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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는 고개를 들었다.


넓은 방은 햇볕으로 채워져 있었다. 창호문은 대청을 향해 활짝 열려있었고, 바깥에서는 새소리가 났다. 임수는 손잡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괸채 맞은편을 보고 있었다. 지저귀는 소리가 꺽꺽대며 죽어가는 소리 처럼 들린다. 주의를 분산 시키는 것이 너무 많았다. 흠집이 많은 목재바닥, 떠다니는 민들레의 씨앗이나 반쯤 볕에 물든 경염의 머리카락, 다리 하나가 다른 것 보다 짧은 의자, 엎질러진 찻잔과 말라붙은 얼룩까지 모든 곳이 임수의 도피처다.


눈을 감으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속삭여지는 혼잣말이 실질적인 충고임을 알았지만, 임수는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뜨고 있어서 아려오는 눈 주위가 붉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경염은 웃고 있었다. 언제나 보던 얼굴이다. 항상 생각하고 떠올리던, 어떤 때는 물에 가라앉은듯 흐릿하기도 했던 얼굴.


경염의 앞에는 고리가 있었다. 아주 천천히, 경염이 의자 위로 올라선다. 삐걱, 균형이 맞지 않는 의자가 흔들렸다. 황자는 매듭이 제대로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을 몇 번 잡아당겼고, 목재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어떤 것이든지 소리가 너무 컸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던 천이 경염의 손에서 놓아졌고, 물든 눈이 임수를 향했다. 임수가 주먹을 그러쥔다.


머리를 넣어. 어떻게든 단호하게 끊어낸 목소리가 울린다. 경염은 말없이 고리를 목에 걸었다. 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간다. 경염의 시선은 임수를 따라가지 않고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이 섬세하게 조각된 등받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당기면 경염이 떨어질 것이다. 새는 이미 죽었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임수는 방의 끝 부분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곳은 모두 없어진지 오래다. 이곳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곳이었다. 경염의 방.


없애야 한다. 알고 있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떨어뜨려. 목소리가 들린다. 살아남아. 외침이 들린다. 수아야. 재촉이 들린다.


하지만 아버지. 나약하리만치 꺼져가는 소리에 임섭이 임수의 어깨를 쥐었다. 손톱이 벗겨지고 살이 까진 끔찍한 손. 이제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염은 눈을 내려깐채 침묵하고 있었다. 민들레 씨앗이 볕을 통과했다가 느리게 떨어진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임수의 손도 재로 뒤덮인다. 수아야. 임수의 눈이 감긴다. 수아야.


경염의 몸이 허공에 뜬다.


끔찍하리만치 조용하다. 임수는 본능적으로 발버둥치는 다리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햇볕은 불로 바뀌고, 발을 디딘 곳은 처형장으로 바뀐다. 재로 뒤덮인 매령은 붉다. 임수는 고개를 들어 목을 맨 시체를 보았다. 까무룩 죽어있는 감정 그 자체가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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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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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자랐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키가 커진 것 같다거나 얼굴이 성숙해졌다는 농담은 황제의 눈 밖에 밀려난 7황자를 기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궁에 가게되면 으레 몇마디씩 들려오는 기분나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라궁으로 향하는 중 만났던 예왕이 너스레를 떨며 좀 커진 것 같다고 말을 건넸을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익숙해진 기만을 듣고 새삼 화를 낼 성정도 아니었다.


