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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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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임수경염. 센티넬은 천인(天人), 가이드는 윤인(輪人) 으로 대체합니다. 천인인 경염과 윤인인 임수. 윤인이 꼭 없어도 천인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설정. 적염군 사태 이후 성장이 멈춰버린 경염에 대한 이야기.










너무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 침전 속 나의 몸이 얼어버린 밤들이 있었습니다.




*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다.


7황자인 소경염의 '부작용'은 금릉 뿐만 아니라 강호에 까지 이야기가 오갈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7황자가 출정을 나갈 때마다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관한 말은 저잣거리에서 꾸준히 화제로 올랐다. 언제나 드높게만 칭해지는 천인의 불길함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몇 없었다. 혹자는 경염이 그렇게까지 전장을 헤매는 이유가 그 부작용 때문일거라고 수근거리고는 했다. 7황자의 상태는 불길함의 징조였으니 금릉에 머물러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황실의 품위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물론 경염이 출정이라는 이유로 궁에서 내쫓기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의 부작용 따위는 빛깔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황제는 천인이 아니었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에 대해 시기를 느끼고 있었다. 3대째나 천인인 황제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름에 부여된 의미를 중요시했다. 하늘이 점지해줬다던 능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황제의 의심은 커졌고, 죽은 기왕도, 내쫓기고 있는 경염도 그 시기의 여파가 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경염이 황제의 눈 밖에 난 것은 부작용 하고는 상관없었다.


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매장소로 위장하고, 그 위에 소철이라는 이름을 덧씌워 금릉에 들어온 임수는 아주 오랜만에 말을 잃었다. 빠른걸음으로 옆을 지나친 남자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 내관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작은, 심하게 어린 남자는 황자의 호칭을 듣고 있었다.


정왕. 용서해달라고 비굴한 말을 주워삼던 내관이 월귀비의 이름을 올린다. 옆에 있던 예황이 채찍을 들고 나서자 바짝 엎드렸던 몸이 계단을 굴렀다. 감히 월귀비의 이름을 팔다니, 오만함이 끝을 모르는구나. 운남왕부 군주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퍼지는 동안 관을 튼 덜 자란 몸이 궁노비에게 돌아가 있었다.


임수는 경염이 시선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걸 알면서도 눈을 돌리지 못했다. 7황자의 부작용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이 성장을 멈췄고, 더이상 머리카락 마저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 어린 몸으로 선두에 서 전장을 호령한다는 이야기. 천인의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의 일종이라는 이야기. 그의 윤인이 죽은 것이, 그 불길한 부작용의 원인이라는 이야기.


"도움은 고마우나, 내관 하나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소."


임수는 앳된 목소리를 들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관이 예황의 호통에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급히 액유정의 노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예황이 저보다 한끗으로 눈이 낮은 경염을 마주보고 고개를 저었다. 기왕의 사건으로 처치가 곤란하신걸 압니다. 아랫것의 일이라도 얽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차분한 말에 경염이 알아들었다는듯, 혹은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돌아가려는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한다. 이름이 무어냐. 정생이라는 답이 돌아올 동안 옆얼굴에 시선이 꽂혔다. 나이는? 열 한 살. 머릿속을 지나가는 어떤 가능성이 경염에게서의 주의를 돌렸다. 황자가 아끼는 액유정의 노비. 가능성을 잴 동안 마치 더이상 대답하지 말라는듯 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생.


임수는 뻣뻣한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는걸 알았다. 제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급하게 일어나 한 공수는 바르지 못했다. 정왕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소문의 7황자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한 손으로 마을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는 천인. 11년 전 부터 전혀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다는 불길한 존재. 황자라는 이름은 쉽게 가려지고는 했고, 그것에 불쾌해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경염은 그저 시선을 맞추려 고개를 좀 더 들어올렸다.


"당신은 누구요?"


창을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입을 떼지 못하는 임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예황이 나서서 대신 소개를 올렸다. 소철 선생.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는 얼굴에 임수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찮은 필부입니다. 모르시는게 당연하지요.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다. 자라지 않은 경염의, 11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주는 여파에 대한 것을. 경염은 꿈에서나 봤던 얼굴에 경계를 덧씌우고 있었고, 임수는 차라리 필부의 신분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눈칫밥을 먹으며 툭하면 금릉에서 쫓겨나는 7황자는 그에 비례해 감이 좋았다. 정생에게 물은 질문만으로도 주의를 샀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분명 경계가 더 심해질 것이다. 황자에게 제 때 예의를 차리지 못한 것을 신경 쓰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게 최선이다.


"궁문을 넘은데다 예황군주와 함께 있는데, 평범한 필부라. 궁을 자주 비우는 탓에 내가 모르는 걸 테지요."


다행히 차분한 목소리는 딱딱할지언정 의심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화제는 예황의 덕으로 정생에게 다시 넘어갔다. 순하고 학문에 뜻이 있기에 가끔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매끄러운 말을 듣던 임수가 정생을 일으켰다. 1년 중 금릉에 머무는 시간이 채 네 달이 안되는 황자였다. 정왕부는 궁의 바깥에 있고, 친왕이 아니니 궁에 있는 시간은 그것보다 더욱 적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액유정의 노비에게 정을 줄만큼, 맞닥뜨릴 일이 그리 많을까.


