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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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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6.10.17 지미윈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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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6.03.16 [임수경염] 흡혈귀1
  10. 2016.03.10 린신의 서신

Be Greedy

카테고리 없음 / 2016. 12. 24. 22:18





퀄 엉망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배경도 없고 명암도 없고 정말... 정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안보이시겠지만 그림 위에 Be Greedy라고 써여있는 글씨 클릭하면 나와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브금도 좀 골라보고 했을텐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부득이하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쿠로 너무 사랑하고 앞으로 잘부탁드립니다 감사해요 행복할게요(도게자...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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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카테고리 없음 / 2016. 11. 24. 01:56



같이 들어주세요!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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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롭

카테고리 없음 / 2016. 10. 17. 21:35

그리핀도르의 기숙사 휴게실은 편안함에 주 목적을 두고있었다.


따뜻한 조명과 푹신한 쇼파, 러그, 쿠션. 어수선하다고 평한다면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도 없었다. 붉고 황금빛인 인테리어는 채도를 낮춰도 화려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휴게실은 시끄러웠고, 많은 학생들이 걸음을 반복했다. 그래도 자정이 넘으면 이곳도 분위기를 바꿨다. 시험기간에는 고정멤버들이 늘어났지만 막 학기가 시작한 직후다. 새벽 2시. 토마스는 쇼파에 파묻혀서 손에 들린 따뜻한 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몸에 둘둘 말은 커다란 담요가 미동이 없다.


토마스는 생각중이었다. 상당히 여러가지를 동시에. 첫번째는 마법의 역사 시간 때 깎아먹은 점수-에디슨, 책에 그려진 얼굴이 정말 날 닮았구나-를 어떻게 만회할 것인지. 두번째는 지금 두르고 있는 담요를 무슨 색 담요라고 해야할지-담요는 빨간색을 베이스로 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색의 자수들로 어지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그냥 빨간색 담요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에 대해. 세번째는 이번년도의 퀴디치에 관해-새로 들어온 신입들 중에 뛰어난 수색꾼이 있어야만 했다. 프라이팬이 골을 잘 지켜주기는 하겠지만, 점수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서. 그리고 네번째는, 이번년도에 취임한 슬리데린의 반장에 대한 것이었다.


"안자고 뭐하는거야?"


척이 졸린 눈을 비비며 계단에서 나타났다. 토마스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손에 들린 핫초코를 보고 있었다. 잠이 안와. 척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잠이 안와?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척은 답을 듣고 돌아가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발을 끌며 토마스의 앞에 앉았다.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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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윈이래

카테고리 없음 / 2016. 10. 17. 19:39


그 발언은 완벽하게 부적절했다.

카라는 영문을 모른채로 끊임없이 아니, 아니, 네가 왜 그런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절대 아니야, 따위의 말을 뱉어내고있는 윈에 의해 강제로 사람 없는 복도로 떠밀리고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카라의 단화는 유리문을 넘어서야 겨우 멈췄고, 물음표가 가득한 파란 눈은 이제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절친한 친구에게 향해있었다. 윈은 할 수만 있다면 발이라도 구르고 싶은 것 처럼 보였다. 대신에 윈은 볼륨을 죽여서 카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한거야!

카라는 당황했다. 말 끝을 늘이며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생각할 동안 파란 눈이 이리저리 굴려다녔고, 약간 패닉한 상태의 입에서는 끊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어 그러니까... 설마 너...?

거기까지였다. 윈은 용감하게도 말이 더 이어지기전에 외계인의 입을 제 손으로 막아버렸다. 윈의 거한 한숨을 통해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카라의 눈썹이 쳐졌다. 땅 끝까지 쳐질 기세로 윈이 팔을 늘어뜨리자 카라가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해. 윈은 그냥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지만 그는 괜찮지 않았다. 전혀.

카라는 정말 그렇게 큰소리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제임스를 좋아해? 목소리가 나오기 전까지 카라는 자신이 그런말을 하고 있는줄도 몰랐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윈은 죽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말을 부정하며 카라와 자신을 그 시선들에게서 밀어내는 것 정도였다. 어쩌면 모두가 신경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에 띄지 않게 일 또는 비디오 게임이나 하는 지루한 기술부 직원에 대한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임스의 사무실 유리가 카라와 자신의 목소리를 줄여버렸을 수도 있었다. 윈은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지금 과민반응 중이다.

윈은 그냥 검은 모니터의 각도를 조절해서 그 끝내주는 뒷태를 반사시켜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너무 많이 집중해서 뒤에서 카라가 오는지도, 그녀가 그를 지난 1분동안 열 번은 넘게 부르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뿐이다. 사실 윈은 거의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비록 의자에 기대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카라는 아무것도 없는 화면에서 윈이 대체 뭘 보고있는지 궁금했고, 윈이 보이는건 카라도 보였다. 카라의, 그러니까, '제임스를 보고 있는거야?' 질문은 타당했다. 검은 화면에서 움직이는거라고는 물론 제임스 뿐이었다. 문제는 윈의 반응이었다. 그는 거의 의자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고, 모니터를 의미없이 휙 돌려버린 다음 말을 더듬었다.

카라는 그녀의 탐구본능을 좀 더 깊게 묻어둬야만 했겠지만, 불운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의 추궁-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일은? 제임스가 뭔가 했어?-과 몇 번의 더듬거림은 그 후 몇 분간 이어졌는데, 윈은 바보같은 목소리로 그게 그러니까를 열 번 넘게 말했고, 아무리 카라라도 그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추론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추론이라기 보다는 감이었다. 카라가 그걸 '추론'했다면 그렇게 무신경하고 큰 목소리로 문장을 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미안해. 그냥 보고 있길래, 그게..."
"나도 알아, 카라. 그냥... 내가 미안해. 과민반응한거."

카라는 아니라며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좀 더 사려깊었어야 했거나 아니면 눈치가 좋았어야했다. 윈은 벽이 제 머리를 집어삼켜 목에서 깔끔히 절단시켜 줄 것마냥 정수리를 붙이고 있었다. 큰 일은 없을 것이다. 힐끔 쳐다본 사무실의 안쪽의 제임스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 카라가 소리치는 동안에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윈이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쉬며 정수리 대신 등을 벽에 붙였다.

윈이 제임스 올슨을 좋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지미 올슨'이었다. 슈퍼맨의 친구에, 퓰리처 상을 받았고, 데일리 플래닛의 수석 사진기사였고, 벌어진 어깨에 복근과 근육을 가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웃는다. 그는 심지어 체취마저 좋았다. 윈은 그가 일 관련으로 캣 그랜트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바람에 섞이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건 거의 고문이었는데, 그 냄새를 맡기 위해 고개를 빼거나, 숨을 들이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죄책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변태가 된 기분이었지만 단지 그 체취는 너무 달았다.

사실 표현하기를 달다고 할만한 냄새는 아니긴 했다. 그한테서는 민트와 사향의 냄새가 났다. 지난 시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외계인과 같이 보냈기 때문에-일주일 전까지는 그냥 베타라고 생각하긴 했지만-윈은 알파의 체취라는게 그렇게 매력적인 것인지 거의 잊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제임스가 캣코에 발령받은지 이틀이 지났을 때 그 냄새를 처음 맡았다. 솔직히말해 그의 냄새는 윈이 맡아봤던 그 어떤 알파의 것보다 완벽했다. 저번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중요한건 윈이 토끼구멍에 끌려들어가는걸 저항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매우 불운하게도.

"말은 걸어봤어?"
"그럼, 서로 농담도 하고, 번호도 교환하고, 저녁도 먹고, 그의 집에도 가봤지."
"정말?"
"아니! 그는 내 존재도 몰라! 사장님과 이 회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어도 있는지도 모른다고!"

