릇에 대한 지원의 확대와 크라울리와의 계약에 대한 허가입니다."
"크라울리? 콜트를 넘겨줬다는 그 교차로의 악마?"
"이제는 지옥의 왕이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겠네요. 네, 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나쁜 점은 이 '크라울리'가 아주 다른 차원의 개자식이라는 것이고, 더 나쁜 점은, 새로운 지옥의 왕이 비즈니스맨이라는 겁니다."

지옥의 왕이라는 말에 파리하게 질렸던 얼굴들이 의문으로 일그러졌다. 샘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도 없던 의자에 갑자기 인영이 생긴다. 윗선들이 기겁해서 의자를 물리자 크라울리가 옷을 정리하며 일어나 아주 밝은 웃음을 지었다. Hello boys.

"크라울리입니다. 지옥의 왕이시죠."

딘이 소개하며 칼을 들어 금방이라도 크라울리를 찌를듯 등에 가져다댔다. 걱정마세요, 악마 전용 칼이니까요. 허튼짓을 하면 바로 죽여버릴 수 있습니다. 놀이기구 안내를 하듯 가볍게 나오는 말에 임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칼이 등에 닿든말든 셰익스피어 연극마냥 팔을 벌리고 허리를 숙인 크라울리가 자리를 마련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꺼냈다.

"사전 공지없는 등장에 대해서 사과의 말씀을 먼저 드리죠. 미리 알리면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걱정과는 다르게, 말을 안듣거나 무례하다고 해서 터뜨리지는 않을테니 너무 쫄지 마세요. 어차피 한 20년 후에는 아주 자주 보게될텐데 좀 일찍 본다고 탈 나지는 않을겁니다."

크라울리가 눈을 깜박여 검은눈을 보이자 윗선들의 얼굴이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샘은 자리에 앉아 천사의 칼을 던졌다 받았고, 크라울리가 손을 튕겨 회의실의 문을 잠갔다. 그럼 신사분들, 브리핑을 이어볼까요. 


예전에 썼는데 포스타입에는 안올려서.... 지금이라도 올림. 더 쓰려나...?

'연성 > Supernatur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샘딘 / 황금나침반au 2.Pilot(2)  (0) 2016.01.14
샘딘 / 황금나침반au 1.Pilot(1)  (0) 2016.01.14
샘딘 It's A Terrible Life 1.  (0) 2016.01.14
캐스딘  (0) 2016.01.14
샘딘 Crush on2  (0) 2015.10.06
Posted by 콩식빵
, |

2.
"아침 먹을거야?"

샘이 임팔라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뒷자리 시트를 전부 차지하고 누운 헤일은 하품을 했고, 주유구 옆에 서있던 마일리는 딘이 던져주는 햄을 공중으로 뛰어 받아먹었다. 기본적으로 데몬은 음식을 먹지 않지만 마일리는 햄 종류라면 맛을 보기 위해 가끔 받아먹고는 했다. 칼로리바를 대충 뜯어먹은 딘이 오일건을 뽑아내고 운전석에 탔다. 마일리가 운전석 시트 아래로 들어와 딘의 옆으로 고개를 뺀다. 

제리코까지는 1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샘은 아직도 신용카드 사기를 치냐며 딘을 나무랐고 마일리가 대신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사냥꾼이라는게 벌이가 좋은 직업은 아니잖아. 헤일이 뒷좌석에서 코웃음을 쳤다.

"카세트 테이프부터 업데이트 하지 그래."
"카세트 테이프가 어디가 어때서?"
"메탈리카에 모터 헤드랑 블랙 새비스? 쓰레기 록들이잖아."
"말 조심해, 새미. 그리고 규칙 알잖아. 선곡은 운전수가 하고-"
"-조수는 입 닥치고 있는다."

