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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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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윈이래

카테고리 없음 / 2016. 10. 17. 19:39


그 발언은 완벽하게 부적절했다.

카라는 영문을 모른채로 끊임없이 아니, 아니, 네가 왜 그런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절대 아니야, 따위의 말을 뱉어내고있는 윈에 의해 강제로 사람 없는 복도로 떠밀리고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카라의 단화는 유리문을 넘어서야 겨우 멈췄고, 물음표가 가득한 파란 눈은 이제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절친한 친구에게 향해있었다. 윈은 할 수만 있다면 발이라도 구르고 싶은 것 처럼 보였다. 대신에 윈은 볼륨을 죽여서 카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한거야!

카라는 당황했다. 말 끝을 늘이며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생각할 동안 파란 눈이 이리저리 굴려다녔고, 약간 패닉한 상태의 입에서는 끊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어 그러니까... 설마 너...?

거기까지였다. 윈은 용감하게도 말이 더 이어지기전에 외계인의 입을 제 손으로 막아버렸다. 윈의 거한 한숨을 통해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카라의 눈썹이 쳐졌다. 땅 끝까지 쳐질 기세로 윈이 팔을 늘어뜨리자 카라가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해. 윈은 그냥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괜찮지 않았다. 전혀.

카라는 정말 그렇게 큰소리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임스를 좋아해? 목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카라는 자신이 그런말을 하고 있는줄도 몰랐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윈은 죽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말을 부정하며 카라와 자신을 그 시선들에게서 밀어내는 것 정도였다. 어쩌면 모두가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에 띄지 않게 일 또는 비디오 게임이나 하는 지루한 기술부 직원에 대한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임스의 사무실 유리가 카라와 자신의 목소리를 줄여버렸을 수도 있었다. 윈은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지금 과민반응 중이다.

윈은 그냥 검은 모니터의 각도를 조절해서 그 끝내주는 뒷태를 반사시켜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너무 많이 집중해서 뒤에서 카라가 오는지도, 그녀가 그를 지난 1분동안 열 번은 넘게 부르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뿐이다. 사실 윈은 거의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비록 의자에 기대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카라는 아무것도 없는 화면에서 윈이 대체 뭘 보고있는지 궁금했고, 윈이 보이는건 카라도 보였다. 카라의, 그러니까, '제임스를 보고 있는거야?' 질문은 타당했다. 검은 화면에서 움직이는거라고는 물론 제임스 뿐이었다. 문제는 윈의 반응이었다. 그는 거의 의자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고, 모니터를 의미없이 휙 돌려버린 다음 말을 더듬었다.

카라는 그녀의 탐구본능을 좀 더 깊게 묻어둬야만 했겠지만, 불운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의 추궁-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일은? 제임스가 뭔가 했어?-과 몇 번의 더듬거림은 그 후 몇 분간 이어졌는데, 윈은 바보같은 목소리로 그게 그러니까를 열 번 넘게 말했고, 아무리 카라라도 그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추론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추론이라기 보다는 감이었다. 카라가 그걸 '추론'했다면 그렇게 무신경하고 큰 목소리로 문장을 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미안해. 그냥 보고 있길래, 그게..."
"나도 알아, 카라. 그냥... 내가 미안해. 과민반응한거."

카라는 아니라며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좀 더 사려깊었어야 했거나 아니면 눈치가 좋았어야했다. 윈은 벽이 제 머리를 집어삼켜 목에서 깔끔히 절단시켜 줄 것마냥 정수리를 붙이고 있었다. 큰 일은 없을 것이다. 힐끔 쳐다본 사무실의 안쪽의 제임스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 카라가 소리치는 동안에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윈이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쉬며 정수리 대신 등을 벽에 붙였다.