카라는 윈의 분노 섞인 외침에 턱을 당겨 입꼬리를 내렸다. 윈은 바로 사과하고는 제 머리를 마구 뒤집어대며 정신 사납게 서성거렸다. 윈의 말은 과장된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임스는 윈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 제임스가 지나다니면 저도모르게 어깨를 숙이며 존재감을 극한으로 지우려 든 탓도 좀 있겠지만.

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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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루성, 아성 1인칭 독백








나는 사람의 거죽을 글자에서 얻었다.

글자들을 회반죽 처럼 두르고 나는 사람 행세를 했다. 멀쩡히 웃고 사랑받고 속였다. 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만 할 것을 억지로 했으며 가죽 안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사람의 자기애는 끝이 없어서, 단지 보이는게 자신들과 비슷하면 무턱대고 좋아하고 만다.

내가 가장 처음 얻은 거죽은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썼다. 명성. 명가의 아성.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글자였다. 나는 그 글자의 발음이 내 얼굴을 덮는 것을 느꼈고, 먹의 틈 사이로,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 전에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고아원의 원장이나 봉사를 나온 사람들이 지어주던 것을, 나는 웃음이라고 알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채 나를 동정하는 표정. 그러나 글자의 틈으로 보인 웃음은 그런것과는 달랐다. 그 웃음은, 형님의 웃음은 아주 밝았고, 나를 전혀 동정하고 있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그것을 좋게 생각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는데,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유로 나에게 동정은 좋은 것이었고, 그런게 전혀 들어가있지 않은 표정을 정말 처음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웃음을 따라했다. 얼굴에 씌여진 글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글자가 사람의 것이기 때문일거라고, 아주 오랜 날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첫 가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형님은 그 다음부터 글자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글자를 몸에 칠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칠하면 칠할 수록 칭찬 받는 일이 늘었고, 칭찬을 받으면 안심이 됐다. 칭찬 받지 않으면 굶는 생활을 했었으므로 나는 꽤나 필사적으로 가죽을 둘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활은 끝났다는걸 깨닫고 나서도 나는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게 싫었지만 너무도 쉬웠으며, 그저 버려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유일하게 내가 사랑 받아야 할 이유였다. 나는 명가가 주는 애정을 배부른줄 모르고 집어삼키며 혼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아가리가 넓은 입은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쑤셔넣었고, 한 번 늘어난 구멍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사람이 아닌 나는 절제라는 것 조차도 가죽으로 써야했기에 글자를 바르는걸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가죽을 덧씌우고 벗겼다가 깁는 것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두려움이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중의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문득 형님의 생각이 났던 것이다.


화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파리로 온지는 이미 1년이 훌쩍 지나있었고, 문제 될 건 없었다. 명성의 가죽이 명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주었으므로 그냥 놔두고 있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형님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자각한 후에, 나는 급하게 구역질을 했다. 매만지던 화초도 내버려둔채 욕실로 달려들어가 말 그대로 안에 있는걸 전부 게워내버리고는 옷을 벗었다. 온도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물을 들이부었고, 손에 걸리는 타올로 상처가 날 정도로 몸을 닦고도 욕조에 잠겨 다음날까지 나오지 않았다. 결과는 지독한 두통을 동반한 일주일간의 몸살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끔찍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 때서야 가죽이 안쪽을 좀먹기 시작했다는걸 깨달은 것이다. 가죽의 표현이 나의 표현이 되고, 가죽이 느끼는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었으며, 가죽이 느끼는 통각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몸살을 앓는 중에도 끊임없이 속을 게워냈고, 몸살이 모두 나은 뒤에는, 거처에서 거울을 모조리 치웠다.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욕조의 물에 몸을 담그고 떨었을 때, 단지 그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사람은 아팠다. 사람은 주었으며, 사람은 잃었고, 사람은 무너진다. 가죽은 버려지지 않기 위한, 받고 싶은걸 가지기 위한 수단이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글자들을 모두 박박 긁어내 발로 짓밟고 싶었다. 형님이 지어주었던 글자가 달라붙다 못해 스며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건, 무서웠다.


청자라는 가죽을 얻은 것은 그 때쯤이었다. 당에 가입할 의사를 비췄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중에 다시 연락이 왔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당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가죽의 결정이었으나, 나의 본질은 신분을 위장 해야한다는 사실을 이빨에 박아넣고 씹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죽. 그것을 얻으면 다시 가죽과 본질을 유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명가의 아성이 아닌 청자로서 가죽을 다시 씌운다면 모든게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썩 잘 먹혀들어갔다. 청자의 가죽은 명성의 가죽과는 아주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님이 썼던 먹으로 쓴 명성의 글자와 만년필 잉크로 휘갈겨 쓴 청자의 글자는 같은 검은색이어도 섞여 들어가 있는 색에 차이가 있었다. 그걸 같은 검은색으로 쳐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청자를 쓴 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몇 번인가 나도 모르는 새에 중요한 임무를 성공시키고는 했고, 신뢰도가 높아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청자는 웃었으나 본질까지 감정이 전달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성공으로 쳤다. 계속 이렇게 청자의 가죽을 쓰고 산다면 유학을 끝내고 돌아가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형님의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점점 청자의 잉크가 스며들었던 먹 마저도 흡수하는 것 같았다.


파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재떨이 정도 밖에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나를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고는 했지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청자는 도구이므로, 그저 일만 잘 하면 되었다. 청자에는 꽃과 향수, 화약과 골목길의 글자가 쓰였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두려움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래서 형님이 파리로 온다고 했을 때 꺼리지 않았다. '청자'는, 다른 가죽이어도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들킬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만약 들킨대도 다른 사람이 됐다고, 그 이상으로 추론하는건 불가능 할거라고 생각했다. 형님은 내가 글자를 가죽으로 쓰고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눈치가 없었다기 보다는 그런걸 눈치 챌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때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형님도 가죽을 쓰게 됐다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가정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총성이 들렸을 때, 다시 돌아온 두려움으로 인해 청자의 가죽은 눈 위에 처참하게 버려졌다. 아직 덜 빠져나갔던 옛날의 먹이 묻은 채인 살점들은 여과없이 공기를 맞았고, 살점에 달라붙어있던 수증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결정들을 만들었다.


그 얼음과 눈으로 얇게 씌인 것의 이름은 명성이었다. 명루의 아성. 살점과 뼈에 달라붙어 긁어낼 수 없는, 가죽이 아닌 피부의 이름이었다.




*



그래도 여전히, 몇 번의 밤에서는 내가 가죽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그건 필시 내가 나의 본질을 앎이고, 원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끔 피부가 벗겨졌고, 살결 아래에서 얼굴을 구기며 필요할 때는 칼로 피부를 긁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살점이 아닌 피부 위에 글자를 쓰고 덮는다. 모든 글자들은 피부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모든 나의 생각들은 피부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먹이 스며들까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이 아닐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내 것을 주지 않고 아파 할 필요도 없는, 웅크린 본질을 두껍게 감싼 가죽을 다시 갖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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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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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임스] 독약

연성/기타 / 2016. 4. 15. 23:07



"어떨 것 같아?"


아서는 잠자코 제 손에 들린 시험관을 보고 있었다. 유리 안에 갇힌 액체는 투명했고, 임스의 웃는 얼굴이 좁은 공간에서 굴곡되어 흐려진다. 살짝 흔드니 바닥부터 기포가 올라왔다. 표면으로 올라와 맺히는 구체를 보던 아서가 뚜껑을 열고 앞에 놓인 위스키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독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노크 소리에 호텔의 방 문을 열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아서는 방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가 들고온 문제는 더더욱. 가방도 코트도 없이 서있는 임스의 손에는 시험관이 들려있었고 인사도, 다른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건 들어서 알았지만 아서가 임스에게 연락을 하거나 묵고있는 호텔의 룸넘버를 알려준 적은 없었고, 임스가 그런 정보를 알아낸 것에 대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아서는 단지 그가 뜬금없이, 아서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오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어쩌면 문을 닫아버렸을 수도 있었다.


