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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썰 백업용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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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의 눈은 굶주려 있었다. 토마스의 눈은 그것보다는 절박한 것에 가깝다. 갤리와 민호는 그 바짝 마른 진흙같은 감정들을 무시하는 법을 알았다. 모른척 지나친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다. 뉴트와 토마스는 제 감정들을 토악질 할 곳이 필요했다. 구멍 뚫린 쓰레기통. 악취나는 국물을 흘려보낼 구덩이.

뉴트와 토마스의 키스는 사실 키스라기 보다는 짐승들이 서로 혀를 물어 뜯으려는 행위와 더 비슷하게 보인다. 만약 뉴트와 토마스가 각자 자신들의 파랑새에게 키스를 한다면 훨씬 부드럽고 애정이 담기겠지만, 그건 배려일 뿐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키스가 얼마나 부드럽던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대의 혀를 물어뜯어 삼키는 것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상대의 일부분이라면 어딘가의 신화처럼 전부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렇게하면 도망가거나 거부당할테니까 부드럽게 할 뿐이다. 그러나 뉴트와 토마스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간다거나 거부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진정으로 원하는 키스를 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할 정도로 이를 세워 물어뜯고, 질릴 때 까지 상대를 취한다.

뉴트가 토마스에게 쏟아내는 것은 폭력에 가까웠지만 토마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토마스가 받아내는 것은 민호의 폭력이다.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뉴트는 갤리를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고 토마스는 민호가 저를 마음대로 다뤄줬으면 했다. 뉴트는 토마스가 관계중에 시선을 돌리거나 피하는 기색을 보이면 망설임 없이 뺨을 갈기고 이를 드러냈다. 토마스가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관계가 끝난 후 뉴트가 약을 던져주거나 미안해 하는 일도 없다. 둘의 이해관계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다른 그림의 퍼즐이 어쩌다가 귀퉁이가 끼워맞춰진 듯이.

관계가 끝난 후에 남겨지는 것은 토마스의 쪽이었다. 여운을 즐기거나 같이 풀밭에 누워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관계가 끝나면 같이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대부분 토마스가 제대로 일어나서 걷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뉴트가 알아서 떠나는 것이었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과 터진 코피나, 엉망진창인 하체를 두고 토마스는 온갖 애액이 튄 풀밭에 길게는 몇 시간이고 누워있고는 했다. 뉴트와 토마스가 숲에 들어간 이후에 토마스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글레이드의 누구도 숲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이나 비료를 퍼오는 일이라면 정가운데를 통과하는 루트만을 이용했다. 직접 말이 나온적은 없지만 글레이드 안에서 네명의 관계를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토마스가 숲 밖으로 나오면 어김없이 척이 달려나와 부축해주려 힘쓰고, 토마스는 그걸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고마워 척. 해사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의 시선은 언제나 민호에게로 향한다. 하던걸 멈추고 못박힌듯 서서 자신을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토마스는 눈웃음을 짓는다. 안녕. 그러면 민호는 다시 못본척 시선을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것이다. 상태가 심한 날은 제프와 클린트에게 갈 때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해먹으로 향한다.

척은 상냥한 아이였다. 토마스를 부축 한 뒤에 따라오는 민호의 은근한 압박에도 꿋꿋이 토마스를 도와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척은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척은 넷 중 누구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고, 그 사실은 토마스를 말리거나 뉴트를 찾아가거나, 민호와 갤리에게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보이는 부분마다 자줏빛으로 물들어있는 토마스를 보고도 태연히 제 일을 할만큼 무심한 성격이 되지도 못했다. 토마스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남기지만 척이 그런 토마스를 나무라거나 답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척은 방관자였고, 글레이드의 모든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어쨌든 구원을 바라지 않는 것은 네 명이었으니까.

어느 날에는 숲에서 나온 토마스의 목에 손자국이 나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목을 졸렸던 흔적이었고, 척은 대번에 놀라서 감자를 깎던 것을 팽개치고 토마스에게로 달려와 화를 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거라고, 처음으로 척이 타르 구체에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러너 장비를 고치는줄 알았던 민호가 보폭을 크게 해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토마스도 척도 망연히 민호를 올려다봤고, 민호는 망설임없이 토마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척의 비명에 다른 아이들도 놀라서 뛰어왔다. 기겁한 알비가 둘을 힘으로 떼어놓자마자 바닥으로 주저앉은 토마스가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진심으로 화를 내는 알비를 신경도 쓰지 않고 민호가 한마디를 뱉었다. 두 번은 없어. 끝없이 기침을 토해내던 토마스는 충혈된 눈으로 민호를 올려다봤고, 흐려진 헤이즐에는 분명한 증오가 담겼다.

그 때의 민호의 표정이란. 토마스와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척은 할말을 잃고 마른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 희열. 그 끝도없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검은 눈에 들어찬 만족감. 상황이 달랐다면 토정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토마스는 기어코 바닥에 토악질을 쏟아냈고 민호는 자리를 떠났다. 웅성대던 아이들은 민호를 따라 자리를 뜨거나 속을 게워내는 토마스 곁에 남아 토마스가 제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물론 그런 용기있는 아이들은 척과 알비를 포함해 4명 정도였고, 토마스는 이번에도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이 토마스가 민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라는걸 척이 아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민호와 갤리는 뉴트와 토마스의 끝없는 애정을 전혀 받아주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공통점의 이유는 전혀 달랐다.

갤리. 갤리는 어떠한가. 갤리는 뉴트를 싫어했다. 단순히 싫어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갤리는 뉴트에게 무관심했고, 뉴트가 무엇을 하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것이 뉴트를 가장 상처줄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여서 썩어가는 증오의 출처는 오래된 글레이더들이라면 모두가 쉬쉬하는 어떠한 일 때문이었고, 그걸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갤리나 뉴트 본인들 마저도 그랬다. 갤리와 뉴트의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다. 치프빌더의 실력은 과연 훌륭해서 그 골짜기는 매우 견고하고 튼튼했는데, 갤리에게 삽을 쥐어준 장본인인 뉴트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민호는 어떻게 다른가. 일단 전제부터가 달랐다. 놀랍게도 민호는 토마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토마스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같았으나, 그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한하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하는 목적까지는 갤리와 같다. 그렇게 하면 토마스가 상처받을 테니까.

민호는 토마스가 처음 자신을 동경 이상의 감정으로 바라보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오의 햇볕보다 더욱 반짝이던 그 투명하고 곧은 눈. 자신이 몸을 움직일 때 마다 기적을 보고 있는 듯 경탄에 차던 시선. 민호는 그런 눈부신 감정들을 내비칠 수 있는 다갈색을 가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손가락을 넣어 눈알을 파낼 수준으로. 글레이드에는 룰이 있고 그중에서 다른 글레이더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항목은 1순위다. 거기다 토마스는 러너였으니 눈이 없어서는 달릴 수가 없다. 민호는 어쨌든 다른 방법을 추구해야만 했다. 손에서 직접 촉감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확실한 방법.

사실 이제 토마스의 눈은 반짝이지 않았다. 다갈색에 담기는 것은 햇볕이 아니라 민호의 검은 머리였고, 누군가는 토마스의 눈에 기름때가 꼈다고 표현했다. 다갈색은 도저히 다른 색을 눈에 담으려하지를 않았다. 한곳에 박힌 시선이 말하는 감정들은 민호의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진다. 봐줘. 봐. 나 좀 봐줘. 사랑해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심한 그 소리는 비올라에서 콘트라베이스까지 음역이 낮아진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같은 스펙트럼에 존재하는 감정들이다. 보이는 것이 어떻든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다갈색이 담는 감정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라도 자신을 향했으면 했다. 다양하면 다양할 수록 좋다. 민호는 토마스가 하루빨리 망가지기를 바랬다. 민호가 없으면 움직이지는 것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그러니까, 지금의 민호는 말하자면 인내중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토마스가 뉴트를 자신의 대역으로 생각하고 섹스하는 것은 허용범위였다. 뉴트마저 토마스를 갤리의 대역으로 생각하니 더할나위 없다. 애초에 뉴트에게 귀띔을 넣은 것 자체가 민호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은 직접 보기까지 했다. 남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불러대는 토마스의 목소리.

토마스도 민호의 의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숲에서 엉망인 상태로 나올적마다 민호가 저를 쳐다보는 눈을 마주했을 때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호는 토마스를 싫어하는게 아니었다. 다소 비정상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민호는 토마스를 사랑했다.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민호가 원하는 수준까지 자신이 망가진다면 민호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이 관계에서 토마스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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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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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울었다.


갤리는 유리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시원한 나무바닥. 창틀이 갈라놓은 사각형이 갤리의 몸 굴곡에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민호는 신발을 벗고 스포츠백을 든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 몸이 땀범벅이다. 일사병으로 죽는건 아닐까 싶을 때에서야 세면대에서 찬 물이 쏟아졌다. 매미 소리에 물소리가 섞였다가 뚝 잦아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분다.


민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화장실을 나와 바닥에 버려져있는 스포츠백을 방에다 던졌다. 안에 들은 물병이 바닥과 부딪혀 덜그럭대는 소리를 냈다. 민호가 문턱 너머로 갤리쪽을 쳐다봤지만 미동도 없다. 침대도 쇼파도 전부 놔두고 이 더운 날에 햇빛에 누워 자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배게도 없이 팔을 베고. 옷까지 전부 갈아입은 민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갤리 앞에 섰다.


살짝 손 대본 갤리의 팔은 지나치게 찼다.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 중이다. 들어올 때는 시원했지만 아무래도 온도가 너무 낮은 것 같아서 민호가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껐다. 에어컨 틀어놓고 자지 말라고 이틀 전에 잔소리 한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얼굴로 자고있다. 혀를 찬 민호가 쇼파에 개어져있는 담요를 끌고와 갤리의 몸 위에 펼쳤다. 무늬 없는 남색 담요 위로 햇빛이 올라온다.


3:4. 아슬아슬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민호가 자리를 옮겨 쇼파에 주저앉았다. 반바지 아래 맨살에 차갑게 식은 가죽이 닿아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돌던 현기증이 아래로 가라앉아 발끝으로 나간다. 민호는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배고픈데. 무료하게 TV 리모컨을 든 민호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팟.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 다음으로 탄산수 광고가 흘렀다. 하얀색 파란색 하늘색. 멍하니 TV를 쳐다보던 민호가 볼륨을 줄이고 일어섰다.


냉장고에는 먹을만한게 없었다. 재료들은 있었지만 음식이 없다. 민호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갤리를 넘겨다봤다가 그냥 냉장고를 닫았다. 지금 요리를 하기엔 너무 시끄러울테다. TV 광고마냥 연기가 흘러나오는 냉동고에는 한칸이 꽉 아이스크림으로 들어차 있었다. 저번에 마트에서 민호가 오기로 카트 안에 쏟아부은 것들이었다. 그깟 아이스크림 좀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갤리는 항상 민호의 건강문제에 연연했다. 고맙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엄마 같아서 짜증난다.


키위 아이스크림 하나를 뺀 민호가 포장지를 벗겨 대충 싱크대에 올려놨다. 나중에 갤리가 치워주겠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돌아오자 광고가 바뀌어 있었다. 손목시계. 그러고보면 얼마전부터 시계를 안차던데.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고장 난 것일터다. 갤리가 하는 시계야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 뿐이니 아마 본인이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살까. 쓸데없는거 샀다고 또 짜증이나 내겠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준 걸 차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TV 볼륨이 컸는지 갤리가 뒤척였다. 민호는 반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빼들고 갤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부스스한 머리통을 들고 일어난다. 잠에서 덜 깬 멍한 눈이 정면에 있는 벽을 노려보다가 휙 민호에게로 돌려졌다. 가늘어진 녹색 눈이 기울어진다.


"언제 왔냐."


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4시간 전에. 갤리는 지랄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뒤로 젖혀 TV 위에 있는 벽시계를 올려다 보고는 입을 비뚤게 한다. 대략 한시간은 잔 것 같았다.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담요를 들춰본 갤리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담요를 질질 끌고 걸어와 민호에게로 던지고는 옆에 앉는다.


"경기는?"

"이겼어."


감흥없는 말에 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에 묻지 않게 빼들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방울진다. 떨어지잖아. 짜증스러운 말에 민호가 투덜대며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물었다. 닦으면 되는 걸 가지고. 갤리에게서의 대답은 없었다. 채널을 바꾸자 브라운관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봤던 경기지만 돌리라는 말이 없어서 민호가 리모컨을 내려놨다. 갤리는 아직도 졸린 눈이다.


매미소리와 관중의 함성이 넘쳐나는데도 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채 나왔다. 어지간히 졸렸던 모양이라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듯 웃었다. 웃지마라. 어제도 야근했다고. 쏘아대는 말에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인 민호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이로 부러뜨렸다.


"또 씹어먹는다."


거의 경멸하는 수준의 시선이 와서 박히는 것에 민호가 입안에 들은 나무조각을 뱉었다. 삼키는 것도 아니고 좀 봐주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걸 왜 씹냐? 신경질적인 말 뒤에 무게 때문에 쇼파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졸려서 또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군. 옆을 돌아본 민호가 제대로 심술맞은 얼굴 앞에 부러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밀었다.


"궁금하면 씹어보던지."


미쳤냐는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갤리가 민호를 무시했다. 킥킥대며 웃은 민호가 쇼파에 가부좌를 틀고 갤리쪽으로 몸을 아예 틀었다. 끈질기게 내밀어지는 막대에 짜증이 폭발한 갤리가 화를 내려고 고개를 돌린다. 벌려진 입에 그대로 막대가 들어가는 바람에 갤리가 잠시 기침을 토했다. 뭔 개짓거리야. 원한 깊은 목소리에도 지지 않고 민호가 다시 막대를 내밀었다.


고양이한테 장난감을 흔드는 듯한 태도다. 깊게 한숨을 쉰 갤리가 결국 민호 손에 들린 막대를 입에 물었다. 이거 잘못하면 가시 박힐텐데.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민호가 막대를 움직여 갤리의 혀를 쓸었다. 하여튼 취향 더럽게 이상해. 들어갔다 나오는 나무막대를 따라 갤리가 혀를 움직였다. 민호의 눈이 가늘어진다.


몇 번은 그냥 왔다갔다 하는 듯 하더니 좀 지나고 나서는 거의 혀를 찔러대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새끼가 진짜. 어느정도 맞춰주려다 결국 허에 상처가 난 갤리가 신경질적으로 막대를 어금니로 물었다. 민호가 막대를 당기자 갤리의 얼굴도 따라왔다. 몇번 쥐고 흔들다가 노려보는 녹색 눈에 실실 웃던 민호가 결국 막대에서 손을 놨다. 바닥에 뱉어진 막대가 빙빙 돌며 밀려나다 멈춘다.


"저녁."

"볶음밥."


귀찮은 것만 골라서 해달라고 하지. 투덜대며 일어난 갤리가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TV에서 흘러나오는 경기는 후반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새끼야, 네가 먹은건 좀 버리라고! 부엌에서 외쳐대는 목소리에 민호가 아까 나왔던 탄산수 광고의 CM을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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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톰 Lack

연성/Maze Runner / 2015. 5. 22. 17:58

민톰



문을 열자마자 담배향이 훅 날아온다. 민호는 눈살을 구긴채로 성큼 안으로 발을 뻗어 창문부터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이 쇼파에 시체처럼 엎드려있는 토마스에게 밀려간다. 민호는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토마스를 발로 찼다. 토마스는 미동도 없었다. 일어나 머저리 새끼야. 섹스해주러 왔잖아. 토마스는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민호를 올려다봤다.

"일어나."

제대로 짜증이 난 목소리에 더해 옆구리가 발로 짓이겨진다. 토마스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일어나서 눈이 묻은 신발에 입을 대고 혀를 내었을 뿐이었다. 씹새끼. 욕을 거르지 않고 뱉은 민호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토마스는 민호의 다리를 기어올라와 얼어있다 싶이 하는 청바지의 버클을 풀고, 속옷 위를 느리게 핥았다. 젖은 천까지 함께 입에 넣고 익숙하게 블로우 잡을 시작하면 민호가 바로 토마스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토마스와의 섹스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민호가 저 좋을대로 분노를 퍼붓는 식의 섹스. 키스도 없고 애무 같은건 더더욱 없다.