샘과 헤일이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기는 동안 딘과 마일리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시동을 걸자 AC/DC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새미라고 부르지마. 어린애 같잖아. 투덜대는 목소리에 딘이 귀 옆에 손을 붙이고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고? 음악소리가 커서 잘 안들려! 샘이 됐다는듯 반대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마일리가 키득댔다. 2년이나 지났는데 도통 바뀐게 없다. 헤일도 같은 생각인지 눈을 감고 체념한 듯이 시트에 턱을 얹었다. 차를 꽉 채우는 음량을 약간 낮춘 딘이 웃는채로 샘을 힐끔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지냈어? 샘이 입을 비뚤게 틀었다. 행복하게. 마일리가 언짢은 얼굴로 시트를 넘어가 헤일을 습격했다. 등에 올라타 머리를 발로 꾹꾹 누르자 헤일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뒤로 돌렸다. 앞발로 헤일의 주둥이를 막은 마일리가 물리기전에 키득대며 시트 아래로 뛰어내렸다. 딘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우회전을 했다.

"자세히 말해줄만한건 없어? 제리였나? 여자친구 얘기 좀 해보던지."
"제시카야. 할 얘기 없어."
"딱딱하게 굴지 말고. 2년만인데."

시트에 얼굴을 얹은 마일리가 헤일의 얼굴을 장난치듯 크게 핥는다. 벌써 두번째로 한숨을 쉰 헤일이 느리게 마일리의 얼굴도 핥았다. 목적 달성 후 다시 앞좌석으로 넘어온 마일리가 시트에 기댄 딘의 등 뒤를 비집고 들어가더니 머리만 샘 쪽으로 쏙 빼냈다. 어서 말하라는듯 저를 빤히 쳐다보는 마일리를 노려보던 샘이 다시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시카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 없어. 같은 과고 조별 과제하면서 만났었어. 헤일을 신경 쓰지 않는척 해줬었고."
"맞춰볼게. 똑똑하고, 아량 넓고, 이해심이 많은데다 엄마처럼 챙겨줬지?"
"물어보는 저의가 뭐야?"
"한 대 치겠다? 동생 애인이잖아! 소개 받아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 그리고 데몬이 보더 콜리였으니까.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

딘의 말투도 얼굴도 별다른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생을 놀리는 즐거움이 담겨있는 정도다. 샘은 그게 화가 났고, 그 사실에 화가 난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화가 났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 마일리가 딘을 쿡 찔렀다. 힐끔 샘을 쳐다본 딘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신호등이 임팔라를 멈춰세웠다.

"나도 2년 동안 잘 지냈어. 궁금하진 않겠지만."

화제를 돌리려는 노력에도 샘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왜저렇게 민감하게 구는거야? 어린애처럼 입이 나오려는걸 억누른 딘이 정면을 주시했다. 엄마처럼 굴어서? 혹시 '그 일'때문에 물어보는거라고 생각하는거라면-

딘은 고개를 털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대신해서 마일리가 딘의 등으로 더 파고들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신호등이 바뀜에 따라 딘이 엑셀을 밟았다.

"아버지는 금방 찾을 수 있을거야."

샘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헤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였고, 차 안은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딘이 말을 덧붙였다. 행복한 삶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임팔라가 약간 거칠게 속도를 올렸다.







3.
"저번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죠?"

보안관은 인상을 구기며 둘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옆에 서있는 헤일에게 향하는 눈을 가로막듯이 딘이 뱃지를 들어보였다. FBI입니다. 보안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요원을 하기에는 젊어보이시는데요. 여전히 헤일을 힐끔거리는 보안관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딘이 현장을 둘러보며 질문을 반복했다.

"네, 1마일쯤 위에서요."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었나요?"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서로 모를 수가 없죠."

그의 데몬인 페렛이 옷 안에서 쑥 얼굴을 내민다. 보안관은 마일리에게 시선을 던진 후에는 경계심을 약간 푼 것 처럼 보였다. 군견을 데몬으로 가지면 이런점에서 혜택이 있었다. 딘이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동안 헤일과 마일리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았다. 모든 유령사건이 그렇듯이 피해자의 체취만 약간 감돌 뿐이다. 냄새를 쫓아서 다리 끝 쪽으로 가던 헤일을 마일리가 급하게 물었다. 뭐냐는듯 짜증스럽게 절 쳐다보는 노란 눈을 마일리가 경고하듯 노려봤다. 눈을 돌리자 꽤나 멀리 떨어져버린 제 인간들이 보였다. 드러냈던 이를 닫은 헤일이 조사를 포기하고 마일리를 따라 샘과 딘에게 돌아갔다. 뭔가 건진게 있냐는듯한 시선에 고개를 젓자 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같은 경찰에게 기대는 말아야겠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발 신경 좀 쓸 수 없어?"