임수는 정생을 액유정에서 꺼내주겠다 약조했다. 이어지는 예황의 말은 줄줄이 맞는 말이었다. 액유정의 노비를 꺼낼 수 있었다면 황자인 경염이 진작에 그리 했을 것이다. 임수는 제 언행이 황자를 기만하는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지요. 딱딱하게 굳은 어린 얼굴의 시선에 서리가 낀다.


임수는 그 시선을 받아서야 세월을 느꼈다. 지나치게 곧은 자세와 뻣뻣하게 들린 목. 저보다 큰 사람을 내리 누르는 위압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잘 웃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황자라지만 어린 몸에, 금릉의 모든 사람들이 7황자가 받는 대접을 알고 있다. 기만 당하는 일이 익숙해졌을 것은 당연했다. 자라지 않는 황자가 건너왔을 길은 굳이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 서슬퍼런 시선은 몸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었다. 시선이 아래에 있더라도 기만 당해 좋을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무시당하는건 괜찮겠으나, 황자의 신분이다. 제가 기만 당하는 것을 그냥 놔둔다면 황실이나 정왕부에도 여파가 갈 것이 당연했다. 그런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다. 매장소의 얼굴이 미소를 만들었다.


"전장에 자주 나가 궁에 신경 쓸 겨를도 없으실텐데, 제가 정생을 빼온다면 전하도 심려를 하나 덜지 않으시겠습니까."


경염이 눈을 내려깔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임수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액유정의 노비에게 선처를 바라는 말은 상황에 맞춰 꺼내면 될 일이다. 황제에게 빚을 만들 일은 많았다. 자신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권모술수를 싫어하는 자신의 천인에게 환심을 사기에 아랫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기대하지. 결국 떨어지는 말에 임수의 고개가 숙여졌다. 짧은 대담은 그것이 전부였다. 황자는 저보다 작은 궁노비를 감싸듯이 품고 자리를 떠났고, 임수는 곧은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이 있나보군요."


예황의 목소리가 흘렀다. 임수는 그저 얌전히 웃었고, 그것으로 답은 충분이 되었다. 마주보도록 몸을 돌린 군주의 눈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들키면 죽을만큼 맞을걸 알면서도 책을 훔치는 아이긴 했지만, 액유정에서 노비를 꺼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당하게 꺼내오겠노라 장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나 강좌맹의 종주가 노비를 구하여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7황자는 정이 많으니 어떤 이유라도 갖다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쪽은?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몇 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시국이었고, 사실 궁노비에 대한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예황은 질문을 넘겼다. 대신하여 경염이 사라진 복도가 까만 눈에 담겼다.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왕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과는 다른 분입니다."


소문. 임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예황은 정왕에 대해 알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 이후 경염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마치 그 전까지는 누군가가 밀어줬던 것처럼, 그 누군가가 그가 움직여야 할 이유였던 것 마냥. 이름도 언급할 수 없도록 사라진 사람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예황은 운남왕부로 보내졌고, 정왕은 단지 이유를 알고싶다고 청한 것 만으로 북방으로 밀려났다. 몇 년이 흘러 다시 마주 본 7황자에게서는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황은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경염의 앞에서 울 수가 없었다. 안부를 물을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황자에게 갖춰야 할 예를 취했고, 경염도 군주에게 해야 할 예우를 갖췄을 뿐이다.


"저잣거리에서는 7황자가 12년 전 부터 멈춰있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하지요. 궁에서는 그것을 황제에 대한 무언의 항명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천인의 부작용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병을 앓았다. 황제에게 그 부작용은 경염이 천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겉모습은 12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할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인데 머리에 벼루를 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정왕이 그것에 대해 항명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정도는, 궁에서 돌아다니는 말들이 사실이라는걸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저 똑같다는 말만 하였다. 12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임수는 눈에 들어오던 경계어린 눈을,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굳어버린 얼굴을 떠올렸다. 12년. 바퀴를 잃은 수레는 땅에 처박혔고, 바람은 나무를 삭혔다. 임수는 질문이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동안은 침묵이었다. 태황태후가 올린 수아라는 이름에 정왕까지 연달아 보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듯 예황이 고개를 숙였다.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일텐데.


먹혀들어갔던 입술이 돌아왔다. 숙였던 고개를 든 예황이 입꼬리를 올렸다. 처지가 좋지 못해도 황자입니다. 다음에 만나실 때는 제대로 예우를 갖추는게 좋을듯 합니다만. 임수의 얼굴이 아래로 기울여졌고, 예황이 근처를 지나가던 내관을 불렀다. 소철 선생을 궁 밖까지 데려다 주시게. 고개를 조아린 내관이 임수의 앞에 서자 예황이 돌아섰다.