어쩔 수 없이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일은 있었지만 거부하거나 그만하라는 말을 담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더 분노가 가중되는 것이다. 토마스는 섹스중에 제 애인의 이름을 불렀고, 그것은 대부분 소위 말하는 '눈이 돌아가는' 스위치가 됐다. 목을 조르거나 머리를 잡아채 바닥이나 딱딱한 곳에 박아버리는 일도 흔했다. 관계가 끝난 후의 토마스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뼈가 부러지거나 이마가 찢어지는 것쯤은 예사다.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토마스는 병원비 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민호와 토마스의 관계는 섹스 파트너였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민호가 먼저 마음이 생겼고 토마스는 민호를 찼다. 너무 깔끔하게 차여서 뭘 해 볼 수도 없었다. 민호가 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민호가 뭔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민호를 앉혀놓고 싫다는 말을 꺼냈다. 내가 너랑 만나는건 섹스 때문이고, 난 애인이 있어. 파트너가 된지 반 년인데 전혀 몰랐다. 물론 쓸데없는 얘기를 하기 보다는 1초라도 더 몸을 더듬는게 중요한 관계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민호는 포기했다. 당연히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노력했다. 그 날 이후로는 아예 연락을 끊었고 섹스 외에는 접점도 없었으니 각자 알아서 잘 살았다. 토마스가 갑자기 문자를 보낸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주소와 숫자 네 개. 지금. 민호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옷을 챙겨 나갔다. 문자에 나와있는 주소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도어락에 숫자 네 개를 쳐 잠금을 풀었다. 안은 온통 술 냄새로 범벅되어 있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토마스는 옷을 입은채로 욕조에 들어앉아 무릎을 감싼채 찬물을 맞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건지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도 보랏빛이었다. 핸드폰이 욕실 바닥에 엎어져 튕겨지는 물을 죄다 맞고 있다.

민호는 당연히 기겁해서 물을 잠그고 토마스를 일으켜세웠다. 얼음장 같은 몸이 힘없이 끌려오더니 민호를 올려다봤다. 충혈된 눈이 빨갛게 짓물러 번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으려던 입이 토마스의 입술에 막혔다. 그렇게나 물을 맞고 있었는데도 바짝 마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들어오는 혀를 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마스의 손은 수월하게 민호의 벨트를 풀었다. 폭주하는 생각들 중에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관계 도중에 모르는 이름이 나와서야 민호는 어렴풋이 토마스가 저를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 끝난 후에 잠이 드는건 토마스의 습관이었고 민호는 아침까지 남아야할지 돌아가야할지 망설였다. 결국 선택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 번으로 끝날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예상대로 토마스는 민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두 달 뒤까지는.

"저녁 먹고 가."

민호는 신발을 신다말고 뒤를 돌았다. 이마에 거즈를 붙인 토마스가 쇼파 등받이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또 무슨 지랄이야 저건. 눈이 녹아 축축해진 신발에서 불쾌한 냄새가 올라온다. 눈 안그쳤잖아. 창문 밖은 말대로 아직 온통 하얬다. 토마스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중간에 한 번 기절 했었다. 더 하고 싶은 것도 아닐터다. 민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민호가 머리를 뒤섞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토마스는 자세를 바로 해 몸을 담요에 파묻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물어보는 말도 없이 저 좋을대로 치즈피자를 시킨 토마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입술이 찢어져서 아픈지 반쯤 벌리다 그만 두기는 했지만. 민호는 얼굴을 구긴채로 그런 토마스를 뒤에 서서 보고 있었다. 앉으라는 권유도 없다. 토마스는 아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감색 체크담요가 둥글게 말린 몸에 붙어 움직였다. 물어뜯긴 상처들이 틈으로 얼굴을 내민다. 민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호는 토마스가 부를 때 마다 매 번 집을 찾았다. 토마스는 민호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었고, 민호가 오지 않는다면 토마스가 민호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아마 노력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민호가 토마스를 찾아오는 이유는 한가지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미련이 남아서라고 하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 그런 탓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가 났다. 저를 이용하는 토마스도, 휘둘리는 자신도. 찾아가서 패기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이유 중 하나로는 동정심도 꼽을 수 있었다. 민호는 첫 날 욕조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토마스를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가 없었다. 민호가 오지 않았다면 그상태로 며칠이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죽었겠지.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힌 채 숨소리 조차 내지 않는 토마스를 그려내는 것은 지나치게 쉬웠다. 다음도, 그 다음의 다음도 토마스는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자가 올 때 마다 벌겋게 짓무른 눈이 눈꺼풀 안에서 떨어지지를 않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토마스는 완전히 잠들었다. 민호는 무릎에 쳐박혀 있는 토마스의 얼굴 언저리에 확인차 손을 갖다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았다가 스러졌다. 너무 심하게 팬걸지도 모른다. 아마 당분간은 걷기도 힘들 것이다. 자업자득이야. 중얼거린다고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호는 손 때가 탄 쇼파에 주저앉아 공연히 토마스를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토마스의 체온이 끝도 없이 내려갈 것만 같았다. 좀 부스럭대나 싶더니 토마스가 편한 자세를 찾아 민호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민호는 토마스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얘기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다고 토마스를 밀쳐내거나 혼자 가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것인지, 문자가 다시 올 때 까지 얼마가 걸릴 것인지를 생각한다. 과연 다음이라는게 있을지 하는 생각도. 간격은 들쑥날쑥했다. 뭐때문에 그렇게 자주 헤어지는건지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다. 다만 토마스가 제 애인에게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매달리는지. 입 밖에 내면 정말 제 밑바닥이 보일 것 같아 민호는 질문을 삼켰다. 토마스에게서 익숙한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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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톰1

연성/Maze Runner / 2015. 5. 10. 13:03
갤리는 추운지방에서 자랐다. 1년중 300일은 구름 아래에서 걸었고, 200일 정도는 우산을 들었다. 갤리는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에 적응하는 것에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3년째에 접어들 무렵에 만난것이 토마스였다. 친구의 친구, 그 정도의 관계였다. 전공은 기계체조 쪽이라고 했다. 1학년이라는 나이도 한몫 했겠지만, 토마스는 지나치게 새파란 빛을 하고 있었다. 갤리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토마스에게 적응하는 것에 오랜시간이 걸릴 것을 알았다.

고향은 플로리다라고 했다. 그런것 치고는 하얀데. 토마스는 플로리다 출신이라고 전부 태닝을 했을거라는건 편견이라고 투덜댔다. 기계체조는 실내체육이니까 뭐. 그래도 서핑은 좋아한다는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가 붙는다. 갤리는 평생 바다를 가본 적이 없었다. 수영장이라면 몇 번 가봤고 수영도 할 줄 알았다. 갤리는 소금물이 싫었다. 물 밖에서도 나는 지독한 비린내와 소금기 모두 마음에 안들었다.

그런것들은 금방 익숙해져요. 토마스는 강사라도 되는마냥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갤리는 지면에 발이 붙어있지 않은 것 처럼 걷는 토마스를 잠시 쳐다봤다. 익숙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갤리는 그 과정이 금방 되지는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쨌건 토마스와 갤리는 사사건건 반대였다. 그럼에도 둘은 꽤 자주 마주쳤다. 교양 중에 겹치는 강의가 있기도 했고, 갤리와 친한 몇 되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과 토마스가 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토마스의 사교성은 확실히 대단했다. 잘 웃는데다 배려심도 있었고 트러블을 만들지 않는 법을 알았다. 안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도 어색한 태도를 고치지 못하는 갤리에게조차 별다른 말 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갤리는 몇 달이 지나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최대한 토마스를 피해다녔다. 안맞는 사람이라는건 어떻게 하든 있기 마련이고, 갤리는 도저히 토마스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평생 플로리다의 햇볕을 받은 짙은 머리색과 투명한 헤이즐은 볼 때마다 갤리에게 울렁거림을 주었다. 위가 아니라 다른 것을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계속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뭘 뱉어내고 싶은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 거북함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토마스가 갤리를 일부러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피해다닌다는 것은 바로 들킨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말했듯이 토마스는 트러블을 만들지 않는 법을 알았다. 둘은 교양 강의에서 마주치거나 일행이 겹칠때면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석에서 만나지도 않았고 따로 문자나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 평행선을 걷는 것 마냥 둘은 제 인생을 살았다.

가까워지거나 서로가 익숙해지는 일도 없는채로 몇개월이 그냥 지나갔다. 갤리는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있고, 기숙사에는 벌레가 너무 많았다. 방학내내 그것들과 씨름하지 않으려면 짐을 싸야한다. 토마스와는 한 달 만에 마주앉았다. 토마스가 먼저 있었던 일행에 갤리가 불려나온 경우였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라 대부분은 집으로 간다고 했다. 갤리는 집에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남는다는 말을 밖으로 뱉었다. 집에 간다고하면 고향을 밝혀야하니까. 나중에야 생각난 이유다. 친구들은 왠일로 안돌아가냐는 질문을 꺼냈고 갤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서 오지 말라네. 귀찮다고.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집은 내 방을 하숙방으로 내놨더라고. 프라이의 말에 한동안 웃음이 흘렀다. 토마스는 농담에는 웃었지만 갤리가 말을 꺼낸 이후로는 계속 갤리를 보고있었다. 얼음이 녹아서 갈수록 커피의 맛이 싱거워진다. 차례가 돌아오자 토마스는 빨대로 커피를 몇 번 저었다. 저는 집에 돌아가요.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자세한 사정을 물을 것도 없어 다음 사람에게로 질문이 넘어간다. 토마스는 휘젓던 빨대를 멈추고는 옆사람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말을 가로챘다.

"갈데 없으신거면 저희집으로 오실래요?"

토마스의 시선은 갤리에게 박혀있었다. 갤리는 목으로 얼음이 잘못 넘어간 듯한 느낌에 잠시 켁켁댔다. 질문은 갤리 대신 옆에 있던 동기가 했다. 뭐?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빨대로 다시 커피를 휘저었다. 시럽이 반통은 들어간 듯한 아메리카노는 유리잔 안에서 얼음과 함께 뱅글뱅글 돌았다. 사촌누나가 자취집을 구했대서 방이 하나 남거든요. 엄마가 쓸쓸하니 누구 하나 데리고 오래서.

터무늬 없는 제안이다. 모여있는 사람중 절반은 갤리가 토마스를 피해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라이가 자기도 갈데가 없다면서 징징대는 소리를 했다. 프라이 선배가 오셔도 상관없구요. 토마스의 태도는 심히 가벼웠다. 프라이는 갤리를 쳐다봤고 갤리는 미간을 있는대로 구기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저런 제안을 하는지 전혀 모를 일이었다. 집에 오라니. 걸어서 10분거리인 것도 아니고, 플로리다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한다. 값도 값이지만 갤리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집이랑은 거의 반대고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다. 거기다 마주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한 상대와 방학내내 같은 집에서 지내다니.

남는 방은 한 개에요. 생각없이 뱉은 듯한 말이 갤리의 관자놀이를 찔렀다. 토마스는 정말 프라이가 와도 별 상관 없는 듯 했다. 갤리는 신경질적으로 빨대를 씹었다. 시비를 거는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토마스는 또 의미없이 커피를 저었다. 갤리는 뒷머리를 긁었다가 곧 빨대를 내려놓았다. 토마스는 이제 두 손으로 유리컵을 잡고 있었다.

"그러지 뭐."

몇몇은 얼굴을 구겼다. 갤리의 답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토마스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다가 얼음이 달각대는 소리와 함께 컵을 내려놨다. 엄청나게 기쁜 표정이라거나 당황한 표정도 아니다. 목요일에 갈건데 괜찮으시겠어요? 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요일이라면 3일 후다. 짐은 이미 다 싸놨고, 비행기표도 어떻게든 맞출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까 말이 가로채였던 옆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제프 선배는 기숙사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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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AU 민톰

토마스 안나옴 주의... 3편만 되면 모든게 엉망이 되는 징크스...






토마스의 전투능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터져나온 불호령에 토마스의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 든다. 전 센티넬이 지휘관이라고 했을 때 알아챘어야 하는건데. 거나하게 한숨을 쉰 민호가 컨트롤 박스로 걸어가 홀로그램 시스템을 다운시켰다. 평소보다 1.5배 정도 작아진 토마스의 몸은 온통 페인트 탄으로 범벅 되어 있었다. 실제 전투였다면 이미 한시간 전 쯤에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다. 토마스가 페인트 탄을 맞을 때마다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목이 아플 정도였다.

어디라도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표정을 한 토마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간 민호가 토마스의 손을 잡아채 노려봤다. 첫만남 때 잡았던대로 토마스의 손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정확히 총과 단검을 다룰 때 생기는 위치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꾸준히 생긴 종류였다. 실제로 명중률은 썩 훌륭한 수준이었으나, 반사신경이 심하게 엉망진창이다. 실제 전투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듯한 수준이었다.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보라는 식으로 노려보니 토마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다.

"사격훈련은 열심히 했었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답답하다는듯 머리를 쓸어넘긴 민호가 한숨을 쉬고 아공간을 벌려 들고 있던 창과 바닥에 떨어진 다른 무기들을 쓸어 넣었다. 원래라면 무기들이 바닥에 떨어져있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부분이다. 필요하면 다른 무기를 바로바로 꺼낼 수 있다는 점에서 민호가 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텀은 굉장히 짧았다. 전쟁터에서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는건 적에게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자살행위였고, 민호의 무기는 아공간에서 나왔다가 역할이 끝나면 곧장 아공간으로 다시 던져넣어졌다. 지금은 토마스가 집중을 전혀 못하는 바람에 파장이 엉망진창이라 생각대로 아공간이 벌려지지 않았다. 홀로그램이었으니 무기를 줍지 않았던거지 실제였다면 공짜 무기상 역할을 했을 것이다.

80개라는 가공할만한 숫자를 견뎠으니 어느정도는 지금 상태로도 실전에 쓸 수 있을거라는 민호의 예상은 빛깔좋게 엎어졌다. 이상태라면 정신교감이 완전히 되고 나서도 나가자마자 헤드샷으로 원킬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대체 뭘 믿고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낸다느니 하는 호언장담을 했는지 모를일이다. 눈치를 보던 토마스가 또 입술을 오리마냥 내밀었다.

"기초로 맞춰줄테니까 그 악질적일 정도로 뻣뻣한 반사신경 부터 어떻게 해봐."
"샤워부터 하면 안될까?"
"샤워는 개뿔, 옷갈아입는데 3분 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에 즉각적으로 튀어나간 토마스가 가방을 채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은 뭐하러 가져가냐는 타박에 대답은 안하고 눈을 굴리던 이유가 밝혀진 셈이었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컨트롤 박스를 몇 번 조작하던 민호가 토마스가 놓고 간 권총과 단검도 아공간으로 던져 넣었다. 아직은 무기를 쓸만한 수준도 못된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제 가이드랍시고 왔던건지.

연단장의 문이 열린 것은 민호가 수준을 보기 위해 홀로그램을 활성화 시킨 직후였다. 페인트 탄으로 엉망인 공간으로 걸어들어온 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김새의 여자였고, 민호는 눈썹을 구겼다. 문에 잠금 걸어놨었는데. 여자는 민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샤워실 쪽으로 눈을 돌렸고, 민호의 시계가 3분이 지났음을 알리자마자 토마스가 안에서 뛰쳐나왔다.

"꼴이 그게 뭐니?"

웃겨 죽겠다는듯 튀어나온 여자의 목소리에 토마스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트리사! 주인 만난 강아지마냥 이름을 외친 토마스가 뒤집어진 반팔셔츠를 입은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민호는 그제야 말쑥한 생김새와 익숙한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트리사는 토마스의 머리에 온통 엉켜붙은 페인트탄을 삿대질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토마스는 쪽팔리지도 않은지 연신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기 바쁘다. 에어리스는 어쨌냐 잘 지내고 있었냐 폭포수 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얼굴이 지난 3일동안 최고조로 상기되어 있다.

"여긴 내 개인 연단장이거든. 그것도 문을 잠궈놨던."

민호는 손목시계의 분침이 정확히 9번을 움직였을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재회가 끝나기를 기다려주고 있었으나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제 먹었던 저녁메뉴에 대해서 얘기를 이어가던 두 명의 시선이 민호에게 돌아간다. 토마스는 아차싶은 표정이었고 트리사는 입을 동그랗게 한 채로 토마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토마스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 뉴트와 갤리가 토마스를 처음보고 민호에게로 던졌던 시선과 비슷한 종류였던 듯 싶었다. 트리사가 발을 움직여 팔짱을 낀 민호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트리사에요. 알고 있겠지만.