예왕은 여전히 딱딱한 녀석이라며 길을 비켰고 경염은 정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지라궁에 찾아들었다. 정비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차리도록 명하며 언제나처럼 경염을 맞았지만, 백합탕을 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을 때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챘다.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떠야하는건 경염이었으나 어째 정비의 얼굴이 더욱 놀라있었으므로 엎질러진 탕은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머니? 의아하게 나온 목소리에 정비가 손을 놓기는 커녕 좀 더 가깝게 손을 끌어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보라고 답지않게 독촉을 했고, 영문을 모르는 경염은 명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경염은 약간 멍한 기분이었다. 몸이 자랐다니? 급히 시녀들을 시켜 관을 틀었던 머리까지 푼 경염은 세심하게 살펴보는 정비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당황스러워했다. 얼결에 바라본 손톱은 정말로 길이가 자라있었다. 한끗. 그러나 전장에서 다쳐도 딱 예전의 상태로만 돌아오던 손톱이 자랐다는건 무시하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키까지 재 본 결과 확실하게 자라있었다. 경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과거에는 매일 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랐는지 확인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습관이다. 손톱도 머리카락도 언제고 똑같았고, 몸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벗었던 겉의복을 다시 입혀주는 손에도 무슨 기분을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잡히는 단서가 없다. 경염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윤인이 죽은 부작용이었다. '윤인'은 천인과는 달라 능력이 없었으나 기의 파장이 비슷한 다른 천인을 받쳐줄 수 있었다. 모든 천인이 윤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평생 자신의 윤인을 만나지 못하는 천인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부작용이 없고 능력 또한 약했다. 기왕도 윤인인 기왕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겨우 돌맹이 하나 들어올리는 정도였지만, 기왕비를 만난 후로는 활 없이도 백 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경염처럼 거의 태어나자마자 윤인을 만난 경우는 역사서에서나 찾아볼 법하게 드문 일이었다. 천인은 천성적으로 기가 두 가지 있다고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천능의 기가 활발하여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있으나 조절에 미숙한 단점이 있다. 자라면서 윤인을 만나지 못하면 자연히 천능의 기가 막혀 점점 능력이 줄어든다. 그러나 경염은 제 윤인과 계속해서 함께 자랐고, 나이가 차면서 천능이 막히는 일 없이 조절법만 늘어갔다. 경염이 나서는 전장에는 항상 불이 따라왔으나 기가 폭주한 적도, 천능이 줄어든 적도 없었다. 불안정한 날들은 많았으나 임수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나 특별한 사람이 갑작스레 죽어 떠났을 때. 윤인에 사라진 것에 대한 부작용은 천인마다 모두 달랐다. 갑작스레 폭주를 하거나 천능을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몸이 끔찍하게 약해질 수도, 혹은 운이 좋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경염처럼 성장이 멈춰버린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시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윤인이 사라진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정비는 경염의 맥을 짚어본 뒤 천능 대신 다른 기가 막혀버렸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서 성장이 멈춘 대신 천능은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경염은 지금까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윤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막혔던 기가 갑자기 뚫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열 두 해 동안 자라지 않았던 몸이었다. 일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해보다 금릉에 좀 오래 머물고 있기는 했지만, 북방토벌을 워낙 깔끔하게 해버린터라 보낼 곳이 없어 그럴 뿐이었다. 특별히 의원을 찾아가거나 다른 탕약을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 시도들은 오래 전에 포기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경염을 앞에 둔 정비는 성정대로 차분해졌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관을 도로 틀어올린 경염은 무슨 말을 떼어야할지 몰랐다. 짐작되는 이유. 말아쥐어지는 경염의 손을 보던 정비가 눈을 내려깔았다.


"...12년이나 되었잖니."


경염은 대답이 없었다. 12년. 긴 시간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 경염은 이제 서른을 넘었으며, 금릉 또한 너무도 바뀌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극심한 슬픔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천능은 요사스러운 것이어서 기의 주인의 마음을 신체적으로 반영시킨다고, 혹자는 그것이 부작용이라고 서술했다. 크게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황상에게서 정왕의 이름을 실추시키려고 하던 뭇 서생들이 계속 들고나왔던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정을 그렇게 놓은 후 생각하면. 경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자라버린, 굳은 살로 뒤덮인 손. 정녕 그런 것일까. 제가 임수를 잊어서, 임수에 대한 마음이나 그리움이 옅어졌기 때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일까. 그런걸까?


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경염은 막사촌 하나를 모조리 태웠다. 부관이 입단속을 시켜 황상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당시의 병사들은 그 때의 경염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막사에서 주저 앉아있는 황자. 재들이 타는 소리가 황자의 오열을 묻었고, 날이 지날 때까지 화마는 줄어들지 않았다.


잿더미에서 걸어나오는 천인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채인 경염의 눈은 극도로 형형했다. 바로 금릉으로 돌아가 이유를 물었으나 황상은 설명해주기는 커녕 경염을 북방으로 내몰았고, 몸은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경염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오래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미련했다. 그럼에도 경염은 주먹을 말아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제가 임수를 얼마나 그리워 했었는지, 그의 죽음에 얼마나 괴로워 했었는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허공에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몸을 항명이라고 칭하는걸 부정하지 않았던건, 경염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작용은 항명이었다. 기왕부의 사람들과 임씨 일가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믿는 경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고, 할수만 있다면 이 모습 그대로 임수를 만나고 싶다고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닳아버렸다고 한다면.