살펴가십시오. 단촐한 인사가 예황의 등을 따랐다. 내관은 눈치껏 사람이 없을 길목으로 임수를 이끌었다. 12년 만에 돌아온 궁은 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찬 바람이 불었다.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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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같이 살기로 했다고?"


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부자우는 이제 거의 질식해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웃으면서 테이블을 치지 않으려고 평생 쓸 인내심을 모두 그러모으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근언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바빠서 며칠 연락 못했다고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두 달 연락 안하면 우체통에 들어있을지도 모를 청첩장을 생각하며 자우가 차를 마셨다.


훈연에 대한건 잘 알고 있었다. 통시에서 범죄자문을 할 당시에 자우도 옆에 있었고, 그 건실한 청년이 근언을 구하려다 팔을 다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옆에 있는게 다른 흉악 범죄자였어도 몸으로 막았을 훈연의 성정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설마 훈연이 아니라 근언에게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걸 문제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전보다 얼굴빛이 이상하게 좋아진 근언을 앞에 두고 자우가 턱을 괴었다.


"언제 소개 시켜줄거야?"


근언은 미간을 구겼다. 누군지 알잖아. 그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식으로 소개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걸 눈치채려면 얼마가 걸릴런지. 아마 기대도 안하는게 좋을 것이다. 괴상한 범죄 심리학자가 가진 유일한 친구의 눈동자가 드르륵 굴러갔다. 굳이 근언에게 소개 받을 이유도 없나. 생각하는 새에 시킨 요리가 나왔다. 실고추로 장식한 생선찜에 근언이 젓가락을 들었다.


조수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좀 웃긴 정도였는데 아예 같이 살기로 한데다 그 보근언이 일일이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근언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투였고, 자우는 제 행동이 이상한 이유를 모른다는 부분이 가장 웃긴 점이라고 생각했다. 꽃 식인마에게서 벗어난 후 통시의 저택을 요양처로 정했을 때만 해도 몇 개월 안에 죽는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사람 일이라는건 정말 어떻게 될런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사람도 생선 좋아한데? 너는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은 매끼마다 생선만 먹고 살 수는 없어."


흰 생선살에서 가시를 분리해 내며 묻자 근언이 입 안에 들은 것을 삼켰다. 다른 것도 해야지. 자우의 젓가락이 삐끗했다. 아연실색한 자우의 표정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요리를 해주겠다고? 네가 먹을 것도 아닌데? 황당해서 반 톤은 올라간 목소리에 근언이 얼굴을 구겼다. 그럼 팔을 다쳤는데 달리 어떻게 해. 너무나 상식인 같은 언행에 자우가 젓가락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전 모르는 사람하고는 밥을 안먹어서...


반쯤 일어나는걸 도로 앉히니 우려가 쏟아져 들어왔다. 너 고기 같은걸로는 한 번도 요리해 본 적 없잖아. 내가 요리사 알아봐줄까? 출장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많아. 제시간에 연락 주면 네가 한 것 처럼 꾸며주는 것도... 나불나불 떠드는 입을 익숙하게 넘겨버린 근언이 생선살에 소스를 찍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안해도 돼. 이상황에서 가장 믿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담는 입을 어이가 없다는듯이 바라본 자우가 얌전히 젓가락을 들었다. 이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안들어먹을 것이다. 주제를 넘기는 수 밖에.


"그럼 그 훈연씨는 언제 경찰서로 돌아가는데?"


근언의 젓가락이 멈췄다. 곧바로 움직이긴 했지만 자우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계약은 3개월이야. 그렇다면 두 달 남짓이 남았다. 콧소리를 낸 자우가 숟가락으로 탕을 떴다. 얼마 안남았군. 훈연이 경찰서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훈연은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듯한 경찰의 모범이었고, 근언의 조수일은 팔이 완치 될 때까지 커리어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승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통시로 돌아가겠지.


자우가 눈치를 봤지만 근언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근언의 상태를 표정만으로 판단했다면 아마 자우가 근언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곁눈질한 자우가 헛기침을 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는걸 인정해야할 것 같았다. 다시 일 얘기인데.


"윤서인네 회사에서 뭐가 좀 터진 모양이야."


근언의 얼굴이 구겨진다. 거의 몇 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닮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복누나의 얼굴을 한쪽으로 치워버린 근언이 젓가락을 놀렸다. 그냥 무역회사잖아. 터질게 뭐가 있다고.


"사원 하나가 죽었다나봐."

"그래서?"

"누가 덮으려고 하고 있어."


젓가락에 걸린 음식을 집어넣고 자료를 꺼내자 근언이 받아들였다. 아직도 연락해? 무심하게 나온 목소리에 자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받았다던데. 얼마전에 있었던 부재중 전화를 생각해 낸 근언이 글자들을 훑었다. 일상 걸려오는 안부전화인줄 알았더니 맡길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없이 자료를 넘기던 근언이 반쯤 남은 요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 까탈스러운 입맛에 맞춰서 일부러 찾아온 집이다. 30분도 채 안있었는데. 근언은 그렇다 치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점심부터 굶은 자우의 황망한 표정을 무시한 근언이 자켓을 챙겨들었다.


