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Maze Runner
늍톰 꿈 01
콩식빵
2015. 9. 6. 23:32
*****데스큐어 스포주의******
톰른 전력 60분
주제: 꽃
입원한 뉴트의 책상에는 꽃이 있었다.
누군가는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다. 죽은 것도 아닌데 책상에 꽃이라니.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뉴트와 친했던 아이가 꽤 큰소리로 투덜거려도 다음날도, 다음날에도 꽃이 있었다. 쌓이는게 아니라 하루 걸러 하루 씩 꽃이 바뀌고 있다. 누군지 몰라도 참 정성이지. 꽃은 항상 아침에 바뀌었고 소문은 무성했다. 매일 가장 먼저 오는 아이는 제가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지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꽃은 바뀌었지만 종류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얀 꽃. 백합, 국화, 뭐 그런 것들. 한 송이일 때도 있고 다발일 때도 있다. 기분이 나빠서든 신경을 안써서든 꽃이 치워지는 일은 없었다. 뉴트가 입원한지 두 달이 지난 요즘에는 옆학교 학생의 짓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아침에 담을 넘어서는 책상에 꽃을 올려놓고 다시 나간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멀리서 봤다는 못믿을 증언들이 몇 개 있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는 곳은 공학이었기 때문에 여학생의 짓인지에 대한 수근거림도 돌았다.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뉴트는 실제로 인기가 있었고, 놓여있는게 꽃이었으니까. 물론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꽃은 계속 놓여졌다. 그곳이 무덤인 것 마냥.
뉴트는 민호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한데? 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뉴트가 집중해서 깎아놓은 사과를 집어먹었다.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아다니기가 여의치 않아 시작한 취미였다. 이젠 제법 껍질을 끊지 않고 깎을 수 있게 됐다.
조심해, 널 죽이겠다는 협박일 수도 있다고. 짐짓 진지한듯 농담을 던지는 민호에게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을 돌린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반박할 말은 없다. 민호는 그쯤이면 됐다는듯 가방을 들어올렸다. 오기도 귀찮은데 언제쯤 퇴원해? 입원한 뒤로 처음 들리는거면서 생색만은 굉장하다. 뉴트는 간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한 달쯤 남았나. 민호가 혀를 찬다.
"평생 절거래?"
뉴트는 말이 없었다. 민호는 뒤통수를 좋을대로 헤집었다. 3층에서 떨어졌으니 다리만 부러진 걸로도 엄청난 행운이다.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뉴트는 발을 헛디뎠다고 했다. 창문이 열려있었고, 철창이 낡아서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고. 안믿을 이유가 없으니 다들 위로를 했다. 뉴트는 어깨만 으쓱였다. 어차피 몸 쓰는 일 하는 것도 아닌데요.
걱정하는 사람은 부모님과 민호가 전부다. 가방을 든채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민호를 쳐다보던 뉴트가 새로운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 날에 깎여나가는 붉은 껍질이 접시로 툭툭 떨어진다.
"설마 그놈의 빌어먹을 꿈 때문인건 아니지?"
결국 민호가 입밖으로 문장을 냈다. 뉴트의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꿈. 눈을 내려깔았던 뉴트가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벽과 미로. 끔찍한 기계음. 부유감. 항상 다리를 절던 자신. 껍질을 뚫고 나온 칼날이 엄지에 닿는다. 뉴트는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눈을 떴다. 간호사 누나한테 혼나겠군. 칼과 사과를 내려놓는다.
"그냥 헛디딘거라니까."
부정을 차단하는 목소리다. 민호는 찝찝한 얼굴이었다. 꿈에 대한 이야기는 입학 초기 이후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나마도 흘리듯이 말했을 뿐이다. 악몽을 꾸는데 항상 다리를 절어. 병신같이 절뚝거리며 뛰어다니는데, 너도 그곳에 나와. 웃기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선명한 꿈인데 말이야.
그당시의 민호는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소름끼치니까 농담이라고 해. 뉴트는 웃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고 흐지부지 넘어간 일이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충격이 크긴 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뉴트가 3층에서 떨어진게 충격이었거나, 아니면 꿈에서처럼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이 충격이었거나.
시계는 6시를 향해 가고 있다. 밥 먹으러 안가도 돼? 축객령에 민호가 여전히 찝찝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꽃 놓고 다니는 새끼 잡아놓을테니까 빨리 와. 뉴트는 손을 휘휘 저었다. 아까와는 달리 미련 없는 태도로 민호가 병실을 나갔다.
*
"안녕."