"목소리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지휘관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일로."

손을 맞잡으며 잇는 말에 트리사에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트리사는 표정을 유지한채로 뒤를 돌아 토마스를 쳐다봤고 토마스도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이 꼭 '내가 뭐랬어' 라는 표정이다. 민호는 눈썹을 휘어 올렸다. 저 둘이 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만한 시간이 있었던가?

트리사가 편하게 대해달라는 말을 꺼내서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지휘관이라고는 해도 센티넬의 계급은 모두 같다. 위키드에서 일한다는 타이틀만 아니었어도 전령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마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도 경계를 풀지 않는 눈에 트리사가 웃었다.

"토마스, 숙소로 돌아가서 샤워 좀 하는게 어때? 못봐주겠다."

토마스는 안절부절 못하던 눈을 토끼마냥 뜨고 트리사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직 트레이닝이. 거기까지 말하고 얼굴을 구긴 토마스가 트리사와 민호를 번갈아서 보더니 시선을 트리사에게 고정했다. 눈이 마주친채로 약 3분 정도가 지나서야 초조하게 옷에 손바닥을 문지른 토마스가 민호의 눈치를 본다. 민호는 토마스의 예상대로 아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안그럴리가 없지. 한숨을 내쉰 토마스가 터덜터덜 걸어 연단장의 입구로 향했다. 축쳐진 어깨에 뒷머리를 뒤섞은 민호가 손가락을 튕겨 입구 옆에 아공간을 벌린다.

"아까 숙소에도 하나 벌려놓고 나왔으니까. 안으로 들어가면 숙소에 열려있는 입구가 보일거야. 제대로 샤워하고 밥이나 먹고 있어. 티도 뒤집어 입고."

환해지는 얼굴이 봄철 벚꽃보다 더하다. 고맙다는 인사에 불퉁하게 팔짱을 낀 민호가 토마스가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아공간을 닫았다. 둘 만 남겨진 공기가 찝찝하기 그지없다. 트리사는 온 몸으로 이유를 묻고 있는 민호에게 유쾌하게 웃어줬다가 어제 토마스가 했듯 유리창문턱에 걸터앉았다. 민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토마스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그야 그렇겠지. 그것 외에 위대하신 지휘관님이 여기까지 발걸음한 이유가 뭐겠어. 비꼬는 생각을 속에만 담아둔 민호가 아공간에서 의자를 끄집어냈다. 멀리 있어도 안정적이다. 전투에 들어가면 정말 답이 없었지만, 어쨌든 토마스는 매우 훌륭한 가이드였다. 다른건 다 제쳐놔도 그것 하나는 민호도 인정하는 바다. 거의 열걸음 이상의 거리를 두고 마주앉는 민호와 눈을 맞춘 트리사가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 턱을 괴었다.

"토마스가 아직 나랑 연결을 끊지 않았다는거 알아?"

민호의 눈썹이 구겨진다. 트리사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내저었다.

연결이 되어있다는건 센티넬과 가이드가 정신교감을 하고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트리사의 말은, 이미 파트너가 아니게 되었고 새로운 센티넬이 파트너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가 트리사와의 교감을 끊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주는 영향은 몇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토마스가 현재 민호를 전혀, 손톱만큼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었다. 민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센티넬을 잃은 가이드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신교감이 끊어졌을 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히 센티넬 뿐만이 아니었다. 센티넬이 전사하여 교감이 끊어진 가이드들은 쉽게 우울증에 걸렸고, 교감의 정도에 따라 자살기도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센티넬이 겪는 부작용보다 훨씬 심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람에 따라 기간이 천차만별이었다. 그걸 줄이는 방법은 어쨌든 한가지다. 다른 센티넬과 정신교감을 하는 것.

민호는 현재의 토마스가 교감이 끊어진 후에 회복한 상태라고만 생각했다. 파트너로 배정 받았답시고 온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동시에 두 명의 센티넬과 정신 교감을 하는 것은 보통의 경우 미친짓이었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등급이 M이든 Z든 효율이 급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트리사가 온 이유도 어쨌든 그런 이유겠지. 트리사는 얼굴을 있는대로 구긴채로 정면을 노려보는 민호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봐, 그 애는 평생 동안 또래 애라고는 나나 에어리스 정도 밖에는 못만났던 아이야. 너는 우리가 3년 동안 파트너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더 오래됐어. 우리는 위키드 실험에서 첫번째로 성공한 페어중 하나야. 정확히 언제부터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5~6년 동안 계속해서 같이 있었다고. 토마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애는 똑똑해. 이 연결이 끊어진 다음에 돌아올 부작용을 네가 받쳐줄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다면 당연히 끊었을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민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트리사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결좋은 머리를 긁어댔다. 그래봤자 이제 3일이다. 이렇게 말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건 트리사도 알고 있었다. 다만 상황이 정말로, 정말로 좋지 않았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트리사가 여전히 얼굴을 구기고 있을 뿐인 민호의 모습에 창턱에서 몸을 내렸다. 약간 정신없다고 느낄 정도로 주위를 서성이던 트리사가 불시에 민호에게로 걸어가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에어리스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민호는 뇌 구석에서 에어리스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지금 당장 가이드로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인력은 저와 에어리스가 끝이지만, 에어리스는 아직 전 파트너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거든요. 첫만남 때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다시 귀에 울린다.

"그건 네가 알아서 케어해야 할 부분 아닌가?"

거의 비꼬는듯한 어조에 트리사가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제발. 나도 너희에게 여유를 주고 싶어. 얼마였지? 2주? 너는 지나치게 짧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네 사정을 많이 봐줘서 책정한 기간이야. 토마스한테는 괜찮을거라고 했지만 정말 촉박하다고! 에어리스의 데미지가 심각해서 토마스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는 케어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 아이는 아예 문을 열려고 하지도 않고, 밖은 아직도 전쟁통이야. 난 빌어먹을 지휘관인데 가이드의 도움 없이는 명령을 전달할 수가 없어. 네가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토마스를 다시 데려와야하고, 그럼 그 가여운 에어리스가 네 담당이 되겠지.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아. 아무도."

강조하는 듯한 말까지 끝마치고 진정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은 트리사가 의자에서 떨어져나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최악이다. 이렇게까지 초조하게 굴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겨우, 겨우 3일째다. 3일째라고. 트리사는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토마스에게 자신이 전부 케어할테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라고 말한 것은 트리사였다. 당연히 약간은 허세였다. 부모한테서 떨어지는 어린아이마냥 불안해하는 토마스를 진정 시켜주려는 목적이었고, 실제로 그 허세는 먹혔다. 하지만 트리사라고 에어리스의 상태가 이정도까지 심각할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계획에 맞추려면 2주나 여유를 줄 수가 없었다. 전쟁은 3개월 안으로 끝내야만 한다. 그걸 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지금 되는데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건 알고 있지?"

민호의 말에 트리사가 한숨을 쉬며 늘어진 머리를 넘겼다. 그래. 힘없이 뱉어지는 말에 민호가 뒷머리를 헤집었다. 들어왔을 때 부터 느낀거지만 이 지휘관은 납득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는 않다.

에어리스의 센티넬은 죽었다고 했다. 토마스가 만난 또래아이들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에어리스라는 사람도 위키드의 연구원일 것이고, 토마스와 트리사와 마찬가지인거라면 그 파트너와도 적어도 5년은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예상보다 심각하다느니 하는 말을 반복하며 불안해하는걸 보면 보통수준으로 생각해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민호는 한숨을 내쉬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이런 심각한 얘기를 언제 해주려고 했던건지.

"그래서, 원하는게 뭐야. 내가 그새끼를 막 태어난 강아지 다루듯이해서 따르게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거야?"
"그 애는 겁에 질려있을 뿐이야."
"왜, 그새끼가 연결이 끊겼답시고 우울해서 죽으려고 하면 내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토마스는 네가 자기를 좋아할리가 없다고 생각해."

냉정을 되찾은 듯 침착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에 어깨를 으쓱인 트리사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연결이 안끊어졌다고 했잖아.

트리사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일방적 텔레파시였지만, 가이드가 있는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조금 오래걸리긴 하지만 완벽하게 정신교감이 된다면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뇌를 이용하는 능력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가이드와 센티넬이 연결되면 감정공유 정도는 보통으로도 할 수 있다. 민호는 트리사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얼굴을 구겼다. 벤은 워낙 쉽게 우울해지는 성격이라 민호도 덩달아 머리위에 먹구름을 달고 살기도 했으므로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 역시 민호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짜증이 나는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위키드 실험에서 첫번째로 성공한 페어라고 했잖아. 토마스는 우리가 없었다면 위키드도 센티넬 관련 실험을 포기했을거라고 생각해. 나랑 자기가 머리가 터져 죽지 않은 것 때문에 너희들이 끌려와서 실험을 당한거라고 자책하고 있단 말이야. 거기다 위키드의 연구원이 되어서는 실험을 도왔으니까 더더욱."

민호는 어제의 일을 다시 머리에서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은 어쨌든 토마스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툭하면 쳐지는 어깨나 계속해서 눈치를 보거나, 작은 호의 하나에도 환해지는 얼굴들.

"말해두지만 우리가 연구원이 돼서 실험을 도운건 너희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였어. 우리라는 샘플이 나왔으니 위키드는 어쨌든 실험을 계속 할거고, 피해자를 줄이면서 실험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빨리 성공하게 하는거였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원인은 우리에게 있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원망하고 싫어하는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너는 특히나 악질적이었던 초기실험 참가자니까 보통의 센티넬 보다 적개심이 더 강할건 당연한거고."
"왜 그따위 가정을 마음대로 사실로 치부하는데?"
"글쎄? 네가 토마스에게 보여준 태도는 잘모르겠지만, 어쨌든 완벽하게 토마스를 싫어한 아이는 한 명 있었다며? 초기 가이드 실험 피해자라던 그."
"갤리녀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부 적대적이거든. 그리고 토마스가 잘못했던거고."
"나도 알아. 하지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 아이의 다리는... 토마스에게는 좀, 트라우마 같은 종류여서."

말을 아끼려는듯 입을 다물어버린 트리사가 고개를 젓고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너무 길게 끌면 토마스의 위가 스트레스 때문에 뒤집어질게 분명했다. 아니면 적어도 손톱이 보기힘들 정도로 엉망이 되겠지. 트리사의 행동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민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아공간을 열어 의자를 안으로 떨어뜨리는걸 보고만 있던 트리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토마스는 상황이 급박해지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말까지 했어."

짐을 챙기던 민호의 시선이 돌아간다. 트리사는 머리를 뒤섞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것 까지 말한걸 알면 화낼텐데.

"나랑 연결이 끊어진 데미지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한방향이라도 너한테 파장을 맞추겠다고 했다고. 말이 되니? 기계인간도 아니고. 난 그냥,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해. 토마스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그 아이는 강박증 비슷한 것에 시달리고 있어서... 전에는 내가 옆에서 다그쳐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신세 한탄을 하는 듯한 어조에 민호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채로 트리사를 쳐다봤다. 유치원 교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우리 아이 좀 잘 봐주세요. 땅콩에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가성으로 나온 민호의 목소리에 트리사가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토마스가 없는 3일은 생각보다 훨씬 불안한 나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시절 부터 항상 함께하던 사람이 곁에서 떨어진다는건 괜찮을거라고 다독였던 쪽이라도 무서운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크고 불안한 갈색 눈은 트리사의 뇌 구석에 아직도 깊게 박혀있었다. 토마스는 남자아이니까 널 지켜줄 수 있을거야. 위로랍시고 건넸던 연구원의 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부러 어른스럽고 강한척 새침하게 구는 트리사에게 토마스는 둥근 눈을 휘어 자주 웃어주고는 했다.

항상 어딘가 모자라고 얼빠진 아이. 생각하는게 너무 많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 아이는 그럼에도 나이에 걸맞는 순수함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트리사는 더더욱 위키드와 이 전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투명한 그릇에 담겼던 맑은 물이 어떤식으로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가는지 옆에서 지켜본 트리사는, 절대로.

"민호."

하릴없이 기지개를 펴며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민호가 트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 벽에는 벌써 아공간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숙소로 통하는 입구 너머에서 토마스가 손톱을 씹고 있을 것이다. 할말이 아직도 남았냐는듯 한쪽 눈썹을 올리는 민호에게 트리사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토마스의 것과 무척 닮은, 토마스에게 배운 웃음.

"그 아이를 사랑해줘."

그럴 자격이 있는 아이니까. 나지막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민호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원하는 것도 많으셔라. 침묵이 지난 다음 나온 목소리에 트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모들이 원래 그렇잖아. 민호는 바로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트리사를 쳐다보다가 등을 돌렸을 뿐이다.

민호는 어제 식당에서 봤던 토마스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점점이 박혀있던 헤이즐. 깨끗한 경탄. 일정하게 울리던 손목의 심박수도.

"그건 내가 알아서해."

툭 말을 던지고 난 민호가 그대로 다리를 뻗어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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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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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 AU 민톰

*약간 먼치킨적 요소 주의... 나도 싫지만 필요한 설정이야... 뒤지고 싶다...






이틀째. 민호는 익숙한 침대에서 일어났다. 글레이드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센티넬의 숙소는 나름대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넓고, 채광도 좋고, 필요한 것은 전부 있다. 원한다면 인테리어도 제 맘대로 바꿀 수 있었다. 어차피 민호의 경우에는 그리 넓을 필요도 없긴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민호는 뻑뻑한 눈을 돌려 옆을 봤다.

세걸음 정도 떨어져있는 반대편 침대에는 낯선 얼굴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있었다. 정신교감이 아직 되지 않은 센티넬과 가이드는 제대로 정신교감이 되고 테스트를 통과할 때 까지 필수적으로 24시간 동안 붙어있어야 한다. 징글징글 했지만 지나치게 잘짜여진 시스템이니 뭐라 불만을 제기하는 것도 껄끄럽다. 어쨌든 필요한 과정이라는건 동의하는 바였다.

햇볕이 이렇게나 강하니 아무리 좋게봐줘도 정오는 지나있다. 민호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었고, 7시 정도에 일어나 아래층 편의점에서 아침밥까지 사온 뒤 할 것이 없어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던 참이다. 딱히 깨울 마음까지는 들지 않아서 언제 일어나나 기다리다가 좀 졸았지만, 더 잤어도 일어나니 상대도 일어나있었다, 같은 전개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이봐."

뭐라고 불러야할지 감이 서지 않아서 일단 그렇게 뱉은 민호가 토마스의 몸을 흔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말랐지만 실제로 닿는 거죽은 상상이상이었다. 위키드 상임 연구원이라면서 밥도 제대로 안먹나. 토마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칭얼거림을 뱉으며 이불에 파고들 뿐 통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긴 속눈썹이 덮인 점투성이 얼굴이 하얀 이불에 숨겨진다. 마음 같아서는 놓고가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스템을 만든 연구원들중 한 명이었다.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예상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민호는 한 번 더 신경질적으로 토마스를 흔들었다. 솜이불 안에서 이번에는 좀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트리사, 10분만. 제발."

꽉 잠긴 목소리. 민호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트리사 좋아하네. 이불의 가장자리를 잡은 민호가 그대로 토마스와 함께 이불을 바닥으로 패대기 쳤다. 한심스러운 비명과 함께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토마스가 이불이 감싸주지 못한 뒤통수를 붙잡고 바닥을 몇 번 굴렀다. 하나, 둘, 셋.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주변과 팔짱을 낀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민호를 보더니 혼란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가라앉히고 매우 어색한 웃음을 띄우는 것이다. 민호는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트리사라는 사람은 센티넬이 아니라 네 보모였나보지?"

민호 본인이 듣기에도 기온이 낮은 목소리다. 토마스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사과를 시도했다. 물론 시도는 실패했고 민호는 아까 챙겨놓았던 묵직한 가방을 들고 문으로 턱짓을 했다. 10분 줄테니까 준비하고 나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는 토마스를 한 번 흘겨본 민호가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토마스가 일어나면 아공간을 한 번 벌려볼 생각이었는데 도움을 받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아직까지 전 센티넬에 묶여있는 가이드에게 뭘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덕분에 연단장까지 또 걸어가게 생겼다. 민호가 닫힌 문에 대고 혀를 찼다.