경염의 눈이 부정하듯 질끈 감겼다.




*



당신은 이렇게 날 떠났죠. 난 내색하지 않아요. 희망도, 사랑도, 영광도, 행복한 결말도 없다는 사실을요.




*





"정왕의 몸이?"


몽지는 확실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위군의 통령은 소문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 그라도 촉각을 세우는 이야기들이 몇 있었다. 죽은 의형제가 금릉으로 돌아온 뒤로는 정왕부의 소식이 그러했는데,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갈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급하게 녕국후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임수는 부탁한 저택의 일인줄 알고 몽지를 들였다가 손을 그러모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염의 성장이 멈춘 것은 윤인인 자신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금릉에 돌아온데다 지척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더이상 부작용이 계속 될 이유가 없다. 사실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한독이 기를 흐트려 놓았을거라 믿었기에 아직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몽지는 낭패어린 임수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임수도 생각 못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강좌맹의 종주가 금릉에 도착하자마자 경염의 부작용이 낫는다니. 예왕의 편인 척 할 계획이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경염이 눈치를 채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김에 말해버리자고 한탄하는 몽지에게 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대업을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경염이 제 정체를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닙니다. 윤인은 평생에 한 사람으로 정해지는건 아니니까요."


드물었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새로운 윤인을 만나게 되면 부작용이 사라진다는 사례는 고서에도 왕왕 나와있는 이야기였고, 마지막 천인 황제도 세 명의 윤인을 두었다. 천인과 마찬가지로 윤인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새 윤인이라니, 정왕이 당황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금릉으로 오자마자 부작용이 나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매장소가 정왕의 새 윤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예왕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예왕의 책사로 있으며 안으로는 정왕을 도울 계획이었는데, 천인과 윤인 사이의 각별한 애정에 대한 것은 온나라가 소비하길 좋아하는 소재였다. 정왕의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의심 많고 총명한 예왕이 뒷생각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해결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뒤집어서 보면,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다만 정왕에게는 조금 잔인한 수가 될 것이고, 신임을 얻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시기가 늦었으면 했는데. 어떤 계절이든 차기만 한 손이 찻잔을 쓰다듬었다.





*




 7황자의 부작용이 서서히 걷힌다는 소문은 빠르게 금릉을 돌았다. 경염은 되도록 정왕부의 바깥으로는 나서지 않았고, 소문은 무성하게 커졌다. 온갖 추측이 나돌았지만 다행히 매장소의 존재까지 이야기가 연결 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백리기의 무술 시합 때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었으니.


임수는 비류가 전해준 서신을 받았을 때 경염이 뭔가를 깨달았을거라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경염도 수상한 책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급하게 전해진, 만나야 한다는 서신을 봤을 때, 가능성이 스쳤을 것이다. 시기가 너무 꼭 들어맞았다. 책사와의 만남 후로 몸이 자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경염에게 몇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앞으로도 계속 자랄겁니다."


책사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경염은 시선을 아래에다 두고 올릴 줄을 몰랐다. 사실 몸이 자랐다는 것이 그렇게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깨가 조금 벌어졌고 섰을 때 반의 반뼘이 안되게 키가 컸을 뿐이다. 손은 소매에 가려지고 머리는 관을 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과 다르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정비와 임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윤인에 대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임수는 시선을 내렸다. 경염은 여전히 단단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자라는 몸에 대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음이 분명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부작용이 없어지는 가장 흔한 경우에 대해서.


서책으로는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책사를 보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였다. 예왕과 태자를 놔두고 절 황제로 올리겠다 선언한 책사가 윤인이라니. 우연이라쳐도 질이 너무 나빴다. 경염을 불러낸 것이나 첫마디까지만 고려해도 자신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듯 눈을 감은 경염이 숨을 뱉었다.


"내 전 윤인에 대해서도 들었을거라 생각한다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매장소가 눈을 감고 있었고, 경염은 시선을 비껴 다기들을 보았다. 적염군에 대한 이야기는 온 나라가 쉬쉬하면서도 밑으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금릉에 들어오며 임씨 가문에 대해 듣지 못했을리가 없고, 경염을 황제로 올릴 생각이라면 그의 윤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리가 없다. 경염의 말이 질문이 아닌 이유도 그런 탓이었다.