귀찮게 문을 두드린데도 무시하거나 프론트로 전화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서가 임스를 안으로 들일 그럴듯한 이유는 없었다. 둘은 반년 전에 헤어졌고, 일이 겹치지 않으면 수백 킬로미터를 떨어져서 지냈으며, 중요하게 할 대화나 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임스는 그 흔한 들여보내줄거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은채 서있었다. 아서는 문에서 한발짝 비켜섰고 임스는 거리낌 없이 방으로 들어와 카우치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서는 임스에게서 시험관을 받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액체는 위스키 안으로 흔적도 없이 녹아들어갔다. 잔을 돌려보던 아서가 겉에 묻은 물방울을 엄지로 쓰다듬는다. 임스는 턱을 괸채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참고로 독약이라면 치사량일거야. 죽거나, 그것보다 심해지겠지. 아주 유려한 너스레다. 아서는 손톱으로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긁듯이 만졌다.


임스를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서는 이 위스키를 마실 이유가 없었다. 임스는 독약을 마시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액체가 독약일지 아닐지를 물었을 뿐이고, 마시지 않고 대답해도 상관없을 문제였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지금에라도 내쫓을 수도 있다. 임스는 순순히 나가줄 것이다. 아서는 그가 그럴 것이라는걸 알았다. 몇 번이고 그랬으니까.


아서는 액체가 독약인지 아닌지 모른다. 아서는 모르는 것이 싫었다. 모르는 것은 아서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건 아서의 신경을 긁어대는 일이었다. 액체는 어쩌면 환각제일 수도 있다. 아서가 이것이 환각제라는걸 확실히 안다면, 마신 다음 일어날 일이 환각이라는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서는 그 액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마셔보기 전까지는, 어쩌면 마시고 나서도 액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만약 독약이래도 정확히 어떤 독약인지, 어떤 성분 때문에 자신이 죽는지, 아마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서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임스는 아서가 위스키를 입에 문채로 다가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임스는 여유롭게 아서의 키스를 받았고, 목 뒤로 정체모를 액체가 섞인 위스키의 반을 넘겼다. 달거나 비리거나, 어쩌면 마비되어 있을 수도 있는 혀가 섞이며 미끄러졌다. 한동안은 젖은 소리만 울렸다.


입술을 떨어뜨리고 팔로 닦은 아서가 방을 가로질러 코트를 들었다. 임스는 여전히 턱을 괸채 카우치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떠나려는듯 풀지도 않은 가방을 든 아서가 옆을 지나쳤다.


"독약이었던 것 같아?"


아서는 임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긴다. 무겁고 부드러운 호텔의 문이 안으로 열렸다가 느슨하게 닫히고, 복도에 울리는 구둣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임스는 몸을 일으켜 아서가 놓고 간 위스키 잔을 들어 조금 남은 내용물을 흔들었다. 한방울도 남지 않도록 잔을 뒤집어마신 임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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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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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는 고개를 들었다.


넓은 방은 햇볕으로 채워져 있었다. 창호문은 대청을 향해 활짝 열려있었고, 바깥에서는 새소리가 났다. 임수는 손잡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괸채 맞은편을 보고 있었다. 지저귀는 소리가 꺽꺽대며 죽어가는 소리 처럼 들린다. 주의를 분산 시키는 것이 너무 많았다. 흠집이 많은 목재바닥, 떠다니는 민들레의 씨앗이나 반쯤 볕에 물든 경염의 머리카락, 다리 하나가 다른 것 보다 짧은 의자, 엎질러진 찻잔과 말라붙은 얼룩까지 모든 곳이 임수의 도피처다.


눈을 감으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속삭여지는 혼잣말이 실질적인 충고임을 알았지만, 임수는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오래 뜨고 있어서 아려오는 눈 주위가 붉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경염은 웃고 있었다. 언제나 보던 얼굴이다. 항상 생각하고 떠올리던, 어떤 때는 물에 가라앉은듯 흐릿하기도 했던 얼굴.


경염의 앞에는 고리가 있었다. 아주 천천히, 경염이 의자 위로 올라선다. 삐걱, 균형이 맞지 않는 의자가 흔들렸다. 황자는 매듭이 제대로 매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을 몇 번 잡아당겼고, 목재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어떤 것이든지 소리가 너무 컸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던 천이 경염의 손에서 놓아졌고, 물든 눈이 임수를 향했다. 임수가 주먹을 그러쥔다.


머리를 넣어. 어떻게든 단호하게 끊어낸 목소리가 울린다. 경염은 말없이 고리를 목에 걸었다. 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간다. 경염의 시선은 임수를 따라가지 않고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이 섬세하게 조각된 등받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당기면 경염이 떨어질 것이다. 새는 이미 죽었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임수는 방의 끝 부분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았다. 다른 곳은 모두 없어진지 오래다. 이곳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곳이었다. 경염의 방.


없애야 한다. 알고 있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떨어뜨려. 목소리가 들린다. 살아남아. 외침이 들린다. 수아야. 재촉이 들린다.


하지만 아버지. 나약하리만치 꺼져가는 소리에 임섭이 임수의 어깨를 쥐었다. 손톱이 벗겨지고 살이 까진 끔찍한 손. 이제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염은 눈을 내려깐채 침묵하고 있었다. 민들레 씨앗이 볕을 통과했다가 느리게 떨어진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임수의 손도 재로 뒤덮인다. 수아야. 임수의 눈이 감긴다. 수아야.


경염의 몸이 허공에 뜬다.


끔찍하리만치 조용하다. 임수는 본능적으로 발버둥치는 다리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햇볕은 불로 바뀌고, 발을 디딘 곳은 처형장으로 바뀐다. 재로 뒤덮인 매령은 붉다. 임수는 고개를 들어 목을 맨 시체를 보았다. 까무룩 죽어있는 감정 그 자체가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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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자랐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키가 커진 것 같다거나 얼굴이 성숙해졌다는 농담은 황제의 눈 밖에 밀려난 7황자를 기만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고, 궁에 가게되면 으레 몇마디씩 들려오는 기분나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라궁으로 향하는 중 만났던 예왕이 너스레를 떨며 좀 커진 것 같다고 말을 건넸을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익숙해진 기만을 듣고 새삼 화를 낼 성정도 아니었다.