윈이 제임스 올슨을 좋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지미 올슨'이었다. 슈퍼맨의 친구에, 퓰리처 상을 받았고, 데일리 플래닛의 수석 사진기사였고, 벌어진 어깨에 복근과 근육을 가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웃는다. 그는 심지어 체취마저 좋았다. 윈은 그가 일 관련으로 캣 그랜트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바람에 섞이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건 거의 고문이었는데, 그 냄새를 맡기 위해 고개를 빼거나, 숨을 들이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죄책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변태가 된 기분이었지만 단지 그 체취는 너무 달았다.

사실 표현하기를 달다고 할만한 냄새는 아니긴 했다. 그한테서는 민트와 사향의 냄새가 났다. 지난 시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외계인과 같이 보냈기 때문에-일주일 전까지는 그냥 베타라고 생각하긴 했지만-윈은 알파의 체취라는게 그렇게 매력적인 것인지 거의 잊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제임스가 캣코에 발령받은지 이틀이 지났을 때 그 냄새를 처음 맡았다. 솔직히말해 그의 냄새는 윈이 맡아봤던 그 어떤 알파의 것보다 완벽했다. 저번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중요한건 윈이 토끼구멍에 끌려들어가는걸 저항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매우 불운하게도.

"말은 걸어봤어?"
"그럼, 서로 농담도 하고, 번호도 교환하고, 저녁도 먹고, 그의 집에도 가봤지."
"정말?"
"아니! 그는 내 존재도 몰라! 사장님과 이 회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어도 있는지도 모른다고!"

카라는 윈의 분노 섞인 외침에 턱을 당겨 입꼬리를 내렸다. 윈은 바로 사과하고는 제 머리를 마구 뒤집어대며 정신 사납게 서성거렸다. 윈의 말은 과장된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임스는 윈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 제임스가 지나다니면 저도모르게 어깨를 숙이며 존재감을 극한으로 지우려 든 탓도 좀 있겠지만.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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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루성, 아성 1인칭 독백








나는 사람의 거죽을 글자에서 얻었다.

글자들을 회반죽 처럼 두르고 나는 사람 행세를 했다. 멀쩡히 웃고 사랑받고 속였다. 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할 것을 억지로 했으며 가죽 안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의 자기애는 끝이 없어서, 단지 보이는게 자신들과 비슷하면 무턱대고 좋아하고 만다.

내가 가장 처음 얻은 거죽은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썼다. 명성. 명가의 아성.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글자였다. 나는 그 글자의 발음이 내 얼굴을 덮는 것을 느꼈고, 먹의 틈 사이로,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 전에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고아원의 원장이나 봉사를 나온 사람들이 지어주던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채 나를 동정하는 표정. 그러나 글자의 틈으로 보인 웃음은 그런것과는 달랐다. 그 웃음은, 형님의 웃음은 아주 밝았고, 나를 전혀 동정하고 있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그것을 좋게 생각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는데,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유로 나에게 동정은 좋은 것이었고, 그런게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표정을 정말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웃음을 따라했다. 얼굴에 씌여진 글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글자가 사람의 것이기 때문일거라고, 아주 오랜 날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첫 가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형님은 그 다음부터 글자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글자를 몸에 칠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칠하면 칠할 수록 칭찬 받는 일이 늘었고, 칭찬을 받으면 안심이 됐다. 칭찬 받지 않으면 굶는 생활을 했었으므로 나는 꽤나 필사적으로 가죽을 둘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활은 끝났다는걸 깨닫고 나서도 나는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게 싫었지만 너무도 쉬웠으며, 그저 버려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유일하게 내가 사랑 받아야 할 이유였다. 나는 명가가 주는 애정을 배부른줄 모르고 집어삼키며 혼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아가리가 넓은 입은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쑤셔넣었고, 한 번 늘어난 구멍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사람이 아닌 나는 절제라는 것 조차도 가죽으로 써야했기에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가죽을 덧씌우고 벗겼다가 깁는 것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두려움이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중의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문득 형님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화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파리로 온지는 이미 1년이 훌쩍 지나있었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명성의 가죽이 명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므로 그냥 놔두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자각한 후에, 나는 급하게 구역질을 했다. 매만지던 화초도 내버려둔채 욕실로 달려들어가 말 그대로 안에 있는걸 전부 게워내버리고는 옷을 벗었다. 온도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을 들이부었고, 손에 걸리는 타올로 상처가 날 정도로 몸을 닦고도 욕조에 잠겨 다음날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일주일간의 몸살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끔찍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 때서야 가죽이 안쪽을 좀먹기 시작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가죽의 표현이 나의 표현이 되고, 가죽이 느끼는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었으며, 가죽이 느끼는 통각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살을 앓는 중에도 끊임없이 속을 게워냈고, 몸살이 모두 나은 뒤에는, 거처에서 거울을 모조리 치웠다.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떨었을 때, 단지 그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사람은 아팠다. 사람은 주었으며, 사람은 잃었고, 사람은 무너진다. 가죽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받고 싶은걸 가지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글자들을 모두 박박 긁어내 발로 짓밟고 싶었다. 형님이 지어주었던 글자가 달라붙다 못해 스며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건, 무서웠다.