*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연단장은 센티넬 전용이었다. 각 센티넬마다 개인 연단장이 있고, 대련을 위한 곳도 따로 있다. 물론 서로를 죽이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었고 대련장 이외의 곳에서 타인에게 능력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강아지 마냥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토마스가 보이지 않게 눈을 굴린 민호가 막 연단장으로 들어가려는 뉴트를 발견하고 눈인사를 했다. 시시덕거리던 뉴트와 갤리의 시선이 소풍 나온 어린애마냥 온갖 곳을 두리번대는 토마스에게로 향한다.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이미 시선으로 보내지는 확인질문에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갤리의 얼굴이 구겨진다. 하기야 갤리도 몇 안되는 가이드 실험 피해자였고, 뉴트에 대해 알고 있으니 위키드의 연구원이 곱게 보일리 없다. 토마스는 또 입술을 오리마냥 내밀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소리가 날 것 만치 눈동자가 굴러간다.

"뉴트 아이작이야."

험악한 분위기에서 먼저 말을 꺼낸건 뉴트였다. 내밀어진 손에 얼굴이 환해진 토마스가 얼른 뉴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토마스 에디슨이야. 민호는 그제야 이력서에 적혀있던 토마스의 성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당연히 토마스를 질색할줄 알았던 뉴트의 반응이 그러니 갤리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으나, 토마스가 조심성 없이 뉴트의 다리를 한 번 힐끔댄 것으로 다시 험악해졌다. 민호를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면 뉴트의 다리에 대해서도 모를리가 없다. 뉴트는 어깨를 으쓱였고 갤리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에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불편하지는 않아?"

민호는 하마터면 토마스의 뒤통수를 후려칠뻔 했다 갤리는 그딴걸 질문이라고 하냐며 이를 갈았고 뉴트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토마스는 갤리의 기에 눌렸는지 다시 어깨를 움츠렸지만 질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뉴트의 다리를 힐끔댔다. 갤리는 완전히 날뛰려고 했고 그것을 막은 것은 뉴트였다. 갤리는 물론이고 토마스의 눈까지 토끼마냥 동그래진다.

"이젠 괜찮아."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입밖으로 내는 듯한. 민호는 할말을 잃었다. 뉴트의 다리에 대한 일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갤리도 민호도, 물론 뉴트도 그 주제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토마스는 동그래진 눈을 깜박였다가 곧 표정을 바꿨다. 정말로 기쁜듯이 환한, 안심한 웃음.

"다행이다."

그리고는 저 혼자 세 명을 지나쳐 연단장으로 들어가버렸다. 갤리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고 민호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져있었다. 토마스의 뒷모습을 쫓던 뉴트는 불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경박하고 높게 울리는 웃음.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댄 뉴트는 곧 민호에게 같이 안들어가냐는 듯 연단장 안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주춤거리던 민호가 곧 갤리에게 눈치를 보내며 연단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토마스를 찾은건 층계참이었다.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보며 심각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다가 민호가 어깨를 건드리자 소스라치게 놀라 바닥에서 5cm는 떴다. 아마 들어오기는 했는데 민호의 연단장이 어디인지 물어보는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얼빠진 행동에도 물론 한소리 할게 있었지만, 당연히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질문을 한거야? 뉴트 아니었으면 멍 하나 새기는걸로 끝나지도 않았어."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눈을 몇 번 깜박인 토마스가 시선을 사선으로 올렸다. 또 재고 있다. 민호는 슬슬 토마스의 뇌를 해부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뉴트가 아니었으면, 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까딱했다간 뉴트 본인의 손에 얼굴이 녹을 수도 있었던 뻔뻔한 질문이었다. 생각이 없는건지 대담한건지, 아니면 단순히 뉴트의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이기적인 질문이었는지- 토마스는 입술을 안으로 오므렸다. 대충 챙겨입고 나온 날씨에 비해 두꺼운 야상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대는 손이 저절로 머리에 그려진다.

"그게 좀,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거든. 괜찮은지."

민호의 얼굴이 대뜸 찌푸려진다. 토마스는 거기서 말을 마칠 생각인지 민호에게 연단장의 위치를 물었다. 민호의 연단장은 지하에 있었고 굳이 그 사실을 못알려줄 것도 없었지만, 민호는 말로 그것을 말하는 대신 바람소리가 날만치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아까처럼 강아지마냥 쫓아오는 발소리가 조금 거슬린다.

토마스가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말해 민호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실험은 끔찍했고 죽은 사람도 수십이지만 토마스는 어린아이였다. 그당시에 어떤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대체 어떤 생각이었는지 민호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고 관심도 없었다. 민호는 목표가 있었고 그것 이외에는 놀라울 정도로 뭐가 어떻게든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민호에게 배정된 가이드다. 그리고, 아마도, 전쟁을 끝낼 사람이었다. 이렇게까지 의중을 알 수 없는 기분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수준이라면 차라리 낫다.

민호의 연단장은 기본적으로 넓은 공간 외에는 준비되어 있는 장애물이나 지형이 없었다. 바꾸고 싶다면 바꿀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시스템을 켜면 홀로그램이 나타날 것이고 평소라면 민호가 창이나 기타 연습하고 싶은 무기로 그것들에게 타격을 주겠지만, 오늘 연단장에 온 것은 그걸 위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는 또 아기새마냥 입을 벌리고 하얀 타일에 둘러쌓인 공간을 둘러보기 바빴다.

"내가 어떻게 싸우는지는 알고있지?"

토마스는 말 잘듣는 학생마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호는 기본적으로는 아공간을 벌려 안에서 무기를 끄집어 내 싸웠다. 그 외에는 포탈 처럼 입구를 두개 뚫어 먼거리에서 적을 화살로 맞추거나, 위에서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기타등등 나름의 활용을 해서 알아서 싸우는 식이다. 가이드가 없을 때는 손바닥만한 입구를 하나 벌리는게 고작이고, 최대로는 50개를 동시에 벌려본 적이 딱 한 번이었다. 벤이 이틀 동안 꼼짝없이 기절해 있어야했지만.

센티넬의 능력은 가이드에 역량에 달렸다. 사실 센티넬의 능력등급은 활용도에 좌우되는 것이라 그다지 쓸모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이드의 등급은 다르다.

민호는 이력서에서 읽었던 토마스의 가이드 등급이 어느정도였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벤은 B였고 그 전 가이드는 B+정도다. 하지만 민호는 애초에 자신이 가이드의 등급이 전투를 좌지우지하는 종류의 능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D등급이어도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민호의 능력은 부가적인 것이었다. 넣어놓기만 하면 어느 무기도 꺼낼 수 있는 것은 확실한 장점이었으나 어쨌든 민호는 무기를 들고 제 몸으로 싸웠다. 무기를 꺼낼 만큼의 아공간만 벌릴 수 있다면 전선에 설 수는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어느정도인지만 테스트 할거니까 집중해."

토마스는 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유리창틀에 걸터앉았다. 자신의 쪽에서 맞출 수 있다고 매우 자신감 넘치게 말했으니 시원치 않으면 발로 차줄 의향도 있었다. 민호가 하려는 것은 상성 테스트다. 정신교감을 단 한번도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일종의 관례였다. 벤과 했을 때는 민호가 들어갈만한 아공간 두 개가 끝이었다. 그것도 B등급치고는 상당한 결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테스트는 간단했다. 민호가 일정한 크기의 아공간을 하나씩 벌릴 때 마다 괜찮은지 묻고, 가이드가 어지럽다고 말하거나 쓰러지면 테스트 종료다. 민호는 별 가감없이 바로 아공간을 하나 벌렸다. 아공간의 입구는 괴수가 입을 벌린 것 같은 외형이었다. 끝도 없이 어두운 동굴 같은 느낌. 민호의 아공간은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 아니라, 아니,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 맞았지만, 쓰기 편리하도록 민호가 일부러 구역을 나눠놓고 구역마다 필요한 것을 쑤셔넣은 구조였다. 비유하자면 서랍장이다.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물건이 있는 구역에 입구를 벌려놓고 손을 집어넣어 꺼내는게 일반적인 사용법이었다.

민호가 처음 연 아공간 구역에는 창이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였고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멀쩡한 얼굴이었으므로 민호는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한 구역을 열었다. 벤은 여기서 기브업을 외쳤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나 뭐라나. 다행히 토마스의 머리는 깨지지 않는 모양이다. 민호는 토마스를 흘기다가 아공간을 하나 더 열었고, 역시 토마스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 하나. 토마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멈추라는 말은 없었다. 열 둘, 열 셋, 열 넷, 열 다섯-

"야, 힘들면 말해."

결국 민호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이미 열 다섯개나 열었다. 벤과는 정신교감 이후로도 한 달은 지나서야 열었던 숫자였다. 토마스는 입에 풀이라도 붙인 것 마냥 입술을 꾹 다물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집중하라고는 했지만 말은 들어야할거 아니야. 혀를 찬 민호가 입을 일자로 만들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 민호가 언질도 하지 않고 한꺼번에 다섯개를 열었다. 토마스의 눈이 처음으로 깜박여졌다.

"민호, 귀찮다고 몰아서 하면 못써."

지나치게 평온한 말투다. 민호는 이제 괴상한 파충류를 보는 듯한 눈으로 토마스를 보았다. 감각이 있기는 한건가? 토마스는 오히려 민호의 시선에 한쪽 눈썹을 휘어올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민호는 대화를 포기하고 10개를 더 열었다. 30.

몰아서 하면 안된다니까.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서 민호는 아예 열린 아공간들을 죄다 닫아버렸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검은 입들에 토마스가 얼굴을 구겼다. 물론 그 얼굴은 민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잡아 올리자 밀가루 반죽마냥 펴져서 하얗게 질렸다. 형광등 불을 반사하는 헤이즐에 혼란이 들어찬다.

"뭐하는 놈이야 너?"

토마스는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일단 민호의 팔목을 잡았다. 물론 그런다고 풀어질 손이 아니긴 했다. 정신교감도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30개라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토마스가 쓰러질거라고 생각하고 시도한 숫자였다. 으르렁대기라도 할 것 만치 이를 드러내는 민호 때문에 식은땀을 흘린 토마스가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맞출 수 있다고 했잖아! 전혀 안믿었던거야?!

내가 맞출 수 있어요. 전날에 들었던 소리긴 했지만, 그게 이런 뜻일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정신교감은 기본적으로는 시너지 효과가 전제였다. 한쪽이 제멋대로 파장을 맞춘다고 해서 해결되는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효과가 없는건 아니었지만 기껏해야 20%에서 25%, 그것도 최대로 생각해야 그정도다. 그런데 30개라니. 정신교감이 된지 2년째에 50개를 연 것으로 벤은 이틀이나 블랙아웃을 겪었다. 민호는 토마스를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곧 던지듯이 멱살을 놓았다. 조금 켁켁거린 토마스가 얼굴 가득 억울함을 담고 구겨진 셔츠를 폈다.

"설마 내 프로파일도 안 읽어봤어?"
"읽었거든?"
"내 가이드 등급이 몇인지는 알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다. 토마스는 입을 다무는 민호를 노려봤다가 가방에서 패드를 꺼냈다. 흠집 하나 없는 새하얀 패드가 토마스가 손가락을 움직임에 따라 화면을 바꿨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 토마스의 프로파일 맨 하단에 적혀있는 가이드 등급의 모양은 M이였다. M? 민호가 눈썹을 구부리자 토마스가 민호에게서 패드를 뺏어 가방에 도로 집어넣으며 신경질을 냈다.

"Master의 M이야. 벤의 등급은 B였잖아! D C B A S M! 내쪽에서만 파장을 맞추는걸로도 50개 정도는 문제 없다고. 마음에 안들어한다는건 알겠지만 나한테 관심 좀 가져줄래? 제발?"

민호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했다. M이라는 등급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는 말은 이 상황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토마스는 단단히 토라진 모양새였고 눈을 굴리던 민호는 사과를 시도했으나 정확히 뭐라고 사과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일줄 누가 알았겠나.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민호를 노려보던 토마스가 또 시선을 사선으로 올렸다. 위화감이다. 뭘 재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닌데.

그러나 토마스의 표정이 곧 누그러졌으므로 민호는 추궁은 하지 않기로했다. 토마스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유리창턱에 걸터 앉았다. 맞잡은 손이 의미없이 꼼질댄다.

"미안해. 좀 서운해서 그랬어. 그게 난, 그러니까, 네가 내 이름이랑 내가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것 밖에는 알려고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프로파일에서 그 항목을 삭제해달라고 했었는데 잘 안됐거든..."

귀나 꼬리가 있었으면 땅끝까지 쳐졌을 분위기다. 민호는 눈썹 한쪽을 들어올렸다. 마음에 안들어한다느니 말하더니 결국은 그놈의 연구원 타이틀인가.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는건 민호도 인정하는 바지만 그런걸 이유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아침부터 죄인마냥 굴던 원인이 밝혀진 셈이었다. 민호는 한숨을 쉬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위로나 어깨를 토닥이는 것도 전문이 아니지만, 저렇게 눈치나 보고 축 쳐져있는걸 계속 보고만 있는 것도 성미에 안맞는 일이다.

"그냥 단순히 네가 그렇게 굉장한 놈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아서 그랬던거야. 딱히 너한테 관심이 없다던가 적개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니까. 2주만에 전부 알려준다며? 0에서 시작하는거 아니었냐?"

토마스의 허리가 펴진다. 민호는 연단장의 컨트롤 박스로 걸어가 공간을 2배 가까이로 늘이고 돌아왔다. 50개까지는 문제 없다고 했겠다. 눈짓을 하자 느낌표를 띄운 토마스가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주시했다. 허세였는지 겸손이었는지는 금방 판결이 나겠지.

빠르게 열리기 시작하는 아공간의 검은 입구가 하얀 타일을 채우기 시작했다.


*


"그만 먹을래."

토할 것 같다는 감상을 얼굴에 띄우고 포크를 내려놓는 것을 민호가 대놓고 노려보자 토마스가 도저히 무리라고 식탁에 엎어져버렸다. 속이 울렁거려. 차가운 유리에 볼을 붙이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뱉길래 어쩔 수 없다는듯 민호가 토마스 몫의 스파게티를 제앞으로 끌어왔다.

테스트 결과 토마스의 발언은 겸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50개를 넘어가서도 말이 없길래 별 생각없이 80개까지 열어버렸더니 81개째에서 바로 토해버린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지럽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못말했단다. 그래도 기절하지 않은게 어디야. 등을 두드려주며 한 말에는 바로 원망이 돌아왔지만.

못걷겠다는걸 팔을 잡고 질질 끌어서 식당까지 오기는 했는데 역시 위에 뭘 밀어넣을 상태는 못되는듯 했다. 그나마도 민호가 계속 노려보는 바람에 반 정도는 들어가긴 했다.

식당은 센티넬 숙소의 지하에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메뉴판이 바뀌고 가격은 외부보다 싼 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맛이 한정적이라 직접 만들어먹는 사람도 많다. 민호는 요리는 젬병이라 대부분의 식사는 이 식당에서 했다. 연단장은 두리번거렸던 토마스도 식당은 익숙한듯 싶었다. 아니면 차마 외부에 관심을 둘 수도 없는 상태거나.

"유리에 붙겠다 아주."

소스 튄 자국 하나 없이 스파게티 그릇을 비운 민호가 턱을 괸 채로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말거나 반쯤은 잠에 빠진 토마스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공중에 휘젓는다. 무리 시켰다는건 당연한 사실이기야 했지만.

한 번 해볼까. 그리 나쁜 기회로 보이지는 않는다. 눈을 굴리던 민호가 팔을 뻗어 테이블에 늘어져있는 토마스의 손목을 주워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난 토마스가 감겨있는 민호의 눈을 보고 곧 놀라서 올라갔던 심박수를 가라앉힌다. 곧추 세워졌던 허리도 편한 자세로 약간 구부려졌다.

토마스의 손목은 뼈에 가죽이 달라붙어있는 모양새였다. 엄지로 쓸기라도 하면 피부가 바스라질 것 같기도 했다. 손바닥에 눌린 안쪽 손목에서 부터 천천히 심박수가 울려온다. 민호는 작은북에서 시작한 소리가 팀파니 수준까지 묵직하고 크게 내려가는 것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위키드에서 권고하는, 센티넬과 가이드가 정신교감을 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다. 물론 가이드의 위가 정상이 아닌 상태로 식당에서 시도하라는 지침은 없다.