경찰들이 멀어지자마자 마일리가 이를 문채로 목소리를 낮췄다. 헤일은 답이 없었고 샘은 눈썹을 휘어올린채 마일리를 쳐다봤다. 대답은 딘에게서 나왔다. 또 허용치 이상으로 멀어졌었어. 샘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반대쪽에서 다가오는 진짜 FBI 요원들에게 태연하게 인사한 딘이 임팔라에 타 시동을 걸었다. 클래식 카가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동안 마일리가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그런식으로 해서 어떻게 대학생활을 했던거야?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데몬도 없었을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대학 생활하면서는 냄새 따위에 집중할 일이 없었다고!"
"오 그래? 그것 참 새로운 소식이네! 참 편하고 재밌었겠군!"

데몬들이 뒷좌석에서 싸우는 동안 샘과 딘은 말없이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데몬과의 거리. 딘과 마일리는 아직도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직 마일리가 족제비니 사나운 핏불이니 하는 것들로 변하기를 좋아했을 시절에, 둘은 혼자 남아서 블럭을 갖고 노는 샘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정말 좋지 않은 일.

작은 동물로 변해서 옷 속에 숨어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헤일은 보이지 않았고, 그건 딘과 마일리를 상당히 불안하게 했다. 헤일은 어디있어? 마침내 근처에 숨어있을 헤일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물었을 때, 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버스 정류장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가방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는데 그걸 가지러 갔다는 이야기였다.

샘도 물론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갑게 질린 딘의 얼굴과 털이 바짝 선 여우의 눈. 샘은 딘과 마일리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순진하게 깜박여지는 눈을 보고 마일리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당장 헤일 불러들여. 당장! 불호령에 놀란 샘은 블럭을 떨어뜨렸고, 딘도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보기 전에 당장 불러들이라고!

샘은 몰랐다. 존과 아퀼라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존이나 딘은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딘과 마일리는 항상 붙어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둘의 사이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샘도 헤일이 좋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옆에서 떨어뜨려놓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냥 그런거라고. 보통 사람들은 데몬과 떨어지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몰랐다. 샘은 그냥 제 느린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것보다는 새로 변한 헤일이 혼자 갔다오는게 편할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헤일이 아무리 멀어져도 샘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아버지한테 들키면 안돼. 딘은 거의 아플 정도로 샘의 어깨를 쥐고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고, 샘이 무서워할만큼이나 두려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뒤늦게 돌아온 헤일은 샘보다도 호되게 혼이 났다. 절대로 샘을 놔두고 혼자 나다니지마! 숫사자로 변한 마일리가 갈기를 곤두세우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고, 헤일은 영문도 모르고 쥐로 변해 샘에게로 숨어들었다. 이후로 헤일이 일정 거리 이상으로 벗어날때마다 딘과 마일리가 그것을 막았다. 데몬은 동물과는 달랐다. 셰퍼드 무리에 마일리가 껴있다고 해도 모두가 마일리가 데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혼자 떨어져다니는 데몬을 말할 것도 없었다. 분리 훈련을 한 데몬들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어렸을 때는 형태를 바꿀 수 있으니 괜찮았지만 샘이 14살 무렵에 헤일이 늑대로 정착하고 나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늑대 데몬을 한 번 보고 잊어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딘은 일정거리 이상으로 데몬이 벗어나면 끈이 당겨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아프고, 모든 신경이 데몬에게 쏠려 당장 거리를 좁히지 않고는 못배긴다고. 샘은 혹시 헤일과 저의 유대가 약해서 그런건지 불안했지만 사실을 확인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샘과 헤일도 웬만해서는 정해진 거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처럼 헤일이 뭔가에 집중할 때면 잊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딘과 마일리는 필요이상으로 신경질적이게 굴었다. 

