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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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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자네가 죽은지도 이제 반 년이 되어가는군. 대유국은 진작에 퇴각했고, 끈질기게 버티던 북연도 깔끔하게 진압했어. 양나라의 군사력이 만천하에 공개 되었으니 당분간 쳐들어올 일은 없을거야. 마음 놓아도 되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 같아서 쓰네만, 국상이 있었네. 자네와 내 예상보다는 조금 빨랐지. 자네가 준 화병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야. 자네의 연인이 이제 황상이니 해결될 건 다 된 셈이지. 해적들이 말썽이고 소주 쪽에는 재앙 같은 화마가 덮쳤지만 그정도야 언제나 있는 일이니 황상이 알아서 처신하고 있네. 조정을 갈아치우고 있는데도 일처리가 확실하니 덕망높은 황제가 나왔다고 입소문이 파다 해.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게지.


새로 개편한 북방쪽 군에 자네의 이름을 붙였다더군. 이정도만 전해도 황상의 상태가 어떤지는 나보다도 잘 알거라고 믿네. 랑야각은 다시 조정 일에서 완전히 빠졌어. 알다싶이, 계속 관여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가끔 대신들이 해결책을 물어본답시고 험한 산을 오르는데, 관심이 없어서 전부 돌려보내고 있네. 신조정이 그렇게 무능해서야 어디다 쓸 지 걱정이네만, 망한다 해도 손을 도와주지는 않을거야. 한 번 빌려줬다가 호된 꼴을 당하지 않았나. 다 자네 덕분이지.


한 번은 황상이 찾아왔었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믿든 안믿든 자네의 선택이다만, 어쨌든 내가 붓을 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호위도 없이 부관 하나만 데리고 왔더군. 겁도 없지.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네.


더 재밌는 얘기가 있어. 황상이 나한테 무릎을 꿇었거든. 태자였다면 놀라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황제인데, 바꿔말하면 양나라가 나한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 되지. 본 사람이 있었으면 재밌었을텐데 말이야.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사람을 황제로 만들 생각을 한건가? 일개 강호인한테 무릎을 꿇는 남자가 황제라니, 양나라도 정말 망할때가 된 것이야. 점성술을 봤을 때는 이례없는 태평성대가 될거라고 하던데, 하기사 점성술 따위를 어떻게 믿겠나.


양나라를 발 밑에 둔 기분을 좀 더 느껴보고 싶었네만, 일으킬 수 밖에 없었어. 아까워서 혀를 다 차고 싶더군.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아무 것도 안했으니. 내가 괜히 랑야각 각주겠나. 어차피 평민으로 분장하고 있어 황명을 내릴 상태도 못되었어. 뭐, 사실 그래서 그 가벼운 무릎따위도 꿇을 수 있었겠지. 나중에는 생각할 수록 분해서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만. 잘 달래서 돌려보냈지만,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사내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단 말이야. 내 직감이 점성술보다 낫지.


장소, 나도 이제 쉬어야겠네. 그 사내의 집착이 원채 무서워서 말이야. 당쟁에 끼어들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돌아서 랑야각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으니, 그야말로 적당한 때라고 할 수 있지. 거기다 양나라를 한 번 밑에 두었잖은가. 더 위로 올라갈 것도 없을 것 같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주겠네. 황상이 한 일을 가지고 너무 웃는다고 질책하지는 말아야할거야. 꼴이 정말 웃겼거든.


정리는 금방 끝날걸세. 랑야각을 아예 없애기는 아까우니, 후계를 정해야겠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후계에 대한 수업은 3년 정도 했어. 자네가 금릉으로 떠난 다음날 부터. 나보다는 못하지만 아주 명석한 사람이니 걱정 같은건 안해도 돼. 내가 떠난다면 랑야각에 대한 불신도 사그라들테니 만사해결이야.