민호가 눈을 떴을 때는 토마스가 지나치게 빤히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이 돌아가거나 피해지는 일이 없다. 토마스는 동물원에서 기린을 처음 본 어린애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신기하고 경탄에 찬, 반짝거리는 시선. 민호는 얼굴을 구겼고 토마스는 그제서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시선을 피했다. 민호는 직후에 얼굴을 구긴 것을 후회했다.

"다 먹었으면 갈까?"
"트리사라는 센티넬, 능력이 뭐였어?"

손목을 빼며 반쯤 일어선 토마스를 붙잡은 것은 민호가 되는대로 뱉은 문장이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 민호의 손에 걸쳐져있다. 토마스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시선을 사선으로 올렸다. 민호의 얼굴이 구겨졌으나 토마스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젯밤 패드에 재미로 검색했던 트리사라는 센티넬의 프로파일에는 토마스와 똑같은 문장이 있었다. 위키드 상임 연구원.

"텔레파시였어. 그 왜, 작전 전달을 하는..."

말은 흐려졌지만 민호는 머릿속으로 들렸던 강단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어렵지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휘관. 과연, 이라는 단어가 혀끝에 걸렸다가 사라졌다. 위키드의 상임 연구원 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글레이드에 무슨 볼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졌다. 토마스는 말을 꺼낸 것을 약간 후회하는듯 복잡하게 얼굴을 구겼지만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해주지 않았어도 민호가 알아냈을 것이다.

민호는 그쯤하고 토마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과 식기들을 쟁반에 담아 한 팔로 받치는 것을 멀뚱히 보기만 하던 토마스가 민호의 흘기는 시선에 제대로 땅에 선다.

"걸을 수 있겠어?"

토마스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한 걸음을 떼자마자 의자를 쓰러뜨릴뻔 했다. 혀를 찬 민호가 알아서 오라는듯 먼저 식기 반납대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가면 아마 쓰러져서 잠들어버릴게 뻔하니 굳이 친절을 베풀 이유도 없다. 토마스가 의자를 차지 않도록 노력하며 민호의 뒤를 따랐다.








벤은 2개가 끝이었는데 토마스는 한 번에 80개까지 열 수 있었던건 그니가... 벤과의 상성테스트 때는 서로 이름만 알았던 수준이었고 토마스 때는 토마스 쪽 하나라도 맞춰져있었기 때문에 차이가 난 것도 있고(꽤 엄청난 차이임 벤 때도 그랬다면 10개는 열었을 것)5등급에서 3등급 올리는거랑 3등급에서 1등급 올리는 것의 그....... 그게 다르듯이 가이드의 등급은 위로 올라갈 수록 올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힘들어져서 3등급 차이라도 차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 애초에 M등급은 두 명ㅇ밖에 업슴 에어리스랑 토마스 '^`) 먼치킨이지만 괜찮아 그럴만하니까...(뒤져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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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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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 민호 X 가이드 토마스


토마스가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으면 어떤 성격일까 머리터지게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써벌임... 드악님 이제 민톰 주세요... 근데 아직 1편이라ㅇ>-<




센티넬은, 일종의 시한폭탄이었다. 그들에 대한 취급은 양면성이 있어서 마치 카드의 앞뒷면과 비슷하다. 전쟁지역인 이 '글레이드' 구역에서는 그 양면성의 강도가 조금 심했다. 앞면은 경탄과 존경심, 예찬. 뒷면으로는 썩어서 고인 혐오감과 두려움. 센티넬들은 아주 놀랍게도 이런 취급을 생각보다 잘 견뎌주었는데,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정부에서의 지원은 아주 훌륭한 수준이었으니까.


센티넬이라는 무기가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기구인 위키드에서 내놓은, 개발된 인간병기는 군자금에 아주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애초에 '센티넬'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는 나름의 초능력자들은 아주 예전부터 있어온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너무 약했고, 아주 강력한 몇을 제외하고는 가볍게 부릴 수 있는 장난 수준이었기에 실제의 전쟁에 파급력이 있을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위키드가 진행한 것은 말하자면 센티넬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프로젝트였다.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시원찮은 마술을 대 살상용 무기로 쓸만한 수준으로.


비밀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였고 엄연히 생체실험이었으며, 사람을 무기로 만든다는 점에서 위키드는 만만치않은 지탄을 받았으나 센티넬의 활약은 그것을 모두 덮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오랫동안 반복되었던 전쟁은 점차 판세를 뒤바꾸고 있는 중이었고, 지표면을 파괴하는 미사일이나 납탄은 점점 모습을 감추었다. 지구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식으로 말한 한 비평가는 당연히 가지고 있던 지위를 박탈당했으나 공감하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센티넬들이 활약하는 곳은 그 글레이드였다. 세계 인권 선원 따위가 발톱을 들이밀 수 조차도 없는,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무법지대.


정부는 위키드에 대한 처벌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로 미루기로 했고 이것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센티넬이 되고 싶다고 찾아오는 지원자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센티넬에게 필요한 '가이드'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된 것이 그 놀라운 결과 중 몇가지였다.


장난 수준에 머무르는 센티넬이라도 어떠한 기폭제가 작동하여 능력이 터지게 되는 일이 있다는건 기록된 바 있는 사실이다. 영국의 좁은 땅덩이에 새겨진 거대한 크레이터나 버뮤다 삼각지 같은 미스테리한 구역 등이 그 예였다. 위키드는 이 사실에 기초해 센티넬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이것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사실 무법지대인 글레이드가 만들어지기 전 부터 계속해서 진행 되어 왔던 프로젝트 였는데, 위키드는 연구 끝에 이 기묘한 능력을 막아놓는 것이 블랙아웃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블랙아웃이란 쓸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뇌가 정해놓고 일정 이상의 힘을 내면 근육이 찢어지거나 몸 어딘가에 이상이 오기 때문에 뇌가 강제적으로 힘을 내는 것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센티넬의 능력이 장난 수준인 것은 '이 이상 능력을 쓰면 버티지 못한다'는 뇌의 판단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 블랙아웃을 무시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쉬운 것은 보조기구를 덧붙여주는 것이다.


'가이드'는, 센티넬의 보조기구였다. 능력이 폭주하는 센티넬의 호르몬을 안정 시켜주고, 센티넬 본인의 뇌 대신 센티넬의 한계를 설정해주는 존재. 글레이드에서 활약하는 센티넬들은 기본적으로 항상 폭주해 있는 상태였다.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글레이드에서 가이드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기성 상품마냥 하나의 가이드가 어떠한 센티넬도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일이 그렇게 잘풀리지는 않았다. 센티넬이 가이드가 있음으로서 능력을 안정적이게 낼 수 있는 것은 센티넬이 받을 영향을 가이드가 대신해서 받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똑같은 영향을 받는게 아니니 터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센티넬이 능력을 폭주시킬 때마다 가이드의 정신은 조금씩 좀먹어 간다. 비유하자면 가이드는 소모성 제품이었다. 한 개도 벅찬 것을 두 개나 감당할 수 있을리도 없고, 애초에 가이드는 센티넬 한 명에게 맞춰져있는 전용상품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토마스는 조금 달랐다.


"두번째 센티넬?"


그것이 민호가 토마스에 대해 들었을 때 처음 뱉었던 말이었다. 코웃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 당연한 일이었다. 민호의 전 가이드인 벤이 적군에게 총살 당한 이후에 민호는 근신처분을 받았다. 당연히 당해야할 일이었다. 가이드는 센티넬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면 안되었고, 가이드를 지키는 것은 센티넬의 역량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이드가 전쟁통에 죽어버리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로, 센티넬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쉽지만, 가이드가 한 번 죽으면 센티넬도 제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가이드는 센티넬보다도 취급이 좋았지만, 인력은 부족한게 현실이긴 했다.


전에 맡았던 센티넬이 가이드가 바뀌었다고 한다. 말이 돼? 민호는 눈썹을 휘어 올렸지만 뉴트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패드에 떠있는 프로파일을 받아든 민호는 이력서에 적힌 내용에 미간을 구기고는 흰 바탕에 적힌 글씨를 천천히 읽었다. 위키드 상임 연구원.


"나이는 동갑인데."


민호의 어깨너머로 종이를 넘겨다보던 뉴트가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다. 애초에 위키드의 상임 연구원이 글레이드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가이드를 자처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손가락을 옮겨 아랫줄을 읽은 민호가 턱을 괴었다. 트리사라는 센티넬과 무려 3년간이나 같이 다녔다.


창백하고 마른, 전쟁통 보다는 책상 앞의 스탠드가 훨씬 어울리는 체형. 검은 머리에 밝은 헤이즐은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사진이 지나치게 앳된 것을 보면 처음 업로드 된 이후로 한 번도 업데이트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도 이런 얼굴로 3년이나 가이드를. 센티넬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이드는 조금 굳건한 타입들이 많았다. 아무리 센티넬 뒤에만 붙어있어도 무기는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했고, 맷집이 없으면 힘들다. 뉴트의 가이드인 갤리만 해도 글레이드 밖으로 나가면 평균을 완전히 웃도는 수준의 덩치였는데.


만나면 조금 다르겠지. 프로파일을 폴더에 쳐박은 민호가 찌푸둥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내일 이 토마스라는 가이드가 오면 다시 그 지겨운 정신교감을 해야한다. 휴식시간이 전부 끝났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하다. 가이드만 있었으면 사실 이동은 문제도 되지 않는데. 가이드가 없는 이상 손바닥만한 아공간을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이다.


"이번 정신교감은 좀 성심성의껏 해봐. 저번처럼 중간에 폭발해서 안하겠다고 날뛰지 말고."

"웃기네. 생각으로는 2년은 질질 끌고 싶은데."

"잘릴걸?"

"자를 수나 있는지 보자."


뉴트가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 것을 힐끔 내려다 본 민호가 부츠의 끈을 제대로 매고 출입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 가이드는 정말 껄끄럽다.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인건 알고 있지만.



*



토마스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훨씬 맥아리가 없었다. 3년이나 지났으니 조금 바뀌었거니 생각했는데 프로파일의 사진과 비교해서 키만 말쑥하게 컸다 뿐이지 도저히 근육량 같은게 늘어있는 것 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대놓고 혀를 차는 민호 때문에 토마스도 얼굴을 구겼으나, 곧 입술을 먹더니 오리마냥 입술을 내밀고 손을 내밀었다. 토마스에요. 입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높다.


민호는 예의상으로라도 이름을 밝혀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냥 손만 잡고 흔들었을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처음 맞잡은 토마스의 손은 뼈가 두드러져있었다. 특정부위에 있는 굳은 살. 총과 단검을 다룬다. 손은 금방 풀어졌다. 토마스는 난감한 얼굴로 눈썹을 구겼고 방 구석에 위치한 감시카메라를 힐끔 쳐다봤지만 민호를 나무라는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민호의 심정은 이해하고 있다. 근신처분이 아직 세 달이나 남았는데 토마스 때문에 다시 전쟁통에 나가게 생겼으니 좋은 기분일리는 없겠지.


"전부 들으셨겠지만, 원래 파트너였던 센티넬이 가이드를 직접 바꿔서 제가 잉여인력이 됐거든요. 현재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민호씨가 유일해서."


아는 것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이 어색한 공기를 차마 계속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민호는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래서는 정신교감이고 뭐고 일이 진행조차 되지 않을 분위기다. 민호는 토마스를 뚫어져라 쳐다만 볼 뿐 도저히 대화 주제를 꺼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토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에 대해서는 들었어요. 아공간 사용자라고."


역시 민호는 대답이 없었다. 토마스는 머리라도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 못하겠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될 일인데 움직일 기미도 없다. 어쨌든 여기서 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건 토마스의 역할인 듯 싶었다. 프로파일에 적혀있던 걸로 보면 상당한 베태랑이어쩌면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항목을 봐서 이런 반응을 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더욱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토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벤씨에 대한건 안타깝게 생각해요."


토마스는 말을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아무리 대화주제가 없다지만. 민호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토마스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민호의 가이드는 두 번 바뀌었다. 다른 센티넬들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였지만 그렇다고 가이드에게 정을 주는 타입인 것도 아니었다. 민호의 능력등급은 S였고 전투능력에 관해서는 글레이드 내에서도 견줄 자가 없다. 가까운 인간관계로 올라와 있는 것도 뉴트 아이작과 그의 가이드인 갤리 갈릴레오 정도였다. 친화력이라고는 없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건 아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토마스의 프로파일에 가까운 인간관계로 올라와 있는 것은 트리사가 다였지만.


"버려진거야?"


민호의 말은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왔다. 굳이 앞문장을 말하지 않아도 무엇에 대해 말하는건지는 확실하다. 사실 센티넬이 가이드를 직접 지정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있는 가이드를, 그것도 3년이나 같이 있었던 가이드를 죽은 것도 아닌데 자기 멋대로 바꿔버렸다는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기본적으로는 강한 유대감을 필요로 하는 관계였다. 정신교감도 그래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고. 정을 주는 타입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민호도 전 가이드와 벤이 죽은 직후에는 강제적인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둘이 민호와 일한 기간은 각각 1년과 2년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3년이나 같이 일한 파트너를.


토마스는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가 곧 시선을 사선으로 올렸다. 감시카메라. 토마스의 관심은 사실 민호보다는 감시카메라에 쏠려있었다. 조금 고민하는 눈빛이다. 마치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재고 있는 듯한 눈. 민호는 당연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은 토마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약간 난감한 신음소리와 함께 토마스의 눈이 다시 민호에게 돌아온다.


"전쟁이 곧 끝날거에요."


민호는 곧장 얼굴을 구겼다. 생각처럼 의문이 입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알맞은 반응이었다. 물어본 질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건지 모르겠는 문장이었으니 당연하다. 토마스는 다시 말을 고르는듯 가만가만 시선을 옮겼다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승세가 완전히 기울어져 있다는 것 쯤은 몸으로도 느끼고 있겠죠. 적군이 발악을 하고는 있지만, 아마 오래 버티지는 못할거에요. 그리고 위키드는 이 전쟁을 더이상 끌고 갈 이유를 찾지 못했구요.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총 동원해서 될 수 있는 한 이 전쟁을 빨리 끝낼겁니다. 민호씨는 중요한 전력이니 더이상 전선에서 물러나 계시면 안돼요. 지금 당장 가이드로 현장에 나갈 수 있는 인력은 저와 에어리스가 끝이지만, 에어리스는 아직 전 파트너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쪽은 센티넬인 트리사가 알아서 케어해야 해서, 남은 제가 오게 된거죠."


민호의 얼굴이 더욱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토마스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앞에 놓인 녹차를 입으로 흘려넣었다. 토마스는 명령 받은 일을 읊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 일을 말하는 듯이 얘기했다. 위키드의 상임 연구원. 과거이력으로 써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모양이다. 


"전쟁을 언제까지 끝내는게 목표인데?"

"3개월."


민호는 코웃음을 쳤다. 3개월이라니. 적군을 3개월 내에 전멸시키기라도 할 생각이라는걸까. 이 전쟁은 이미 10년 이상 지속되어온 전쟁이었다. 센티넬이 등장한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지금에서야 승기가 기울어진 수준이다. 토마스는 민호의 비아냥대는 반응에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예상범위 안. 평소라면 재수없다고 혀를 찰 얼굴이었지만, 아까 난감해 하던 얼굴이 겹쳐져서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민호가 눈을 가늘게 했다.


"하지만 나랑 정신교감을 하려면 적어도 4개월은 필요할텐데. 벤이 그정도가 걸렸거든."


토마스는 다시 난감한 빛을 띄었다. 그러나 전혀 곤란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정신교감은 평균적으로 2개월에서 3개월이 걸렸다. 민호는 영 감정에 무뚝뚝해서 좀 더 걸리는 편이다. 벤은 그나마 조금 덜 걸린 수준이었다. 첫 파트너와는 장장 6개월이나 걸렸다. 평균으로 쳐서 2개월이 걸린다고 해도 3개월 안에 끝날 전쟁이라면 그 때쯤엔 사실 민호가 할 일이 거의 없을터였다. 비효율적이다. 올거였으면 적어도 두 달 전에는 왔어야 계산이 맞았다.


"나는 2주 정도로 잡고 있는데."