"맡으려면 얘기 해봐야 돼서."


세상 혼자 사는듯한 등이 망설임 없이 차키까지 들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자우의 젓가락에서 살이 미끄러졌다. 몇 분 후에야 얌전히 음식을 주워 입에 넣은 자우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정표 앱에서 정확히 두 달후의 날짜를 선택한 뒤 글자를 써넣는다. 청첩장이 와도 놀라지 말 것. 마음속으로만 성호를 그으며 자우가 앱을 종료했다.





*




근언은 잔뜩 불만인 표정이었다.


훈연은 근언을 의자에 앉혀놓은채 한 팔로도 멀쩡하게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근언이 손을 움찔거릴 때마다 보지도 않고 괜찮다고 먼저 말했다. 뚱한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빈공간에 척척 물건들을 끼워넣는걸 바라보던 근언이 무릎에 놓인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훈연은 어느정도 예상은 했어야 했다. 훈연은 근언이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면-근언은 그걸 자각하고 있지 않더라도-자신이 그걸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을의 입장이어서 그런건 아니었고, 결국에는 그 전날 복도에서 봤던 그 창백한 얼굴 때문이었다. 그런걸 한 번 보면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밀어내는 짓은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총을 쏜 건 근언인데 왜 제가 이러고 있어야하는지, 훈연은 장장 하룻동안 그것을 고민했으나 결국 동거를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잘난 보근언은 훈연의 대답에 그럼 거절하려고 했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머리라도 짚고 싶었으나 아직 자신도 파악 못한 동거를 허락한 이유까지 줄줄이 떠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훈연은 입을 다물었다. 근언의 입장에서는 훈연이 거절할 이유가 없던게 맞았다. 삼시세끼 챙겨주고 옆에서 배려해준다는데. 거기다 경찰 관계자에게 연락이 오거나 책을 빌리러 쓸데없이 엘레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사가 그런 합리적인 이유로만 돌아간다면 훈연이 팔을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랫층은 이제 비었고, 세를 놓으면 며칠 안으로 입주자가 들어 올 것이다. 당연히 짐을 옮겨야 했는데, 몇 개 되지도 않은데다 겨우 윗층으로 옮기는 것이니 훈연은 사람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박스에 임시로 테이프를 감으면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었고.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서 옮길 준비를 하는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당연히 근언이었다. 도와줄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니 훈연은 근언이 도와줬으면 하는 짐들을 따로 빼놓았는데,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팔을 잡혀 질질 끌려나왔다. 올라가 있으세요.


당황해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레베이터 문이 닫혔다. 집에서 대놓고 쫓겨난 훈연은 바로 다음층에서 내려 계단으로 돌아왔다. 제가 옮긴다니까요! 복도를 울려댈 정도로 커다랬던 말싸움의 승자는 훈연이었는데, 훈연의 생각과는 다르게, 훈연이 밀고나가면 이기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근언이었다. 그건 근언이 훈연을 이해하고 말고에 대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근언은 아직까지 왜 훈연이 부득불 자기가 짐을 옮긴다고 소리를 질러댔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팔을 다쳤다. 근언의 팔은 멀쩡했고, 짐을 옮긴다고 해서 근언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딜봐도 근언이 짐을 옮기는 것이 타당했는데 훈연은 화분 같은 것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짐을 자신이 들었다. 심지어는 정리도 도와주지 못하게 억지로 앉혀놨고.


근언이 어떤 불만을 품고 있던 훈연은 알아서 정리를 마쳤다. 사실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것 치고는 놀랍도록 빨리 끝난 편이었다. 훈연은 팔을 다친 다음에도 계속 혼자서 살았고, 따라서 정리 쯤은 문제 없었다. 근언은 이제 훈연이 사실은 한 팔로 요리를 할 줄 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집이 넓어서 다행이네요. 다 안들어갈까봐 걱정이었는데..."


하기야 다 안들어갈 것 같았다면 근언이 같이 살자는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언은 아까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책을 드디어 덮고 일어났다. 근언이 뭔가 말을 하기 전에 훈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침대가 들어갈 만한 곳이 없네.


"그건-"

"-같이 자도 된다는 말을 하시려는거면,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걸 말해드리죠. 절대."


단호한 목소리에 근언의 입이 다물렸다. 정말로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군. 한숨을 쉰 훈연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근언의 침대에 앉았다. 저는 옆에 누가 있으면 잠이 잘 안와서요. 주워삼은 변명은 그럴싸했다. 훈연은 이제 어느정도 근언의 사고방식을 알았다. 안지 얼마 안된 사람하고 침대를 나눠쓰기는 싫다는 주장을 그대로 한다면 아마 같은 침대를 나눠쓰는 것에 대한 합리성을 역설하려고 들 것이다. 근언의 침대는 넓었으므로 우려하는 접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위생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블라블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잠이 안온다는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대꾸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제가 카우치에서 자죠."