어깨가 1m는 족히 튄다. 뉴트는 사각에 있는 그늘에 앉은채로 웃고 있었다. 목각인형 처럼 뒤를 돌아보는 얼굴에 선명하게 점이 찍혀있다.
오전 5시30분. 아무도 못 볼만 하군. 혹시 몰라서 거의 한시간쯤을 일찍 온 뉴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담에 매달려있는 아이를 훑었다. 옆 학교의 마크가 새겨진 와이셔츠가 잠겨지지 않은채로 검은 반팔 위에 입혀져있었다. 각도 때문에 명찰이 안보였다. 소문이 반쯤은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손에는 하얀 라일락. 뉴트는 문득 오늘 제 책상에 놓여있을 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목발을 짚고 일어선다.
"맞춰볼게. 영재반 소속이지?"
말이 없다. 옆 학교의 영재반은 6시 등교가 일반적이었다. 팔에 힘이 빠진건지 도망쳐도 아무것도 안될거라고 알았는지 아이가 담에서 뛰어내렸다. 명찰에 선명하게 이름이 써있다. 토마스.
식은땀과 담의 먼지가 범벅 된 손을 바지에 문지른 토마스가 입을 우물거리다 뒤통수를 긁었다. 말을 걸은데다 라일락를 뚫어져라 쳐다보는걸 보면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고는 말을 고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뉴트는 삐딱한 자세였다. 목발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토마스는 깁스가 되어있는 다리를 본 후로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리, 절게 되는거야?"
뉴트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럴 것 같대. 목이 매이는 기분이라 헛기침을 해야했다. 꽃과 얼굴, 명찰의 이름까지. 그냥 단순한 추측이었다. 민호는 꿈을 꾸지 않는 모양이었고, 그럴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하필이면 네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토마스가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쉬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꽃은, 소문대로의 의미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네가 죽었으면 한다던가 그런게 아니라, 누군가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길래 무시할 수가 없어서... 물론 다른 소문 처럼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갖다놓은 것도 아닌데- 나는-"
이거 진짜 바보 같이 들리겠다. 갈수록 발음을 뭉게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말을 끊은 토마스가 짜증을 내며 머리를 거칠게 긁어댔다. 빛깔 좋은 변명 정도 만들어두면 좋았을텐데. 없다는건 아니었지만 본인 앞에서 변명을 꺼내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입원한 병원이 꽤나 멀었고, 들리는 얘기로는 퇴원은 2주나 남았다고 했는데. 목발을 봐서는 트리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게 아니야?"
토마스가 아래로 끌려갔던 얼굴을 든다. 뉴트는 한쪽 목발에 완전히 기댄채로 웃고 있었다. 토마스는 눈을 깜박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말이 제대로 안나와서 또 입술만 우물댄다. 떠보는 질문들은 싫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맞는건지 영 알 수가 없다. 답이 없는 토마스를 두고 어깨를 으쓱인 뉴트가 목발을 짚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춤 뒤로 물러났던 토마스가 착실하게 다가오는 뉴트를 곤혹스럽게 바라봤다. 마주칠 생각은 없었다. 평생 레벨로. 얼굴을 가까이 할 생각은 더더욱. 뉴트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손이 내밀어진다. 토마스는 의문스러운듯 미간을 구긴채로 뉴트와 손을 번갈아보다가 곧 제 손을 위에 올려놓았다. 웃음을 터뜨린 뉴트가 다른 손을 움직여 토마스의 손에 있는 라일락을 가져왔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 앞으로 라일락을 든 뉴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봄철도 아니니 구하기 힘들었을텐데. 가져온 보람없이 뉴트가 다시 토마스에게 라일락을 건넸다. 받아. 주는거니까.
"내가 산 건데...?"
얼빠진 목소리에 다시 뉴트의 웃음이 터졌다. 목발을 짚지 않았다면 어깨라도 두드려줬을 것이다. 안받기도 껄끄러운지 토마스가 라일락을 받았다. 불편한 얼굴로 라일락을 보는 토마스를 빤히 쳐다보던 뉴트가 손을 뻗어 라일락의 꽃잎을 하나 땄다.
"토미."
토마스가 훽 고개를 든다. 귀엽게까지 보일 정도라 입꼬리를 올린 뉴트가 꽃잎을 빙빙 돌렸다. 멍청하게 벌려져있던 입이 의식적으로 닫힌다. 토마스가 다시 라일락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뉴트가 웃는채로 입을 연다.
"휴대폰 번호라도 교환하는게 어때?"
학교 근처에서 마주치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하거든.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토마스가 몇 초 뒤에야 허둥지둥 폰을 꺼내들었다. 내주는 손에 라일락 향기가 베어 들어 있었다.
흰 라벤더의 꽃말: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