예왕은 여전히 딱딱한 녀석이라며 길을 비켰고 경염은 정비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지라궁에 찾아들었다. 정비는 미리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차리도록 명하며 언제나처럼 경염을 맞았지만, 백합탕을 들기 위해 소매를 걷었을 때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챘다.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떠야하는건 경염이었으나 어째 정비의 얼굴이 더욱 놀라있었으므로 엎질러진 탕은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머니? 의아하게 나온 목소리에 정비가 손을 놓기는 커녕 좀 더 가깝게 손을 끌어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보라고 답지않게 독촉을 했고, 영문을 모르는 경염은 명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경염은 약간 멍한 기분이었다. 몸이 자랐다니? 급히 시녀들을 시켜 관을 틀었던 머리까지 푼 경염은 세심하게 살펴보는 정비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당황스러워했다. 얼결에 바라본 손톱은 정말로 길이가 자라있었다. 한끗. 그러나 전장에서 다쳐도 딱 예전의 상태로만 돌아오던 손톱이 자랐다는건 무시하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키까지 재 본 결과 확실하게 자라있었다. 경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과거에는 매일 밤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랐는지 확인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습관이다. 손톱도 머리카락도 언제고 똑같았고, 몸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하기 위해 벗었던 겉의복을 다시 입혀주는 손에도 무슨 기분을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잡히는 단서가 없다. 경염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윤인이 죽은 부작용이었다. '윤인'은 천인과는 달라 능력이 없었으나 기의 파장이 비슷한 다른 천인을 받쳐줄 수 있었다. 모든 천인이 윤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평생 자신의 윤인을 만나지 못하는 천인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부작용이 없고 능력 또한 약했다. 기왕도 윤인인 기왕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겨우 돌맹이 하나 들어올리는 정도였지만, 기왕비를 만난 후로는 활 없이도 백 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경염처럼 거의 태어나자마자 윤인을 만난 경우는 역사서에서나 찾아볼 법하게 드문 일이었다. 천인은 천성적으로 기가 두 가지 있다고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천능의 기가 활발하여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있으나 조절에 미숙한 단점이 있다. 자라면서 윤인을 만나지 못하면 자연히 천능의 기가 막혀 점점 능력이 줄어든다. 그러나 경염은 제 윤인과 계속해서 함께 자랐고, 나이가 차면서 천능이 막히는 일 없이 조절법만 늘어갔다. 경염이 나서는 전장에는 항상 불이 따라왔으나 기가 폭주한 적도, 천능이 줄어든 적도 없었다. 불안정한 날들은 많았으나 임수가 옆에 있으면 언제나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나 특별한 사람이 갑작스레 죽어 떠났을 때. 윤인에 사라진 것에 대한 부작용은 천인마다 모두 달랐다. 갑작스레 폭주를 하거나 천능을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몸이 끔찍하게 약해질 수도, 혹은 운이 좋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경염처럼 성장이 멈춰버린다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시기적으로 보면 어쨌든 윤인이 사라진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정비는 경염의 맥을 짚어본 뒤 천능 대신 다른 기가 막혀버렸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래서 성장이 멈춘 대신 천능은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경염은 지금까지 전혀 자라지 않았다. 윤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막혔던 기가 갑자기 뚫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열 두 해 동안 자라지 않았던 몸이었다. 일상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해보다 금릉에 좀 오래 머물고 있기는 했지만, 북방토벌을 워낙 깔끔하게 해버린터라 보낼 곳이 없어 그럴 뿐이었다. 특별히 의원을 찾아가거나 다른 탕약을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 시도들은 오래 전에 포기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경염을 앞에 둔 정비는 성정대로 차분해졌다. 시녀들의 도움으로 관을 도로 틀어올린 경염은 무슨 말을 떼어야할지 몰랐다. 짐작되는 이유. 말아쥐어지는 경염의 손을 보던 정비가 눈을 내려깔았다.


"...12년이나 되었잖니."


경염은 대답이 없었다. 12년. 긴 시간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 경염은 이제 서른을 넘었으며, 금릉 또한 너무도 바뀌었다. 윤인을 잃은 천인은 극심한 슬픔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천능은 요사스러운 것이어서 기의 주인의 마음을 신체적으로 반영시킨다고, 혹자는 그것이 부작용이라고 서술했다. 크게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황상에게서 정왕의 이름을 실추시키려고 하던 뭇 서생들이 계속 들고나왔던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정을 그렇게 놓은 후 생각하면. 경염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자라버린, 굳은 살로 뒤덮인 손. 정녕 그런 것일까. 제가 임수를 잊어서, 임수에 대한 마음이나 그리움이 옅어졌기 때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일까. 그런걸까?


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경염은 막사촌 하나를 모조리 태웠다. 부관이 입단속을 시켜 황상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당시의 병사들은 그 때의 경염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막사에서 주저 앉아있는 황자. 재들이 타는 소리가 황자의 오열을 묻었고, 날이 지날 때까지 화마는 줄어들지 않았다.


잿더미에서 걸어나오는 천인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채인 경염의 눈은 극도로 형형했다. 바로 금릉으로 돌아가 이유를 물었으나 황상은 설명해주기는 커녕 경염을 북방으로 내몰았고, 몸은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경염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오래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미련했다. 그럼에도 경염은 주먹을 말아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제가 임수를 얼마나 그리워 했었는지, 그의 죽음에 얼마나 괴로워 했었는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허공에 떠버린 느낌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몸을 항명이라고 칭하는걸 부정하지 않았던건, 경염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작용은 항명이었다. 기왕부의 사람들과 임씨 일가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믿는 경염의 마지막 발버둥이었고, 할수만 있다면 이 모습 그대로 임수를 만나고 싶다고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닳아버렸다고 한다면.


경염의 눈이 부정하듯 질끈 감겼다.




*



당신은 이렇게 날 떠났죠. 난 내색하지 않아요. 희망도, 사랑도, 영광도, 행복한 결말도 없다는 사실을요.




*





"정왕의 몸이?"


몽지는 확실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위군의 통령은 소문에 밝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런 그라도 촉각을 세우는 이야기들이 몇 있었다. 죽은 의형제가 금릉으로 돌아온 뒤로는 정왕부의 소식이 그러했는데,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갈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급하게 녕국후부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임수는 부탁한 저택의 일인줄 알고 몽지를 들였다가 손을 그러모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염의 성장이 멈춘 것은 윤인인 자신이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금릉에 돌아온데다 지척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더이상 부작용이 계속 될 이유가 없다. 사실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한독이 기를 흐트려 놓았을거라 믿었기에 아직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몽지는 낭패어린 임수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임수도 생각 못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강좌맹의 종주가 금릉에 도착하자마자 경염의 부작용이 낫는다니. 예왕의 편인 척 할 계획이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경염이 눈치를 채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김에 말해버리자고 한탄하는 몽지에게 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대업을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경염이 제 정체를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닙니다. 윤인은 평생에 한 사람으로 정해지는건 아니니까요."


드물었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 새로운 윤인을 만나게 되면 부작용이 사라진다는 사례는 고서에도 왕왕 나와있는 이야기였고, 마지막 천인 황제도 세 명의 윤인을 두었다. 천인과 마찬가지로 윤인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였다. 새 윤인이라니, 정왕이 당황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금릉으로 오자마자 부작용이 나은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매장소가 정왕의 새 윤인이라는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예왕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예왕의 책사로 있으며 안으로는 정왕을 도울 계획이었는데, 천인과 윤인 사이의 각별한 애정에 대한 것은 온나라가 소비하길 좋아하는 소재였다. 정왕의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의심 많고 총명한 예왕이 뒷생각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해결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뒤집어서 보면,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다만 정왕에게는 조금 잔인한 수가 될 것이고, 신임을 얻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시기가 늦었으면 했는데. 어떤 계절이든 차기만 한 손이 찻잔을 쓰다듬었다.





*




 7황자의 부작용이 서서히 걷힌다는 소문은 빠르게 금릉을 돌았다. 경염은 되도록 정왕부의 바깥으로는 나서지 않았고, 소문은 무성하게 커졌다. 온갖 추측이 나돌았지만 다행히 매장소의 존재까지 이야기가 연결 되지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백리기의 무술 시합 때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었으니.


임수는 비류가 전해준 서신을 받았을 때 경염이 뭔가를 깨달았을거라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경염도 수상한 책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고 급하게 전해진, 만나야 한다는 서신을 봤을 때, 가능성이 스쳤을 것이다. 시기가 너무 꼭 들어맞았다. 책사와의 만남 후로 몸이 자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경염에게 몇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앞으로도 계속 자랄겁니다."


책사의 첫마디는 그러했다. 경염은 시선을 아래에다 두고 올릴 줄을 몰랐다. 사실 몸이 자랐다는 것이 그렇게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깨가 조금 벌어졌고 섰을 때 반의 반뼘이 안되게 키가 컸을 뿐이다. 손은 소매에 가려지고 머리는 관을 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과 다르다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정비와 임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윤인에 대한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임수는 시선을 내렸다. 경염은 여전히 단단한 모양새였다. 갑자기 자라는 몸에 대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음이 분명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부작용이 없어지는 가장 흔한 경우에 대해서.


서책으로는 읽은 바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책사를 보는 시선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였다. 예왕과 태자를 놔두고 절 황제로 올리겠다 선언한 책사가 윤인이라니. 우연이라쳐도 질이 너무 나빴다. 경염을 불러낸 것이나 첫마디까지만 고려해도 자신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듯 눈을 감은 경염이 숨을 뱉었다.


