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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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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 전력 60분

주제: 해피엔딩






갤리는 옛날 이야기를 알았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한 두개, 그나마도 두리뭉술하게 알 뿐이다. 누워서 사과를 먹는 아이에게 대고 어디의 공주마냥 새하얗게 될거라고 비아냥대는 정도였다. 여러가지가 섞인 것도 있었다. 인어공주가 자신이 인어인 것을 늑대에게 들켜서 결국 늑대를 돌로 때려죽였다더라, 예쁘고 가난한 여자가 야수를 만났다가 요정의 힘을 빌려 힘들게 탈출했다더라.


입에 올릴 때 마다 결말도 과정도 다르다. 글레이드에는 동화책이 없었다. 누구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모르고, 그걸 알아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옛날 이야기는 토마토를 자라게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토마토를 자라게 해줬으면 하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희망은 진짜가 아니었고.


"그래서 마녀를 쫓아내고 성을 지켜서 다들 잘 살았어. 얘기 끝."

"그거 거짓말이지? 그사람들이 마녀를 쫓아낼 수 있었을리가 없잖아."


척은 툴툴댔다. 어린애 취급을 받은 느낌인 모양이었다. 술을 들고 통나무에 대충 앉아있던 갤리는 벌건 얼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 애송아. 거짓말이다.


술이 넘어간다. 앞에는 모닥불이 있었다. 오랜지 빛이 넘나들며 풀들을 하얗게 새게 해버리고, 미로의 벽과 글레이더들에게 번진다. 그런 색채는 강렬했다. 수채화 보다는 싸인펜으로 죽죽 그어 놓은 그림 같다. 여기저기 겹치고 색이 덧발려서 더러운, 한없이 선명한. 그런 어린 아이의 그림에는 얼굴이 없다. 색이 덮여서 분간이 힘들다. 어쩌면 술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당연히 술 때문이지. 갤리는 손에 들린 술을 더 마셨다. 주황색 잉크가 엉망으로 꾹꾹 눌린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린다. 삐뚤삐뚤하게, 4살 짜리가 그리는 얼굴처럼 엉망으로. 노을에 담갔다 빼놓은 얼굴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웃는 얼굴도 있다. 자는 얼굴도, 하품을 하는 얼굴도, 멍한 얼굴도, 우울하거나 울거나, 한숨을 쉬는 얼굴도 있었다. 갤리는 얼굴들의 숫자를 세었다. 술을 더 마신다.


"성을 지킨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갤리는 시선을 내렸다. 색소에 반만 담궈진 커다란 빵이 떠들고 있었다. 갤리는 제가 떠올린 생각이 웃겨서 웃었다. 빵에도 얼굴을 그려넣는다. 궁금한 얼굴. 귀여운 얼굴. 가장 어린 얼굴.


"거짓말이라더니."

"마녀를 죽인게 아니라 그냥 쫓아낸거잖아.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 내 말은, 마녀가 그렇게 사악하다면 말이야."


갤리는 물끄러미 빵을 보았다. 내 말은 무시하고 조잘조잘 잘도 떠드네. 갤리는 술을 더 마셨다.


"그런 일은 없어."


빵이 구겨졌다. 다른 빵들은 흐물흐물 녹아서 모닥불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주황색으로 빛나니 머리가 불덩이인 요정들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을 잡고 모닥불 주변에서 원을 그리며 돈다. 춤이 점점 빨라져서 어쩌면 유성우 같기도 했다. 타는 것. 전부 타고 있다. 실제로 타는 것은 나무장작이었지만, 불은 모두를 태우고 있었다. 밝고 선명하게. 그렸던 얼굴들이 뭉게져서 갤리는 인상을 구겼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기도 했다. 해먹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그냥 풀밭에서 자고 싶었다. 벌레들이 많으니 그렇게는 안된다. 갤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럴 수도 있잖아. 마녀라며."

"멍청아, 내가 아까 뭐라고 했냐. 얘기 끝이라니까. 그 뒷 부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야. 해피엔딩이라고. 옛날 이야기 들어본 적 없냐?"


반죽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갤리가 위에 심통난 얼굴을 그렸다. 반죽은 옛날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궁에서 끌려나온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갤리도 그걸 알았다. 갤리는 술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반죽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반죽의 두피는 안에 뼈라도 들은 듯이 딱딱했다. 반죽이 고개를 털어버린다. 반죽 주제에. 갤리가 반죽의 목에 팔을 걸고 끌어왔다. 반죽은 반항하나 싶더니 헤드락을 걸고 머리를 더 쓰다듬자 곧 그만 두었다. 갤리는 불이 태운 오렌지 색 반죽을 한 팔에 가두고 웃었다.


"듣고 싶으면 옛날 이야기 정도는 계속 해줄게. 내가 약속한다."

"진짜? 언제라도?"


반죽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볼을 잡고 늘인 갤리가 새끼 손가락이라도 필요하냐고 비뚤게 웃었다. 반죽은 다시 화를 낼 테세다. 그래도 제안이 나쁘지 않았는지 얌전했다. 갤리는 반죽을 건 채로 통나무에서 일어났다. 흡사 인질을 갖고 있는 분위기다. 술 때문에 갤리의 몸이 휘청인다. 그래도 반죽을 놓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멀리서 새까맣게 탄 반죽이 소리친다. 신참 괴롭히지 마 갤리. 반죽이 벗어나려 버둥거린다. 갤리는 선심 쓰는듯 반죽을 놔줬다.


"진짜 옛날 이야기 계속 해줄거지?"

"그래 이새끼야. 어린게 말을 못믿어."

"전부 해피엔딩인걸로?"


갤리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안그래도 솟아있는 모양이 조명을 밀어내며 올라간다. 반죽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눈도 없으면서 신나서 갤리를 올려다본다. 갤리는 손을 들어 반죽의 이마와 눈을 덮었다. 반죽은 작아서 한 손에 들어온다.


"평생 해피엔딩만 들을 수 있게 해줄게. 땡깡 피우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반죽은 손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웃는다. 온 몸으로 웃는다. 손 안에서도 웃는다. 반죽은 갤리를 꼭 안아주고는 총총 해먹으로 뛰어갔다. 불에서 멀어지며 반죽이 탄다. 새까맣게, 새까맣게, 갤리가 그린 얼굴이 보이지도 않도록 새까맣게. 다른 아이들도 슬슬 일어나 불에서 멀어져갔다. 갤리가 술을 집어들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모닥불로 향했다. 지나치는 아이들이 툭툭 건드리며 자기 할 말을 하고 간다.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봐, 잘 자. 모든 반죽들이 탄다. 갤리는 모닥불 앞에 혼자 섰다.


마침내 불이 태우고 있는 것이 갤리 혼자가 되었을 때, 갤리는 마시다 남은 술을 불에 부었다. 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갤리는 발을 들어 약해진 불을 밟았다. 계속 밟는다. 장작이 무너져서 불이 꺼질 때 까지.


갤리는 탄 장작을 봤다. 아무것도 물들이지도, 태우지도 못하고 멀거니 남아 죽은 재를. 시체를.


그리고는 뒤를 돌았다. 알고 있는 모든 해피엔딩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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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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