훈연이 틀렸다. 팔짱을 낀 근언이 뒷목이 당겨오려고 하는 훈연을 내려다보았다. 떠보는 말도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걸 알기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침대에서 주무시죠. 어금니 사이에서 새어나온 말에 근언이 보란듯이 카우치에 앉는다.


"회복이 먼저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깁스를 풀 때 까지는 훈연씨가 침대에서 자고, 그 후로는 다시 상의하는걸로 하는게 좋겠군요."


좋기는 개뿔이. 혼자서 결론을 내놓고 책을 집어드는 작태에 기함한 훈연이 목끝까지 올라온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결국 근언의 뜻대로 될 것이다. 몇 번의 말싸움으로 터득한 것들을 되뇌이며 훈연이 허리를 폈다. 제가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자는게 거슬리시면, 다시 돌아가는 수 밖에 없겠네요.


근언의 눈썹이 꿈틀댄다. 침대를 들여올 공간이 없으니까요. 태연하게 말을 이은 훈연이 내용물을 꺼내놓고 황망히 입을 벌리고 있던 박스를 집어들었다. 옮기려면 옮길 수 있었다. 해가 지긴 했어도 내일 특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지도 않았으니. 긴 다리로 집을 가로질러 드레스룸에서 옷을 꺼내오자 근언히 급하게 일어나 옷걸이들을 뺏어들었다. 이렇게 나올겁니까? 이를 바득바득 가는 듯한 표정에 훈연이 웃었다. 그럼요.


근언이 팩 몸을 돌리더니 제 침대에 정장째로 올라가 누웠다. 단단히 삐진 모양새였다. 참지 못하고 어린애마냥 웃어버린 훈연이 가장자리에 앉아 근언을 쳐다봤다. 작은 매트리스 정도는 들여올 수 있을거에요. 전 거기서 자죠. 안마주치려고 작정한듯 구석으로 몰려갔던 근언의 눈이 돌아온다.


"선생님이 해주는 배려가 싫은게 아니에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형광등 대신 스탠드가 켜진 방은 그림자가 반쯤 빛을 먹어들고 있었다. 훈연은 근언이 뭔가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훈연이 몸이 불편하니 멀쩡한 제가 하는게 나을거라는 계산에서 오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다. 훈연도 근언의 팔이 불편했다면 똑같이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나 짐을 옮기거나 요리를 하는 것 같은 노동이라면 더더욱.


그냥 할 수 있는건 제가 하고 싶어요. 가만히 나오는 말은 얼핏 가볍게도 들렸다. 도움을 받는게 부끄럽거나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팔을 다친건 훈연의 잘못이었고 두 팔이 멀쩡한 사람보다 약한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앉아있고 싶지는 않았다. 훈연은 앞으로도 근언의 배려를 수없이 거절할 것이다. 원치않는 호의는 거절할 수 있다. 억지로 호의를 받는 관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근언이 이해해주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장시간 침묵이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창문의 밖에서는 차들이 지나가는 일상적인 소리가 들렸다. 근언은 말 없이 훈연의 눈을 보고 있었다.


불시에, 훈연의 손이 뻗어졌다.


의식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근언의 머리는 침대에 눕는 과정에서 흐트러져 이마로 내려와 있었고, 그걸 정리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그림자를 만들자 근언이 반사적으로 물러난다. 중간에 손을 멈춰서야 얼마나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은 훈연이 어색하게 손을 접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좀..."


이마쪽을 손짓해보이자 근언이 반쯤 일어나 머리를 매만졌다. 너무 무례했죠. 머슥하게 뒷머리를 만진 훈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편의점에 갈건데 부탁할게 있냐는 말에 근언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고개를 끄덕인 훈연이 현관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딜봐도 탈출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근언이 급하게 소리를 내 발을 잡았다.


돌아오시면, 상의 할게 있어서요. 사건 관련으로... 훈연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 영원 같이 느껴졌다. 진한 눈썹이나 선이 확실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근언이 협탁을 더듬어 파일을 집어냈다. 정리할 때부터 눈에 띄었던 것이 등장하자 훈연이 감탄사를 낸다. 사건 파일이었구나. 분위기가 풀어지는 느낌에 근언의 어깨가 내려간다. 현관문 앞에 선 훈연이 눈이 접히도록 웃었다.


"빨리 다녀올게요."


달칵, 문의 잠금장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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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연은 장장 30분간 의사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장저우로 옮긴 이틀째날 근언이 건네준 명함의 주인공이었는데, 실력은 좋은듯 보였지만, 아니, 깁스를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 구르는 바람에 구급차에 실려왔다면 어느 의사든 30분 정도는 잔소리를 했을것이다. 훈연은 고개를 숙이고 쏟아지는 잔소리를 맞았다. 뒤에 선 근언이 미안했는지 자꾸 시선을 힐끔댔다.