"내 전 윤인에 대해서도 들었을거라 생각한다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매장소가 눈을 감고 있었고, 경염은 시선을 비껴 다기들을 보았다. 적염군에 대한 이야기는 온 나라가 쉬쉬하면서도 밑으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금릉에 들어오며 임씨 가문에 대해 듣지 못했을리가 없고, 경염을 황제로 올릴 생각이라면 그의 윤인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리가 없다. 경염의 말이 질문이 아닌 이유도 그런 탓이었다.


어떤 말이 나와도 시치미를 뗄 수 있었지만, 임수는 제가 화두로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7황자 소경염은 고집이 세고 주변에 어둡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모순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파고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수에 대한 화제가 민감하면 민감할 수록 그럴테고, 그래서 윤인에 대한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나중에 하고 싶었다. 매장소가 임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준 다음에 나누어야 할 화제였는데. 


"매령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임수가 저에 대해 뱉을 말이 많지는 않았다. 경염은 제 손 끝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오히려 끝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감긴 임수의 눈꺼풀이 약하게 떨린다.


"그랬지."


찬 목소리였다. 매장소는 송구하다는듯 고개를 숙였고, 경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을 말한건데 어째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오. 차분해진 얼굴로 찻잔을 가져간 경염이 소매를 걷었다. 서책에서 읽었다고는 하나 자세한 건 모를테니 간단하게 얘기해주겠소.


"바퀴 윤자를 쓰는 것은 알고 있겠지. 천인이 가진 천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윤인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이오. 윤인은 천인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천인은 불가능하지."

"...전하는 살아계시지 않으십니까."


임수는 경염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랬으나 천인은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간결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윤인은 별달리 하는 것은 없었다. 천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천능을 증폭 시킬 수 있었고, 천인이 폭주할 때 몸을 닿게 하는 것으로 진정시킬 수 있으니 옆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역할의 8할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왕에게 넘어간 척 해야하니 둘은 옆에 있기는 커녕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한다. 조절이 미숙했을 때 만났다면 문제가 있겠으나 경염은 이미 윤인 없이도 천능을 다룰줄 알았다. 무리하게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설명에 매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능에 관한 것 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경염은 손을 가리고 있던 천을 위로 걷어 매장소에게 내밀었다. 검지의 손톱만이 유난히 길다. 매장소가 허락을 구해 손을 살펴볼 동안 나머지는 잘라냈다는 말이 들려왔다. 손톱 외에 손의 골격도 자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주 전이니 놀랍도록 빠르게 자라고 있는 셈이다.


"계속 정왕부에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소. 소문도 마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고. 선생을 안만난다고 자라지 않는 것 같지도 않으니, 윤인인걸 숨기는게 쉬울 것 같지는 않소만."


임수는 길다란 손가락을 쓸어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하의 윤인인 것은 반드시 숨겨야합니다. 예왕에게 의심을 사는건 피해야하니까요. 그것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염이 자연스레 손을 빼냈다.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묻는 목소리에 임수가 찻잔을 잡았다. 속여야지요.


"황상에게 전하가 적염군과 임수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하십시오. 둘도 없는 기회이니."


바람에 열기가 섞인다. 임수는 그러쥐어지는 주먹을 내려깔은 눈으로 보며 차를 흘려넣었다. 그을림을 낸다면 녕국후부에 자신이 왔었다는걸 알리는 꼴이 된다. 빠르게 열을 가라앉힌 경염이 목을 세웠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임수는 곧은 시선을 그대로 받아쳐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미에 붙였듯이 둘도 없는 기회였다. 제위다툼에 나서 최종적으로 태자에 책봉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천대받는 처지부터 개선해야 한다. 12년 전의 일에서 미련을 털어버려 외관이 자란다고 한다면 경염을 보는 황상의 눈도 달라질 것이었다. 천인의 몸은 하도 불가사의한 것이라 온갖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거나 일정한 유형이나 '보통'이라 칭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윤인이 사라져 성장이 멈춘 몸이었다. 윤인에 대한 미련이 없어져 다시 자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물며 천인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황상이야 더 쉽게 속겠지. 천인에 대한 황상의 시기 탓에 예왕이나 태자도 그쪽에 능하지 않으니 넘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라면 경염에게 있었다.


"거짓을 고하는 것이 성정에 맞지 않으신걸 알지만, 대업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니 신중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황상을 속이려면 단지 황상 혼자만을 속여서는 안된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예왕이나 태자 같은 다른 황자들이나 심지어는 예황과 정비에게마저도 거짓말을 해야했다. 정생의 일만 따지더라도 거짓말을 하기 싫어할 뿐 못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으나, 무거운 것은 거짓말의 내용이었다.


임수와 기왕, 7만의 적염군에 대한 것을 이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입에 담아야하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며 지나간 일들이라고. 누구도 경염을 탓하지 않겠으나 경염은. 경염만큼은 제위다툼을 위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늦든 빠르든 몸이 자랐을테니 언젠가는 해야했을 거짓말이었지만 임수는 그 시기가 되도록 늦었으면 했다. 경염의 자책은 임수의 속마저 파먹을 것이었기에.


경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숙인 얼굴은 시선에 잡히지 않았고, 열기도 나서지 않았다. 못한다는 답이 들려도 수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위험이 따랐고, 너무 위태스러운 작전이다. 경염이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으니 나올 결과를 알아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희생은 언제나 따르는 법이었으나 임수는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구역질을 참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다. 임수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약조해 줄 것이 있소."


오래 걸렸으나 망설임이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경염의 고개가 들리는 듯 천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각거리는 단호한 소리.


"난 기왕 형님과 임씨 일가가 모반을 꾀했다고 믿지 않아. 사건을 재조사 해 그들의 결백을 밝혀내야 해.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고."


임수의 내려진 시선에는 아직 쥐어져있는 주먹만이 보였다. 정갈하게 놓여있는 손은 앞으로 12년의 세월을 빠르게 거칠것이다. 더 커지고 길어져 큰 칼이나 활도 가볍게 쥐게 되겠지. 몸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금의 얼굴은 흔적만 남고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 얼어있어 안에 들어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은 누구도 관심있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차가운 덩어리. 언제나 무시받았던,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얼음.


"그걸 막지 않는다고 약조 한다면. 선생의 계획이 무엇이든 따르겠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얼음에게서 새어나오는 열기가. 얼음에 갇혀있던 적염이. 덮쳐오는 화마가 너무나 그리워서, 임수의 눈이 감기었다.




*



이게 우리가 사랑했던 방식이에요. 마치 영원한 것 처럼.

그리고 우린 남은 여생을 살아가죠, 하지만 함께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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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분량이 얼마 안돼서 기분이 이상하네;;; 임수경염 뱀파이어au... 군님 사랑해요....







흡혈귀라고 부른다.


경염은 그런 귀신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바깥의 무서움을 모르는 임수의 손에 끌려 정처없이 밤의 저잣거리를 헤매고 돌아왔던 날이다. 임섭 장군은 철부지 어린아이들을 앉혀놓고 세상에 존재하는 귀신에 대해 가르쳤다. 죽은자의 몸으로 움직이는 강시,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각다귀, 행인을 끌고 들어가는 수귀, 긴 손톱을 가졌다는 산호.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흡혈귀라고 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해 거꾸로 매달아놓고 생피를 빼간다. 고통에 찬 비명은 귀신의 귀에는 닿지 않고, 절망스러운 얼굴과 그들의 애원은 귀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루치 피를 전부 빼면 잠시 놔두었다가 사람에게 피가 차면 다시 매달아 놓고 일을 반복한다. 잘못해서 먹이가 죽어버릴 때 까지 계속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사람이란 먹이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먹이에 대한 동정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흡혈귀에게 잡히면, 평생을 갇혀 살다가 결국에는 죽게 된단다. 어렸던 경염과 임수는 마른침을 삼켰고, 다시는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작은 입들이 뱉었던 말은 결과적으로 잘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이 겁을 주기위해 한 허구의 이야기라는걸 알기까지는 몇 년 정도가 걸렸다.