청자라는 가죽을 얻은 것은 그 때쯤이었다. 당에 가입할 의사를 비췄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중에 다시 연락이 왔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죽의 결정이었으나, 나의 본질은 신분을 위장 해야한다는 사실을 이빨에 박아넣고 씹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죽. 그것을 얻으면 다시 가죽과 본질을 유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명가의 아성이 아닌 청자로서 가죽을 다시 씌운다면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썩 잘 먹혀들어갔다. 청자의 가죽은 명성의 가죽과는 아주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이 썼던 먹으로 쓴 명성의 글자와 만년필 잉크로 휘갈겨 쓴 청자의 글자는 같은 검은색이어도 섞여 들어가 있는 색에 차이가 있었다. 그걸 같은 검은색으로 쳐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청자를 쓴 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몇 번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중요한 임무를 성공시키고는 했고, 신뢰도가 높아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자는 웃었으나 본질까지 감정이 전달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성공으로 쳤다. 계속 이렇게 청자의 가죽을 쓰고 산다면 유학을 끝내고 돌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형님의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점점 청자의 잉크가 스며들었던 먹 마저도 흡수하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재떨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나를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고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청자는 도구이므로, 그저 일만 잘 하면 되었다. 청자에는 꽃과 향수, 화약과 골목길의 글자가 쓰였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두려움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이 파리로 온다고 했을 때 꺼리지 않았다. '청자'는, 다른 가죽이어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들킬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약 들킨대도 다른 사람이 됐다고, 그 이상으로 추론하는건 불가능 할거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내가 글자를 가죽으로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눈치가 없었다기 보다는 그런걸 눈치 챌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형님도 가죽을 쓰게 됐다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가정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총성이 들렸을 때, 다시 돌아온 두려움으로 인해 청자의 가죽은 눈 위에 처참하게 버려졌다. 아직 덜 빠져나갔던 옛날의 먹이 묻은 채인 살점들은 여과없이 공기를 맞았고, 살점에 달라붙어있던 수증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결정들을 만들었다.


그 얼음과 눈으로 얇게 씌인 것의 이름은 명성이었다. 명루의 아성. 살점과 뼈에 달라붙어 긁어낼 수 없는, 가죽이 아닌 피부의 이름이었다.




*



그래도 여전히, 몇 번의 밤에서는 내가 가죽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그건 필시 내가 나의 본질을 앎이고, 원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끔 피부가 벗겨졌고, 살결 아래에서 얼굴을 구기며 필요할 때는 칼로 피부를 긁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점이 아닌 피부 위에 글자를 쓰고 덮는다. 모든 글자들은 피부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모든 나의 생각들은 피부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먹이 스며들까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이 아닐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내 것을 주지 않고 아파 할 필요도 없는, 웅크린 본질을 두껍게 감싼 가죽을 다시 갖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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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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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임스] 독약

연성/기타 / 2016. 4. 15. 23:07



"어떨 것 같아?"


