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갤 축전 Propose
이랑님, 폴님 톰갤 트윈지에 들어갔던 축전. 내가 썼던 썰이 원작이라 책 내주시는거 정말 감사해서ㅠㅁㅠ 썰에 없었던 토마스랑 갤리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축전으로 줬었다... 4페이지 분량이라 짧지만 티슷에도 올려봄.
"좋아해."
갤리는 가방을 들쳐매다 말고 뒤를 돌았다. 강의실에는 아직 노을이 지지 않고 있었다. 넓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크기. 책상은 줄지어 늘어져있고 의자는 산만하게 흩어져있었다.
갤리는 칠판 위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갤리가 졸다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앞에, 아니 뒤에 있는 사람은 거진 30분을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갤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볼 필요성이 있었다. 하얀 얼굴에 짧은 앞머리, 별처럼 뿌려진 점. 형광등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매우 창백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이 하얀 것 보다는 좀 더, 뭐랄까, 입술도 파랗고. 갤리는 그제서야 남자가 방금 자신에게 뱉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아. 갤리가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를 뱉자 남자의 어깨가 튀었다. 앞으로 어깨가 굽어서 몸집이 더 작아보였다.
너무 자주 듣는 소리다 보니까 단어의 무게를 잊어버린 참이다. 갤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침음성이 차가운 벽과 인조 대리석에 부딪힌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제 입을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갤리는 남자를 훑어봤다. 같은 과, 는 아니다. 30분 전에 진행 된 강의는 교양이었고 전공 수업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살펴보고 있었지만 도저히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갤리는 문득 그런 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저한테 하신 말이에요?”
남자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창백했던 얼굴이 점점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갤리는 잠자코 남자를 쳐다봤다. 모르고 물어본 질문일 리가 없었다. 강의실에 남은 건 갤리와 남자가 전부이고 남자가 유령을 볼 수 있을 확률도 희미했다. 단지 갤리는 말문을 틀만한 문장이 필요했다. 남자는 입을 어물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더니 소심하게 목을 움직였다. 갤리는 잠시 눈을 위로 굴렸다. 예상 못한 반응은 아니지만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갤리는 가방을 다시 들어올렸다.
“계속 앉아있었던 겁니까?”
남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안 깨우고? 이 질문에는 반응이 없었다. 갤리는 뱉은 직후에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저도 모르게 좋아한다는 말을 뱉을 정도면 무슨 생각을 했었을지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깨웠을 리가. 갤리는 헛기침을 했다. 제 목에도 슬슬 열이 올라오고 있는 듯 했다. 강의실 공기 전체가 난감한 빛을 띄고 있다. 뻣뻣한 페인트 냄새.
남자는 선고를 기다리는 듯 한 분위기로 축 늘어져있다. 갤리는 제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키 탓으로 동그란 정수리가 정면으로 보였다. 입을 비뚤게 한 갤리는 신발바닥으로 강의실 바닥을 몇 번 비볐다. 문득 여기서 계속 있다가는 시계 초침이 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갤리는 발을 움직였다. 다른데서 얘기하죠. 남자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얼굴을 더 창백하게 했다. 갤리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난감해져서 강의실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싫어요? 남자는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갤리는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 강의실을 나왔다. 남자가 급하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갤리는 자연스레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곧 기다리고 있을 얼굴들이 생각나서 방향을 돌렸다. 학교 안 까페도 괜찮아요? 몇 걸음 뒤에서 쫓아오던 남자는 뒤를 돌아보는 갤리 때문에 거의 넘어질 뻔 했다. 곧이라도 쓰러질 듯한 분위기에 갤리가 알맞은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웃음을 흘렸다.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갤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듣기나 했는지 모를 일이다. 갤리는 대학 부지 내에 있는 까페로 향했고, 남자도 허둥지둥 갤리를 따라왔다. 약간 처음 기르는 개를 산책 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
“이름이?”
남자가 정말 기절할 것 같은 모양새라 갤리가 대신해서 커피를 받아왔다. 남자는 가늘고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마스. 흔한 이름이다. 갤리는 얼음이 떠있는 커피를 빨대로 저었다. 이 질문을 꺼내야할지 말아야할지. 습관대로 뒤통수를 긁은 갤리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우리?
“ㄸ,따로 만난 적은, 없고, 그러니까, 교양 몇 개가 겹치는데, 아까거랑, 역학 수업, 이, 그. 동기니까, 말은. 죄송합니다.”
남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역학 수업이라니, 강의명에 역학이 들어가는 강의가 몇 개인데 그런 설명을. 그러나 역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으므로 갤리는 질문을 참았다. 적어도 제 기억력이 잘못 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충분한 양의 커피가 빨대를 통해 갤리의 입으로 들어갔다. 멍한 머리가 약간 깨워지는 느낌에 갤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했던거지? 그냥 확인차.”
남자는 대답 없이 머리를 그대로 박고 있었다. 충분한 답이 되었으므로 갤리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까. 갤리는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말싸움을 하고 있을 두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에 있는 동그란 정수리를 쳐다봤다. 어떻게 반했는데? 마치 남의 연애담을 묻는 듯한 말투에 남자가 여전히 엎드린 채로 어물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릴 정도로 절박한 눈이 열기에 차있었다.
마치 이것만큼은 눈을 맞추고 말해야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시선.
“ㅊ,책을, 주워줬는데, 세 달 쯤 전에.”
세 달? 갤리는 약간 황당해져서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반문을 뱉었다. 세 달 전에 반했단 말이야? 갤리는 남자를 오늘 처음 봤다. 그 전 까지는 이름도 몰랐는데. 그보다 겨우 책을 주워줘서 반했다니. 갤리의 표정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초조하게 손을 말아쥐었다.
“복도였는데, 책이 완전 쏟아지는 바람에... 그냥 내가 주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이 나와서. 올려다 봤는데, 햇볕이, 그게-”
남자는 입을 몇 번 금붕어처럼 뻐끔대다 다시 엎드려버렸다. 뭔가 열심히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갤리는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세 달 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확실히 누군가의 책을 주워준 것 같은 기억. 후드를 뒤집어 쓰고, 안경을 쓴 채인. 햇볕에 반사되는 옅은 갈색 눈과 선명한 점. 갤리는 혀를 움직여 감탄사를 내었다. 그 때의.
“귀여웠던.”
남자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갤리는 뱉은 말을 수정하거나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귀 끝까지 붉어지는 창백한 얼굴과 색이 돌아오는 입술. 고른 치아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갤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통유리로 된 까페의 창문에서 세 달 전보다 훨씬 약한 햇빛이 들어왔다. 갤리는 빨대를 입에 넣고 언젠가 성격이 나빠보인다고 지적 받았던 웃음을 지었다. 좋아한다고 했지.
“사귈까, 그럼?”
남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악스럽게 벌려진 입에 갤리가 배를 잡고 웃어대는 소리가 의자가 넘어지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