그 뒤에도 흡혈귀에 대한 것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는데, 불가사의한 일을 두고 귀신의 소행이라며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짐승의 짓이거나 귀신의 짓으로 보이게 꾸민 일들이었다. 몇몇 사건들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어도 경염은 어린시절 이후로 그것들이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임섭의 말이 거짓이라는걸 먼저 알았던 임수가 하도 놀려대서 그랬던걸지도 몰랐다. 12년전, 툭하면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장난을 걸던 친우가 죽은 후에는,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 있음을 알기에 믿지 않았고.


알게 된 경위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


제위 싸움에 덤벼드는 것을 결정했던 날. 매장소는 자신이 사람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말했고, 말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경염은 속을 알 수 없는 책사가 또 자신을 기만하는 것인가 고민했다. 어떤 반응을 내보이는지 살피는 걸 수도 있었고, 어쩌면 비유일 수도 있었다. 매장소는 침묵하는 경염을 보고 웃더니 견평의 이름을 불렀다. 대기하고 있었던 듯 뒤쪽에서 견평이 사발을 들고왔다. 안에는 세 모금 정도의 피가 차있었고, 매장소는 경염의 당황한 표정도 보지 않고 그것을 한번에 들이켰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흡혈귀에게 물려 가까스로 살았다고. 빈 사발을 건네받고 그것이 진짜 사람의 피임을 확인한 경염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사람을 죽이고 있는거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저었고, 견평이 소매를 걷어 자상을 보였다.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만큼 피가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에 경염이 기묘한 표정을 했다. 사실 매장소는 경염이 어렸을 때 그렸던 흡혈귀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창백하기는 했지만 병환 때문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색이었고, 번들대는 눈이나 커다란 이빨 따위도 없었다. 그나마 보통보다 신장이 커 팔다리가 길었으나, 그역시도 사람의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귀신이라 이름 붙일 외관이 아니다.


경염은 입안에 도는 질문을 섬기지는 않았다. 너무 무례한 의문들이었으니까. 경염을 대신하여 매장소가 나도는 소문들과 자신의 다른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매장소는 괴력을 가지거나 불사의 존재도 아니었고, 은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기실 보통의 완전한 흡혈귀는 그랬지만, 그들은 굳이 여러 인간의 피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매장소가 완전한 흡혈귀가 아닌 이유는 그가 만들어졌기 때문이었고, 진짜 흡혈귀의 피를 마실 때까지는 인어마냥 반인반수의 상태일 수 밖에 없었다. 인간과 흡혈귀의 중간에 걸쳐진 귀신은 피를 마시지 못하면 눈꺼풀도 들지 못하는 천한 약골일 뿐이다. 경염은 매장소가 봄철이 되어서도 화로를 치우지 않는 것이나 강호인이면서도 칼 하나 휘두르지 못하는 것을 기억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온 금릉에 매장소를 제외하고 네명 뿐이었다. 호위인 비류와 견평, 려강, 그리고 경염. 잠시 침묵하던 경염은 어째서 자신에게 진실을 알렸냐고 물었다. 뒷얘기를 듣지 않고, 또는 듣고서도 믿지 않고 당장 악귀라며 목을 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말을 들은 반요는 눈을 휘며 웃었다. 서로 숨기는게 없도록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책사가 피를 먹는 귀신이라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새 저택에는 비밀통로가 만들어졌으며 궁에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서생은 차근차근 태자와 예왕을 무너뜨렸고, 신실한 충성으로 경염의 신뢰를 샀다. 자신이 귀신이라고 고백했던 날 뒤로 매장소가 경염의 앞에서 피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뿐만아니라 자신이 귀신이라는걸 떠올리게 할만한 어떠한 언행도 일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자 경염은 그날의 대화를 대부분 잊고 있었다. 매장소가 흡혈귀라는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대화를 다시 상기 시키는 것은 꽤 오랜 날이 지나서였다. 침전에 침입자가 든 것을 알았을 때, 경염은 이미 팔이 붙잡힌 후였다.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집기도 전에 어리고 익숙한 얼굴이 불쑥 시야를 차지했다. 비류. 항상 제 책사의 곁을 지키던 호위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거거. 수거거가. 짧은 말로 뱉어내며 억지로 저를 일으키는 통에 경염의 얼굴이 굳어졌다.


급히 발걸음을 옮긴 소택의 침전은 엉망이었다. 깨진 사기그릇과 엎어진 서책, 날뛰고 있는 귀신, 그걸 막고 있는 장정 두 명까지. 경염은 제 쪽으로 날아오는 다기를 급하게 피하다가 문지방에 어깨를 부딪혔다. 난장판이다.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했던 책사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운 소리를 냈다. 제발 진정해 달라고 애원하는 견평과 려강의 목소리도, 억지로 팔을 떼어놓으며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비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염이 어렸을 적 그렸던 귀신이다. 번들거리는 눈과 드러난 이빨이 흉측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생각이 스치자 행동은 빨랐다. 성큼 안쪽으로 발을 들인 경염은 정신이 없는 려강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제 팔을 그었다. 말릴 틈도 없이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잡아 억지로 제 팔을 향해 숙였고, 귀신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끔찍한 소리였다. 부러뜨릴듯 쥔 팔에 귀신의 손톱과 이가 박혀들어갔다. 경염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마자 새된 소리를 지른 두 부관의 등에 소름이 퍼졌으나 경염은 생소한 아픔에 어금니를 물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채였다. 피를 마신다기보다는 살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굳어버렸던 부관들은 경염의 낯빛이 창백해졌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달려들어 매장소를 떼어놓으려 들었다. 귀신의 반항이 거셌으나 비류가 뒤에서 힘으로 떨어뜨리자 팔에 박힌 이가 빠졌고, 그틈을 놓치지 않고 경염이 매장소의 뒷목을 쳐 날뛰던 몸을 기절시켰다.


"지혈제, 당장!"


불호령에 쓰러진 종주의 몸을 떠받치던 견평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소매를 뜯어 상처 위쪽을 이빨로 단단히 묶은 경염이 비류가 붙잡은 매장소를 급히 살폈다. 제 피가 묻어있는 입의 안쪽에는 아직도 형형하게 송곳니가 나와있었다. 몸 곳곳에는 두드러기 같은 포진이 올라와 있었고, 피부도 시체마냥 차갑다. 무언가를 집어던지다가 생채기가 났는지 머리카락과 피가 엉겨붙은 손에도 상처가 있었다.


살피는 동안 지혈되지 않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향 때문에 도로 깨지는 않을지 어금니를 사려문 경염이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하고 있었던겐가! 하얗게 질린 려강은 고개를 숙였고, 비류는 매장소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울 것 같은 아이의 표정에 아연해진 경염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달빛에만 의존에 절 찾아다녔을 아이였다.  절박하게 제 형님을 부르던 얼굴이 의식이 없는 귀신의 품으로 사라진다. 머리가 아픈 것이 빈혈 때문일지 확신하지 못한채로 경염이 작은 등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을거다. 뱉은 말이 제 귀로 돌아온다. 등을 쓸어주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괜찮을거야. 조금 멀리서 지혈제를 든 려강이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





매장소가 눈을 뜬 것은 그 뒤로 이틀이 흐른 후였다. 정무를 보던 경염은 통로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옷을 갈무리하여 일어났다. 깨어나자마자 종을 울리라고 닥달을 해댔으니 늦게 울린 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한소리를 해야할 것이다. 전영도 물리고 혼자 비밀통로를 거쳐 소택에 걸음을 들인 경염은 침전에서 겨우 일어나 앉아있는 귀신을 마주했다. 전날의 기세가 어디로 갔는지 환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매장소는 허리를 숙여 예우를 차렸고, 경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귀신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말을 고르는듯도 했고 도저히 어떤 말을 뱉어야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시는 황자의 옥체에 흉을 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박아넣었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에는 경염이 직접 팔을 그었다지만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제 책사를 앞에 두고 경염이 먼저 말을 떼었다.