어떤 말이 나와도 시치미를 뗄 수 있었지만, 임수는 제가 화두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7황자 소경염은 고집이 세고 주변에 어둡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모순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파고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수에 대한 화제가 민감하면 민감할 수록 그럴테고, 그래서 윤인에 대한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나중에 하고 싶었다. 매장소가 임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준 다음에 나누어야 할 화제였는데. 


"매령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임수가 저에 대해 뱉을 말이 많지는 않았다. 경염은 제 손 끝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오히려 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감긴 임수의 눈꺼풀이 약하게 떨린다.


"그랬지."


찬 목소리였다. 매장소는 송구하다는듯 고개를 숙였고, 경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을 말한건데 어째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오. 차분해진 얼굴로 찻잔을 가져간 경염이 소매를 걷었다. 서책에서 읽었다고는 하나 자세한 건 모를테니 간단하게 얘기해주겠소.


"바퀴 윤자를 쓰는 것은 알고 있겠지. 천인이 가진 천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윤인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이오. 윤인은 천인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천인은 불가능하지."

"...전하는 살아계시지 않으십니까."


임수는 경염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랬으나 천인은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간결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윤인은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다. 천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천능을 증폭 시킬 수 있었고, 천인이 폭주할 때 몸을 닿게 하는 것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니 옆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역할의 8할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왕에게 넘어간 척 해야하니 둘은 옆에 있기는 커녕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한다. 조절이 미숙했을 때 만났다면 문제가 있겠으나 경염은 이미 윤인 없이도 천능을 다룰줄 알았다. 무리하게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설명에 매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능에 관한 것 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경염은 손을 가리고 있던 천을 위로 걷어 매장소에게 내밀었다. 검지의 손톱만이 유난히 길다. 매장소가 허락을 구해 손을 살펴볼 동안 나머지는 잘라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손톱 외에 손의 골격도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주 전이니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정왕부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소. 소문도 마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고. 선생을 안만난다고 자라지 않는 것 같지도 않으니, 윤인인걸 숨기는게 쉬울 것 같지는 않소만."


임수는 길다란 손가락을 쓸어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하의 윤인인 것은 반드시 숨겨야합니다. 예왕에게 의심을 사는건 피해야하니까요. 그것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염이 자연스레 손을 빼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묻는 목소리에 임수가 찻잔을 잡았다. 속여야지요.


"황상에게 전하가 적염군과 임수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하십시오. 둘도 없는 기회이니."


바람에 열기가 섞인다. 임수는 그러쥐어지는 주먹을 내려깔은 눈으로 보며 차를 흘려넣었다. 그을림을 낸다면 녕국후부에 자신이 왔었다는걸 알리는 꼴이 된다. 빠르게 열을 가라앉힌 경염이 목을 세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임수는 곧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쳐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미에 붙였듯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제위다툼에 나서 최종적으로 태자에 책봉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천대받는 처지부터 개선해야 한다. 12년 전의 일에서 미련을 털어버려 외관이 자란다고 한다면 경염을 보는 황상의 눈도 달라질 것이었다. 천인의 몸은 하도 불가사의한 것이라 온갖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거나 일정한 유형이나 '보통'이라 칭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윤인이 사라져 성장이 멈춘 몸이었다. 윤인에 대한 미련이 없어져 다시 자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물며 천인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황상이야 더 쉽게 속겠지. 천인에 대한 황상의 시기 탓에 예왕이나 태자도 그쪽에 능하지 않으니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라면 경염에게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것이 성정에 맞지 않으신걸 알지만,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신중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황상을 속이려면 단지 황상 혼자만을 속여서는 안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예왕이나 태자 같은 다른 황자들이나 심지어는 예황과 정비에게마저도 거짓말을 해야했다. 정생의 일만 따지더라도 거짓말을 하기 싫어할 뿐 못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으나, 무거운 것은 거짓말의 내용이었다.


임수와 기왕, 7만의 적염군에 대한 것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야하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며 지나간 일들이라고. 누구도 경염을 탓하지 않겠으나 경염은. 경염만큼은 제위다툼을 위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늦든 빠르든 몸이 자랐을테니 언젠가는 해야했을 거짓말이었지만 임수는 그 시기가 되도록 늦었으면 했다. 경염의 자책은 임수의 속마저 파먹을 것이었기에.


