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Maze Runner
민톰 Lack
콩식빵
2015. 5. 22. 17:58
민톰
문을 열자마자 담배향이 훅 날아온다. 민호는 눈살을 구긴채로 성큼 안으로 발을 뻗어 창문부터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이 쇼파에 시체처럼 엎드려있는 토마스에게 밀려간다. 민호는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토마스를 발로 찼다. 토마스는 미동도 없었다. 일어나 머저리 새끼야. 섹스해주러 왔잖아. 토마스는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민호를 올려다봤다.
"일어나."
제대로 짜증이 난 목소리에 더해 옆구리가 발로 짓이겨진다. 토마스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일어나서 눈이 묻은 신발에 입을 대고 혀를 내었을 뿐이었다. 씹새끼. 욕을 거르지 않고 뱉은 민호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토마스는 민호의 다리를 기어올라와 얼어있다 싶이 하는 청바지의 버클을 풀고, 속옷 위를 느리게 핥았다. 젖은 천까지 함께 입에 넣고 익숙하게 블로우 잡을 시작하면 민호가 바로 토마스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토마스와의 섹스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민호가 저 좋을대로 분노를 퍼붓는 식의 섹스. 키스도 없고 애무 같은건 더더욱 없다.
어쩔 수 없이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일은 있었지만 거부하거나 그만하라는 말을 담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더 분노가 가중되는 것이다. 토마스는 섹스중에 제 애인의 이름을 불렀고, 그것은 대부분 소위 말하는 '눈이 돌아가는' 스위치가 됐다. 목을 조르거나 머리를 잡아채 바닥이나 딱딱한 곳에 박아버리는 일도 흔했다. 관계가 끝난 후의 토마스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코뼈가 부러지거나 이마가 찢어지는 것쯤은 예사다.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토마스는 병원비 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민호와 토마스의 관계는 섹스 파트너였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민호가 먼저 마음이 생겼고 토마스는 민호를 찼다. 너무 깔끔하게 차여서 뭘 해 볼 수도 없었다. 민호가 고백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민호가 뭔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민호를 앉혀놓고 싫다는 말을 꺼냈다. 내가 너랑 만나는건 섹스 때문이고, 난 애인이 있어. 파트너가 된지 반 년인데 전혀 몰랐다. 물론 쓸데없는 얘기를 하기 보다는 1초라도 더 몸을 더듬는게 중요한 관계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민호는 포기했다. 당연히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노력했다. 그 날 이후로는 아예 연락을 끊었고 섹스 외에는 접점도 없었으니 각자 알아서 잘 살았다. 토마스가 갑자기 문자를 보낸건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주소와 숫자 네 개. 지금. 민호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옷을 챙겨 나갔다. 문자에 나와있는 주소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도어락에 숫자 네 개를 쳐 잠금을 풀었다. 안은 온통 술 냄새로 범벅되어 있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토마스는 옷을 입은채로 욕조에 들어앉아 무릎을 감싼채 찬물을 맞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건지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도 보랏빛이었다. 핸드폰이 욕실 바닥에 엎어져 튕겨지는 물을 죄다 맞고 있다.
민호는 당연히 기겁해서 물을 잠그고 토마스를 일으켜세웠다. 얼음장 같은 몸이 힘없이 끌려오더니 민호를 올려다봤다. 충혈된 눈이 빨갛게 짓물러 번들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으려던 입이 토마스의 입술에 막혔다. 그렇게나 물을 맞고 있었는데도 바짝 마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들어오는 혀를 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마스의 손은 수월하게 민호의 벨트를 풀었다. 폭주하는 생각들 중에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관계 도중에 모르는 이름이 나와서야 민호는 어렴풋이 토마스가 저를 부른 이유를 눈치챘다. 끝난 후에 잠이 드는건 토마스의 습관이었고 민호는 아침까지 남아야할지 돌아가야할지 망설였다. 결국 선택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 번으로 끝날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예상대로 토마스는 민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두 달 뒤까지는.
"저녁 먹고 가."
민호는 신발을 신다말고 뒤를 돌았다. 이마에 거즈를 붙인 토마스가 쇼파 등받이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또 무슨 지랄이야 저건. 눈이 녹아 축축해진 신발에서 불쾌한 냄새가 올라온다. 눈 안그쳤잖아. 창문 밖은 말대로 아직 온통 하얬다. 토마스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중간에 한 번 기절 했었다. 더 하고 싶은 것도 아닐터다. 민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민호가 머리를 뒤섞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토마스는 자세를 바로 해 몸을 담요에 파묻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물어보는 말도 없이 저 좋을대로 치즈피자를 시킨 토마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입술이 찢어져서 아픈지 반쯤 벌리다 그만 두기는 했지만. 민호는 얼굴을 구긴채로 그런 토마스를 뒤에 서서 보고 있었다. 앉으라는 권유도 없다. 토마스는 아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감색 체크담요가 둥글게 말린 몸에 붙어 움직였다. 물어뜯긴 상처들이 틈으로 얼굴을 내민다. 민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민호는 토마스가 부를 때 마다 매 번 집을 찾았다. 토마스는 민호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었고, 민호가 오지 않는다면 토마스가 민호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아마 노력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민호가 토마스를 찾아오는 이유는 한가지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미련이 남아서라고 하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분명 그런 탓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가 났다. 저를 이용하는 토마스도, 휘둘리는 자신도. 찾아가서 패기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이유 중 하나로는 동정심도 꼽을 수 있었다. 민호는 첫 날 욕조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토마스를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가 없었다. 민호가 오지 않았다면 그상태로 며칠이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죽었겠지.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힌 채 숨소리 조차 내지 않는 토마스를 그려내는 것은 지나치게 쉬웠다. 다음도, 그 다음의 다음도 토마스는 정말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자가 올 때 마다 벌겋게 짓무른 눈이 눈꺼풀 안에서 떨어지지를 않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토마스는 완전히 잠들었다. 민호는 무릎에 쳐박혀 있는 토마스의 얼굴 언저리에 확인차 손을 갖다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았다가 스러졌다. 너무 심하게 팬걸지도 모른다. 아마 당분간은 걷기도 힘들 것이다. 자업자득이야. 중얼거린다고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호는 손 때가 탄 쇼파에 주저앉아 공연히 토마스를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토마스의 체온이 끝도 없이 내려갈 것만 같았다. 좀 부스럭대나 싶더니 토마스가 편한 자세를 찾아 민호에게 완전히 몸을 기댔다. 민호는 토마스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얘기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다고 토마스를 밀쳐내거나 혼자 가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것인지, 문자가 다시 올 때 까지 얼마가 걸릴 것인지를 생각한다. 과연 다음이라는게 있을지 하는 생각도. 간격은 들쑥날쑥했다. 뭐때문에 그렇게 자주 헤어지는건지에 대해서도 아는게 없었다. 다만 토마스가 제 애인에게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어째서 그렇게까지 매달리는지. 입 밖에 내면 정말 제 밑바닥이 보일 것 같아 민호는 질문을 삼켰다. 토마스에게서 익숙한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