"생피를 먹으면 안된다고 하더군."


매장소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피를 내줬던 밤에 견평을 들볶아서 얻어낸 답이었다. 흡혈귀가 날뛰는데 충성스러운 부관들이 피를 주지 않고 진정하라 말만 했던 이유였다. 그 전까지는 반드시 피를 밖으로 꺼내 담아 이틀을 지낸 뒤 마셨다고 한다. 죽은 피의 식감은 진흙과도 같아 차라리 안먹느니만 못한 맛이지만, 생피를 한 번 맛 본 후에는 죽은 피를 먹을 수 없게 된다. 피를 내줄 충신은 널리고 널렸으나 강좌맹의 종주는 그들의 목숨을 갈취하여 제 목숨을 늘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은 피를 마시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반요의 몸이라는 것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반요가 피를 원하는 것은 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죽은 피로는 널뛰는 기를 잡아누르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그런 죽은 피마저 얼마간 들어가지 못하면 귀신의 기가 몸을 찬탈하게 되어있다. 강좌맹에서는 귀신을 억지로 붙잡을 동안 다른 사람이 피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이곳은 금릉이었다. 비류까지 달려들어도 진정 시키기 어려운데 왜 피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도 없는 금릉에서 갑자기 죽은 피를 구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비류가 경염의 침전까지 들이닥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디에라도 도움을 청해야 했기에.


"나 때문에 생피를 입에 대었으니 일이 꼬였겠군. 급했다고는 하나 설명도 듣지 않고 피부터 내어준 내 잘못이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필요하다면 피는 내 것을 주도록 하지."


매장소가 말을 잃었다. 당황하여 반문 되어오는 말에 경염이 소매를 걷어냈다. 이런걸 무고한 사람에게 남길 수는 없으니까.


단단한 팔에 노랗고 붉게 새겨진 멍과 상처들에 매장소가 손을 그러모았다. 비틀리듯 새겨진 손자국들과 그대로 남은 손톱자국들이 괴사한 피부조직 위를 가르고 있었고, 아물기 시작한 자상의 흉터 주위로 귀신의 잇자국이 나있었다. 실로 끔찍한 몰골에 떨리는 책사의 손이 황자의 팔에 닿았다. 건드리지도 못하고 겨우 손만 주워 잡은채 고개를 숙이는 반요에게 경염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장에서 수십년을 구른 몸이오. 상처는 늘상 있는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게."


7황자 소경염은 몇 년에 한 번씩 금릉에 돌아오는 군왕이었고, 팔 밑이 멍드는 것 정도는 전쟁터에서 얻는 상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잃을뻔도 했던 팔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매장소가 침묵했다. 경염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팔을 빼어 소매를 내렸다.


"열병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무거운 목소리에 경염이 입꼬리를 올린다. 정왕부에도 심복을 숨겨두는 모양이로군. 귀신은 대답하지 않았고, 경염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실혈이 있었으니 몸이 그것을 회복하려 하는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하루 만에 나았고 그 외에 몸이 아프거나 변한 점은 없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경염은 똑같이 피를 주겠노라 약조했을 것이다.


생피를 먹지 않고 귀신의 기를 누르기 위해 반요가 했던 노력을 경염이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힘들었을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날뛰는 제 종주를 보고 차라리 제 피를 내어주고 싶었을 부관들의 고충도 마찬가지다. 성급한 판단으로 경염이 귀신에게 생피를 먹였고, 그러니 책임도 경염이 져야하는게 맞았다. 긴 설득에 매장소는 쓴웃음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귀신에게 피를 뺏기고도 자책을 하다니, 얼마나 소경염다운 생각인지.


"잘못하면 제가 전하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낮은 목소리에 경염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반대가 아니오. 목숨줄을 쥐고 있는건 선생이 아니라 나지. 뻔뻔한 말투에는 매장소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경염의 말이 옳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겁니다."

"선생은 내가 기분이 좋아지려고 팔을 그었는줄 아는 모양이군."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걸 아시지 않습니까."

"정확히 그런 문제네. 내가 칼을 든 것은 선생을 살리기 위해서였지. 내 피를 주는 것도 마찬가지고."


간결한 말에 매장소가 경염을 마주보았다. 한없이 바르고 솔직한 얼굴이었다. 귀신에게 피를 주는 것도,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신뢰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경염은 매장소가 반요라서 자신을 배신하거나 절 죽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귀신이 어떤지 직접 보았음에도.


"왜 저를 살리려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피를 내어준 밤과는 달리 단단히 관을 틀고 옷을 갖춰입은 황자가 눈을 깜박였다. 매장소는 뱉은 질문을 회수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저 답을 기다렸다. 대체 어느새 이렇게까지 신뢰가 두터워졌나. 매장소는 비열한 수를 쓰는 책사를 혐오한다고 말하던 경염의 얼굴을 기억했다. 대나무 같은 성정 탓에 신뢰를 얻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는데, 이제는 귀신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까지 내걸고 있었다. 경염은 곧 편안하게 웃었다. 소선생이 필요하니까.


"내 형님과 친우의, 그리고 7만 적염군의 한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선생이 필요하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선생이 그리 해줄 것을 알고."


매장소는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자주 만나면 전영이 의심할테니 밤이 되었을 때 만나는 것이 낫겠소. 필요하면 항상 그랬듯이 종을 울리시게. 편히 웃으며 그렇게 말한 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따라 일어나 배웅하려는 것마저 앉힌 경염이 침전 문지방에 서있던 견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택을 벗어난다. 매장소는 반쯤 일어난 어정쩡한 자세를 겨우 무너뜨렸다. 견평이 놀라 달려와 부축한다.


"...내가 멍청했다."


한숨 섞인 말에 강좌맹의 타주가 어찌 그런말을 하느냐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주 오래전에, 흡혈귀의 이름만 꺼내도 경기를 일으키던 작은 아이를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생피를 빼간다는 말에 했던 겁먹고 두려운 표정을 짓던 아이는 제가 없는 동안 말쑥히 자랐고, 저보다도 강한 심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경염을 선택한 것인데도 임수는 소경염을 오래전의 어린아이로 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엉망인 팔을 생채기로 치부하던 얼굴을 떠올린 매장소가 눈을 내려깔았다. 생피를 먹는다면 기를 다스리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종주는 하던대로 제 피를 주는게 낫지 않겠냐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견평에게 웃어보였다.


황자가 내리는 은혜를 거절할 수야 있겠나. 금릉에 돌아온 뒤로 가장 편해보이는 목소리가 장난스레 갈라졌다.







이건 진짜 다음을 쓸지는 잘 모르겟다 쓰고 싶은거 다 써서... 참고로 린신이랑 비류는 반요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임. 매장소를 물어서 살린건 린신네 아버지. 견평이랑 려강이 막을 동안 비류가 피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건데 쓸 타이밍을 못잡았다. 참고로 피가 부족해서 날뛰는 반요는 진짜 흡혈귀보다 더 강함 살려고 발버둥 치는거라... 헉 설정충 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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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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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자네가 죽은지도 이제 반 년이 되어가는군. 대유국은 진작에 퇴각했고, 끈질기게 버티던 북연도 깔끔하게 진압했어. 양나라의 군사력이 만천하에 공개 되었으니 당분간 쳐들어올 일은 없을거야. 마음 놓아도 되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 같아서 쓰네만, 국상이 있었네. 자네와 내 예상보다는 조금 빨랐지. 자네가 준 화병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야. 자네의 연인이 이제 황상이니 해결될 건 다 된 셈이지. 해적들이 말썽이고 소주 쪽에는 재앙 같은 화마가 덮쳤지만 그정도야 언제나 있는 일이니 황상이 알아서 처신하고 있네. 조정을 갈아치우고 있는데도 일처리가 확실하니 덕망높은 황제가 나왔다고 입소문이 파다 해.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는게지.