경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숙인 얼굴은 시선에 잡히지 않았고, 열기도 나서지 않았다. 못한다는 답이 들려도 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위험이 따랐고, 너무 위태스러운 작전이다. 경염이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으니 나올 결과를 알아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희생은 언제나 따르는 법이었으나 임수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구역질을 참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임수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약조해 줄 것이 있소."


오래 걸렸으나 망설임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경염의 고개가 들리는 듯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각거리는 단호한 소리.


"난 기왕 형님과 임씨 일가가 모반을 꾀했다고 믿지 않아. 사건을 재조사 해 그들의 결백을 밝혀내야 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고."


임수의 내려진 시선에는 아직 쥐어져있는 주먹만이 보였다. 정갈하게 놓여있는 손은 앞으로 12년의 세월을 빠르게 거칠것이다. 더 커지고 길어져 큰 칼이나 활도 가볍게 쥐게 되겠지. 몸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금의 얼굴은 흔적만 남고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 얼어있어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차가운 덩어리. 언제나 무시받았던,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얼음.


"그걸 막지 않는다고 약조 한다면. 선생의 계획이 무엇이든 따르겠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얼음에게서 새어나오는 열기가. 얼음에 갇혀있던 적염이. 덮쳐오는 화마가 너무나 그리워서, 임수의 눈이 감기었다.




*



이게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에요. 마치 영원한 것 처럼.

그리고 우린 남은 여생을 살아가죠, 하지만 함께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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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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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분량이 얼마 안돼서 기분이 이상하네;;; 임수경염 뱀파이어au... 군님 사랑해요....







흡혈귀라고 부른다.


경염은 그런 귀신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바깥의 무서움을 모르는 임수의 손에 끌려 정처없이 밤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돌아왔던 날이다. 임섭 장군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을 앉혀놓고 세상에 존재하는 귀신에 대해 가르쳤다. 죽은자의 몸으로 움직이는 강시,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각다귀, 행인을 끌고 들어가는 수귀, 긴 손톱을 가졌다는 산호.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흡혈귀라고 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해 거꾸로 매달아놓고 생피를 빼간다. 고통에 찬 비명은 귀신의 귀에는 닿지 않고, 절망스러운 얼굴과 그들의 애원은 귀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치 피를 전부 빼면 잠시 놔두었다가 사람에게 피가 차면 다시 매달아 놓고 일을 반복한다. 잘못해서 먹이가 죽어버릴 때 까지 계속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사람이란 먹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먹이에 대한 동정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흡혈귀에게 잡히면, 평생을 갇혀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된단다. 어렸던 경염과 임수는 마른침을 삼켰고, 다시는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작은 입들이 뱉었던 말은 결과적으로 잘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이 겁을 주기위해 한 허구의 이야기라는걸 알기까지는 몇 년 정도가 걸렸다.


그 뒤에도 흡혈귀에 대한 것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귀신의 소행이라며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짐승의 짓이거나 귀신의 짓으로 보이게 꾸민 일들이었다. 몇몇 사건들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어도 경염은 어린시절 이후로 그것들이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임섭의 말이 거짓이라는걸 먼저 알았던 임수가 하도 놀려대서 그랬던걸지도 몰랐다. 12년전, 툭하면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장난을 걸던 친우가 죽은 후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있음을 알기에 믿지 않았고.


알게 된 경위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제위 싸움에 덤벼드는 것을 결정했던 날. 매장소는 자신이 사람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말했고, 말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경염은 속을 알 수 없는 책사가 또 자신을 기만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어떤 반응을 내보이는지 살피는 걸 수도 있었고, 어쩌면 비유일 수도 있었다. 매장소는 침묵하는 경염을 보고 웃더니 견평의 이름을 불렀다. 대기하고 있었던 듯 뒤쪽에서 견평이 사발을 들고왔다. 안에는 세 모금 정도의 피가 차있었고, 매장소는 경염의 당황한 표정도 보지 않고 그것을 한번에 들이켰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흡혈귀에게 물려 가까스로 살았다고. 빈 사발을 건네받고 그것이 진짜 사람의 피임을 확인한 경염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사람을 죽이고 있는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저었고, 견평이 소매를 걷어 자상을 보였다.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만큼 피가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경염이 기묘한 표정을 했다. 사실 매장소는 경염이 어렸을 때 그렸던 흡혈귀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창백하기는 했지만 병환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색이었고, 번들대는 눈이나 커다란 이빨 따위도 없었다. 그나마 보통보다 신장이 커 팔다리가 길었으나, 그역시도 사람의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귀신이라 이름 붙일 외관이 아니다.