총을 피하려다 넘어졌다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신발 밑창이 미끄러워 넘어졌다는 변명은 정말 그럴듯 해 보였다. 어쨌든 실제로 총상이 있는게 아니었으니 넘어져서 다친게 맞기는 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총탄과 총은 근언의 침대 밑으로 들어갔고, 그제서야 안 사실이지만 근언이 사는 층에는 입주자가 없었다. 새건물이라 입주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게 다행중의 다행이었다. 구급대원들은 넘어졌다는 훈연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창백히 질려서 구급차까지 따라오려는 근언에게 이걸로 죽지는 않는다면서 만류했다. 근언의 얼굴만 봐서는 훈연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사람 같았다. 구급대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총에 맞을뻔 했으니 틀린말도 아니긴 했지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근언은 꿋꿋하게 구급차를 같이 타고 병원으로 왔고, 처치는 제 때 끝났다. 다행히 뼈가 전부 어그러졌다거나 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예정 됐던 것 보다 한 주 정도 더 깁스를 해야한다는 말에 훈연의 어깨가 쳐졌다. 완치는 그렇다쳐도 깁스는 앞으로 3주면 풀 수 있었는데. 근언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같이 있었으면 좀 잡아줬어야지 대체 뭘 했어요?"


의사는 불시에 화살을 근언에게 돌렸다. 근언은 눈을 피했고, 훈연은 근언은 나중에 온 거라면서 손사레를 쳤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찬 의사가 처방을 내렸다. 어디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바로 오세요. 물리치료 꼬박꼬박 오고. 훈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가봐도 괜찮다는 말에 훈연이 일어섰다. 정말 긴 하루다.


"...미안합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에서 다시 사과가 들려왔다. 훈연은 내려가는 숫자를 쳐다보다가 근언에게로 눈을 돌렸다. 단정하게 서있지만 눈도 고개도 한없이 내려가 있다. 픽 웃어버린 훈연이 고개를 저었다. 사격 실력이 형편 없던데요.


간단한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상자를 벗어나자 평소와는 달리 근언이 훈연의 뒤를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었다. 차에 도착하자 훈연이 뒤를 돌았고, 근언은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문 안으로 몸을 구겨넣은 훈연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내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차에 들어오니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근언은 차에 타고도 얼마간 시동을 걸지 않았다. 시트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훈연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근언은 복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얹어진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훈연은 지금이 옳은 타이밍임을 알아챘다.


"왜 총을 가지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경찰이라서요. 덧붙인 말에 근언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죄책감 탓인지 아까부터 마주치기가 영 힘든 눈이다. 민간인의 총기 소유는 불법이다. 지금은 조수역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말마따나 훈연은 경찰이었다. 훈연도 공무중이 아니면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것이 근언의 침대 밑에 있다는건 보통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에서 살았을 때 허가 받았던 총기에요. FBI의 자문이어서. 목소리만큼은 변함없이 깔끔하다. 훈연은 왜 FBI의 자문이 총기를 갖고 있는지나 총기를 어떻게 중국에 반입했는지 까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주 중대한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총으로 죽었을 뻔 했는데도 훈연은 아직 신고를 넣을 생각은 없었다. 추문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지 근언이 훈연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없었던 사이에 신변의 위협이 될만한 사건을 맡았나요?"


그래봤자 길이 갈린지 2시간 남짓이다. 그랬을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훈연은 일단 그렇게 물었다. 근언은 약간 망설이는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훈연은 넘어갔을테지만, 거짓말을 모를 정도로 둔감한 사람은 아니다. 훈연은 눈을 굴렸다.


"그럼 악몽인가."


혼잣말이었지만 좁은 차안에서는 크게 들렸다. 어차피 몰래 말할 사항도 아니었다. 훈연은 뱉어놓고 조심스럽게 근언을 살폈다. 반쯤은 추론이었다. 훈연은 근언이 총을 쏘기 전에 그가 침대에 누워있는걸 봤고, 이른시간이긴 했지만 서춘오에 대한 수사를 하면서 둘의 수면패턴은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워낙 예민한 사람이니 훈연이 20분간 문앞에서 서성였다면 인기척 때문에 반쯤 깼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 외의 근거는 좀 터무니 없는 것들이었다. 부축당할 때 본 팔의 흉터. 한쪽에 크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마치 난도질 당한듯한 모양새로 있었다. 그리고 간요가 말했던 유령저택에 관한 것도. 간훤의 얘기는 말도 안되는 것 처럼 들렸지만 그냥 과장됐을 뿐이라면 이상할 건 없었다. 기묘하게 마른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훈연은 수사 첫날에 근언을 봤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직 살이 덜붙어서 약간 패인 듯 했던 눈주변은 응당 그래야하는 것 보다 어두웠다. 지금은 괜찮아보였지만 아마 아직도 정상체중에는 못미칠 것이다. 다이어트를 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심한 스트레스의 반작용이라고 보는게 근언의 이미지에 들어맞았다.