"...미안."

거의 으르렁대던 데몬들의 소리가 멈췄다. 마을쪽으로 차를 몰던 딘이 샘을 힐끔거렸다. 뭐가. 간단한 대답에 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여러가지. 얼버무렸지만 딘은 샘이 무엇을 사과하는지 알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딘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런걸로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거 알지?"

샘은 답이 없었다. 마일리는 귀를 뒤로 눕혔다가 앞좌석으로 건너와 시트 아래에 몸을 파묻었고, 헤일은 세웠던 다리를 굽히고 뒷좌석에 엎드렸다. 딘과 마일리가 화를 내는 것은 걱정 때문이다. 샘과 헤일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둘을 피했다. 늑대인 것 까지는 그런데로 괜찮았다. 드물기는 해도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데몬과 훈련없이 분리를 한다는건,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었다. 딘은 그런것에 샘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제 동생이 얼마나 평범해지고 싶어하는지를 아는 이상 더더욱.

차가 마을로 들어왔다. 적당히 주차할 곳을 찾아 임팔라를 멈춰세운 딘이 문을 열자 마일리가 먼저 뛰쳐나갔다. 딘이 내리고, 샘이 내리고, 헤일이 열린 창문으로 몸을 빼내 마지막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딘이 입을 비뚤게 틀었다. 그럼 에이미라는 사람부터 한 번 찾아볼까. 마일리가 호기롭게 한 번 짖고는 앞장섰다.







4.
[허위 신고라니, 새미. 불법이라는건 알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샘이 웃으며 헤일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칭찬 고마워. 얘기 좀 하자는 딘의 말을 시작으로 그간 알아냈던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헤일 때문에 기자라는걸 믿도록 설득하는데 조금 걸렸지만 어쨌든 콘스탄스의 남편은 부정을 저질렀고, 상대하는게 백의의 여인인 것은 확실했다. 의문인건 왜 존이 시체를 진작에 태워버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라면 존도 시체가 옛 집의 뒷뜰에 묻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다. 이유야 어찌됐건 샘은 그 쪽으로 임팔라를 몰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도 그곳에 있을거라는 말에 번번히 말이 끊겼던 딘이 역정을 냈다. 아까부터 말하려던거잖아! 아버지는 제리코를 떠나셨어. 조수석에서 털을 고르고 있던 헤일이 인상을 구기며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아버지의 일기를 갖고 있거든.]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으시잖아."
[이번에는 그러셨는걸.]

헤일과 샘이 눈빛을 주고 받았다. 뭐라고 써있는데? 어디로 오라고 지시하실 때랑 똑같은 힌트라는 말에 샘이 골치가 아프다는듯 입 안을 씹었다. 좌표. 어디냐는 질문에 딘이 아직 모른다는 답을 냈다. 존이 아직까지 제리코에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했던게 멍청했다. 헤일이 대신하듯이 한숨을 쉬었다. 고생길이군. 동감한다는듯 입꼬리를 내렸던 샘이 휴대폰에서 들리는 잡음에 얼굴을 구겼다. 딘. 딘? 휴대폰을 툭툭 치며 이름을 반복하는 동안 헤일이 갑자기 털을 세우며 핸들에 앞발을 뻗었다. 동시에 뭔가를 친 임팔라가 도로에 급정거했다. 눈을 크게 뜬채 숨을 몰아쉬던 샘이 백미러에 잡히는 여자의 얼굴에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넣었다. 데몬이 없다. Shit.

"집에 데려가 주세요."

헤일이 위협하듯 목울대를 울렸다. 상대하는게 데몬이거나 동물이었다면 즉각 효력이 있을 법한 무시무시한 소리였지만, 안타깝게도 늑대의 울음은 유령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집에 데려가 주세요. 갸냘프다기 보다는 화가 난 듯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마른침을 삼킨 샘이 부정의 답을 냈다. 여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문의 잠금장치가 잠겼다. 멋대로 눌러지는 엑셀과 돌아가는 핸들에 샘이 입안쪽을 씹었다. 하필 딘도 없을 때.