새로 개편한 북방쪽 군에 자네의 이름을 붙였다더군. 이정도만 전해도 황상의 상태가 어떤지는 나보다도 잘 알거라고 믿네. 랑야각은 다시 조정 일에서 완전히 빠졌어. 알다싶이, 계속 관여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나. 가끔 대신들이 해결책을 물어본답시고 험한 산을 오르는데, 관심이 없어서 전부 돌려보내고 있네. 신조정이 그렇게 무능해서야 어디다 쓸 지 걱정이네만, 망한다 해도 손을 도와주지는 않을거야. 한 번 빌려줬다가 호된 꼴을 당하지 않았나. 다 자네 덕분이지.


한 번은 황상이 찾아왔었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믿든 안믿든 자네의 선택이다만, 어쨌든 내가 붓을 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호위도 없이 부관 하나만 데리고 왔더군. 겁도 없지.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네.


더 재밌는 얘기가 있어. 황상이 나한테 무릎을 꿇었거든. 태자였다면 놀라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황제인데, 바꿔말하면 양나라가 나한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 되지. 본 사람이 있었으면 재밌었을텐데 말이야.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사람을 황제로 만들 생각을 한건가? 일개 강호인한테 무릎을 꿇는 남자가 황제라니, 양나라도 정말 망할때가 된 것이야. 점성술을 봤을 때는 이례없는 태평성대가 될거라고 하던데, 하기사 점성술 따위를 어떻게 믿겠나.


양나라를 발 밑에 둔 기분을 좀 더 느껴보고 싶었네만, 일으킬 수 밖에 없었어. 아까워서 혀를 다 차고 싶더군.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아무 것도 안했으니. 내가 괜히 랑야각 각주겠나. 어차피 평민으로 분장하고 있어 황명을 내릴 상태도 못되었어. 뭐, 사실 그래서 그 가벼운 무릎따위도 꿇을 수 있었겠지. 나중에는 생각할 수록 분해서 날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만. 잘 달래서 돌려보냈지만,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사내가 없어서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단 말이야. 내 직감이 점성술보다 낫지.


장소, 나도 이제 쉬어야겠네. 그 사내의 집착이 원채 무서워서 말이야. 당쟁에 끼어들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돌아서 랑야각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으니, 그야말로 적당한 때라고 할 수 있지. 거기다 양나라를 한 번 밑에 두었잖은가. 더 위로 올라갈 것도 없을 것 같더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주겠네. 황상이 한 일을 가지고 너무 웃는다고 질책하지는 말아야할거야. 꼴이 정말 웃겼거든.


정리는 금방 끝날걸세. 랑야각을 아예 없애기는 아까우니, 후계를 정해야겠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후계에 대한 수업은 3년 정도 했어. 자네가 금릉으로 떠난 다음날 부터. 나보다는 못하지만 아주 명석한 사람이니 걱정 같은건 안해도 돼. 내가 떠난다면 랑야각에 대한 불신도 사그라들테니 만사해결이야.


풍경이 괜찮은 곳에 정자 하나를 짓고 술이나 마실 예정인데, 어디로 갈건지는 다음 서신에 써주겠네. 몇군데를 골라놓긴 했는데 비류녀석이 죄다 마음에 안든다고 퇴짜를 놓지 뭔가. 절대 안떠나겠다고 계속 도망치는 바람에 골치가 다 썩고있어. 견평과 려강이 있는 힘껏 잡아들이고는 있지만 고집을 꺾을 것 같지는 않네. 자네가 있었다면 설득은 일도 아니었겠지. 누가 살려준 목숨인데 양심도 없다니까. 어쨌든 협박을 하면 어떻게든 따라올거야. 비류 하나만 남겨놓고 가지는 않을테니까 걱정말고 다음 서신이나 기다리게나.


자네가 있는 곳에는 도화나무가 있다고 들었네. 도화나무는 없지만서도, 비류가 매일 같이 가지를 꺾는 바람에 엉망이 된 매화나무에 아직 꽃이 남아있어. 불쌍하긴 하지만 염치없게 한 가지를 더 꺾었네. 동봉해서 보내니 상하지않게 보관하게나. 꽃잎 하나라도 떨어져 있다간 화를 면치 못할거야.


장소. 내가 첫머리 부터 임수가 아니라 거짓이름을 써서 언짢았을거라고 생각하네. 내가 의도한 것이니 걸려들었다고 후회해도 괜찮아. 그리 똑똑하니 예상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앞으로 평생 그 호칭을 바꾸지 않을거라는걸 말이야.


자네는 매장소를 싫어했지. 난 그딴건 신경쓰지 않아. 내가 언제 자네 기분을 신경쓴 적이나 있는가? 자네도 포기하는게 좋을걸세. 무슨 협박을 해도 모자랄테니까. 황상이 또 다시 무릎을 꿇어도 마찬가지야. 나는 자네를 마음대로 부를 권리가 있어. 내가 자네를 마음대로 미워하고, 마음대로 욕하고, 마음대로 그리워 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야. 자네가 원하든 말든 난 자네를 평생 매장소로 기억할거야. 모두가 자네를 임수라고 부른다고 해도.


다른 한 명도 자네를 평생 수거거라고 부르겠지. 솔직히 말해서 난 임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임수는 멍청해. 이름도 그게 뭔가? 매장소가 훨씬 품격있지.


내가 아는 매장소는 이기적이었지만, 임수는 어떤가. 임수는 잔인하지. 자네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잖아. 13년 동안을 잔인한 사람인 척 살았지만, 자네도 나도 사실이 아니라는걸 알지. 매장소는 잔인하지 않네. 임수는. 뭐, 확실한건 내가 임수를 싫어한다는거지.


황상이 왔을 때, 난 칼을 들었네. 일촉즉발이었지. 부관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리도 없을테고, 황상은 가만히 있었어. 정말 베어버릴 생각이었지. 역모가 다 뭔가. 툭하면 저질러지는거, 내가 못할건 또 뭐겠어.


매장소를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죽어도 마땅하다고. 하지만 전부 헛소리라는 것도 알았지. 그 멍청한 사내가 자네를 죽인게 아니지 않은가. 매장소를 죽인건 임수고, 임수는 내가 죽이기도 전에 가버렸으니. 역모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성질이 아니라 칼은 내렸네. 잘 참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해. 원래 뭔가를 참는 성격은 아니라는걸 알잖나.  


장소. 잘 지내고 있는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아. 답신을 보내줄 필요는 없네. 꿈에도 나타날 필요 없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게 놔둬. 그럼 나도 비류에게 그렇게 전할테니.


내가 자네를 만날 때에는, 잔인하지 않기를 바라네. 그정도는 들어줄 수 있을거라고 믿어. 도화나무 아래에서 질리도록 환하게, 이기적이게 웃고 있어주게. 나한테 술을 사주고, 내가 보낸 매화가지를 망가뜨렸다고 말하게. 그럼 비류가 오기 전에 비슷한 매화 나무를 찾아서 꽂아놓자고. 안그렇게 생겨서 눈치가 빠르니 알아챌지도 모르겠지만, 자네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문제 없을거야. 그냥. 그렇게 하자고.


자네한테 보내려면 서신을 불태워야 하니 또 아무도 내가 양나라를 발 아래에 뒀다는걸 모르게 되겠군. 천하에 떠들고 다니면 좀 더 빨리 만나게 될지도.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테지만 말이야. 나는 천수를 누릴 사주거든.


내가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릴테니 약속을 잊어버렸답시고 매화를 소홀히 하면 안될 것이야. 다음 서신은 내가 옮길 곳을 정한 직후에 쓰도록 하겠네. 임수에게 안부 전해주게. 욕도 함께. 나중에 보세나.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의원 린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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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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