아서는 잠자코 제 손에 들린 시험관을 보고 있었다. 유리 안에 갇힌 액체는 투명했고, 임스의 웃는 얼굴이 좁은 공간에서 굴곡되어 흐려진다. 살짝 흔드니 바닥부터 기포가 올라왔다. 표면으로 올라와 맺히는 구체를 보던 아서가 뚜껑을 열고 앞에 놓인 위스키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독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노크 소리에 호텔의 방 문을 열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아서는 방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가 들고온 문제는 더더욱. 가방도 코트도 없이 서있는 임스의 손에는 시험관이 들려있었고 인사도, 다른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건 들어서 알았지만 아서가 임스에게 연락을 하거나 묵고있는 호텔의 룸넘버를 알려준 적은 없었고, 임스가 그런 정보를 알아낸 것에 대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아서는 단지 그가 뜬금없이, 아서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오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문을 닫아버렸을 수도 있었다.


귀찮게 문을 두드린데도 무시하거나 프론트로 전화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서가 임스를 안으로 들일 그럴듯한 이유는 없었다. 둘은 반년 전에 헤어졌고, 일이 겹치지 않으면 수백 킬로미터를 떨어져서 지냈으며, 중요하게 할 대화나 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임스는 그 흔한 들여보내줄거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은채 서있었다. 아서는 문에서 한발짝 비켜섰고 임스는 거리낌 없이 방으로 들어와 카우치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서는 임스에게서 시험관을 받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액체는 위스키 안으로 흔적도 없이 녹아들어갔다. 잔을 돌려보던 아서가 겉에 묻은 물방울을 엄지로 쓰다듬는다. 임스는 턱을 괸채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참고로 독약이라면 치사량일거야. 죽거나, 그것보다 심해지겠지. 아주 유려한 너스레다. 아서는 손톱으로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긁듯이 만졌다.


임스를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서는 이 위스키를 마실 이유가 없었다. 임스는 독약을 마시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액체가 독약일지 아닐지를 물었을 뿐이고, 마시지 않고 대답해도 상관없을 문제였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지금에라도 내쫓을 수도 있다. 임스는 순순히 나가줄 것이다. 아서는 그가 그럴 것이라는걸 알았다. 몇 번이고 그랬으니까.


아서는 액체가 독약인지 아닌지 모른다. 아서는 모르는 것이 싫었다. 모르는 것은 아서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건 아서의 신경을 긁어대는 일이었다. 액체는 어쩌면 환각제일 수도 있다. 아서가 이것이 환각제라는걸 확실히 안다면, 마신 다음 일어날 일이 환각이라는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서는 그 액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마셔보기 전까지는, 어쩌면 마시고 나서도 액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만약 독약이래도 정확히 어떤 독약인지, 어떤 성분 때문에 자신이 죽는지, 아마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서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임스는 아서가 위스키를 입에 문채로 다가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임스는 여유롭게 아서의 키스를 받았고, 목 뒤로 정체모를 액체가 섞인 위스키의 반을 넘겼다. 달거나 비리거나, 어쩌면 마비되어 있을 수도 있는 혀가 섞이며 미끄러졌다. 한동안은 젖은 소리만 울렸다.


입술을 떨어뜨리고 팔로 닦은 아서가 방을 가로질러 코트를 들었다. 임스는 여전히 턱을 괸채 카우치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떠나려는듯 풀지도 않은 가방을 든 아서가 옆을 지나쳤다.


"독약이었던 것 같아?"


아서는 임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긴다. 무겁고 부드러운 호텔의 문이 안으로 열렸다가 느슨하게 닫히고, 복도에 울리는 구둣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임스는 몸을 일으켜 아서가 놓고 간 위스키 잔을 들어 조금 남은 내용물을 흔들었다. 한방울도 남지 않도록 잔을 뒤집어마신 임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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