억지로 끼워맞추는 느낌이 강했으나 훈연은 그것들이 근언이 총을 가지고 있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훈연은 근언의 과거에 대해 알지 못했다. 메릴랜드 대학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자이니 월반을 좀 했을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여러번 반복했듯이, 훈연은 감이 좋았다. 근언이 눈을 감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말해줄 생각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따져도 괜찮았다. 일일이 캐묻거나 화를 내도 되었다. 사실 훈연이 지금당장 조수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근언은 할 말이 없었다. 훈연은 신변에 위협을 당했고, 구두뿐인 장담은 믿기가 어렵다. 총에 위협당하는 것은 절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훈연은 잠시 근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저녁은 먹고 들어가죠."


생선으로. 가벼운 말에 근언의 눈이 떠졌다. 훈연은 시선을 모른척 했다.






*





근처의 시장은 시끄러웠다. 한 시간 만의 쾌거에 훈연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지금이라도 차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겠냐고 세 번이나 물었던 근언은 무릎이라도 짚고 싶은 얼굴이었다.


근언은 훈연이 진짜 시장을 찾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언이 아는 근처의 '시장'은 음식을 살 수 있는 5층짜리 대형마트와 백화점이었고, 그곳은 걸어서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훈연은 시장을 찾아야한다며 위치를 모르냐고 물었다. 근언은 눈을 깜박이다가 휴대폰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검색해 보죠.


위치는 나왔지만 아주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다. 약간 거기서 거기같아 보이는 건물들과 길도 한몫 했지만 시장이 넓어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훈연은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고, 근언은 30분 전 부터 약간 지쳐서 훈연의 뒤를 따라갔다. 헤매서 그렇지 시장도 얼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들어가는 훈연을 억지로 따라가며 근언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꼭 시장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훈연은 식재료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었고, 음식의 품질을 알아챌만큼 입맛이 예민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마켓이 어디있는지 몰랐을 때는 인터넷으로 식재료를 주문했다. 부득불 시장에 가야한다고 길바닥을 헤맨 이유는 근언을 메어두기 위해서였다.


훈연은 근언이 자신을 피할 것을 알았다. 총에 맞을 뻔한 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훈연이 시장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피곤하긴 해도 못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죄책감이 남아있던 근언은 거기에 대고 안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고, 물론 그것까지 예상한 처방이었다.


근언은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 훈연이 먼저 피할거라고 생각했음이 당연했다. 훈연도 그래야한다는걸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근언이 총을 쏜 것은 실수고, 다시 그러지 않을거라는 것 정도는 빌라의 복도에서 눈치챘다. 훈연은 경찰이었고 범인이나 용의자가 총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은 질리도록 받았다. 무서워하길 바랬다면 수류탄 정도는 들고왔어야 했을 것이다.


증거로, 훈연은 오늘 아침 아주 태연하게 근언의 집에 열쇠를 꽂았다. 근언은 지난 밤 전혀 자지 않은듯한 얼굴로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평생에서 세 번 정도나 지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너무 일찍 왔나요? 가볍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근언은 입을 다물었고, 곧 노트북을 닫았다. 준비하겠습니다.

 

"맛있을까요?"


훈연이 사과를 들이밀었다. 장 볼 목록을 적기는 했지만 꼭 그것만 사야하는건 아니었다. 근언은 인상을 살짝 구긴채 사과를 노려봤다. 너무 귀찮게 구나. 근언은 살 것도 없는데 훈연이 가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여지없이 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머슥하게 치우려는 찰나 근언이 사과를 제 손으로 옮겨왔다. 손으로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났다.


맛있을겁니다. 사과를 돌려주자 가판대에 서있던 주인이 당연히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전부 최상품이니 걱정하지말고 사가라는 홍보에 입꼬리를 올린 훈연이 몇 개를 골라냈다. 껍질째 먹어도 상관없으니 집에서 혼자 있을 때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가판대에서 멀어지며 훈연이 사과를 두드린 이유를 물었다. 맑은 소리가 나면 신선한거라는 대답에 훈연의 입이 동그래졌다. 아는게 많은줄은 알았지만 사과 감별법 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늘 사야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건 식기였다. 군것질거리나 구경거리들을 그냥 지나치며 제일 첫번째로 보이는 식기판매점에 몸을 구겨넣자 근언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무젓가락으로 쓰레기통이 넘칠 지경이어서요. 젓가락들이 걸려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근언이 물음표를 띄웠다. 계속 나무젓가락을 쓰고 있었습니까?


"어차피 집에서 먹는 음식이야 배달음식이나 테이크아웃이니까요. 산다고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파는건 조금 그래서."


무늬가 없는 것을 아무거나 골라 세 쌍쯤을 든 훈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통시에 있을 때는 훈연을 불쌍하게 여긴 간요의 어머니가 간훤을 시켜 음식을 가져다 주었지만, 비행기를 타야하는 거리이니 제대로 된 음식을 보내주는 것에는 한계가 조금 있었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면서 택배로 장조림 따위를 보내주겠다는 통화를 하기는 했어도 오려면 아직 삼사일은 남았을 것이다. 안그래도 바쁜 간요에게 음식을 부탁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결국 선택지는 좁다. 제대로 된 식기들은 아직 통시의 집에 있었다. 이사를 온게 아니었고 식기 정도야 사면 되는 일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내친김에 그릇들도 둘러보려는데 근언이 뒤늦게 사과 봉지를 가져갔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훈연이 물결무늬가 있는 접시를 집어들었다. 처음 자취 했을 때 샀던 접시보다 두 배 가량 비쌌다. 경찰의 박봉으로는 조금 무리인가. 도로 내려놓는데 시야에 스친 근언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슨 문제라도."