풍경이 괜찮은 곳에 정자 하나를 짓고 술이나 마실 예정인데, 어디로 갈건지는 다음 서신에 써주겠네. 몇군데를 골라놓긴 했는데 비류녀석이 죄다 마음에 안든다고 퇴짜를 놓지 뭔가. 절대 안떠나겠다고 계속 도망치는 바람에 골치가 다 썩고있어. 견평과 려강이 있는 힘껏 잡아들이고는 있지만 고집을 꺾을 것 같지는 않네. 자네가 있었다면 설득은 일도 아니었겠지. 누가 살려준 목숨인데 양심도 없다니까. 어쨌든 협박을 하면 어떻게든 따라올거야. 비류 하나만 남겨놓고 가지는 않을테니까 걱정말고 다음 서신이나 기다리게나.


자네가 있는 곳에는 도화나무가 있다고 들었네. 도화나무는 없지만서도, 비류가 매일 같이 가지를 꺾는 바람에 엉망이 된 매화나무에 아직 꽃이 남아있어. 불쌍하긴 하지만 염치없게 한 가지를 더 꺾었네. 동봉해서 보내니 상하지않게 보관하게나. 꽃잎 하나라도 떨어져 있다간 화를 면치 못할거야.


장소. 내가 첫머리 부터 임수가 아니라 거짓이름을 써서 언짢았을거라고 생각하네. 내가 의도한 것이니 걸려들었다고 후회해도 괜찮아. 그리 똑똑하니 예상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앞으로 평생 그 호칭을 바꾸지 않을거라는걸 말이야.


자네는 매장소를 싫어했지. 난 그딴건 신경쓰지 않아. 내가 언제 자네 기분을 신경쓴 적이나 있는가? 자네도 포기하는게 좋을걸세. 무슨 협박을 해도 모자랄테니까. 황상이 또 다시 무릎을 꿇어도 마찬가지야. 나는 자네를 마음대로 부를 권리가 있어. 내가 자네를 마음대로 미워하고, 마음대로 욕하고, 마음대로 그리워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야. 자네가 원하든 말든 난 자네를 평생 매장소로 기억할거야. 모두가 자네를 임수라고 부른다고 해도.


다른 한 명도 자네를 평생 수거거라고 부르겠지. 솔직히 말해서 난 임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임수는 멍청해. 이름도 그게 뭔가? 매장소가 훨씬 품격있지.


내가 아는 매장소는 이기적이었지만, 임수는 어떤가. 임수는 잔인하지. 자네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잖아. 13년 동안을 잔인한 사람인 척 살았지만, 자네도 나도 사실이 아니라는걸 알지. 매장소는 잔인하지 않네. 임수는. 뭐, 확실한건 내가 임수를 싫어한다는거지.


황상이 왔을 때, 난 칼을 들었네. 일촉즉발이었지. 부관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리도 없을테고, 황상은 가만히 있었어. 정말 베어버릴 생각이었지. 역모가 다 뭔가. 툭하면 저질러지는거, 내가 못할건 또 뭐겠어.


매장소를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죽어도 마땅하다고. 하지만 전부 헛소리라는 것도 알았지. 그 멍청한 사내가 자네를 죽인게 아니지 않은가. 매장소를 죽인건 임수고, 임수는 내가 죽이기도 전에 가버렸으니. 역모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성질이 아니라 칼은 내렸네. 잘 참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해. 원래 뭔가를 참는 성격은 아니라는걸 알잖나.  


장소. 잘 지내고 있는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아. 답신을 보내줄 필요는 없네. 꿈에도 나타날 필요 없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게 놔둬. 그럼 나도 비류에게 그렇게 전할테니.


내가 자네를 만날 때에는, 잔인하지 않기를 바라네. 그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거라고 믿어. 도화나무 아래에서 질리도록 환하게, 이기적이게 웃고 있어주게. 나한테 술을 사주고, 내가 보낸 매화가지를 망가뜨렸다고 말하게. 그럼 비류가 오기 전에 비슷한 매화 나무를 찾아서 꽂아놓자고. 안그렇게 생겨서 눈치가 빠르니 알아챌지도 모르겠지만, 자네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문제 없을거야. 그냥. 그렇게 하자고.