여자가 손을 젓자 덤벼들던 헤일이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며 높은 소리를 냈다. 헤일! 덩치 큰 늑대가 꼼짝없이 늘어지는걸 급하게 감싸안는 새에 임팔라가 낡은 주택 앞에 멈춰섰다. 확인하지 않아도 콘스탄스의-여자의 집인 것 같았다. 전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슬픈 목소리에 이를 악문 샘이 여자를 노려봤다. 집에 돌아가기 두려운가보지?

여자가 순식간에 샘의 위로 자리를 옮겼다. 손이 닿은 부분부터 얼어붙어가는 것 같았다. 샘이 아직 늘어져있는 헤일을 계속해서 곁눈질 했다. 잠깐 기절한 것 뿐인 것 같았고, 데몬은 회복력이 빠르니 금방 일어날 것이다. 시선이 돌아가는게 마음에 안드는지 여자가 손에 힘을 넣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속삭이는 듯이 낮은 목소리다. 너무 추워요. 트랙터가 몸을 짓누르는 것 처럼 움직일 수 조차 없다. 생경한 고통이 흉곽을 뚫듯이 퍼졌다. 

"날 죽일 수는 없을 걸...! 난 부정을 저지를 생각 없어,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 여자가 불쌍하다는 듯이 입을 비틀어 웃었다. 뺨에 닿는 손가락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Oh Deer, 하지만 그런 기분이잖아. 안그래?"

뱀처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샘이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힘을 줬다. 시야 구석에서 헤일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소용 없다는걸 알면서도 발톱을 세워 허공을 휘두르자 전파가 불안정한 TV 화면처럼 여자의 모습이 지직거렸다. 화를 돋군듯 이를 드러낸 여자가 더욱 무게를 싣는다. 샘이 터뜨리듯 비명을 내지르기 무섭게 총소리가 들렸다. 두 세번의 총성에 여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다시 총성. 마일리가 사납게 짖는 소리가 들린다. 여유를 찾자마자 허리를 일으킨 샘이 운전대를 잡았다. 원한다면 집에 데려다 주지. 딘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한채 샘이 엑셀을 밟았다.







5.
"좌표에 쓰여있는건 여기야. 콜로라도의 블랙워터 릿지."

Sounds chaming.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시트를 도는 셰퍼드의 목을 눌러 제지시킨 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마나 멀어?

백의의 여인을 멋지게 처리한 뒤의 임팔라는 공기가 덥혀져 있었다. 샘도 딘도 분명 허리께니 등이니 하는 곳에 멍이 들어서 제대로 앉아있기도 아픈 상태였고, 운전석 쪽의 유리는 깨져있었지만,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어찌되도 상관 없는 것 같았다. 호흡을 맞춰본지 2년만이었는데도 나름 훌륭하게 잘 해냈고, 객관적으로도 멋들어진 마무리였다. 존의 다이어리에서 다음 목적지도 찾았고. 마일리도 신나 있었지만 헤일도 훌쩍 뒷좌석으로 건너간 마일리의 장난을 기꺼이 받아줬다. 덩치가 커서 겨우 차의 뒷좌석에서는 크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늘 새벽과 비교하자면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차 흔들리니까 적당히 해 마일리. 꾸중 같지도 않은 딘의 나무람에 거의 키득대듯이 웃은 샘이 아까의 질문에 답했다. 600마일 정도 걸려.

"괜찮네. 내일 아침 쯤에는 도착할거야."