경염은 입안에 도는 질문을 섬기지는 않았다. 너무 무례한 의문들이었으니까. 경염을 대신하여 매장소가 나도는 소문들과 자신의 다른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매장소는 괴력을 가지거나 불사의 존재도 아니었고, 은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기실 보통의 완전한 흡혈귀는 그랬지만, 그들은 굳이 여러 인간의 피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매장소가 완전한 흡혈귀가 아닌 이유는 그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었고, 진짜 흡혈귀의 피를 마실 때까지는 인어마냥 반인반수의 상태일 수 밖에 없었다. 인간과 흡혈귀의 중간에 걸쳐진 귀신은 피를 마시지 못하면 눈꺼풀도 들지 못하는 천한 약골일 뿐이다. 경염은 매장소가 봄철이 되어서도 화로를 치우지 않는 것이나 강호인이면서도 칼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기억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온 금릉에 매장소를 제외하고 네명 뿐이었다. 호위인 비류와 견평, 려강, 그리고 경염. 잠시 침묵하던 경염은 어째서 자신에게 진실을 알렸냐고 물었다. 뒷얘기를 듣지 않고, 또는 듣고서도 믿지 않고 당장 악귀라며 목을 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말을 들은 반요는 눈을 휘며 웃었다. 서로 숨기는게 없도록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책사가 피를 먹는 귀신이라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새 저택에는 비밀통로가 만들어졌으며 궁에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서생은 차근차근 태자와 예왕을 무너뜨렸고, 신실한 충성으로 경염의 신뢰를 샀다. 자신이 귀신이라고 고백했던 날 뒤로 매장소가 경염의 앞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뿐만아니라 자신이 귀신이라는걸 떠올리게 할만한 어떠한 언행도 일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자 경염은 그날의 대화를 대부분 잊고 있었다. 매장소가 흡혈귀라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대화를 다시 상기 시키는 것은 꽤 오랜 날이 지나서였다. 침전에 침입자가 든 것을 알았을 때, 경염은 이미 팔이 붙잡힌 후였다.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집기도 전에 어리고 익숙한 얼굴이 불쑥 시야를 차지했다. 비류. 항상 제 책사의 곁을 지키던 호위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거거. 수거거가. 짧은 말로 뱉어내며 억지로 저를 일으키는 통에 경염의 얼굴이 굳어졌다.


급히 발걸음을 옮긴 소택의 침전은 엉망이었다. 깨진 사기그릇과 엎어진 서책, 날뛰고 있는 귀신, 그걸 막고 있는 장정 두 명까지. 경염은 제 쪽으로 날아오는 다기를 급하게 피하다가 문지방에 어깨를 부딪혔다. 난장판이다.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했던 책사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제발 진정해 달라고 애원하는 견평과 려강의 목소리도, 억지로 팔을 떼어놓으며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비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염이 어렸을 적 그렸던 귀신이다. 번들거리는 눈과 드러난 이빨이 흉측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생각이 스치자 행동은 빨랐다. 성큼 안쪽으로 발을 들인 경염은 정신이 없는 려강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제 팔을 그었다. 말릴 틈도 없이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잡아 억지로 제 팔을 향해 숙였고, 귀신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끔찍한 소리였다. 부러뜨릴듯 쥔 팔에 귀신의 손톱과 이가 박혀들어갔다. 경염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마자 새된 소리를 지른 두 부관의 등에 소름이 퍼졌으나 경염은 생소한 아픔에 어금니를 물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채였다. 피를 마신다기보다는 살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굳어버렸던 부관들은 경염의 낯빛이 창백해졌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달려들어 매장소를 떼어놓으려 들었다. 귀신의 반항이 거셌으나 비류가 뒤에서 힘으로 떨어뜨리자 팔에 박힌 이가 빠졌고, 그틈을 놓치지 않고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쳐 날뛰던 몸을 기절시켰다.


"지혈제, 당장!"