두번째 코웃음. 토마스는 다시 녹차를 마셨다. 존댓말이 사라졌지만 민호가 신경쓸 부분은 아니었다. 애초에 동갑이었고 토마스도 그건 알고 있다. 민호부터가 처음부터 반말이었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2주라니. 가족이었으면 모를까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민호는 이 토마스라는 사람과 2주만에 정신을 교감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나 들어볼 생각으로 민호가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팔짱을 꼈다. 토마스는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감시카메라를 봤다. 그러나 이제는 별 상관 없는듯 했다. 토마스가 기지개를 켜듯 테이블에 팔을 쭉 뻗는다.


"초기 실험 참가자죠?"


대답은 없다. 토마스는 딱히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이 아닌듯 다시 저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안구 같은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러간다. 다시 고민중이다. 위키드의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조금 지나치게 생각하는 바가 얼굴에 잘 드러나는거 아닌가. 민호는 초침소리에 맞춰 팔에 얹어진 검지 손가락을 두드렸다. 1, 2, 3, 4, 5.


"내가 맞출 수 있어요. 다 지켜봤으니까."


민호에게서의 반응은 없었다. 민호를 힐끔댄 토마스가 다시 입술을 오리마냥 내밀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아마 민호가 일어나서 토마스를 한 대 후려갈길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럴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초기 실험. 센티넬이라는 이유로 어린애들을 잡아다 놓고 그동안 이론으로만 나왔던 연구들을 적용하는 첫 실험들을 뜻했다. 당연히 잘 될리가 없다. 민호가 아는 죽은 아이들만 해도 반백명이 넘는다. 트리거가 걸린 능력을 폭주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을 연구해야 했던 실험이었기 때문에 위험지수는 하늘을 찔렀다. 민호만 해도 제가 벌린 아공간에 먹혀들어갈 뻔 한걸 연구원들이 기겁하고 마취총을 쏜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민호는 솔직히 말해서 능력이 아공간 생성이라는 무해한 것이었기 때문에 살았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기로 쓸 것을 염두에 두고 데려온 아이들이기 때문에 같은 실험을 받은 센티넬 아이들의 능력은 훨씬 무서운 것들이었다. 불을 쓰던 아이는 자신의 불에 타서 죽었고, 물을 쓰던 아이는 익사했다. 독심술이 능력이었던 아이가 끝내 미쳐버려서 감금 당한걸 본 적도 있었다. 염산 능력자인 뉴트는 실험 중간에 자신의 다리를 녹여버렸다. 새살이 돋았지만 뉴트는 아직도 다리를 절었다. 뉴트가 산을 내보내는 것은 손바닥이었고 녹은 것은 다리였으니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는 소문마저 있었고 민호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토마스는 자기가 그런 실험을 모두 지켜보고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노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구원이다. 어떤식으로든 일조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민호는 제가 처음 실험을 받았을적에 거울을 봤던 일을 떠올렸다. 토마스의 나이는 민호와 동갑이다. 그런 작은 몸으로 연구원 가운을 입고 제 또래의 아이들이 당하는 것들을 보고 있었을까. 민호의 입이 비뚤어졌다.


"하지만 난 너에 대해 모르는데."


토마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불쾌해진 민호가 눈을 가늘게 뜬다. 토마스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대고는 되도않는 수습을 하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당연히 민호의 표정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토마스는 곧 웃음을 진정시키고 싱그럽다고 해도 좋을 미소를 입에 걸었다. 호박색 눈이 휘어진다. 민호의 시선이 다른 의미로 고정된다.


"그걸 알기 위한 2주인걸."


전부 알려줄게. 네가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게. 노래 하듯이 나오는 문장. 여전히 휘어진채 반쯤 떠진 헤이즐을 바라보던 민호가 비뚤어진 입을 일자로 만들었다. 2주. 민호는 누군가에게 의지를 해 본 역사가 없었다. 가이드는 그저 없으면 불편한 보조기구였다. 위키드에서 초기 실험 참가자에게 주입했던 이론이다. 이제는 상당부분이 바뀌어 있었지만 민호는 그 가치관을 바꾸지 않은채로 살았다. 그 편이 편하니까.


그러나 민호는, 자신이 토마스를 보조기구 정도로 취급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3개월. 코웃음을 쳤지만 저렇게까지 확실하게 전쟁이 끝날 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다. 민호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통에서 발을 빼지 않는 것은 한가지 이유였다. 전쟁은 끝나야 하는 것이니까. 모두가, 심지어는 뉴트조차 10년은 더 걸릴거라며 고개를 저었는데.


걸어 볼만 한가. 민호는 토마스가 했던 것 마냥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았다.


"2주 안에 정신교감이 되지 않으면 때려칠거야."


다시 기가 죽는 듯 입술을 내밀고 어깨를 늘어뜨리는 토마스를 보면서 민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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늍갤 타투이스트AU... 메온에 낼 원고였는데 도저히 못쓰겠어서 4페이지만에 중단ㅎ 일단 그냥 올려봄.



남자는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갤리는 벨이 두 번 길게 눌러지지 않아도 남자가 자신에게 오고있음을 알았다.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발소리와 문 앞에서 내쉬는 깊은 숨소리는 남자를 상징한다. 갤리는 자신이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남자에게서 숨길 수 있었다. 느긋하게 눌러지는 초인종 소리를 들어도 몇 초간 움직이지 않다가 아주 천천히 도어락의 문고리를 내리는 것으로, 그리고 지겹다는 듯이 구겨지는 눈썹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나는 걸음으로. 그리고 남자는 그런 갤리의 연기에 속아줄 수 있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과 입꼬리로, 아무렇지 않게 현관 안으로 디딛는 가벼운 신발로.

남자는 꼭 한 달만에 갤리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목적의 특성상 한 달이라는 시간은 그리 긴 텀은 아니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는 쇼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리모컨이 다인 거실을 지나친 남자는 곧바로 굳게 닫힌 안방의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익숙치 않은 염료 냄새를 뚫고 가정용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는 가죽의자에 앉는다. 가죽의자는 치과에서나 볼 듯한 생김새다. 뒤로 누울 수도 있고, 등받이를 올려 등을 기댈 수도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시술용 의자였다. 남자는 거부감도 없이 자신의 잠자리마냥 푹 기대어 눈을 감고있다.

"뉴트."

갤리는 조금 언짢은 듯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한쪽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갤리를 봤다가 허리를 일으켜 구부정하게 턱을 괴었다. 빙글빙글. 짖궂은 어린아이 마냥 웃는 입에서 가벼운 인사가 흘러나온다. 안녕, 갤리.

처음 본 남자의 몸은 백열등 같았다. 햇빛을 보지 못한 하얗고 창백한, 그리고 딱딱한, 열을 품은 몸. 갤리는 사실 백열등보다는 약간 생기를 돌게 한 대리석을 먼저 떠올렸다. 갤리는 남자의 몸을 조각하고 싶었고, 남자는 기꺼이 그것을 허락했다. 갤리의 집 초인종을 두 번 울리는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갤리의 직업이었고, 남자를 포함한 낯선이들이 힘을 들여 갤리를 찾아오는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남자의 몸에 처음 조각한 것은 오른쪽 갈비뼈의 녹각(한자)이었다. 색 없이 외곽선만 검은색으로 새긴, 실제의 녹각보다는 조금 복잡하고 섬세한 도안. 남자는 사실 도안을 생각하고 갤리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문신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갤리의 추천을 바랬을 뿐이다. 요구조건은, 단단한 것일 것. 갤리는 망설임 없이 녹각 도안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수긍했고, 갤리가 맥없이 누운 자신의 위에서 바늘로 조각을 마칠 때까지 갤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낯선 일은 아니었으므로 갤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의 살 아래에 잘못된 화학물질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갤리는 작업을 하는 중 입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상대가 계속해서 말을 걸면 마지못해 몇 마디 대답을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몇마디를 뱉게 된다. 바늘조각은 섬세한 작업이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그림을 망치는 것 보다는 무뚝뚝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 백배 나았다.

그러나 남자는, 보통의 재료들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숨소리조차 별로 나지 않아서 그 끈질긴 시선만 아니었다면 시체를 붙들고 있는줄 알았을 것이다. 남자가 갤리의 기억에 남은 것은 순전히 그 침묵과 시선 덕분이었다.

침묵이 유지되지 않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갤리는 밑그림부터 바늘로 직접 하는 편이었고, 요즘의 타투이스트들 처럼 기계를 쓰지도 않았다. 독한 술을 한 잔 정도 건네기는 하지만 마취제도 환각제도 주지 않는다. 그런것들에 기대어서 만들어진 상흔들은 조각이라고 불릴 가치조차 없었다. 조각될 상흔은 반드시 고통을 참아낸 결과물이어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침묵으로 참아내지 못했다.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허세를 부린다. 갤리의 바늘을 찾는 사람들 중 제대로 고통을 이겨낼줄 아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이유는, 어쨌든, 엄청 아팠으니까.

그러니까 남자는 그 고통을 이겨낼줄 아는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다. 흉부 바로 아래의 갈비뼈는 바늘을 대기에는 지나치게 아픈 곳이다. 살집이 있는 체형이어도 그런데 하물며 남자의 몸은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멋모르고 해달라고 했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부위다. 괜찮겠냐고 짧게 물은 질문에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갤리는 남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까만 눈동자에 그대로 담기는 바늘과 자신의 손.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새겨진 녹각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하얀 손가락. 갤리는 자신의 기분을 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자신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의례적인 인사나 빈말조차 입에 담지 않은채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값을 치룬 뒤 돌아갔다. 까맣고 평범한, 장식조차 없는 가죽지갑에서는 염료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갤리는 그 냄새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2주일 후 남자가 다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도.

"분명히 말하는데, 누구라도 당신의 몸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당신을 질 나쁜 갱이나 집착증을 가진 정신이상자라고 생각할거야."

갤리의 질책에 뉴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후드는 간단히 남자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대리석이었던 남자의 몸은 처음의 깨끗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오른쪽 갈비뼈와 왼쪽 어깨, 양 손목, 오른쪽 장골까지.

남자가 갤리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이번으로 다섯번째였다. 텀은 제각각이었지만 남자는 항상 한 달이 채워지기 전에 다시 가죽의자에 누웠다. 세번째로 남자를 봤을 때 갤리는 기묘한 예감이 배 아래서부터 엉켜오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아주 근거없고 서서히 안쪽을 눌러오는 감각. 단골 손님들은 몇 명 가지고 있었지만 갤리는 남자를 명부에 기록하지 않았다. 첫번째와는 달리 다음부터 남자는 원하는 도안을 가지고 왔고, 갤리는 묵묵히 바늘에 명주실을 감고 보기보다 복잡한 도안을 섬세하게 조각해냈다.

갤리가 뜻을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 문장으로 된 트라이벌(각주)이 감긴 손목이 가죽의자 위에 무기력하게 얹어진다. 갤리는 새로 받은 도안을 고개를 기울인채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국화꽃. 이런 분위기의 도안을 갖고 온 것은 처음이다.

"왜?"

남자는 입으로 뱉은 의문사와는 다르게 갤리의 시선을 예상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려놓은 얼굴이 갤리가 들고 있던 도안으로 향한다. 남자가 들고 오는 도안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모양의, 의미보다는 보여주기 식의 도형이다. 손목의 트라이벌도 성경의 구절이라고 했고 주말의 아침에도 찾아오는 걸로 봐서는 남자에게 큰 의미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형태가 확실한 선은 처음의 녹각이 전부다. 그런데 갑자기 국화꽃이라니.

남자는 갤리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죽은건 아니야. 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안에 들어찬 꽃송이가 들어갈 만한 곳을 상상했다. 문신을 여러 곳에 새기는 사람은 비단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마치 오래된 폐공장의 벽처럼 쓰고는 했다. 싸구려 그래피티로 가득 찬 회반죽. 갤리는 남자의 몸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경건함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약하고 희미해서, 한 번의 잘못으로 쉽사리 망가지고는 하는 것이다. 갤리는 불빛에 공연히 도안을 대보며 투명한 눈을 굴렸다. 남자는 작업실에 들어온 뒤에 갤리에게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

"왼쪽 허리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갤리가 마음대로 한 결정을 남자가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원하는 위치가 있으면 도안을 건넬 때 말한다. 남자가 지정하지 않는 사항은 온전히 갤리의 몫이었다.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남자가 눈을 감자 갤리가 찬장에서 염료를 꺼냈다.

가죽의자에 드러누운 남자는 체념이 무엇인지 아는 자세다. 갤리는 바늘귀를 들고 남자의 하얀 몸에 손가락을 얹었다. 피가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의 옅은 상처. 부어오르는 모양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조각의 밑그림이 된다. 바늘이 살에 닿는 느낌은 언제나 갤리를 긴장하게 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얇은 피부가 찢어질 것이다. 갤리가 끝을 대고 있는 것은 세상 어떤 것 보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가죽이었다.

갤리는 문득 바늘 하나만으로 남자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눈을 굳게 감은채로 부검을 기다리는 시체는 바늘이 좀 더 깊게 들어가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갤리가 바늘을 들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음에도 남자는 태평하게 꿈을 꾼다. 아니, 갤리는 남자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눈꺼풀 아래에 가려져 있어도 남자의 눈은 저를 향해있다. 갤리가 묵묵히 바늘을 움직였다.

시작하기 전에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일단 갤리가 바늘을 들면 좁은 방은 침묵에 잠겼다. 갤리는 호흡을 조절하며 자신이 이 남자에 대해 정확히 어떤 것을 아는지 가만히 생각했다. 나이는 갤리보다 어리거나 동갑이겠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나 회사에 다닌다고 하기에는 찾아오는 시간대가 지나치게 자유롭다. 그저 놀고 있는 취업준비생 정도일까. 그렇다면 갤리에게 망설임 없이 내놓는 현금들의 출처는 어디인지, 어째서 몸을 문신으로 뒤덮으려고 하는지, 모르는 것은 찬장에서 저를 보고있는 염료의 수만큼 많다.

"갤리."

갤리의 시선이 힐끔 남자에게 향한다. 남자는 미미하게 얼굴을 구긴채로 갤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집중. 입모양으로 말해지는 단어에 갤리가 다시 바늘로 눈을 돌렸다. 밑그림 자체는 완벽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과를 해야하는지 생각하던 갤리가 곧 말 없이 남자의 살을 바늘로 찔렀다. 잡생각은 옆으로 치워두려 했으나 그 직후에 생각의 결론이 났다. 갤리가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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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스탈]Thin air

연성/기타 / 2014. 12. 30. 20:10



의미를 모르겠는 스키틀즈 기반 노기스탈. 커플링은 아니고... 노기+스탈..? 스타일즈가 스캇을 오래도록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설정...

캐붕..? 모르겠음 뭐든지 괜찮다는 사람만.




시야에는 끔찍한 시멘트 바닥이 있었다. 스타일즈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반쯤 확신하고 쳐다본 다리가 또 다시 덫에 걸려있다. 단단히 물려있는 오른쪽 다리에서 익숙한 고통이, 아니, 왼쪽 다리일지도.

스타일즈는 다급하게 일어나 앉아 바닥을 짚고 있던 양손을 눈앞에 들어보였다. 하나, 둘, 다섯, 일곱, 열. ...열 하나. 절박하게 떨어지는 감정에 스타일즈가 양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시멘트 벽에 등을 기댔다. 벽과 닿은 부분 부터 얼어붙는다.


스타일즈는 그대로 눈을 감고 다리를 끌어모았다. 덫이 바닥에 끌리는 기괴한 소리가 공기를 긁어도 귀를 막지 않는다. 막아봤자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얼굴에 붕대를 감은 괴한이 다리를 끌며 입을 벌릴 것 같은 지하실.


스타일즈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성대가 나가서 목구멍에 피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 더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 빌어먹게 차가운 공기를 긁어대고 싶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저 머리를 파묻는다. 스타일즈의 손가락은 열 한개이고 만약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스타일즈는 그저 배게에 머리를 뉘이고 눈을 감고 있을 뿐이였다. 이건 꿈이다. 그것도 굉장히 역겨운.

내놓은 팔이 점점 얼어붙어 가고 있었지만 스타일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멘트 바닥을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끔찍한 숨소리도 모두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일어나, 스타일즈. 일어나. 일어나. 초조하게 벽에 머리를 부딪혀봤지만 그리운 제 방의 천장이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제발.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은 뭐지?"