불쑥 시트 위로 얼굴을 내밀며 말한 마일리가 딘의 무릎으로 뛰어내려왔다. 야, 야! 순간적으로 가려진 시야 때문에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좀 얌전히 있으라는 호통에 마일리가 자리가 좁아서 그런거라고 노래하듯 말했다. 한동안 둘이서만 다녔으니 조수석은 항상 마일리의 차지였는데 이젠 존이랑 다닐 때보다도 공간이 없다. 딘이 픽 웃어버릴 동안 샘이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저, 딘. 헤일이 뒷좌석에서 한쪽귀를 옆으로 돌렸다. 뭐냐는듯 올라가는 눈썹에 샘이 망설이는 목소리를 냈다. 난... 마일리가 핸들을 쥔 딘의 양 팔 사이로 훅 고개를 내밀었다.

"돌아갈거라고 하는건 아니지?"
"면접이 10시간 후에 있어. 가야해."

헤일이 고개를 들고 샘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상기 되어있던 공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얼굴을 구긴채인 딘이 샘을 힐끔거렸다. 헤일이 곧 시선을 거두고 평소처럼 엎드렸고,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일리가 먼저 팩 고개를 돌리고 딘의 무릎 위에서 몸을 말았다. 딘이 신호등을 무시하고 핸들을 꺾어 좌회전을 했다. 마음대로 해. 데려다줄테니까.

"딘, 이해 해 줘야 해."
"이해라는게 언제부터 그렇게 강요적인 단어였냐?"

빈정대는 어투에 샘이 입 안쪽을 씹었다. 말이 다시 반복 되지는 않았다. 딘은 딱딱한 표정으로 차를 몰았고,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샘은 눈이 감기질 않았다. 헤일은 평소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제리코에서 스탠포드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샘은 시트에 기대 억지로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냥을 다니던 시절에는 매일 있었던 일이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유령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화상을 입은 듯 욱신댄다. 침묵의 밑에서 아까의 목소리가 기어올라온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잖아. 안그래?

임팔라가 약간 거칠게 멈춰섰다. 눈을 감고 있던 헤일이 멎은 엔진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고, 샘도 내려놨던 짐을 집어들었다. 마일리는 여전히 등을 돌린채였다. 아버지 찾으면 연락 할거지?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딘이 약간 쓰게 웃었다. 차에서 완전히 내린 헤일이 열린 창문에 앞발을 올렸다. 나중에 도우러 갈게. 꼬리가 축 쳐진 마일리가 꾸물대며 몸을 돌렸다. 그래. 늘어진 귀가 퍽 미련을 남게 했다. 한참이나 마일리와 마주보고 있던 헤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망할 유령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거면, 넌 천하의 답 없는 멍청이야."

쓰인 단어치고는 차분하기만한 목소리에 샘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임팔라는 샘의 등이 사라지자마자 시동을 걸어 길을 빠져나갔다. 그런거 아니야. 안믿는다는듯 콧방귀를 뀐 헤일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열기나 하라는듯한 고갯짓에 샘이 더플백을 어깨에 매고 열쇠를 꺼낸다. 잠금쇠가 풀리는 동안 헤일이 눈을 가늘게 하고 문 밑으로 코를 디밀었다. 왜 그래? 몇 번 코를 킁킁거리던 헤일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떨떠름한 얼굴에 샘이 인상을 구겼다. 뭐 잘못 됐어? 답답하다는듯 재촉하는 소리에 헤일이 약간 멍한 목소리를 냈다. 믹의 냄새가...

"당장 문 열어."

낮은 목소리에 샘이 즉각적으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빠르게 풀린 잠금쇠에 문고리를 돌려 열자 헤일이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제시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간 집은 기괴한 정적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 제스? 불안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걸음을 뻗던 샘이 탁자에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쿠키 위에 얹어져있는 익숙한 필체. 보고 싶었어! 사랑해!

잉크가 눌러붙은 메모를 쥔 샘이 헤일이 사라진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끝에서부터 빠르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기시감. 속도를 올리는 박동이 채찍질하듯 샘의 걸음을 독촉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잡아 끄는듯 쉽사리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걸음씩 위태롭게 뻗던 걸음이 침실에 닿았다. 멍하니 위쪽을 쳐다보고 있는 헤일의 모습이 보였다. 