불호령에 쓰러진 종주의 몸을 떠받치던 견평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소매를 뜯어 상처 위쪽을 이빨로 단단히 묶은 경염이 비류가 붙잡은 매장소를 급히 살폈다. 제 피가 묻어있는 입의 안쪽에는 아직도 형형하게 송곳니가 나와있었다. 몸 곳곳에는 두드러기 같은 포진이 올라와 있었고, 피부도 시체마냥 차갑다. 무언가를 집어던지다가 생채기가 났는지 머리카락과 피가 엉겨붙은 손에도 상처가 있었다.


살피는 동안 지혈되지 않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향 때문에 도로 깨지는 않을지 어금니를 사려문 경염이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하고 있었던겐가! 하얗게 질린 려강은 고개를 숙였고, 비류는 매장소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울 것 같은 아이의 표정에 아연해진 경염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달빛에만 의존에 절 찾아다녔을 아이였다.  절박하게 제 형님을 부르던 얼굴이 의식이 없는 귀신의 품으로 사라진다. 머리가 아픈 것이 빈혈 때문일지 확신하지 못한채로 경염이 작은 등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을거다. 뱉은 말이 제 귀로 돌아온다. 등을 쓸어주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괜찮을거야. 조금 멀리서 지혈제를 든 려강이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





매장소가 눈을 뜬 것은 그 뒤로 이틀이 흐른 후였다. 정무를 보던 경염은 통로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옷을 갈무리하여 일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종을 울리라고 닥달을 해댔으니 늦게 울린 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한소리를 해야할 것이다. 전영도 물리고 혼자 비밀통로를 거쳐 소택에 걸음을 들인 경염은 침전에서 겨우 일어나 앉아있는 귀신을 마주했다. 전날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환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매장소는 허리를 숙여 예우를 차렸고, 경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귀신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말을 고르는듯도 했고 도저히 어떤 말을 뱉어야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시는 황자의 옥체에 흉을 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박아넣었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에는 경염이 직접 팔을 그었다지만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제 책사를 앞에 두고 경염이 먼저 말을 떼었다.


"생피를 먹으면 안된다고 하더군."


매장소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피를 내줬던 밤에 견평을 들볶아서 얻어낸 답이었다. 흡혈귀가 날뛰는데 충성스러운 부관들이 피를 주지 않고 진정하라 말만 했던 이유였다. 그 전까지는 반드시 피를 밖으로 꺼내 담아 이틀을 지낸 뒤 마셨다고 한다. 죽은 피의 식감은 진흙과도 같아 차라리 안먹느니만 못한 맛이지만, 생피를 한 번 맛 본 후에는 죽은 피를 먹을 수 없게 된다. 피를 내줄 충신은 널리고 널렸으나 강좌맹의 종주는 그들의 목숨을 갈취하여 제 목숨을 늘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은 피를 마시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반요의 몸이라는 것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반요가 피를 원하는 것은 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죽은 피로는 널뛰는 기를 잡아누르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그런 죽은 피마저 얼마간 들어가지 못하면 귀신의 기가 몸을 찬탈하게 되어있다. 강좌맹에서는 귀신을 억지로 붙잡을 동안 다른 사람이 피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이곳은 금릉이었다. 비류까지 달려들어도 진정 시키기 어려운데 왜 피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도 없는 금릉에서 갑자기 죽은 피를 구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비류가 경염의 침전까지 들이닥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디에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기에.


"나 때문에 생피를 입에 대었으니 일이 꼬였겠군. 급했다고는 하나 설명도 듣지 않고 피부터 내어준 내 잘못이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필요하다면 피는 내 것을 주도록 하지."


매장소가 말을 잃었다. 당황하여 반문 되어오는 말에 경염이 소매를 걷어냈다. 이런걸 무고한 사람에게 남길 수는 없으니까.


단단한 팔에 노랗고 붉게 새겨진 멍과 상처들에 매장소가 손을 그러모았다. 비틀리듯 새겨진 손자국들과 그대로 남은 손톱자국들이 괴사한 피부조직 위를 가르고 있었고, 아물기 시작한 자상의 흉터 주위로 귀신의 잇자국이 나있었다. 실로 끔찍한 몰골에 떨리는 책사의 손이 황자의 팔에 닿았다. 건드리지도 못하고 겨우 손만 주워 잡은채 고개를 숙이는 반요에게 경염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장에서 수십년을 구른 몸이오. 상처는 늘상 있는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게."


7황자 소경염은 몇 년에 한 번씩 금릉에 돌아오는 군왕이었고, 팔 밑이 멍드는 것 정도는 전쟁터에서 얻는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잃을뻔도 했던 팔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매장소가 침묵했다. 경염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팔을 빼어 소매를 내렸다.


