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Maze Runner

민갤 전력 여름

콩식빵 2015. 5. 24. 00:48



매미가 울었다.


갤리는 유리창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시원한 나무바닥. 창틀이 갈라놓은 사각형이 갤리의 몸 굴곡에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다. 민호는 신발을 벗고 스포츠백을 든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온 몸이 땀범벅이다. 일사병으로 죽는건 아닐까 싶을 때에서야 세면대에서 찬 물이 쏟아졌다. 매미 소리에 물소리가 섞였다가 뚝 잦아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분다.


민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화장실을 나와 바닥에 버려져있는 스포츠백을 방에다 던졌다. 안에 들은 물병이 바닥과 부딪혀 덜그럭대는 소리를 냈다. 민호가 문턱 너머로 갤리쪽을 쳐다봤지만 미동도 없다. 침대도 쇼파도 전부 놔두고 이 더운 날에 햇빛에 누워 자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배게도 없이 팔을 베고. 옷까지 전부 갈아입은 민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갤리 앞에 섰다.


살짝 손 대본 갤리의 팔은 지나치게 찼다.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 중이다. 들어올 때는 시원했지만 아무래도 온도가 너무 낮은 것 같아서 민호가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껐다. 에어컨 틀어놓고 자지 말라고 이틀 전에 잔소리 한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얼굴로 자고있다. 혀를 찬 민호가 쇼파에 개어져있는 담요를 끌고와 갤리의 몸 위에 펼쳤다. 무늬 없는 남색 담요 위로 햇빛이 올라온다.


3:4. 아슬아슬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민호가 자리를 옮겨 쇼파에 주저앉았다. 반바지 아래 맨살에 차갑게 식은 가죽이 닿아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돌던 현기증이 아래로 가라앉아 발끝으로 나간다. 민호는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배고픈데. 무료하게 TV 리모컨을 든 민호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팟.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 다음으로 탄산수 광고가 흘렀다. 하얀색 파란색 하늘색. 멍하니 TV를 쳐다보던 민호가 볼륨을 줄이고 일어섰다.


냉장고에는 먹을만한게 없었다. 재료들은 있었지만 음식이 없다. 민호는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갤리를 넘겨다봤다가 그냥 냉장고를 닫았다. 지금 요리를 하기엔 너무 시끄러울테다. TV 광고마냥 연기가 흘러나오는 냉동고에는 한칸이 꽉 아이스크림으로 들어차 있었다. 저번에 마트에서 민호가 오기로 카트 안에 쏟아부은 것들이었다. 그깟 아이스크림 좀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갤리는 항상 민호의 건강문제에 연연했다. 고맙지 않다는건 아니지만 엄마 같아서 짜증난다.


키위 아이스크림 하나를 뺀 민호가 포장지를 벗겨 대충 싱크대에 올려놨다. 나중에 갤리가 치워주겠지.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돌아오자 광고가 바뀌어 있었다. 손목시계. 그러고보면 얼마전부터 시계를 안차던데.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고장 난 것일터다. 갤리가 하는 시계야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 뿐이니 아마 본인이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살까. 쓸데없는거 샀다고 또 짜증이나 내겠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준 걸 차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TV 볼륨이 컸는지 갤리가 뒤척였다. 민호는 반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빼들고 갤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부스스한 머리통을 들고 일어난다. 잠에서 덜 깬 멍한 눈이 정면에 있는 벽을 노려보다가 휙 민호에게로 돌려졌다. 가늘어진 녹색 눈이 기울어진다.


"언제 왔냐."


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4시간 전에. 갤리는 지랄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고개를 뒤로 젖혀 TV 위에 있는 벽시계를 올려다 보고는 입을 비뚤게 한다. 대략 한시간은 잔 것 같았다.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담요를 들춰본 갤리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담요를 질질 끌고 걸어와 민호에게로 던지고는 옆에 앉는다.


"경기는?"

"이겼어."


감흥없는 말에 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에 묻지 않게 빼들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방울진다. 떨어지잖아. 짜증스러운 말에 민호가 투덜대며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물었다. 닦으면 되는 걸 가지고. 갤리에게서의 대답은 없었다. 채널을 바꾸자 브라운관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봤던 경기지만 돌리라는 말이 없어서 민호가 리모컨을 내려놨다. 갤리는 아직도 졸린 눈이다.


매미소리와 관중의 함성이 넘쳐나는데도 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채 나왔다. 어지간히 졸렸던 모양이라 민호가 어이가 없다는듯 웃었다. 웃지마라. 어제도 야근했다고. 쏘아대는 말에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보인 민호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이로 부러뜨렸다.


"또 씹어먹는다."


거의 경멸하는 수준의 시선이 와서 박히는 것에 민호가 입안에 들은 나무조각을 뱉었다. 삼키는 것도 아니고 좀 봐주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걸 왜 씹냐? 신경질적인 말 뒤에 무게 때문에 쇼파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졸려서 또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군. 옆을 돌아본 민호가 제대로 심술맞은 얼굴 앞에 부러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밀었다.


"궁금하면 씹어보던지."


미쳤냐는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갤리가 민호를 무시했다. 킥킥대며 웃은 민호가 쇼파에 가부좌를 틀고 갤리쪽으로 몸을 아예 틀었다. 끈질기게 내밀어지는 막대에 짜증이 폭발한 갤리가 화를 내려고 고개를 돌린다. 벌려진 입에 그대로 막대가 들어가는 바람에 갤리가 잠시 기침을 토했다. 뭔 개짓거리야. 원한 깊은 목소리에도 지지 않고 민호가 다시 막대를 내밀었다.


고양이한테 장난감을 흔드는 듯한 태도다. 깊게 한숨을 쉰 갤리가 결국 민호 손에 들린 막대를 입에 물었다. 이거 잘못하면 가시 박힐텐데.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민호가 막대를 움직여 갤리의 혀를 쓸었다. 하여튼 취향 더럽게 이상해. 들어갔다 나오는 나무막대를 따라 갤리가 혀를 움직였다. 민호의 눈이 가늘어진다.


몇 번은 그냥 왔다갔다 하는 듯 하더니 좀 지나고 나서는 거의 혀를 찔러대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새끼가 진짜. 어느정도 맞춰주려다 결국 허에 상처가 난 갤리가 신경질적으로 막대를 어금니로 물었다. 민호가 막대를 당기자 갤리의 얼굴도 따라왔다. 몇번 쥐고 흔들다가 노려보는 녹색 눈에 실실 웃던 민호가 결국 막대에서 손을 놨다. 바닥에 뱉어진 막대가 빙빙 돌며 밀려나다 멈춘다.


"저녁."

"볶음밥."


귀찮은 것만 골라서 해달라고 하지. 투덜대며 일어난 갤리가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TV에서 흘러나오는 경기는 후반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새끼야, 네가 먹은건 좀 버리라고! 부엌에서 외쳐대는 목소리에 민호가 아까 나왔던 탄산수 광고의 CM을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