자네한테 보내려면 서신을 불태워야 하니 또 아무도 내가 양나라를 발 아래에 뒀다는걸 모르게 되겠군. 천하에 떠들고 다니면 좀 더 빨리 만나게 될지도.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테지만 말이야. 나는 천수를 누릴 사주거든.


내가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테니 약속을 잊어버렸답시고 매화를 소홀히 하면 안될 것이야. 다음 서신은 내가 옮길 곳을 정한 직후에 쓰도록 하겠네. 임수에게 안부 전해주게. 욕도 함께. 나중에 보세나.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의원 린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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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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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이나 일곱 살 때 쯤. 임수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경염이 앞뒤 보지 않고 같이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금릉으로 흐르는 강은 맑지 못했고, 둘 모두 수영은 커녕 툭하면 넘어지며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어떤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뒤에서 둘을 보던 경우가 급히 뛰어들어 구한 물었을 경염은 답하지 못했다. 잘못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호령에 경염은 젖은 꼴로 땅에 누워있는 임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괜찮겠죠? 겨우 나온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물을 잔뜩 먹어 끝까지 내려간 목소리였다. 모두를 구하려 하는 바람에 뭍으로 건졌을 임수는 기절한 상태였다. 몸에 이상은 없을거라 말했지만 경염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차라리 매달리며 울었다면, 경우도 혼냈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일을 어찌 했느냐고. 경염은 저도 물에 빠져 죽을 했다는건 생각하지도 않는 같았다. 허우적거린건 임수만이 아니었고, 괴로웠을텐데.


임수는 얼마안가 깨어났다. 경염은 그제서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힘빠진 몸으로 임수를 부축해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경우가 입을 떼기도 전에 경염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쩌려고 그리 조심성이 없냐며 화를 내는 소리에 그제서야 떨림이 묻어있었다임수는 정신이 없는지 무거운 눈을 굴려 생쥐꼴을 경염을 쳐다보았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물에 빠져서도 보였던. 착각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어린 마음으로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났다작은 손이 뻗어진다. 강의 차가움이 그대로 옮아있는 얼굴이 평소보다도 창백했다. 손에 닿은 뺨은 이상하게 연약하다.


경염. 젖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이 떨어졌다. 황자의 위엄과는 너무 맞지 않은 광경이었다. 항상 놀리고는 했던 짙은 눈썹은 쳐져있었고, 걱정과 두려움이 엉망으로 섞여있었다. 임수가 흐릿하게 웃었다너무 걱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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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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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치부들과 모든 불안감들이 눈을 깜박일 시간조차 주지 않아요.





*




기린재자라고 하였다. 손에 넣으면 천하를 쥐게 해준다는, 강호 강좌맹의 종주.


경염은 따가운 눈을 문질렀다. 밤이 늦었다. 서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오늘도 그런 날의 일부일 뿐이었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침전에는 촛불 몇 개가 녹아가고 있다. 경염은 먹으로 쓰인 글자를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당신을 선택 할 겁니다. 낯선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경염은, 웃음이 나왔다. 예황군주의 혼삿일을 이용해 정생을 녕국후부로 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왕의 마지막 남은 핏줄은 천대받는 7황자가 숨기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단번에 알아보았다. 기왕비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액유정에서 아이 하나를 살리고 묘비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몰라도 경염만은 정생의 얼굴에 남아있는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인이 아니라는 것에 얼마나 마음을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 본인조차 모르는 신분은 숨기기 쉬웠다. 당연히 액유정에서 꺼내주고 싶었으나 황상의 눈 밖에 난 불길한 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소철 선생이라는 자는 말을 꺼낸지 며칠만에 정말로 아이를 궁에서 꺼내왔다. 아직 노비 신분을 벗어나도록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리 될 것을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주변에 어두웠던 경염은 금릉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 비상한 자가 그저 동정심으로 액유정의 노비를 꺼내오려 했을까. 마음에 걸리는 것 투성이였다. 다른 것 보다도 처음부터 나이를 물어본 것이 언짢았다. 그 뒤에 곧바로 꺼내주겠다 약조를 하였던 것도, 정말로 그 약조를 지킨 것도.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자를 거두는 데에 굳이 노비를 데려갈 이유도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줄을 설 신분이었다. 경염은 뒤로 공작을 펼치거나 정보를 캐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고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 호위도 물리고 녕국후부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정생을 데려온 이유라는게 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태자와 예왕. 랑야각에서 금낭을 받은 두 황자가 편으로 끌어들이려 온갖 공세를 한다는 기린재자는 경염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생을 구해내는 것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 말하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경염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제 판단에 의심이라고는 없는 그런 자신감.