떨떠름한 목소리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말 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훈연은 얼굴을 구겼다. 뭐를? 근언이 훈연의 손에서 젓가락과 그릇을 뺏어들더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오랜만에 나온 무례한 행동에 훈연의 얼이 빠졌다. 뭐하시는... 근언의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여분은 제 집에 있습니다. 훈연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서너개 떠올랐다.


"깁스를 뺄 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지내죠."


아주 뜬금없는 주장이었다. 훈연은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수습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런 문장이 튀어나왔는지 짐작이 안됐다. ㅇ,왜... 멋대로 걸음을 옮기는 근언을 따라가며 훈연이 말을 더듬었다. 불시에 멈춰선 근언이 훈연을 돌아봤다. 식사 때마다 올라오는 것보다 편할 테니까.


"ㄱ,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아예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근언이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좀 벌어진 탓에 목소리가 커졌다. 치이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통과하며 따라잡으려니 어이없음도 커졌다. 정말이지 요리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일이 일이다 보니 혼자 살 때도 하루에 한끼 이상은 밖에서 먹었고, 한 주를 더 하고 있어야하긴 했지만 깁스를 풀기 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일단 깁스를 풀면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밥을 챙겨주는건 차를 탈 때 조수석을 열어주거나 장을 볼 때 짐을 들어주는 정도의 배려가 아니었다. 거기다 같이 산다니. 어떻게 논리가 비약하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팔을 다친건 제 문제고,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제가 당신한테 총을 쐈죠."


훈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에 대한 사죄로 하죠. 뻔뻔한 얼굴이다. 어제 차 안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이 맞나 싶어 훈연이 기함을 토했다. 근언은 더 들을 것 없다는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훈연은 제자리에서 머리를 뒤섞었다. 말들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다.


어차피 아래층에 살고 있으니 식사시간 때 마다 올라가는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지,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식사를 대접 받아야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총은, 근언의 잘못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런식으로 갚을 필요는 없다. 뒤늦게 쫓아가며 훈연이 몇 번 목소리를 내었다. 선생님, 선생님! 다리는 제가 더 긴대도 길이 복잡해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식사따위를 챙겨주고 싶어하는거지? 간요의 어머니가 훈연의 식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훈연과 간요는 거의 같이 자라다 싶이 했으니까. 하지만 근언은. 거기까지 생각한 훈연이 불시에 걸음을 멈췄다.


근언은. 가까운 사이인가?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조금 얼얼했다. 그런가? 갑자기 생각이 복잡하게 꼬였다. 아주 먼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장저우에 와서는 하루에 적어도 6시간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까. 하지만 훈연도 근언도 서로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었고, 사적인 대화라고는 훈연이 책을 빌려가거나, 뭐 겨우 그정도가 다였다. 훈연이 매끼를 밖에서 사먹고 있다는걸 이제서야 안 것만 봐도 결론은 뚜렷했다.


하지만 훈연은 아까까지 근언의 옆에서 걸었다. 총으로 위협당한 이틑날에.


심지어 훈연은 자신이 총으로 위협당한 이유도 알지 못했다. 총이 무섭지 않은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럴만한 사이였나? 근언의 머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수 일을 그만두지 않는건 그럴만 했다. 하지만 시장에 끌고 나오는건? 훈연은 그 이유를 다시 생각했다. 근언이 거리를 둘 걸 알아서였다. 그건, 보통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둘은 일만 하면 되었다. 근언도 훈연도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있었고, 근언이 훈연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뭔가가 바뀔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공과 사를. 훈연의 입술이 먹혀들어갔다. 다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걸 구분하며 근언을 대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근언은 그렇게 하고 있었던가. 질문이 돌고 돌았다. 강등 당하거나 계속 통시에 있는 서에 있기에는 아까웠기 때문에 조수로 골랐다고 했다. 능력을 높게 봐줘서. 이제와서 그걸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훈연은 근언이 했던 다른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근언이 저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명확했다. 그렇게 잘해주는데 눈치도 못챌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자신은?


둘은 함께 수사를 한다. 근언은 훈연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다. 훈연은 아무렇지 않게 근언이 열어주는 조수석으로 들어간다. 훈연은 근언의 책을 읽는다. 근언은 훈연에게 총을 쐈다. 훈연은 근언을 시장에 끌고왔다. 거리를 두기 싫어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갔다. 퍼뜩 정신을 차린 훈연이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근언은 안보이게 된지 오래다. 머리를 뒤섞은 훈연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빌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에 묻혀버렸다.




두룹두뚜 뚜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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