"열병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무거운 목소리에 경염이 입꼬리를 올린다. 정왕부에도 심복을 숨겨두는 모양이로군. 귀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경염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실혈이 있었으니 몸이 그것을 회복하려 하는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루 만에 나았고 그 외에 몸이 아프거나 변한 점은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경염은 똑같이 피를 주겠노라 약조했을 것이다.


생피를 먹지 않고 귀신의 기를 누르기 위해 반요가 했던 노력을 경염이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힘들었을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날뛰는 제 종주를 보고 차라리 제 피를 내어주고 싶었을 부관들의 고충도 마찬가지다. 성급한 판단으로 경염이 귀신에게 생피를 먹였고, 그러니 책임도 경염이 져야하는게 맞았다. 긴 설득에 매장소는 쓴웃음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귀신에게 피를 뺏기고도 자책을 하다니, 얼마나 소경염다운 생각인지.


"잘못하면 제가 전하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에 경염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반대가 아니오. 목숨줄을 쥐고 있는건 선생이 아니라 나지. 뻔뻔한 말투에는 매장소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말이 옳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겁니다."

"선생은 내가 기분이 좋아지려고 팔을 그었는줄 아는 모양이군."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걸 아시지 않습니까."

"정확히 그런 문제네. 내가 칼을 든 것은 선생을 살리기 위해서였지. 내 피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고."


간결한 말에 매장소가 경염을 마주보았다. 한없이 바르고 솔직한 얼굴이었다. 귀신에게 피를 주는 것도,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신뢰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경염은 매장소가 반요라서 자신을 배신하거나 절 죽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귀신이 어떤지 직접 보았음에도.


"왜 저를 살리려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피를 내어준 밤과는 달리 단단히 관을 틀고 옷을 갖춰입은 황자가 눈을 깜박였다. 매장소는 뱉은 질문을 회수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저 답을 기다렸다. 대체 어느새 이렇게까지 신뢰가 두터워졌나. 매장소는 비열한 수를 쓰는 책사를 혐오한다고 말하던 경염의 얼굴을 기억했다. 대나무 같은 성정 탓에 신뢰를 얻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귀신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까지 내걸고 있었다. 경염은 곧 편안하게 웃었다. 소선생이 필요하니까.


"내 형님과 친우의, 그리고 7만 적염군의 한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선생이 필요하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선생이 그리 해줄 것을 알고."


매장소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자주 만나면 전영이 의심할테니 밤이 되었을 때 만나는 것이 낫겠소. 필요하면 항상 그랬듯이 종을 울리시게. 편히 웃으며 그렇게 말한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따라 일어나 배웅하려는 것마저 앉힌 경염이 침전 문지방에 서있던 견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택을 벗어난다. 매장소는 반쯤 일어난 어정쩡한 자세를 겨우 무너뜨렸다. 견평이 놀라 달려와 부축한다.


"...내가 멍청했다."


한숨 섞인 말에 강좌맹의 타주가 어찌 그런말을 하느냐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주 오래전에, 흡혈귀의 이름만 꺼내도 경기를 일으키던 작은 아이를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생피를 빼간다는 말에 했던 겁먹고 두려운 표정을 짓던 아이는 제가 없는 동안 말쑥히 자랐고, 저보다도 강한 심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경염을 선택한 것인데도 임수는 소경염을 오래전의 어린아이로 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엉망인 팔을 생채기로 치부하던 얼굴을 떠올린 매장소가 눈을 내려깔았다. 생피를 먹는다면 기를 다스리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종주는 하던대로 제 피를 주는게 낫지 않겠냐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견평에게 웃어보였다.


황자가 내리는 은혜를 거절할 수야 있겠나. 금릉에 돌아온 뒤로 가장 편해보이는 목소리가 장난스레 갈라졌다.







이건 진짜 다음을 쓸지는 잘 모르겟다 쓰고 싶은거 다 써서... 참고로 린신이랑 비류는 반요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임. 매장소를 물어서 살린건 린신네 아버지. 견평이랑 려강이 막을 동안 비류가 피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건데 쓸 타이밍을 못잡았다. 참고로 피가 부족해서 날뛰는 반요는 진짜 흡혈귀보다 더 강함 살려고 발버둥 치는거라... 헉 설정충 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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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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