대체 어떤 생각인걸까. 경염은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보았다. 손톱조차 자라지 않는 몸이었다. 자신에 대한걸 몰랐을리가 없다. 불길한 천인. 멈춰버린 황자. 그런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태자와 예왕을 두고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둘 중에 하나가 황제가 될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오래전에 막는 것을 포기한 수순이다. 뻔한 것을 고르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했지만, 당장 황제에게 문안을 드릴 때마다 살얼음판이 되는 본궁을 생각하면 더한 이유가 있을거라는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둘과는 다른 성정을 믿는다 했나. 도박이라고 해두지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본디 남의 낯가죽 뒤를 뚫어보는 능력은 가진바가 없으나 매장소라는 인물은 정말 모호한 데가 있었다. 경염은 천하를 쥐어준다는 강좌맹의 종주에게 쉽사리 신뢰를 주고 싶지 않았다.


책사는 질색이다. 궁에서 떠도는 중상모략도, 그들이 떠드는 탁상공론도 듣고 싶지 않았다. 12년 전의 그 사건만 해도.


경염은 공연히 힘을 주었던 손의 끝에서 그을림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타버린 책의 귀퉁이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버린다. 과연 그런가? 12년 전의 그 사건이 책사들의 간교한 말놀림 때문이었을까? 경염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온 나라에서 떠들기를 쉬쉬하는 이야기였고, 궁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온 궁에서 그 사건에 대해 떠올리게 하는 것은 경염의 자라지 않는 몸 뿐이었다. 항명이라고 수근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눈이 떠졌다. 바스라지는 서책을 덮은 경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는 것은 없어도 확신하는 것은 있었다. 낯선 얼굴에게 말했던 대로 태자와 예왕, 그 두 사람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진흙탕이라는 제위다툼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해도.


하지만 이런 얼어버린 몸으로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악바리마냥 달라붙는 고민을 마지막으로 침전의 촛불이 꺼졌다.





*





"그러니까, 네 몸을 지키겠다고 태자를 인질로 삼았다는 말이냐?"


불 같은 목소리였다. 경염은 무릎을 꿇은채 눈을 내려깔았다. 호령 정도는 예상하고 한 행동이다. 월귀비가 피차 숨기자며 꺼낸 제안은 들을 가치도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몽 통령의 다급한 말을 듣고 소인궁의 경비들을 기절시켰을 때부터 뒤의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증인으로 왔다는 말로는 본궁에 들어오지 못할까봐 걱정했을 뿐.


월귀비와 태자는 시종일관 억울하다는 말을 삼았다. 정왕과 예황, 황후가 짜고 저희를 모함하는 것이라며 호소하는 월귀비가 얼마나 불쌍해보이던지 경염의 손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세력을 늘리려 예황군주를 해하려 했던 주제에 말만은 청산유수다. 그러나 외관과 다르게 경염은 열여덟의 소년이 아니었고, 예전처럼 의관에 그을림을 내거나 손에서 연기가 피어나오게 만들지는 않았다.