스타일즈는 결국 귀를 막았다. 말하지 않을거야. 숨소리가 웃음소리로 바뀐다. 스타일즈는 손을 내려 팔을 감싸고 이미 벽에 붙어있는 등을 최대한 밀어붙였다. 일어나 스타일즈. 들으면 안돼. 대답 해서도 안돼. 덜덜 떨려오는 팔을 억지로 잡아쥔다.

"스타일즈, 답을 알고 있잖아. 저번에 대답 했었으면서."

스타일즈는 무릎으로 쳐박았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가스 마스크를 쓴 듯한, 역겹게 공기를 긁어내리는 목소리가 아니다. 시야에는 붕대로 감긴 얼굴이 아닌 거울이 있었다. 아니, 거울이 아니다. 표면에 비춰지는 단순한 평면이 아니었다. 같은 얼굴, 같은 옷, 같은 자세. 차이점이라고는 웃고 있다는 것 뿐이다. 스타일즈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누구든.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목을 누르는 악력에 스타일즈는 짓무른 눈을 치뜨고 앞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뺨을 건드리는 손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절그럭거리며 덫이 다리를 따라 올라온다. 욕을 씹어도 바뀌는 것은 없다.

노기츠네는 봉인 당했다.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네메톤의 힘으로 70년을 잠들어있었던 트릭스터는 다시 한 번 그 강력한 힘에 의해 강제로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사람들을 홀려서 혼란과 갈등을 만들거나 스타일즈의 머릿속에 들어차서 그의 친한 친구들과 하나뿐인 가족을 해치지도 않았다. 스타일즈는 그 사실을 상기하려 절박하게 애썼다. 이건 노기츠네가 아니야. 이건 노기츠네가 아니야. 이건 노기츠네가 아니야.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스타일즈는 처음은 아니었다, 라고 문장을 시작하기 어색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이 아이켄 하우스의 지하실에서 보냈다. 어떤 예고나 징조 같은 것은 없었다. 노기츠네가 사라지고도 스타일즈는 쉽게 불면증을 고치지 못했고, 며칠 정도는 아무 꿈도 꾸지않고 눈을 떴지만, 곧 다시 이 지하실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다리는 언제나 덫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창백한 피부로 흐르는 생생한 피.

"뭐, 생각하고 싶은데로 생각해. 그것까지 막을 수야 없지."

어깨를 으쓱인 남자는 불시에 손에서 힘을 풀어냈다. 바닥으로 무너진 스타일즈가 거의 토악질을 할 듯 숨을 게워내며 몸을 들썩거렸다. 스타일즈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덫에 걸려있다고 생각하기로 했고, 왼쪽 다리의 고통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으나 스타일즈는 시멘트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일어나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웃고있었다. 한 쪽 입꼬리를 틀어올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바닥에 엎어진 스타일즈를 내려다 보고 있다. TV가 에러를 일으키듯 테이프가 씹히는 소리를 내며 더러운 붕대를 감은 시체의 모습이 겹쳐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정도 장난질로도 이미 충분한 것이다. 스타일즈는 입술을 짓씹었고 노기츠네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스타일즈의 복부를 걷어찼다. 겨우 참고있던 토악질이 쏟아진다.

스타일즈의 기억으로는 오늘은 저녁을 먹지 않았다. 사실 아침도 점심도 모조리 먹지 않은 상태였다. 올라오는건 위액뿐이었고 식도가 산성액에 지져지는 느낌이 생생하다. 노기츠네는 게워낼게 없어 위를 쥐어짜는 스타일즈를 내려다보다가 곧 짧은 머리카락을 쥐어 억지로 스타일즈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치를 떠는 표정에 노기츠네가 천천히 시선을 맞추며 몸을 숙였다.

"걱정마. 그놈의 빌어먹을 나무통 때문에 바깥으로 나갈만한 힘은 전혀 없으니까. 네 꿈 속의 존재일 뿐이지. 일단은."

눈을 휘어 웃는 모습에 스타일즈가 고개를 힘껏 털어 노기츠네의 손을 떨쳐냈다. 그만한 힘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입을 동그랗게 만든 노기츠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미 피고름이 맺힌 입술을 다시 깨물며 스타일즈가 노기츠네에게 눈을 부라렸다.

"노려봐서 어쩔건데? 죽일거야?"

히죽 웃는 얼굴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지만 스타일즈는 팔을 움직여 자신과 똑같은 얼굴에 주먹을 꽂지는 않았다. 눈을 감거나 손을 들어 귀를 다시 막아버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의 일이다. 손해를 보는 것은 스타일즈였다.

스타일즈는 무시하는 쪽을 택했고 다리를 그러모았지만 당연히 노기츠네는 사라지지 않았다. 흉내내듯 똑같이 다리를 그러모으고는 턱을 괸 노기츠네가 노래를 불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불러 본 적 없는, 스타일즈가 중학교 때 직접 고쳐 아직까지 소리를 내는 낡은 라디오에서 나왔던 노래. 스타일즈는 그 노래의 가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 늘어지는 박자의, 꺼질 것 같은 남자 보컬의 목소리.

"그만."

노기츠네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붉게 충혈된 눈을 노기츠네는 아주 잘 알고있었다. 그의 눈은 자신의 눈이었다. 그럼, 잘 알고 말고. 만족스럽게 끄덕여지는 얼굴에 스타일즈가 어금니를 물었다.

"원하는게 뭐야."

노기츠네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Trust me, I just want as you are. Don't change the things you do, just stay as you are.

스타일즈는 결국 주먹을 휘둘렀다. 멱살을 틀어쥐고 온 힘을 짜내서, 화가 풀릴 때까지 실실 웃고있는 자신의 얼굴을 팼다. 코가 짓이겨지고, 입술이 터지고, 눈 주위의 살이 파랗고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만들었다. 노기츠네는 비명도 반항도 없이 스타일즈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덫이 절그럭대는 소리와 강도를 더해가는 타격음이 정신병원의 지하실에서 벽에 부딪혀 되돌아온다.

스타일즈는 평생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주먹을 내둘러 본 적이 없었다. 죄책감도 죄악감도 없었다. 어쩌면 아래에 깔려있는 것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울을 단단한 물체로 깨부수고 싶은 충동은 새삼 낯선 것이 아니었으니까.

주먹에는 유리조각 대신 살비늘과 피가 박혀들었고, 스타일즈는 거의 형태가 비뚤게 일그러질 때까지 노기츠네를 패고 나서야 던지듯이 커다란 몸을 밀쳤다. 바닥에 쓰러진 노기츠네가 큰소리로 웃더니 벌떡 몸을 일으킨다. 나간 턱뼈와 코를 이리저리 맞추는 소리가 대신해서 지하에 울려퍼졌다.

"그래. 그거면 된거야.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굉장하다니까, 내가. 아무렴."
"내 말투 쓰지마."
"이게 네 말투야? 아니지, 스타일즈. 이건 우리 말투야. 너도 알고있잖아."

부드럽게 말하며 피부가 벗겨진 스타일즈의 손을 감싼 노기츠네가 멀쩡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멍도, 피도, 부러진 코도 없다. 스타일즈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 벽에 바짝 붙어 다리를 접었다. 노기츠네에게 주먹을 꽂을 때는 아프지 않았던 다리에서 다시 피가 흐른다.

"난 단순히 거래를 제안하고 싶었던거야. 세레나데가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지만."

어깨를 으쓱인 노기츠네가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코웃음을 친 스타일즈는 피가 덕지덕지 붙은 손을 들어 귀를 막아버렸다. 정말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였다. 듣지 않을 것이다. 저 잘난 혀에 놀아났다간 어떤 결과를 불러 들이게 될지 뻔했다. 노기츠네가 한 일은 스타일즈가 한 일이었고, 그것들 모두는 스타일즈의 머릿속에 지나치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스캇, 쉽게도 쓰러지는 사람들, 죽어가는 알리슨.

"이봐, 겁쟁이 친구. 난 너잖아. 알고 있지?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손바닥 뒤집기 하는 것 처럼 다 알 수 있다고. 네가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스타일즈는 더욱 몸을 움츠리고 머리를 아예 팔에 파묻었다. 노기츠네의 말이 맞았다. 스타일즈는 노기츠네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의 이 미약한 반항이 아무 소용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러나, 스타일즈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잖아. 그렇지? 스캇의 배에 칼을 쑤셔넣고 돌린 것도,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네 손에 의해 손 쓸 틈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도, 그 엿같은 알리슨이 드디어 스캇 맥콜에게서 영원히 떠나버린 것도, 사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잖아. 이기적인 스탈린스키. 말해봐. 내 말이 틀려?"

스타일즈는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아니야. 어깨에는 죄책감이 쌓여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근육이 긴장했고, 병원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잔상이 언제나 스타일즈를 따라다녔다. 스타일즈는 다시 불면증을 앓고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꾸준히 상담실을 찾아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단 말이다.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타일즈가 입으로 뱉는 것들은 상담실에서 하는 말들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좀 아프긴 했겠지만 죽지는 않았잖아. 늑대인간이니까 금방 치유 됐을거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너 때문이었잖아. 내가 한게 아니라고. 네가 한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멋대로-"
"그럼 알리슨은?"

턱 막혀버린 목소리에 스타일즈가 다시 머리를 팔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알리슨은? 그 가여운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건 어떻게 변명할거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스타일즈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습관처럼 손톱이 입으로 들어간다. 까득까득, 불안하게 이빨로 짧게 깎인 손톱을 씹는 스타일즈의 팔 위로 얼음장 같은 손이 얹어졌다. 불쌍한 스타일즈 스탈린스키. 가엾기도 해라. 심하게 익숙해야 할 목소리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뱀 처럼 스타일즈의 팔뚝을 가로지른다.

"괜찮아. 굳이 도덕적인척 할 필요 없어. 넌 가끔 지나치게 무리를 해. 강한척에 모든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척, 무심한척, 신경 안쓰는 척, 다 괜찮은 척. 사실은 전혀 강하지도 않고 괜찮지 않은데도 말이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잖아. 네 속은 네가 사랑하는 스캇 맥콜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문드러졌어. 네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욱 깊지. 어둡고 낯설어. 네 열렬한 짝사랑 상대는 대답도 해주지 않잖아. 어쩜 이렇게 가련할 수가. 이대로 있다가는 어차피 미쳐버리고 말걸. 우리는 그걸 알고 있잖아."

스타일즈는 핏발이 선 눈으로 지척으로 다가와있는 노기츠네의 눈을 들여다봤다. 끝도 없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한 순수하고 악질적인 시선. 초점은 다리의 출혈 때문에 한참 전부터 어긋나고 있었지만, 노기츠네의 눈을 볼 때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노기츠네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스타일즈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노기츠네는 손가락을 튕겼다. 끔찍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던 다리에서 묵직한 쇠가 떨어져나간다.

"이제 가볍지?"

그렇게 말하고 눈을 휘어 웃은 트릭스터는 가만히 스타일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음장 같은 체온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해주는 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을 따라한걸지도. 스타일즈는 노기츠네의 손을 쳐내지 않은채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맹세코 알리슨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노기츠네도 알리슨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알리슨만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게 맞았지만, 오니에게 당해 숨이 끊어진 알리슨은 마지막까지 스캇의 품에 안겨있었고 노기츠네도 스타일즈도 그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둘 모두 스타일즈가 그 사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스타일즈는 부정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사람이면 안되었으니까.

"결국 모든 문제는 그 빌어쳐먹을 스캇 맥콜인거잖아. 안그래? 네가 자신이 싸이코패스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원인도, 정말로 싸이코패스이면 안되는 이유도, 바깥으로 이 혼란스러운 사실을 꺼내놓고 상담을 받아서는 안되는 이유도."
"난 싸이코패스가 아니야."
"그래, 넌 싸이코패스가 아니지. 넌 그냥 평범한 청소년이야. 조금 길고 복잡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노기츠네는 스타일즈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곧 죽을 작은 소동물을 보는 듯한 눈. 스타일즈는 문득 노기츠네의 손을 쳐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대한 몸을 구겨넣은채 그대로 시멘트를 들이부어 가둬놓은 것만 같았다. 숨이 불편하다.

노기츠네는 스타일즈의 뺨에서 손을 떼고 뒤를 돌아 조금 떨어진 드럼통 위에 올라앉았다. 스타일즈는 그 드럼통이 처음부터 이 아이켄 하우스의 지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편하게 허리를 굽힌 자세에서 다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공중에 늘어진 후드의 긴 끈이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그래서, 어쩔까? 그 얄미운 여우 계집애를 죽여줄까?"

스타일즈는 무언가가 목을 틀어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라. 노기츠네는 그정도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말들을 뱉고 있었다. 원하는 방식으로 죽여줄게. 알리슨은 칼로 죽었으니 그 여자애는 고슴도치로 만들어줄까? 질식사는 어때? 역겨운 늑대인간들이 한 것 처럼 꾸미는건? 아이작이라는 애를 몰아넣어보자.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죽이지 않을거야."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내뱉은 문장에 노기츠네는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빛을 띄웠다. 탕탕, 불만스럽게 드럼통이 발 뒤꿈치로 두들겨진다. 노기츠네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단호한 스타일즈의 눈빛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중요한 순간에 재미가 없어지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나.

"그럼 다리만 불구로 만드는건?"
"난 키라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않을거야!"
"해를 입힌게 너라는걸 스캇에게 들키면 미움 받을테니까?"

다시 입을 다무는 스타일즈를 바라보던 노기츠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스타일즈가 힘 없이 두어번 고개를 젓는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스타일즈는 노기츠네가 몰아붙였던 말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남이 상처입는 것을 싫어했다. 원인이 저라면 말할 것도 없다. 노기츠네는 자신의 혀가 지어낸 말들이 효력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 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문드러진 속과 다르게 머리쪽은 조금의 틈을 주면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는다.

노기츠네는 멈췄던 다리를 다시 번갈아서 흔들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아까와는 달리 시끄러운 소리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지하실에서 울려퍼진다.

"가만히 있는건 지겹지 않아?"

스타일즈가 고개를 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듯 구겨지는 미간을 다시 웃는 상으로 내려다보던 노기츠네가 턱을 괴었다. 드럼통을 두드리는 소리는 메트로놈 처럼 일정한 박자로 계속해서 스타일즈의 귀에 쌓인다.

"네 사랑스러운 스캇은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잖아. 계속 보기만 할거야? 그만 참을 때도 됐지. 이젠 너도 움직여야지, 스타일즈. 언제까지 만족한척 하고 있을거야. 네 위치를 봐. 조금 똑똑할 뿐인 늑대인간의 평범한 인간 친구. 언제든 우두머리에게 버려져서 뒹굴어도 이상할게 없지. 넌 그냥 필사적으로 옆에 붙어있으려고 매달릴 뿐이야. 넌 언제나 그애의 옆에 있었는데, 스캇은 너한테 어떻게했지? 네가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널 돌아보지 않는거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어? 오, 물론, 해본 적 있지. 아주 많이. 그 애가 좋아하는 애들은 죄다 특별하잖아."


스타일즈는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읊어지는 사실의 연속. 던져지는 말에서 부정할 부분을 찾으려 뇌가 의미없이 돌아간다.

"난 네 부름을 듣고 온거야. 스캇이 듣지 못하는 그 처량한 울부짖음 말이야. 난 그런 것들을 좋아해. 굉장한 맛이 나거든. 네 어둠은 최상품이야. 몇 년 동안 진득하게 썩어 농밀해졌지. 어딜 가도 이만한 걸 찾기는 힘들걸. 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네 정신이 다른 멍청한 인간들보다 약해서 내가 기어들어온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런건 별로 상관 없거든. 넌 스스로를 정신병원의 지하에 가두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덫을 물리고 있어.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있지.

스타일즈, 너는 특별해질 권리가 있잖아. 거래하자. 난 네 덫을 없애줄 수 있어. 이 지겨운 지하에서 나가는거야. 특별해지면 공중으로 흩어진 스캇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애는 널 돌아볼거야. 사랑해줄거라고. 그걸 원하지 않아? 단단히 잠궈놓은 그 더러운 희망사항 마저 모조리 풀어놓자. 도와줄게. 할 수 있다는걸 알잖아. 스타일즈, 우리는 할 수 있어. 따라잡을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먼지에 무게를 더하자. 흩어진 시선을 잡아뭉개서 끌어내리자. 스캇, 스캇 맥콜. 그 멍청한 늑대인간을 옆에 붙잡아놓자고. 뭘 망설여?"