샘. 허망한 목소리였다. 하얀 시트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올려다본 천장에는 제시카가 있었다. 배가 갈린 채 샘을 내려다보는, 놀란 그대로 굳어버린 시체가.

"안돼..."

그건 차라리 신음에 가까웠다. 안돼! 비명을 신호탄으로 제시카의 시체에서부터 불이 뻗어져나왔다. 헤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으로 샘의 옷을 잡아당겼다. 가야 해! 타오르는 화마가 비현실적이다. 바깥에서 문을 차서 여는 듯한 큰 소리가 들렸다. 샘! 연기 때문인지 콜록이는 소리와 함께 마일리가 먼저 뛰쳐들어왔다. 일순 천장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어금니를 문 채 헤일을 도와 샘의 옷을 물어 힘껏 당긴다. 뒤늦게 들어온 딘이 아예 샘의 몸을 들쳐업다 싶이 집에서 끌고 나왔다. 안돼, 제스! 제스! 처절한 목소리가 타오르는 재들에게 먹혀들었다. 손에서 떨어진 제시카의 메모가 불에 닿아 순식간에 타버렸다. 버티려고 몸부림 치는 샘을 억지로 끌고 나오며 딘이 119를 호출한다. 아래나 옆에 사는 이웃들이 천으로 입을 막은채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완전히 나오자 유독가스 탓인지 죽을듯이 기침이 터져나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도로 들어가려는 샘의 어깨를 붙든 딘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정신차려 멍청한 새끼야! 이가 망가질 정도로 악다문 샘이 욕을 씹어뱉었다. 젠장, 구해야 한다고! 당장 놔! 

"이미 늦었어! 데몬이 없었다고! 다시 들어가는건 미친 짓이야!"

뱉어지는 말들이 수직으로 내려꽂혔다. 몸부림을 치던 샘이 울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젠장, 제기랄, 망할- 휘청거리는 몸을 떠안은 딘이 입안쪽을 씹은채 타들어가는 건물을 바라봤다. 신고를 받은 구조대가 울리는 사이렌이 점점 가까워진다. 마일리가 다가와 딘의 다리에 몸을 바짝 붙였다. 군견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날과 똑같다. 메리가 죽었던 그 때와-

"우리 때문이야..."

새어나오는 소리에 딘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가지만 않았어도. 헤일이 허망한 눈으로 집을 쳐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일리가 입을 열었지만 샘이 딘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야, 새미- 한 번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성큼성큼 뻗는 걸음이 임팔라로 향한다. 잡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보던 딘과 마일리가 시선을 마주쳤다. 어쩌면 위로를 하는게 가장 최악의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뜻은 아니었어."

임팔라의 트렁크에서 무기를 챙기던 샘이 아래쪽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못 돌아올거라고 했던거. 늑대의 목소리는 재를 들이켜 바짝 말라있었고, 답지않게 어수선했다. 장전되는 샷건 너머로 소방차가 도착한다. 정말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허망한 목소리가 공중에 뜬다. 난 그냥... 딘을 만나면, 제시카한테 돌아가지 못할거라는 뜻이었어. 쉬어버린 소리가 고해를 하듯이 작아졌다. 샘은 묵묵히 다른 총을 집어들었다. 늑대가 젖은 바닥에 다리를 굽히고 몸을 말았다. 아무것도 보기도 듣기도 싫다는 듯이 머리를 집어 넣고 최대한 작고 꼼꼼하게, 마치 스스로를 가두듯이.





에피 하나씩 골라서 이런식으로 쓰고 나머지는 건너뛰고 그럴듯. 1편에 몰아넣어야했던 내용들인데 길어서 나눔. 기본적으로는 슈내 스토리라인과 똑같을..듯.


'연성 > Supernatur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샘딘 It's A Terrible Life 2.  (0) 2016.01.14
샘딘 / 황금나침반au 1.Pilot(1)  (0) 2016.01.14
샘딘 It's A Terrible Life 1.  (0) 2016.01.14
캐스딘  (0) 2016.01.14
샘딘 Crush on2  (0) 2015.10.06
Posted by 콩식빵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