몽 통령이 사마뢰를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한 후로는 월귀비의 통탄도 통하지 않았다. 감히 운남왕부의 군주를 해하려 한 죄로 월귀비는 품계를 강등당했고, 태자는 3개월의 금족령에 봉해졌다. 처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미간 하나 구길 수 없었다. 어찌됐든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경염은 처벌을 기다렸다. 상황이 급박했다고는 하나 태자를 인질로 잡은 것은 궁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질문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소인궁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에 경염의 입이 다물렸다. 몽 통령의 덕분이라고 곧이곧대로 고할 수는 없었다. 금위군의 통령이 어째서 소인궁에 대한 일을 알았는지 경염조차 알지 못했다. 예황 군주에 관련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앞 뒤를 잴 것이 없었고, 몽 통령 본인도 뒤쪽에서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음 순간에 들어온 예왕이 황상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겠으나, 황상도 뜬금없는 예왕의 등장에 얼굴을 구긴 참이었다. 하는 말은 구구절절 그럴듯 한 것들이었다. 처벌을 내리려는 황상에게 선처를 구하는 예왕을 따라 정왕도 허리를 숙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일단 예왕의 말이 사실인것으로 믿게 해야한다는걸 알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의문은 머지 않아 풀렸다. 오랜만에 입궁했으니 지라궁에 들르려던 경염을 예황이 막아선 탓이다. 기어코 입에 올라오는 소철이라는 이름에 경염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몽 통령을 만나 자세한 내막에 대해 이야기 한 후에는 찾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언짢은 일이 있으시군요."


품에 맞춰 길이를 줄인 의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밖에는 가벼운 비가 내리고 있었고, 새로 돋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쓸려가지 않으려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임수는 목을 뻣뻣이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황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한없이 곧고 누구도 폄하할 수 없을 기개였다. 조금이라도 인물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허리를 굽힐 수 있을 남자다. 


언짢은게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예황군주의 사건에 대해 물어볼게 있다는 말에 임수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맞은편을 권했으나 경염이 자리에 앉는 일은 없었다. 그 사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는데요. 잔에 차를 따르며 섬긴 말에 경염의 옥패가 흔들렸다.


결과에 만족하냐는 물음에 매장소는 오히려 제가 만족해야하냐는 물음을 던졌다. 예황군주에게 위험에 대비하라 언질을 준 것도, 군주를 안전하게 구해낸 지략도 경염으로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명민한 수였다. 비상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게 사실이었다. 정왕이 예황을 구했으니 정쟁이 터진다면 운남왕부는 공식적으로 경염의 편을 들 것이고, 예왕을 이용해 동궁의 미움도 거둬냈다. 결국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정왕부였다. 경염이 몸을 돌려 책사를 마주보았다.


"난 예황군주 같은 충신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생도 그들을 내 앞날의 발판으로 삼지 마셨으면 합니다만."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임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정쟁의 도구. 임수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금릉에 오는 것을 준비했다.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넣었고,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수를 짜놓았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면 금릉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뼈에 드는 한기는 여전하다. 끓인 물이 담긴 다기를 잔에 기울이며 임수의 눈이 내려갔다. 전하가 절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계셨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가볍게 위장한 목소리에도 경염의 시선은 비껴갈 줄 몰랐다.


혐오하는 눈. 열여덟의, 자주 물기를 담고는 했던 검은색은 자신의 몸처럼 얼어있었고, 이미 지나간 겨울을 생각하게 했다.


"전하께선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신 거군요."


경염이 자리를 옮겨 드러난 바깥을 시선에 담았다. 나를 군주로 모시겠다고 했으니, 내 규칙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겹의 옷으로 감싸여진 등에서는 열기가 피어났다. 감정에 기복이 생기면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미략한 것이니 의복이 타거나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으나, 옅게 부는 바람을 데우기에는 충분하다. 어릴적에는 조절이 더욱 미숙해서 여름이 되면 아무도 경염의 곁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동안 많은 책사를 봐왔소. 조용히 열린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황궁에 넘쳐나는 것이 그들이다. 장수들이 전장에 나가 싸울 동안 탁자에 앉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머리를 굴리는 자들. 간교하고 음험한 이야기와 속삭임. 그들의 중상모략 앞에서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버텨내지 못했다. 임수는 잔 속에서 내려앉는 찻가루를 보았다.


"내 형님과 내... 절친한 벗조차도, 그들 때문에 사라져야 했지."


열기는 한층 거세어졌다. 절친한 벗. 이름을 꺼내는 것 조차도 조심스러운, 역모를 꾸민 임씨가문의 윤인. 경염의 책사에 대한 불신은 잘 알고 있었다. 정생의 일로 녕국후부에 발걸음을 했을 때 직접 말하기도 했으니까. 손 하나로 마을을 불태울 수 있었던 제 천인을 끝내 얼려버린 것이 무엇인지, 임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난 그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소."