탕.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진 듯한 커다란 파열음. 스타일즈는 귀에 흘러들어오는 목소리에 어금니를 물었다. 듣고있는게 아니었다. 중간에 멈춰세웠어야 하는건데.

노기츠네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들여우는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여 간단하게 몸을 뺏고 모든 것을 지배할 뿐이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죽어가는 알리슨을 떠올린다. 화살에 온 몸이 뚫려 쓰러지는 키라의 모습도 겹쳐본다. 알리슨 때 처럼 키라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스캇의 모습도 생각한다. 그를 위로해주는 자신도.

스타일즈는 도리질을 쳤다. 멍청한 스타일즈 스탈린스키. 스타일즈는 자신의 다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있는 덫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피가 말라붙은 검은 사냥덫은 입을 벌리고 망연하게 엎어져있었다. 덜덜 떨리는 하얀 손이 덫으로 향하는 것을 보던 노기츠네가 질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에 묻힌다. 노기츠네는 얼굴을 구기고 지하실에서 메아리치는 그 처절한 울음을 들었다. 이미 창백해질대로 창백해진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비명을 멈춘 스타일즈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짓무른 눈으로 노기츠네를 노려보았다. 단호하고 선명한 헤이즐.

"Let, me, out."

어금니 사이로 나온 또렷한 문장에 노기츠네가 과장되게 눈을 위로 굴렸다. 드럼통에서 내려온 마른 몸이 발소리를 내며 스타일즈에게로 다가온다. 스타일즈는 피하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바로 앞에서 무릎을 굽힌 노기츠네가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 스타일즈의 턱을 틀어쥐었다.

"언젠가는 날 찾게 될거야. 네 생각과는 달리, 들여우도 거래라는걸 하거든. 쥐고있는 패가 없을 때는 특히 더."

스니커즈가 덫에 걸린 다리를 짓이긴다. 상상도 못했던 고통에 스타일즈가 본능적으로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이켄 하우스의 지하실이 끔찍한 소리로 한가득 채워지는 것과는 달리 스타일즈의 의식은 점점 흐려진다. 급박하게 다리를 붙잡았지만 노기츠네는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다리를 짓누를 뿐이었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팍 튀었을 때, 스타일즈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스타일즈는 지끈대는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익숙한 노래를 들었다.

Trust me, I want you just as you are,
Don't change the things you do, just stay as you are...

침대 옆 협탁에 낡은 라디오가 지지직댄다. 스타일즈는 손을 뻗어 잡은 라디오를 그대로 벽에 던졌다.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노래가 멈춘다.

이불을 들어보면 멀쩡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한 일인데도 한숨을 돌린 스타일즈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손가락도 정상적으로 열 개였고, 책상에 올려져있는 책의 글귀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시계바늘은 오전 5시를 가리키며 멈추는 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찍 일어났다. 인터넷이라도 켜 볼 목적으로 핸드폰을 들면 살짝 열린 방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편한 옷을 입은 마을의 보안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스타일즈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큰소리가 나서."
"죄송해요. 잠결에 좀."

스탈린스키는 부숴진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라디오를 눈에 담았다. 스타일즈가 처음 자신의 손으로 고쳤던 라디오다. 새 것을 사주겠다는 말에도 애착이 간다며 고개를 저었던 물건인데.

스타일즈는 다시 자신에게로 시선을 힐끔 돌리는 스탈린스키에게 여전히 조금 어색하게 웃어보이고 있었다. 저번보다 훨씬 말랐다. 스타일즈는 그 사건의 이후로 조금씩 체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한 번에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고, 스탈린스키도 하나뿐인 아들의 식사량까지 모조리 신경쓸 정도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움푹 패인 눈가가 짓물러 있는 것을 본 스탈린스키는 문 너머로 보이지 않는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마른 입술을 핥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있던 스타일즈는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저어지는 고개에 스탈린스키의 눈이 안도의 빛을 띈다.

"그럼 괜찮은거지?"
"그럼요. 문제 없어요. 깨워서 죄송해요. 주무셔야하는데."

스탈린스키는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스타일즈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는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은 스탈린스키가 조금 더 자두라는 말을 남기고는 방문을 닫았다. 곧게 펴고 있던 스타일즈의 허리가 무너진다.

눈을 감으면 꺼진줄 알았던 라디오에서 다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게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다.

I reached out to hold you and found nobody there, You turn into air.

"Trust me, I want you just as you are."

Don't change.

스타일즈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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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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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토마스 프로게이머 민호로 현대AU 톰민. 


캐붕주의, 모브 옛애인 주의, 욕설주의, 짧음주의.






1.
옆집에 사람이 이사왔다.

꽤 오래 비워져있던 집이라 이제부터 누가 와서 산다고 생각하니 조금 신기해서 커튼을 걷어놓고 구경하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온통 컴퓨터들 밖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이는것만 세어본 결과 데스크탑 본체가 두개에 모니터가 네개다. 컴퓨터 장사 하는 사람인가.

외에는 죄다 기본적인 것 밖에 없는걸로 봐서는 적어도 인테리어를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단촐하기 짝이 없는 짐들이 하얀 집 안으로 들어가는걸 빤히 보고있는데도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삿짐센터에 다 맡겨놓고 나중에 올 모양이다. 다른 가구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고급인 의자가 보인다. 

그쯤에서 편집자의 독촉전화가 걸려왔으므로 다시 커튼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네. 네. 아니요, 제가 지금 밖이거든요. 죄송해요. 2시간 안에 보내겠습니다. 진짜라니까요. 집에 없다니까? 사랑합니다 편집자님. 네. 네.



2.
이사왔다. 기분 좆같다. 다 불태워버릴거다. 지옥에서 보자 개같은 밀터새끼야. 다음에 마주치면 얼굴가죽을 뜯어서 서커스 사자에게 팔어버릴 것이다. 진심이다.



3.
옆집에 이사온 사람은 남자다.

얼굴을 본적은 없으나 적어도 여자라면 대량의 뜯지도 않은 콘돔을 박스째로 집앞에 버려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에도 태워서 거의 테두리밖에 안남은 사진들과 액자등이 왜 이런 외곽의 후진 2층집에 덜렁 혼자 이사왔는지를 알려줬다. 딱히 보고싶어서 본건 아니었다. 누구나 집앞 쓰레기통에 못보던 브랜드의 콘돔이나 불태운 사진이 있으면 추론 정도는 한다.

에너지바를 씹으며 옆에 쓰레기 봉투를 고이 내려놓고 돌아가는데 옆집이 쥐죽은듯 조용했다. 자는건가 싶어서 손목시계를 보니 4시다. 나갔다고 생각하는게 현명한듯 싶었다.이사온지 이틀인데 아직도 얼굴을 모른다. 옆집사람은 자신의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모퉁이를 도는 익숙한 검은 차에 방향을 바꿔 튀었다. 끈질긴 편집자 새끼. 오늘은 알비네 집에서 자야겠다.




4.
이사 온 집은 쾌적했다. 밀터새끼 면상을 더이상 안보게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짐정리는 친절하고 비싼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대충 해줬으므로 하는거라고는 쇼파에서 뒹굴대는 것 밖에 없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거의 15시간을 잤다. 침대가 아직 안와서 당분간은 여기가 잠자리였다. 목 아프다. 그 침대 졸라 비싼거였는데. 뺏어올걸.

클락션 소리에 밖을 쳐다봤다. 낯선 검은 차였는데 이웃집에 멈춰서있다. 이웃 사람인가? 눈을 가늘게하고 쳐다보니 다시 클락션이 울린다. 이웃집에서는 반응이 없다. 결국 차에서 내린-약간 곰을 닮은 험악한-남자가 이웃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세 번. 이제는 문을 부술기세로 두들긴다. 아무래도 이웃집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웃집 사람 이름은 토마스인 모양이었다. 목이 터져라 부르고 개새끼라는 욕까지 들어먹어도 안나오는거보면 아무래도 집에 없는 모양이다. 남자도 아는 모양인지 풀파워로 문을 걷어차고는 절망스러운 한숨과 욕을 끝으로 독촉을 그만두었다.

옆집 사람은 사채를 쓴 모양이다. 그 지옥같은 원룸에서 겨우 탈출하니까 매일 빚독촉을 당하는 인간 옆집에 살게 되다니 내 인생도 기구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아야지.




5.
옆집에 이사온 사람은 확실히 남자다.

동양인에, 키가 크고, 스타일 좋고, 매우 중요하게도, 내 취향이다.

솔직히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또 그 망할 편집자인줄 알고 쥐죽은듯 있었는데 한참만에야 이웃사람인데 안에 아무도 없냐고 소리치는 목소리를 듣고는 이불 속에서 튀어나갔다. 이웃 사람! 일주일동안 집안에서 나가는걸 본적이 없는 그 신비주의의 막 애인과 헤어진 비련의 주인공. 소설가에게 그만큼 완벽한 이웃이 어디있을까. 만나고 싶어서 손에 펜도 잡히지 않았다. 사실 한 달 동안 안잡히고 있기는 하지만 뭐, 내가 글쓰는 기계도 아니고 어쩌겠는가. 정장을 갖춰입을 시간이 없었다는게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여차하면 창문을 이용해 밖으로 튀어야하는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어느정도 깔끔한 차림인게 다행이었다. 가버리기전에 벌컥 문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자 회색 베스트에 검은 바지를 입은 훤칠한 이상형이 뭔가를 들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아무말도 안하고 있으니까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이웃사람이라고 소개한 이웃사람이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고향나라의 전통을 소개하며 들고있던걸 내밀었다. 이사온 날에 줬어야하는건데 정신이 없었다나. 동양 어딘가의 고향나라 전통 만세.

티라미수 같이 생긴걸 고이 받아들고 살펴보니 먹는거랜다. 잘지내보자는 뜻이라니까 거절할 이유도 없다. 다른 할말이 많았으나 어쨌든 고맙다는 말부터 꺼냈다. 이웃사람은 웃으면서 자신을 민호라고 소개했다. 좀 시니컬하고 무뚝뚝한 느낌이었는데 웃으니까 아주 딴사람이다. 더더욱 마음에 든다. 이름의 발음은 좀 어렵지만.

예상대로 옆집에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딱히 물어본건 아니다. 사실 아까 고맙다고 한마디 한게 내가 입을 뻥긋거린 전부였다. 남자는 이 어색한 만남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건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느라 쓸데없어보이는 사족도 여러가지 붙이는 중이었다.

옆옆집에도 갔었는데 사람이 없었댄다. 거기는 비워진지 두 달 쯤 됐고 나의 책임감 투철한 곰같은 편집자가 이사올 고민을 밤낮으로 하고 있는 곳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남자는 내 목소리는 별로 듣고싶지 않은 모양인지 자기 할말만 하고 잘부탁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난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는 악수를 진행했다. 내가 보기엔 자기 의지로 이 티라미수 같이 생긴걸 이웃집에 돌리고 있는건 아닌것 같았다. 

그대로 돌아가려는 손목을 붙잡고 일단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도 아까 했으면서 아주 떨떠름한 얼굴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대화까지는 무리인것 같길래 대충 말대로 잘지내보자고 웃으니까 더 떨떠름한 얼굴을 한다. 너무 티났나. 어색하게 손을 떼니까 그제서야 좀 심했나 싶었는지 아직도 떨떠름한 감이 있는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갔다. 뒤태까지 취향이다. 세상에. 저 정말 착하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오랜만에 펜을 잡을 일이 생겼다.



6.
이사 온 집은 최악이다.

그놈의 이사떡! 엄마는 대체 뭐가 그렇게 내 대인관계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이사떡 같은거 안돌려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결국 시루떡을 보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기야 했다지만 그렇다고 독립한지 6년이나 된 아들에게 이웃사람과 잘지내라고 구하기도 힘든 떡을 한박스나 보내는 것은 엄연한 과보호다. 혼자 먹어보려고 했는데 3일을 삼시세끼 떡만 먹으니 뇌까지 떡으로 변해버릴 것 같다. 한계다. 쪽팔림이고 뭐고 이걸 처리해야만 한다.

결국 일주일만에 현관문을 나섰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일광욕을 했었으므로 그렇게까지 적응이 안되지는 않았다. 예상보다 바람이 차가워서 움츠러들기야 했지만 못버틸 정도는 아니다. 빨리 처리해버리고 다음 시즌 대회나 준비해야지.

차례로 돌아오려고 일단 다섯 건너 집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외곽의 시골이라 그렇게까지 개인주의에 찌들어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순조롭게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데 세번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비어진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대로 다음집으로 넘어가려는데 대망의 옆집이었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곰같은 사채업자는 아직 안 온 모양이다.

일주일 내내 그 사채업자의 공격을 요령좋게 피하던 그 토마스라는 작자의 집 앞에는 신문이 쌓여있었다. 부재중이라고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우유는 꾸준히 가져가고 있으니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초인종을 누르니 역시나 반응이 없다. 두 번 눌러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내야할 것인가 조금 고민됐다. 대게 이 토마스란 사람은 집에서 은신술을 쓰면서 기거하는 하루살이였다. 언젠가는 폭력배들이 문 뚫는 기구를 사들여 쳐들어가게 될까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사온지 이튿날에 다짐했던 대로 되도록이면 만나고싶지 않았으나 옆옆집의 쓰레기통이 사용불가 커멘드가 떴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자 집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집에 있었군. 느긋하게 기다리면 문이 벌컥 열리고 말쑥한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감상은, 웩이었다. 이런 세상에. 밀터새끼랑 똑같은 헤이즐넛이잖아! 좆같은 눈깔. 심지어 미남이다. 미남이라면 질색이다. 사채까지 끌어다쓰는 주제에 유전자의 축복을 받고있다니. 예의상 올라가는 입꼬리가 경련으로 떨렸다. 봤으면서 말은 안하고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게 기분 나쁘다. 뭘봐? 동양인 처음봐?

눈깔이 헤이즐넛인것과 미남인 것은 말마따나 유전자의 랜덤 축복이지 빚쟁이의 업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난 어쨌든 최대한 친절하게 이사떡에 대한 전통을 설명했다. 저 머릿속에 마네키네코와 치파오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데에 내 손목을 건다. 시루떡을 건네 받아서는 무슨 양초를 보듯이 보길래 먹는거라고까지 해줬다. 오늘 처음 만났으므로 잘못먹으면 기도가 막혀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을거라는 충고까지는 해주지 않았다.

고맙다고 입을 여는걸 보면 예의를 밥말아먹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아서 웃음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래도 그 곰같은 사채업자에게 이 빚쟁이와 내가 안면을 튼 사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형식적인 자기소개와 이야기거리를 랩하듯이 꺼냈다. 지나치게 빤히 얼굴을 바라보는게 굉장히 부담스럽다. 알아듣기는 한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잘부탁한다고 손을 내밀었다. 어깨를 으쓱이더니 마주잡길래 몇 번 흔들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정확히는, 벗어나려고 했다.

손목이 잡히는데 덜컥 병신같은 예감이 들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뒤를 도니까 예의 그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일종의 촉이 꿈틀댄다. 자기 이름이 토마스란다. 네, 알아요. 창문 밖으로 너무 자주 들어서. 매우 떨떠름하다. 왜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쓸데없이 자기소개를 하는가. 뭣하러 내가 멈췄는데 계속 손목을 잡고있는가. 아니야, 민호. 아니야. 만약에 아니면 얼마나 얼굴 팔리는 추측이냐고. 그러나 자꾸 헤이즐넛이 마음에 걸린다. 기시감이다. 본적 있다. 저건 그러니까, 시발, 제발 아니기를 빌지만,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인 것 같은데.

다행히 엄청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있으니 대화를 오래끌지는 않았다. 뒤돌아서 가는데 계속 쳐다본다. 말도안돼 말도안돼 말도안돼. 5년간은 솔로로 살 생각으로 이사한 집인데. 뜬금없이 빚쟁이에게 인생을 저당잡힐 수는 없다. 밀터 개새끼. 저주를 내린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럴리가 없다. 저주인형 사야지. 재 하나 안남을 때까지 불태워줄 것이다.

생각해보니 좀 타입으로 생기긴 했던데. 운동이나 할까.





※곰같은 편집자 갤리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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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콩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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