경염이 믿지 못하는 것은 매장소였다. 경염이 혐오 하는 것은 중상모략을 들먹이는 필부였으며, 경염이 경계하는 것은 사람을 정쟁에 이용해 먹는 책사다. 임수가 아닌 매장소. 12년 전에 멈춰버린 사람과는 달리 한없이 변해버린, 친우도, 자신의 윤인도 아닌, 진훍을 뒤집어 쓴 바퀴.


"...염려 놓으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임수는 제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고 확신했지만, 나중에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게 될 것을 알았다. 경염이 눈을 감자 끼쳐오던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임수가 손을 뻗지 않기 위해 힘을 넣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걸 알았음에도 열기가 그리웠다. 제 앞에서는 차갑게 식히는 일이 결코 없었는데.


"선생같은 책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알거라 생각하지는 않소. 허나 지켜줘야 할 사람과 해선 안 될 일은 분명히 해두는게 좋을겁니다."


매장소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쥐어준다 해도 자신을 내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천하여도, 설사 죽은 제 윤인이라고 해도.


"오늘 규칙을 정하러 오셨으니, 저도 몇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경염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수그러듦에 따라 임수의 머리도 차가워졌다. 경염은 옷을 바로하여 매장소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몇 번 대면한 얼굴임에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한 몸은 구역질을 밀어내느라 바빴고, 흐려지는 표정을 다잡는 것은 배로 어려워진다. 익숙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태자와 예왕을 상대하는 것은 정왕의 열정만으론 부족했다. 임수가 있는 이유는 그들을 막기 위함이며, 그들과 맞서려면 그들보다 독해져야 했다. 제위다툼은 목이 걸려있는 일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도모하는 대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역모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그 위험에 관해서는 살아남은 7황자 만큼 잘 아는 사람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경염은 잠자코 매장소의 말들을 들었다.


"전하의 규칙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허니 앞으로 전하께서도 절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앳된 얼굴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쉽게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제게 속이는 일도 있어선 안 됩니다. 다음으로 정생의 이름이 나오자 경염의 낯 빛이 달라진다.


정생을 구하는 것을 선물이라고 칭했을 때, 긴장을 풀었었다. 지금은 운남왕부에 있지만 머지않아 정왕부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이었고, 액유정에서 나온 궁노비에 관한 것은 금새 사그라들 화젯거리였다. 들키지 않았을거라 생각했는데. 난처하게 할 일은 없을거라는 말에 경염의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날 해할 생각이었으면, 정생의 비밀을 구실 삼아 협박을 했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하의 곁에 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후일에 태자와 예왕이 칼을 겨눌 때 무엇으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십니까. 오늘 이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앞으로 저를 절대적으로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협박에 가까웠다. 정왕이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매장소가 필요하다는. 아니, 사실은, 임수가 제위다툼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경염이 필요했다. 이것은 청원이었다. 적염군에게 씌워진 역모의 이름을 벗기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대업을 위한, 어쩌면 아직 제 이름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제 곧은 천인에게, 이탈해버린 바퀴가 절박히 원하는 것에 대한.


"폭풍은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임수는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열기가 섞이는 것을 느꼈다. 열 여덟의 어린 얼굴은 관을 틀고 있었고, 눈은 제 결정이 가져올 결과에 짓눌려 감겨있었다. 천인. 하늘이 내려준 사람. 차가운 한기에 몸을 얼려버린, 한시도 잊은적 없었던 정인.


"속히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경염이 대답 대신 남기고 간 열기가, 바퀴에 묻은 진흙을 쓸었다.





*




당신의 선함으로 당신의 어두운 나날들을 가져가겠습니다. 당신을 연모하기에,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저번편의 첫문장은 It's all coming back to me now, 이번 편의 첫과 끝은 Unconditionally. 한 부분만 가져온거라 따로 노래를 적지는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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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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